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스크랩] 방임

자유지향 2008. 8. 29. 00:38

그대 자신을 완전히 방임하라

In Search of the Miraculous
그대 자신을 완전히 방임하라

우주는 에너지의 팽창이다. 그리고 생명은 그 에너지가 결정화(結晶化)된 것이다. 우리가 물질로 보는 것, 돌처럼 보이는 것 또한 에너지이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보는 것, 생각이라고 경험하는 것, 의식이라고 경험하는 것 또한 에너지가 변형된 현상이다. 바다에 이는 파도, 숲 속의 소나무, 해변 가의 모래알,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들, 이렇게 우주의 모든 것은 똑같은 에너지가 각양각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난다고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육체가 어디에서 끝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육체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육체는 그저 육체로써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태양이 차갑게 식는다면 우리 또한 얼어붙어 죽음을 맞을 것이다. 이것은 태양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양은 우리 몸의 일부이다. 태양이 열을 잃어버리는 즉시 우리 또한 멸망할 것이다. 태양열은 곧 우리 몸의 열이다.
 
우리는 사방을 둘러싼 공기로부터 생명에너지(prana)를 얻는다. 만일 공기를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즉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이쉬는 숨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외부의 세계와도 연결된다.
육체는 어디에서 끝나는가? 만일 그대가 철저하게 탐구했다면 우주 전체가 곧 우리의 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의 몸은 무한하다. 그리고 올바르게 탐구한다면 그대는 생명의 센터가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생명은 모든 곳으로 팽창한다. 그러나 이것을 알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생생한 에너지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안에 정체되어 있는 에너지를 해방시켜 흐르게 하는 모든 방법을 지칭하는 말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명상 안에 깊이 들어가면 그대 안에 숨어있던 에너지가 상승할 것이다. 그 에너지는 외부의 우주 에너지와 연결될 만큼 막강한 기세로 솟아오를지도 모른다. 이러한 연결이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불어오는 바람 앞에 바들바들 떠는 나뭇잎처럼 될 것이다. 그때에 존재계와의 분리감이 없어지고 우리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우주와 하나가 된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했는가?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경험을 말로 옮기려고 애썼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까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 헤매는 가운데 나를 잃었다. 그를 발견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내가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어떻게 그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까비르는 이러한 경험을 시(詩)로 표현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그 표현법을 바꾸었다. 처음으로 신을 경험했을 때 그는 이슬방울이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 그의 말을 옮겨 보자.

"오, 친구여, 까비르는 찾고 또 찾다가 자기를 잃어버렸네. 이슬방울 하나가 바다로 흘러들었네. 그러니 어떻게 이슬방울을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까비르는 탐구의 과정에서 자기를 잃어버렸다. 이슬방울이 바다로 흘러들었다. 그러니 어떻게 이슬방울을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까비르는 나중에 위의 싯구절을 바꾸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그는 나중에 "전에 내가 말한 것은 잘못되었다. 그것은 오류였다."고 말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이슬방울이 바다로 흘러들어간 것이 아니라, 바다가 이슬방울 안으로 들어왔다."
 
만일 이슬방울이 바다로 흘러들어 간 것이라면 그 이슬방울을 다시 불러들일 기회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가 이슬방울 안으로 흘러들었다면 이슬방울을 다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슬방울이 바다로 흘러들어간 경우에 이슬방울은 뭔가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다 자체가 이슬방울 안으로 흘러들었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까비르는 자신의 시를 이렇게 고쳐 썼다.

"오, 친구여, 찾고 또 찾다가 까비르는 자기를 잃어버렸네. 바다가 이슬방울 안으로 녹아들었네. 그러니 어떻게 이슬방울을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 이슬방울이 바다 안으로 흘러들었다고 말한 것은 실수였다.
우리가 순수한 에너지의 진동인 채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가 에너지의 진동 자체가 되었을 때 무한한 에너지의 바다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그때에는 실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말은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언어적인 표현과 경험 자체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앎에 대한 우리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러나 언어적인 표현에는 한계가 있다.
 
대단한 경험은 제쳐 두고라도 아주 사소한 경험조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두통을 느낄 때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 때문에 가슴이 아플 때에도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아주 사소한 경험조차 이렇다. 그러니 신이 우리를 찾아 내려올 때에는 어떻겠는가? 그것은 언어로 옮기기가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분명하게 안다. 다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신을 알기 위해서는 순수한 에너지의 진동이 되어야 한다. 마치 에너지의 격렬한 태풍,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샘물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강렬한 에너지의 진동으로 살아 있어라. 그러면 우리 몸의 열과 심장의 박동, 숨결 하나하나가 참기 힘든 갈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는 갈증 그 자체가 되어 애절하게 갈구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라지게 하라. 그래야만 신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어제 말했듯이, 이 만남은 우리의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잠자는 뱀, 잠자는 센터가 우리 안에 있다. 생명에너지(shakti)가 솟아올라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도 이 센터를 통해서이다. 씨앗이 땅 속에 묻혀 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꽃과 씨앗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생기기 위해서는 그 둘 사이에서 나무가 가지를 뻗고 잔가지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꽃은 씨앗 속에 잠재해 있다. 어딘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씨앗과 꽃을 연결시키는 나뭇가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꽃이 그러하듯이 나뭇가지 역시 씨앗으로부터 뻗어나갈 것이다. 우리 안의 에너지도 씨앗의 형태로 잠재해 있다. 그 에너지가 솟아오르기 위해서는 나뭇가지가 필요한데, 그 나뭇가지 역시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흔히 척추로 알고 있는 부분의 밑에서부터 씨앗이 싹터 꽃이 된다. 이 꽃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이 꽃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천 개의 잎을 가진 연꽃으로 묘사한다. 우리의 뇌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천 개의 잎을 가진 연꽃처럼 피어난다.
 
그러나 이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밑바닥에서부터 상승하여 뇌 안의 가장 높은 센터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상승하기 시작한 에너지는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구도자(sadhak)의 퍼스낼러티(personality) 전체를 뒤흔들 것이다. 그 때에 이 지진을 멈추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지진에 동조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지진을 저지하려고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 중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려워한다면 어떠한 진보도 불가능하다.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비종교적인 마음이다. 공포심보다 더한 죄악은 없다. 두려움이야말로 구도자의 길에 놓인 가장 큰 장애물이다. 두려움은 구도자의 목을 내려 누르고 꼼짝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바윗돌이다.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터무니없고 무가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할지 두렵다고 내게 호소한다.그러나 대중의 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과의 만남을 놓칠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마음놓고 웃지 못한다.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한다. 그는 어떤 감정이나 느낌에 푹 젖어들지 못한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중간한 상태에 있다. 그는 일종의 림보(limbo)상태에 있다. 울거나 웃을 때 그는 두려움을 느낀다. 특히 남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맘껏 울지 못한다. 그들은 울음이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울음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 수 없는 사람의 삶에는 뭔가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 빠져있다. 삶의 한 부분이 영원히 불구자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불구가 되어버린 그 부분은 바윗돌처럼 무겁게 그를 짓누를 것이다.
에너지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 궁극적인 에너지의 사원을 향해 순례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몸이 떨리거나 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해야 한다.
요가의 모든 자세(asana)는 여러 가지 명상의 상태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 자세들은 곰곰이 생각해서 인위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다. 먼저, 명상 중에는 몸이 상황에 따라 상이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 다음에 명상가는 그것을 요가 자세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몸의 자세는 자동적으로 마음의 상태를 따른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몸이 특정한 자세를 취하면 마음도 그에 상응하는 상태로 변화된다는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울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우리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찬다. 눈물이 가득 차면 우리는 내면에 울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눈물과 울음은 똑같은 현상의 두 측면이다. 우리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본능적으로 주먹을 쥔다. 이빨을 악물고 눈이 붉게 충혈 된다. 그리고 뭔가를 때리기 위하여 팔이 올라간다. 반면,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할 때에는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그 때에 우리는 주먹을 쥐지 않는다. 이빨을 악물거나 눈이 붉게 충혈 되지도 않는다. 사랑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불끈 쥐었던 주먹이 풀리고 악다문 이빨에도 힘이 빠진다. 붉게 충혈 되었던 눈도 정상으로 돌아와 고요해진다. 이렇게 사랑에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상의 다양한 상태에 따라 몸도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몸의 특정한 상태가 방해받으면 마음의 동조상태도 즉시 방해받는다. 누군가 그대에게 주먹을 쥐거나 이빨을 악물지도 않고, 눈에 힘을 주고 크게 뜨지도 않은 채 화를 내라고 한다면 그대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화를 내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육체기관의 동조가 없다면 어떻게 화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몸에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않고 화를 내라고 하면 그대는 화를 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그대에게 눈에 어떠한 다정함도 나타내지 말고 사랑하라고 요구한다면, 손을 통해 흐르는 사랑의 전류도 없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거나 호흡의 변화도 없이 사랑하라고 요구한다면, 몸에 어떠한 징조도 나타내지 말고 사랑해 보라고 한다면 그대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렵다. 나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명상 도중 그대의 몸이 회전하거나 꼬인다해도 그냥 놔두어라. 그것을 제어하려고 하지 말라. 그것을 의도적으로 제어하려고 하면 내면의 명상상태에 큰 해가 갈 것이고, 어떠한 진보도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요가 자세는 다양한 명상의 상태를 통해 유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가의 무드라(mudra)도 명상을 통해 자연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그대는 불상마다 여러 가지 무드라를 짓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 무드라 또한 특정한 마음의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무드라를 다루는 경전이 탄생했으며, 무드라의 상태를 관찰함으로써 구도자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측하는 것이 더 용이해졌다. 왜냐하면 무드라는 인위적인 행동이 아니라 명상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겼을 때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동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상 중에 일어나는 몸의 움직임을 제어하려고 들지 말라.
 
나의 이해에 따르면, 춤은 명상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나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모든 것은 명상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한다. 미라(Meera)는 춤을 배우기 위해 아무데도 간 적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미라가 춤을 통해 신을 발견한 것처럼 오해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라가 신을 발견하자 자신도 모르게 춤이 솟아난 것이다. 춤을 통해 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발견했을 때 춤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거대한 바다 전체가 이슬 방울 안으로 흘러들어 왔을 때, 그 이슬방울이 춤추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엄청난 보물을 발견한 거지가 덩실덩실 춤추는 것 외에 무엇을 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문명에 의해 불구가 된 나머지 춤을 잃어버렸다. 이 세상을 다시 한번 종교적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인간의 삶을 즉흥적이고 편안한 자연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나의 이해이다.
그러므로 명상 중에 에너지가 솟아올라 그대의 존재 전체가 춤추기 시작하면 그 춤을 방해하지 말라. 그대 몸의 움직임을 억제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진전도 없을 것이다. 일어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움에 목을 매달고 사는 것 같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춤을 추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의 아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바로 제 옆에 앉아있는 아들놈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춤을 추기 시작하면 제 남편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그는 '저 여편네 미쳤군!'하고 말할 것입니다."
명상 중에는 아사나와 무드라 외에도 많은 일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명심하라.
 
나는 사상가 한 명을 안다. 그는 수많은 산야신과 사두(sadhu), 수도원, 아쉬람(ashram)을 찾아다닌 인물이다. 여섯 달 전쯤 그가 나를 찾아왔다. 그가 말하기를,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경험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그대가 그 경험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그가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아마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도하는 명상에 참여했을 때 누군가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들으면 저는 정신을 차리려고 바싹 긴장합니다. '나도 저런 꼴이 되면 사람들이 뭐라고 그럴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와 무슨 상관인가? 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가? 그대가 죽음의 문 앞에 서 있을 때 그들이 그대를 구원해 주겠는가? 그대가 불행할 때 그들이 불행을 나누어 갖겠는가? 그대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그들이 불을 밝혀 주겠는가? 오히려 그대가 불을 밝히려는 찰라 그들은 훼방을 놓을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기에? 진정 그대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대는 자신의 두려움을 불특정 다수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대는 자신의 두려움을 사방에 투영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았을 때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바짝 긴장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는 한 달 동안 조용하고 외진 곳에 가서 생활하라. 그런 곳에 가서 그대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일어나도록 허용하라."
그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설명했다.
"만일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소리치고 싶으면 소리질러라.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달리고 싶으면 달려라. 미치고 싶으면 한달 동안 완전히 미쳐라."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반대했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말대로 하다가 진짜로 미쳐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 말대로 나 자신을 완전히 방임하고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상태로 돌아갔다가 진짜 미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가 자신의 광기를 억누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런다고 해서 광기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광기가 겉으로 표현되도록 허용하라. 그러면 광기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억누른다면 광기는 영원히 그대를 쫓아다닐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억눌러왔다. 우리는 마음놓고 울거나 웃지 못한다 달리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춤추지도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억눌러왔다. 우리는 안에서 모든 문을 꽁꽁 걸어 잠그었다. 우리들 스스로가 죄수이며 간수이다. 밖으로 나가 신을 만나고자 한다면 모든 문을 활짝 열어 젖혀야 한다. 하지만 그때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가지 억눌러왔던 모든 것들이 표면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눈물을 억눌러 왔다면 눈물이 터져나올 것이고, 웃음을 억눌러 왔다면 웃음이 터져나올 것이다. 그것들이 밖으로 터져나오게 내버려 두라. 그것들이 씻겨 나가도록 놔두어라.

우리가 있는 이 곳은 매우 외진 곳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초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기의 이 소나무들이 우리를 보고 흉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소나무들은 그대들과 더불어 기뻐할 것이다. 그대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저 바다에 이는 파도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울부짖고 싶으면 울부짖는다. 잠자고 싶으면 조용히 잠잔다. 또한 여기에 있는 이 모래밭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 자신을 완전히 방임하라. 그대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일어나게 내버려 두라. 저항하지 말라.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소리지르고 싶으면 소리질러라. 달리고 싶으면 달려라. 바닥에 쓰러져 뒹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자신을 개입시키지 말라. 모든 일이 그냥 일어나도록 방임하라. 그러면 어떤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면서 솟구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어떤 힘이 깨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닫혀있던 모든 문이 열리면서 길이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순간에 공포심에 휩싸이지 말라. 그 내면의 움직임과 하나가 되라. 소용돌이치는 에너지의 춤에 자신을 내맡겨라. 그 안에 그대 자신을 완전히 함몰시켜라. 그래야 기대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일은 매우 쉽게 일어난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그대는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 어느 날엔가 정점에 도달하면 그대는 그토록 사소한 것에 매달려왔다는 것을 알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대를 가로막은 장애물이 거대한 것이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만 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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