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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기 자신을 아는 방법

자유지향 2008. 8. 30. 11:37

자기 자신을 아는 방법


관심이 있을 때 그치고, 관심이 없을 때 나타나는 사고의 본성은 과연 무엇인가? 당신은 알아차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심의 완전한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하나의 관념인가? 아니면 사실인가? 그 둘은 분명히 다르다. ‘알아차린다.’라는 말은 사람이나 사물, 자연, 사회구조 등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깨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관찰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정신분열 상태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만일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상을 알고 나서 내부 세계로 이동 한다면 당신은 균형을 취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항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밀물과 썰물처럼 연속적인 운동이다. 그리하여 외부 세계에서 내부 세계로 움직이게 되면 하나의 기준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은 매우 복잡한 구조이며 복합적인 운동체이다. 그런데 이처럼 복잡한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은 오직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당신은 상처 받지 않으려고 그들과 멀어질 수도 있고 또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이 의존적이고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다.
그러므로 관계는 자신을 알 수 있는 거울인 것이다. 외부 세계도 마찬가지다. 외면은 자신의 반영이다. 사회나 정부 등의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자기자신과 동일한 사람들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질서와 무질서의 문제를 조사해야 한다. 당신은 외부적으로 엄청난 무질서와 혼란, 불확실성이 존재함을 본다. 무엇이 이러한 무질서를 초래했는가?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들인가? 만일 자신이 외부적인 무질서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 무질서는 곧 자신의 무질서가 표출된 것은 아닌가?

외부적인 무질서는 우리의 내부적인 무질서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내면에 질서를 갖지 못하는 한 항상 무질서가 존재할 것이다. 정부가 그러한 무질서를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극단적인 형태는 전체주의이다.
 
우리들 각자가 무질서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무질서하다. 당신은 자신의 무질서를 의식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그러한 관념을 의식할 뿐인가?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추상화 시킨 것이다. 그리고 추상화는 있는 그대로에서 벗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은 보통 관념 속에서 살고 사실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관념과 사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가? 과연 당신은 있는 그대로를 의식하게 되는가?
 
무질서란 어떤 의미인가? 그 속에는 모순이 있다. 대립적인 욕망, 대립적인 요구, 대립적인 운동,자아 속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이원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곧 무질서의 속성이다. 이러한 이원성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그것은 당신이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기 대문이 아닌가?

당신은 있는 그대로를 떠나서 되어야 할 것으로 가려고 한다. 그것은 분노하고 있는 사람과 분노해서는 안 되는 사람의 차이이다. 만일 당신이 있는 그대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당신은 있어야 할 것이나 되어야 할 것으로 도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관념을 만들어 그 관념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를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과거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미래 속에 존재하는 현재를 변형시키려는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만일 잇는 그대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안다면, 미래란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와 함께 남아있는 문제인 것이다.
 
만일 있는 그대로를 보고서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만을 보고 그 외의 것은 전혀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자신이 탐욕스러움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탐욕이 일종의 감정인데, 자신이 탐욕이라는 이름의 그 감정을 본 것이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언어는 결코 사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은 언어를 마치 실제 사물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언어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가?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언어는 감정을 자극한다. 그리고 당신의 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나는 언어의 노예인가? 사실이 나에게는 실제적이지 못할 정도로 언어가 중요해진 것인가? 나는 산에 가서 직접 경치를 보기 보다는 사진을 보고 싶어한다. 사진을 보는 것은 상징을 보는 것이지 결코 실제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과연 상징에 불과한 언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리하여 실체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인가? 언어가 탐욕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낸 것인가? 아니면 언어를 동반하지 않고 탐욕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은 고도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먼저 말이 그 감정을 창조한 것인지 아니면 말이 없이 그 감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를 세심하게 조사해야 한다. 결국 말이 그 감정인 것이다. 나는 전에 그러한 감정을 가졌을 때 탐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현재의 감정도 같은 종류의 과거 사건에 의해서 등록시키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재가 과거 속에 흡수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언어가 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해졌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탐욕이나 질투라는 언어로부터 벗어나 자유가 존재하는가? 언어는 과거에 속한 것이다. 감정은 과거에서 나온 언어에 의해서 인지된 현재이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가 ‘나’이다. 그리고 과거는 시간이다.결국 시간이 나인 것이다. 그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이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과거는 현재에게 항상 어떠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항상 충돌과 모순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거를 수반하지 않고 탐욕이라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는가? 이름을 붙이지 않고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고 탐욕을 관찰할 수 있는가? 관찰자인 ‘나’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가? 과거에 속한 관찰자를 동반하지 않고 탐욕이라는 감정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가?
‘나’가 없을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관찰할 수 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색깔과 형태를 관찰할 수 있는가? 어떻게? 당신은 눈을 통해서 그것을 관찰한다. 눈을 움직이지 말고 관찰할, .. 눈을 움직이면 사고하는 두뇌가 동작을 개시하는 순간 왜곡이 일어난다. 눈으로 뿐만이 아니라,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사물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때 그 자리에는 결코 관념이 아닌 사실에 대한 관찰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에 접근해야 한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어떠한 편견이나 비난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대립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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