생각

[스크랩] 영성과 영성과학

자유지향 2009. 9. 8. 14:35

영성과 영성과학(Spiritual Science)

 

김 재 수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ㆍ공학박사

 

어떤 모임에서 이야기 끝에 우연히 영성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 모임에 참석한 공대교수 한 분이 갑자기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너무나 직선적인 물음이었기에 당황했고 즉각 답하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새롭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 한마디로 무어냐고 물을 때와 같다. 그 교수가 그 뜻을 모를 리는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확실한 개념이 떠오르지 않아서 묻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난 그때 잠시 머뭇거리며 답변을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되었다. “영성은 엄밀히 모든 사물의 본질을 가리키며 그 자체로 실체를 뜻하는 것이지만 이를 보다 실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성의 속성을 떠올리는 것이 한결 낫다. 그 속성은 살아있음, 기쁨, 사랑, 지혜, 평화, 창조, 풍요로움, 아름다움이며… 궁극의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실은 영성이란 과학적인 용어는 아니다. 그러니 더더욱 영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0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영성과학(Spiritual Science)이란 말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면 왜 이러한 말이 등장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흔히 과학적이다 합리적이다라고 말할 때의 과학과 합리라는 개념은 18세기 뉴턴 과학에 입각한 것이다. 뉴턴적 과학은 기계론적 과학이다. 기계론적 과학은 우주를 설명할 때에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전제로 잘 만들어진 기계처럼 설명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한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요소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할 수 있다. 요소환원주의란 전체와 부분을 나누어 생각하여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고 전체가 흩어지면 요소로 나뉘어서 다 나눌 수 없는 불변-절대적인 입자 같은 데로 환원된다고 보는 사상이다. 따라서 기계론적 요소환원주의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한 원인-결과에 따른 철저한 인과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의 배경에는 중세 교회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과학을 신학과 의도적으로 분리하여 철저히 자연적인 현상에 국한하려고 한 면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요소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이 20세기의 물질문명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따라서 오늘날의 과학, 철학,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 만연되어 있다. 이런 요소 환원주의적인 틀을 처음 만든 인물이 바로 뉴턴과 데카르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요소환원주의적 세계관을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그리고 보어의 “상보성 이론”과 같은 새로운 틀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지난 이삼백 년간 서양세계를 지배해오던 과학은 그 개념의 180도 전환을 일으키고 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뉴턴 물리학이 확실하고 분명한 실재가 있다는 신념을 전제로 인간을 배제한 철저한 인과론에서 출발한 물리학이라면 20세기에 등장한 양자역학적 세계는 결정론적 인과율로는 설명될 수가 없는 세계이다. 간단히 말해 실험대상이 실험자의 의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실재를 추구해 오던 뉴턴 물리학의 근간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된 틀은 종래의 서구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에 197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데니스 게이버의 “홀로그래피 이론”, 그리고 일리야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개념들을 첨가하여 오늘날 일명 “신과학”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양자역학으로부터 신과학에 이르는 현대물리학의 세계관 변화와 함께 어떻게 과학이 영성을 말하게 되었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첫째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전제로 이 우주를 보아왔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의 등장으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란 개념이 사라진 것이다. 이 말은 이 우주는 내가 중심이다 하면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고대로 동양의 철학사상의 근본인식인 “내 안에 모든 우주가 있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종교에서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개념인 천당과 지옥도 실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상대적이라는 말이 된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다(루가 17장 21절)”라고 하신 성경말씀은 현대 물리학적인 우주관과 일치한다.

 

서양에서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에 대한 논란은 16세기부터 300여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입자란 공간에 극히 제한된 부분에 한정된 것이고 파동은 넓은 공간에 퍼져 있는 것이므로 동일한 물질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한편 입자와 파동은 동시에 관찰될 수 없고 단지 관찰자의 선택에 의해서 입자난 파동의 성질 중 하나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관찰자인 인간은 언제나 주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한편 앞서 언급한 양자역학을 완성시킨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입자의 세계에서 입자의 운동량을 알면 위치를 알 수 없고 위치를 알면 운동량을 알 수 없다. 즉 동시에 위치와 운동량을 관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입자의 세계의 모든 변화는 인과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확률에 의해서만 예측이 될 수 있으며 어떤 실험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는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고 실제로 실험을 해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인데 그 관찰되는 결과는 수학적인 확률법칙에 의해서 나타난다. 이것은 인과율의 철칙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고전물리학의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 것이다. 관찰의 결과는 관찰자인 인간의 의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관찰실험을 하느냐는 관찰자의 의사에 따라 물질은 그 반응을 달리하는 것이다. 자연은 관찰자의 의사에 따라 물질은 그 반응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가 자연의 관찰자인 동시에 자연현상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인간은 이 물질계에서는 절대적인 객관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또 한번 의미한다.

원자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보어와 양자역학을 완성시킨 하이젠베르크는 자주 만나서 이 문제를 토의한 끝에 절망에 빠져 “자연이 이렇게도 불합리한 것이냐”고 한탄하였으며, 아인슈타인은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땅이 꺼져나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적인 격동기를 겪은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아인슈타인, 플랑크, 드 브로이,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등은 실존철학적인 인간 고민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홀로그래피 이론은 1947년 영국의 데니스 게이버가 수학적으로 예측한 것으로 그 후 레이저의 발명으로 그것이 사실적인 현상임이 밝혀진다. 홀로그래피는 전체 그림을 구성하는 부분 속에 전체에 모습이 들어있는 신기한 사진으로서 이로부터 부분자체가 또 하나의 전체임을 물리적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파동으로 구성된 우주가 모두 홀로그램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사는 공간도 홀로그램적이며 따라서 티끌 속에도 이 무한한 우주와 그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고, 시간도 홀로그램적으로서 찰나 속에 영겁의 시간과 그 정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내 안에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있다”라는 말과 “내가 이 우주이다”라는 말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며 이로부터 전체와 부분은 서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복음 14장 11절)”라고 말씀하신 것은 홀로그램적인 우주의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전 인류의 죄를 대신 하셨다는 것도 신앙의 신비가 아닌 홀로그래피한 우주의 진리로 설명할 수가 있다. 이 같이 부분은 전체일 수 없고, 부분이란 요소는 전체에 환원될 뿐이라는 요소환원주의 서양철학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현상이 홀로그래피의 발명으로 물리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이와 함께 1964년 “벨의 정리”가 나온다. 이는 물리학사상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 여겨지는 것으로서 우리의 우주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주는 부분으로 분리될 수 없는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여기서 일어나는 우리의 사건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다른 사건들의 즉각적인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우주는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며 그 안에는 무수한 수준의 유기체적 기관이 들어있다. 각 수준의 유기체는 같은 수준의 유기체와 부단히 상호 작용한다. 더 나아가 개인의 환경은 사회이며 사회는 생태계를, 생태계는 생물권을, 생물권은 전 우주를 그 환경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기체적 우주관에서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전 우주와 부단히 상호 작용하고 있으며 우주와 함께 공동진화 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일리야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일어나는 “혼돈이론”은 지금까지의 설명 불가능한 비가역성과 비선형적인 자연현상을 새롭게 이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밖에 쉘 드레이크의 형태장과 형태공명장 이론에 이르러는 그 동안 이해되지 않고 설명할 수 없었던 자연과 이 우주의 모습이 보다 확연히 들어 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이 양자역학으로 시작된 현대물리학과 더 나아가 신과학에 이르러서는 마음, 정신 또는 의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게 되었으며, 의식과 물질을 별개로 분리하지 않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하나라는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물질이라는 것도 불멸의 것이 아니라 부단히 생멸하는 에너지의 한 형태이며, 물질의 개념을 역동적인 장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데이비드 봄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는 환상의 세계일지도 모른다”라는 표현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힌두교에서 이 세계를 “마야” 즉 “환영”의 세계라고 하는 말이 과학적으로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하버드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현대물리학의 새로운 발견을 주시하면서 “과정철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우리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영화를 보면 그것이 실제로 움직이며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현상과 같다. 사실은 일초에 24개의 정지화면을 잇달아 비춘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양자물리학으로부터 촉발된 사물을 보는 근본적인 변화를 토마스 쿤은 “과학적 패러다임전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물리학적인 커다란 변화에 대한 깊은 인식보다는 좀더 현실적이고 심각한 사회적, 문화적인 위기감의 공감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는 금세기까지 세계의 과학기술을 지배해온 서양의 물리론적, 기계론적 이원론에 바탕을 둔 사고체계가 마침내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는 심각한 상황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다. 다시 말해 이제 이러한 사고체계를 바탕에 둔 현재의 과학기술문명이 이룩한 물질적인 풍요로움의 순기능 적인 그늘속에 인간이 배제된 기술사회의 숨가쁜 변화와 그로 인한 인성파괴, 금권만능, 비인간화 등 인간소외 현상의 가속화와 함께 끊임없이 전개되는 생태계의 파괴, 물과 공기 등의 환경오명, 자원고갈, 에너지 문제 등의 역기능이 지구적 차원의 인류공멸을 일으킬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여러 분야에 걸쳐 동시 다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이 뉴-에이지 사상의 근간을 이루게되고 더 나아가 신과학 운동이라는 구체적인 운동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는 것이 1970년대 말이다. 이때부터 과학에서 영성이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반전운동, 반핵운동, 녹색운동, 여성운동, 다양한 형태의 소비자운동,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자는 심신의학운동 등등 산발적으로 전혀 무관하게 전개되는 듯해도 일련의 사회운동현상의 밑바탕에는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공통된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모든 유기체 생물은 환경과 조화를 잃었을 때에는 소극적 피드백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지만, 그 부조화가 극에 달하면 적극적 피드백으로 유전변화를 일으켜 다른 종으로 변한다. 문명도 마찬가지로 환경의 도전에 대응할 만한 창조적 유연성을 잃고 경직되어 있을 때에는 그 문명은 쇠망하고 새로운 문화가 발생한다는 것을 아놀드 토인비는 고대 이집트문명, 희랍문명, 회교문명 등 많은 문명들의 성쇠패턴의 예를 들어 보여주었다. 쇠망해 가는 문명은 기계론적이고 분석적이며, 사변적이고 물질적이며 개인 위주의 남성적이고 양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반면 새로 대두하는 문화는 시스템적이고 종합적이며, 직관적이고 정신적이며, 환경에 민감한 여성적이고 음적인 특징을 지닌 문화가 될 것이다라고 지적하며 이제 우리는 문화의 전환점에 와 있다고 카프라는 그의 저서 “문명의 전환점(1982)”에서 말한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문명은 다시 말해 모든 사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상호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그 모든 존재의 본질인 영성이 존중되고 드러나는 문명으로서 이것이 우리 지구 인류문명이 진화하는 길임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본다면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출현한 양자역학이라는 현대물리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영성이 새롭게 도출되고 영성의 의미를 인류가 과학적으로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 천년을 시작하는 21세기는 바야흐로 영성시대의 첫걸음이 되어야 인류문명의 진화가 보장된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끝으로 영성 안에 종교가 있을 수는 있지만 종교 안에는 영성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성은 그 속성이 꾸밈없고 자유로워서 주의나 교리, 개념 따위로 길들일 수 없고 또한 매순간 살아서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21세기를 시작으로 새로운 천년은 과학과 종교 그 모두를 아우르는 영성과학 시대가 도래해야할 것이며 그때 비로소 천년 지복의 새로운 지구문명시대가 전개되어 우리 태양계를 넘어 우리 은하계의 탐사가 이루어지고 외계의 수많은 지적 생명체들과 교류하는 단계인 우주ㆍ은하문명 시대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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