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스크랩] 발견

자유지향 2008. 8. 29. 00:34

구하지 말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마하무드라의 노래
구하지 말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마하무드라는 모든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그러나 참으로 진지하고 진실한 그대를 위하여
이것을 말할 수밖에 없도다.

공(空)은 의지처를 필요로 하지 않나니,
마하무드라는 무(無)에 의지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그러면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으리라.

 
궁극적 차원에서의 경험은 결코 경험이 아니다. 경험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자가 없는데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말할 것인가? 누가 그 경험을 설명할 것인가? 주체가 없으면 객체 또한 사라진다. 둑이 사라지고 경험의 강물만 남는다. 앎이 거기에 있지만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신비주의자들의 문제다. 그들은 궁극적인 차원에 도달했지만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없다. 지적인 이해를 구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해 줄 길이 없다. 그들은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 그들의 존재 전체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하지만 지적인 교류는 불가능하다. 만일 그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전해 줄 수 있다. 그대가 허용한다면, 그대가 수용적으로 열려 있다면 그들은 그대에게도 그 일이 일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언어는 도움이 안된다. 이론과 교리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들의 경험은 'experience'라기 보다는 'experiencing'에 가깝다. 그것은 과정이다.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과정이다.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물방울 하나가 바다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또는 바다 전체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간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완벽한 합일이다. 그대는 그 안으로 녹아들어 사라진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자취조차 없다. 그러니 누가 그것을 전달할 것인가? 누가 이 골짜기로 돌아올 것인가? 누가 이 어두운 밤으로 돌아와 그것을 말해 줄 것인가?
 
세상의 모든 신비주의자는 언어적인 교류(communication)에 관한 한 무력함을 통감했다. 영적인 교류(communion)는 가능하지만 언어적인 교류는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이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영적인 교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것은 두 가슴이 만나 사랑을 이루는 것이다. 언어적인 교류가 머리와 머리의 관계라면, 영적인 교류는 가슴과 가슴의 만남이다. 영적인 교류는 느낌이다. 그러나 언어적인 교류는 지식에 불과하다. 말이 전달될 뿐이다. 말이 주어지고, 말이 이해될 될 뿐이다. 그리고 말의 본성 자체가 아무 생명력도 없기 때문에, 말을 통해서는 살아 있는 것을 전달할 수 없다. 궁극적 차원의 일은 고사하고,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말의 무능함을 절감할 때가 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진실로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느낄 때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어린 시절, 나는 이른 아침에 강가에 나가곤 했다. 그 곳은 작은 마을이었으며, 강물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언뜻 보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해가 뜨기 전에 보면 강물이 흐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럴 정도로 느릿하고 고요했다. 이른 아침, 사람들이 목욕하러 나오기도 전의 강가는 말할 수 없이 고요했다. 새들이 노래하기에도 이른 시간이었다. 정적이 감도는 강가에는 망고 나무 향기만 짙게 풍기고 있었다.
 
나는 자주 그 곳에 가서 앉아 있었다.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수영을 하고 몸을 씻었다. 해가 떠오르면 넓은 모래 뻘이 펼쳐져 있는 건너편 기슭로 건너갔다. 나는 그 곳에 누워 몸을 말렸으며, 어떤 때는 깜빡 잠이 들기도 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아침 내내 무엇을 했니?"하고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하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너는 네 시간 동안이나 어딘가에 있었는데 그 곳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너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했을 거야."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나의 말 또한 틀리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강과 함께 그 곳에 있었을 뿐이다. 나는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했을 뿐이다. 간혹 수영 같은 것이 느껴지면......이 말을 기억하라. 수영 같은 것이 느껴지면 나는 수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한 행동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잠이 찾아오면 나는 잠을 잤다. 그런 일들이 저절로 일어났을 뿐 거기에 행위자는 없었다. 이렇게 사토리(satori)의 첫 번째 체험은 그 강가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곳에 존재할 뿐이었으며, 수많은 일들이 저절로 일어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냐, 너는 틀림없이 뭔가 했을 거야."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맞아요. 저는 목욕을 했고, 햇볕에 몸을 말렸어요."하고 응답했으며,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서야 만족하셨다. 그러나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강에서 일어난 일들을 "저는 목욕을 했어요."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너무나 초라하고 빈약한 표현이다. 강과 함께 장난치고, 강물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다니고, 강물에 몸을 담그고 헤엄치는 것은 너무나 깊은 경험이었다. "저는 그 곳에서 목욕을 했어요."라는 말로는 아무 것도 전달할 수 없었다. "그 곳에 가서 둑 위를 걸었고, 그 곳에 앉아 있었어요."라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간혹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도 말로는 표현하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말의 공허함을 느낀 적이 없다면 그대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가 매우 표피적으로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그대가 경험한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대가 진실로 살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을 넘어선 어떤 것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이때 비로소 삶이 그대를 찾아온다. 삶이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궁극적인 것이 그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대는 간단하게 말을 넘어선다. 그대는 벙어리가 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내면에 단 하나의 단어도 형성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건 너무나 빈약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그대에게 일어났던 경험을 오염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하무드라(mahamudra)는 최후의 경험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마하무드라는 궁극적인 경험이다. 마하무드라는 우주와 하나가 되는 전체적인 오르가즘을 뜻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간혹 상대방 안으로 녹아드는 것을 느낀다. 더 이상 둘이 아니다. 몸은 분리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서 어떤 것이 황금의 다리를 놓는다. 내면에서 둘이 사라진다. 하나의 생명 에너지가 두 극단에서 진동하고 있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만이 마하무드라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체험보다 수 백만 배 더 깊고 높은 것이 마하무드라의 차원이다. 마하무드라는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완벽한 오르가즘이다. 존재의 근원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여기, 마하무드라의 노래가 있다. 틸로빠(Tilopa)가 이것을 '노래'라고 부른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대는 이것을 노래할 수는 있지만 말로 할 수는 없다. 춤출 수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다. 노래를 통해서도 극히 일부를 전달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심오한 차원이다. 노래의 내용이 아니라 노래하는 방식을 통해서 무엇인가 전달될 수 있을지 모른다.
 
신비주의자들 중에는 궁극적인 체험을 한 후에 춤을 춘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그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통해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 마음, 영혼 등 모든 것이 그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의 춤은 일반적인 춤이 아니었다. 사실, 모든 춤은 이 신비주의자들로 인해 생겨났다. 춤은 행복, 엑스타시, 지복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미지의 어떤 것이 기지(旣知)의 차원으로 뚫고 들어왔다. 초월적인 어떤 것이 이 세상으로 내려왔다. 이때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춤추고 노래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하겠는가? 마하무드라의 노래가 이런 식으로 탄생했다.
 
누가 그 노래를 부를 것인가? 틸로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법열(法悅)의 느낌 자체가 노래한다. 이것은 틸로빠의 노래가 아니다. 틸로빠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험 자체가 진동하면서 노래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마하무드라의 노래'라고 불리는 것이다. 법열 차제가 노래하고 있다. 틸로빠는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용해되어 사라졌다. 구하는 자가 사라지고 궁극적인 목적지만 남았다. 경험자가 사라져야만 경험이 존재한다. 구하라, 그러면 놓칠 것이다. 구함을 통해 '구하는 자'가 더 견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구하지 말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구하는 노력 자체가 장애물이다. 구하면 구할수록 '구하는 자'가 강화된다. 에고가 견고해진다.구하지 말라.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노래가 전하는 가장 심오한 메시지다. 구하지 말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라. 아무데로도 갈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신이 있는 곳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에서 신을 발견할 것인가? 지도도 없고 길도 없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는 사람도 없다. 아무도 신에 도달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 역(逆)이 진실이다. 그대가 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그대를 찾아온다. 그대가 준비되면 신이 찾아와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그대가 준비되었을 때마다 신이 찾아온다. 이 '준비'란 수용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수용적일 때에는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사원이 된다.
 
틸로빠는 이 노래를 통해, 안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대나무가 되라고 말한다. 텅 빈 대나무가 되는 순간, 돌연 신의 입술이 그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피리가 되고,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노래다. 틸로빠는 텅 빈 대나무가 되었고, 신이 이 대나무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것은 틸로빠의 노래가 아니다. 궁극적인 경험 자체가 부르는 노래다.

이 아름다운 현상을 탐구하기 전에 틸로빠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틸로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사실, 틸로빠 같은 사람들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역사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들은 인류의 주된 흐름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이 흐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인류는 욕망을 통해 움직이지만 틸로빠 같은 사람들은 무욕(無慾)을 통해 움직인다. 그들은 인류의 주된 흐름, 역사의 물줄기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에서 멀리 벗어날수록 그들은 신화적인 인물이 된다. 그들은 신화처럼 존재한다. 더 이상 시간 속의 인물이 아니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들은 시간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을 초월한 차원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영원 속에서 산다. 그들은 이 평범한 인류의 차원에서 사라졌다. 자취도 없이 증발했다. 그들이 증발하고 있을 때, 오직 그 순간에만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증발하는 동안만 우리의 흐름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틸로빠가 누구인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오직 이 노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노래는 제자인 나로빠(Naropa)에게 준 선물이다. 이런 선물은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은 사랑과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 선물을 받아들일 자격을 갖춘 인물이 있어야 한다. 이 노래는 나로빠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노래가 주어지기 전에 나로빠는 수많은 시험을 받아야 했다. 그의 신뢰와 사랑이 시험받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일말의 의심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의 가슴 전체가 신뢰와 사랑으로 충만해졌을 때 이 노래가 주어졌다.

나 또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이 곳에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대가 준비되어야만 들려줄 수 있다. '준비'라는 말은 그대의 마음속에서 의심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의심을 억누르거나 물리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물리쳐도 의심은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억눌린 의심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계속 그대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의심과 싸우지 말라. 의심을 억누르지 말라. 그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신뢰에 쏟아라. 의심하는 마음에 무관심하라.
 
무관심이 열쇠다. 의심을 무시하라. 의심이 존재한다. 그 의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신뢰와 사랑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라. 똑같은 에너지가 의심이 되기도 하고, 신뢰가 되기도 한다. 의심에 무관심 하라. 의심은 그대의 협조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무관심해지는 순간 이 협조가 깨진다. 의심이 먹이를 구하지 못한다. 의심은 그대의 관심을 먹고 살아간다. 의심에 반대하는 것도 관심이다. 의심에 반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반대하는 관심 자체가 의심의 먹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반대를 통해 의심에 협조한다. 그저 무관심 하라. 찬성도 반대도 하지 말라. 의심을 편들지 말고, 의심에 맞서지도 말라.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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