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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과학 9~13

자유지향 2008. 6. 4. 23:36

 

  9. 소립자의 식과 기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기를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는 이유는 기의 객관적 측정이 어렵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기가 물리적인 힘이 아니므로(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측정기구로서는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모두가 개인적 체험인데, 그것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 그러니 연구의 대상인 `기'의 실태가 종잡기 어렵고, 따라서 연구도 진척될 수가 없는 것이다. 기공을 수련하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기가 생체전기라고도 하지만, 기가 전기나 자기磁氣라면 그 측정은 매우 쉬운 것이다. 전자기파(동)라도 마찬가지다. 현대 과학은 우리 뇌 속에 있는 양성자 하나의 변화도 측정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

자, 그러면 <기>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우선 우주만상의 가장 근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시공간> : 기는 우주의 시공간에 있는 것일까?


기가 언급되어 있는 중국의 고전을 보면 기는 천지만물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변화의 근원이라 한다. `천지만물'에서 천지`를 우주('宇`는 공간, '宙`는 시간을 말한다) 또는 시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약간의 확대해석이 되겠지만, 중국글자가 워낙 의미가 넓고 그래서 애매하기도 하니까 <천지=시공간>이라 인정하자.

19 세기까지, 정확하게는 20세기 초에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할 때까지 시간과 공간은 물질과는 완전히 별개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ꡒ절대적 시간ꡓ과 ꡒ절대적 공간ꡓ이 있으며, 물질과 그리고 인간은 그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상대성이론은 물질이 시간과 공간(이 두 개를 합해서 `시공간'이라 한다)에 영향을 미쳐서 변형시키며, 변형된 시공간은 다시 물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것이 중력이다)을 밝혔다. 즉 시공간은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라 물질과 서로 `상호작용'(물리학에서는 `힘' 대신에 `상호작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을 하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시공간에 대한 이 새로운 인식은 한 편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동양철학이 말하는 ꡒ천 天ꡓ의 개념처럼 시공간은 인간과 가깝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숙한 것이며 역동적인 것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또한 양자역학은 공간이 그 동안 우리가 생각해왔듯이 `텅 빈 것'이 아니라,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수많은 소립자들이 순간적인 생성-소멸을 거듭하고 있는 것임을 밝혔다.

하이젠베르그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


(△t)x(△E)≥h(△t는 시간, △E는 에너지, h는 플랑크의 상수이며 극히 작은 양이다)


에 의해서 공간 속에는 매우 짧은 시간 동안이라면 에너지가 저절로 생겨날 수 있으며, 이 에너지는 물질(소립자)로 나타난다.

에너지가 작은 입자라면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에너지가 큰 입자라면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스스로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인 `플랑크의 시간' 10의 마이너스 43승 초 동안이라면 무한대의 에너지를 가진 입자(우주)도 공간 속에서 혼자서 생겨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진공을 상상한다면 진공이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무수한 것'들이 순식간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 아니, 이것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소립자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일종의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므로 크고 작은 파도(파동)들이 물결치는 큰 바다와 같은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야 할 것이다.

공간에 장의 형태로 에너지를 가하거나, 인위적인 제한으로 이러한 입자들의 자발적 생성-소멸을 촉진시킬 수도 있고 억제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상상이나 이론적인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공간에서의 물질의 생성-소멸 파동은 이론과 실험 양면으로 증명되어 있다. 1950년대에 네델란드의 과학자 카시미르 Casimir는 진공 속에서 소립자들의 생성-소멸 현상을 실험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였고 곧 그것은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ꡒ진공 속에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다 있다ꡓ - 물리학자의 말이다. 양자역학적이 아닌 우리의 일상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모든 것들이 다 있으려 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주 - 공간은 모든 소립자들의 `존재하려는 경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말씀 드린 것처럼 ꡐ경향ꡑ은 ꡐ의지ꡑ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기>이다.  소립자의 본성은 아무 것도 없는 진공 속에서조차 ꡐ존재하려는 의지ꡑ로서 번쩍이고 있는 것이다.

ꡐ기ꡑ는 우주에 가득 차 있으며, `기'가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이라는 옛 생각을 양자역학이 증명한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진공은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 진공의 에너지를 계산해 보면 터무니없이 높은 수치가 나오는데, 이것은 현재 우주론의 골치 거리이다. 스티븐 호킹 Stephen Hawking(1942~ )은 우리의 우주가 무수히 많은 다른 우주들과 미소한 웜홀wormhole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진공의 에너지가 우리의 관측처럼 제로에 가깝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시공간의 이러한 본질을 `기'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

시공간은 균질(homogeneous)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또한 물리 이론상 그러하다. 공간이 지구나 태양계에서뿐만 아니라 우주 어디에서나 동일할 것이라는 가정을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라 한다(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주장한 것은 아니다). 물리학의 기초 법칙들인 운동량 보존의 법칙은 공간의 균질성을,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시간의 균질성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위치나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균질할 것이라는 ꡒ코페르니쿠스의 원리ꡓ는 적어도 우리가 경험하고 추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확실해 보인다.

시공간이 균질하다면 그 속에 기가 아무리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있다'라는 인식의 근본이 `주위와 차이가 있다'라는 것이다. 균질하게 가득 차 있는 것을 그 내부에 있는 관측자가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물론 차이가 없으므로 흐름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변화도 없다. 변화가 없으면 인식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 것이다. 시공간 그 자체가 기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공간은 ꡐ완벽하게ꡑ 균질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공간에서의 소립자의 생성-소멸 현상은 분명한 물리적 효과를 발휘한다. 앞에서 말한 카시미르의 이론이 그 하나이다. 진공 속에 얇은 금속판을 가깝게 마주보도록 설치하면 양자이론에 의해서 이 두 금속판이 그 사이의 공간에 소립자의 생성을 억제하므로, 금속판 내부에는 외부의 공간에 비해서 소립자들이 적게 된다. 외부의 소립자들은 금속판에 압력을 가하므로 결과적으로 두 금속판 사이에는 인력이 작용하게 된다. 이것을 카시미르 효과라 부르며 실험으로 측정 확인되었다.

다른 예로서 원자의 내부에 있는 전자는 그 주위에 생겼다 사라지는 다른 전자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된다. 이 효과도 측정 가능하다.

이처럼 진공에서의 소립자들의 생성-소멸 현상은 소립자의 본성이 `존재하려는 경향', 즉 기를 가지고 있으며, 공간에는 이러한 ꡐ기ꡑ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립자> : 모든 물질의 근본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우주의 근본적인 존재는 시공간 다음으로는 소립자다.

소립자(素粒子)란 이름 그대로 만물의 기본이 되는 입자로서, 모든 물질을 구성하거나 다른 소립자들 사이에 힘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소립자의 종류는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도 수백 종에 이르지만, 그 중에서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여러 중간자 등 많은 소립자들은 쿼크라는 더 작은 소립자가 결합된 것이므로, 더 쪼갤 수 없는 최소입자라는 의미인 `소(素)'립자라는 표현이 맞지 않다. 이런 것들을 제외한다면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는 전자 중성미자 등 여섯 종류의 <렙톤>과 역시 여섯 종류의 <쿼크>들이며, 물질을 구성하지 않는 소립자도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광자 즉 빛이며 이 입자들은 소립자들 사이의 힘(작용)을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한다.

소립자들의 기본적인 성질은 거의 밝혀져 있다. 물리학에서 소립자를 연구하는 분야를 따로 <소립자 물리학>이라 하는데, 소립자 물리학은 양자역학을 그 기본 이론으로 사용하며, 에너지(속도)가 높은 소립자에 대해서는 상대성이론에 의한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또한 그 역으로, 상대성이론의 중심인 중력에 대해서도 미소한 규모일 때에는 양자이론을 적용해야 하는데, 중력의 양자이론은 아직까지 연구 단계에 있다.)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과 함께 20 세기 물리학의 양대 업적이라 불리는 이론으로서, 물질과 시공간의 미세한 근본적 성질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상대성이론이 아인슈타인의 단독 업적인데 비해서 양자역학은 수십 년에 걸쳐서 많은 물리학자들의 연구로서 이루어진 - 정확하게는 이루어져 가고 있는 분야다. 즉 그만큼 상대성이론보다 더 복잡하고 더 어렵다. 우주와 물질의 궁극적 기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성 이론은 단순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에 비해 양자이론은 어느 물리학자의 말처럼 ꡒ철학자들이 자주 말해 왔듯이, 현실세계는 너무 어질러져 있고 너무도 자의적이어서 미학이 아무리 정교하게 안내해도 사유(思惟)의 힘만으로는 그 정체를 밝혀 낼 수 없어 보인다ꡓ라는 표현이 들어맞을 만큼 복잡하고 까다롭다. )


20 세기에 들어서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는 우주--시공간과 소립자의 세계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관념을 그 뿌리부터 뒤집어 놓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오죽하면 ꡒ양자이론에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양자역학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ꡓ라는 말이 있을까. 상대성이론 역시 실험에 의해 증명되기 전까지는 충격과 논란의 대상이었을 뿐,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은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대부분 아마츄어들이지만) 상대성이론을 부정하기 위한 연구에 매달리고 있을 정도이다.

<과학>과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과학>은 형이하학이요, <철학>은 형이상학으로서, 서로 대립적인 학문의 분야인 줄로 알기 쉽다. 그렇지 않다.

물리학은 원래 철학의 한 분야이었다. 19 세기까지만 해도 자연철학이라 불려졌으며, 실제로 당시까지의 학자들은 철학, 수학, 물리학 연구를 겸하고 있었고, 지금도 많은 물리학의 대가들이 <(과학)철학>이라 분류될 내용의 저술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 책, 논문을 읽어보면 아닌게 아니라 그 내용이 철학인지 물리학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물리학은 수학을 도구로 사용하여 엄밀하고도 객관적인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법칙들은 객관적인 논리와 수학식으로서 확실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어째서 `철학'이 필요한 것일까?

그 이유는 첫 째, 물리학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학적인 접근방법에 의한 탐구가 불가피하기 때문이요,

두 째, 밝혀진 사실(현상)들도 그 내용이 우리들의 기존관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수학식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 언어로 번역해주는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ꡒ백 명의 양자역학자가 있으면 백 개의 양자역학 해석이 있다.ꡓ라는 말이 있다.

비록 양자역학의 수학 수준이 매우 높아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 식들의 모양은 그리 길고 복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순해 보이는 수식 하나에도 무궁무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심오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수식 하나 하나에 ꡒ색즉시공 공즉시색ꡓ과 같은 넓고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제 현대 물리학이 밝혀 낸 사실들을 통해서 소립자의 성질을 조사해 보자.


<상보성원리 相補性 原理>


비록 그 이름은 `입자'이지만, 소립자는 입자가 `아니다.'

소립자는 입자이기도 하며 파동이기도 하고, 또한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이처럼 양자역학은 이해하기 어렵고 모순되어 보이는 말로서 시작된다. 입자와 파동은 그 근본 성질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입자는 절대 파동일 수 없으며, 파동은 절대 입자일 수 없다. 그런데 소립자는 두 가지 본질을 함께 가지고 있다.

즉 두 가지의 대립되는 성질이 어울어져서 하나의 소립자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상보성원리>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입자적인 성질과 파동적인 성질이 서로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소립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립자의 절반은 입자요 절반은 파동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때는 완전한 입자요 어떤 때는 완전한 파동인 것이다. 입자와 파동처럼 전혀 다른 성질이 물질의 가장 미소한 단위인 소립자에 있어서는 서로 함께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은 소립자를 모래알이나 먼지 같은 그저 `아주 작은 알맹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예이다. (엄밀한 기준에서라면 소립자라 하지 않고 ꡐ소자 素子ꡑ라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소립자라는 명칭이 이미 너무 익숙해졌으며, ꡐ소자ꡑ라는 용어는 다른 분야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바꾸기에는 늦었다.)


소립자의 입자-파동 이중성은 간단한 실험으로 확인 가능하다.

<이중 틈새 실험>이 그것이다.




      ----->                        

     (전자 총)                      

                                               

                     (이중 틈새 차폐 막)

                                           (스크린 ; 형광 막)                     



텔레비젼의 브라운관은 그림처럼 전자총과 스크린으로 되어 있다. 전자총과 스크린 사이를 두 개의 작은 틈새가 있는 차폐 막으로 가려 놓고 전자를 하나씩 쏘아보자.(주; 지금 소립자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전자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전자 이외의 다른 모든 소립자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먼저 틈새 두 개 중 하나를 막아놓고 실험할 경우에는 전자는 총알(입자)처럼 그 틈새를 지나서 스크린에 도달하여 한 점을 찍게 된다. 이때 전자는 하나의 입자로서 행동한다.

다음, 틈새 두 개를 모두 열어놓고 전자를 `하나씩' 쏘아보자. 틈새가 하나 뿐일 때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입자처럼 행동하던 전자는 틈새가 두 개가 되자 그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전자가 좀 더 자유로워진 것이다. 자유로운 상태의 전자는 그 본질이 파동으로서 나타난다. 전자는 파동으로서 두 개로 나누어진 것처럼 두 개의 틈새를 `동시에' 통과한 다음, 다시 나누어진 두 개의 파동이 마치 각기 별개의 파동인 것처럼 서로 간섭하여 스크린 상에 입자에는 없는 파동만의 특징인 간섭무늬를 그려낸다. 분명히 전자를 하나씩 쏘았는데, 그 하나의 전자가 둘로 나누어지기도 하며 나누어진 부분끼리 서로 간섭작용을 하기도 한다는 것은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놀랍고 신기한' 일은 그뿐이 아니다.

이제 두 개의 틈새가 있는 차폐 막 바로 뒤에 틈새마다 한 개씩의 전자측정장치를 설치해보자. 이 장치는 전자를 입자로서 검출하는 장치이다. 만약 지금도 전자가 두 개의 `파동'으로 나누어져서 두 개의 틈새를 각각 통과한다면 전자측정장치에는 아무 것도 측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전자는 그 두 개의 측정장치 중의 하나에 ꡐ입자로서ꡑ 측정된다. 물론 다른 측정장치에는 측정되지 않는다. 두 개의 파동으로 나누어졌던 전자는 실험자가 `입자를 관측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서는' 파동에서 다시 한 개의 입자로 되돌아 온 것이다.

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 개의 파동으로 나누어졌던 전자가 다시 한 개의 입자로 합쳐진 것'이 아니다. 나누어진 두 파동은 서로 간섭할 수는 있을지라도 다시 합체하기는 불가능하다. 전자는 변신합체로봇이 아니다. 전자는 파동의 상태로 두 틈새를 지나왔지만, 전자측정장치를 만나는 순간에 `시간을 역행하여' 자신의 과거를 바꾸는 것이다. 즉 `나누어진 파동으로 두 개의 틈새를 지나왔던 과거'를 `하나의 입자로서 두 개의 틈새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지나온 지금`의 입자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이 사실은 John Wheeler 등의 보다 정밀한 실험에서 확인되었다.

양자이론에 의하면 입자의 움직임은 당구공이 굴러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입자가 한 점 A에서 다른 점B로 움직일 때, 입자는 A에서 B로 가는 <모든 경로>를 통해서 옮겨간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속 편하게 `A에서 사라진 다음 B에서 다시 나타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실제 현상에 가까울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입자가 A에서 B까지 움직일 때 택할 수 있는 모든 경로에 그 경로를 거쳐갈 확률을 곱하여 적분한다. ꡒ경로적분 path integral`이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립자의 움직임마저도 우리의 일상적 인식과는 판이한 것이다.


소립자는 우리(관측자)의 요구에 따라서 때로는 입자로서, 때로는 파동으로서 나타난다. 우리가 입자적 성질(효과)을 관측하기를 원하면 입자로서, 파동적 성질을 관측하기를 원한다면 파동으로서 관측되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가장 흥미 있는 점은 틈새가 한 개뿐일 때에 전자는 입자처럼 그냥 그 틈새를 지나가지만, 두 개의 틈새를 열어놓았을 때에 전자는 틈새가 두 개 있다는 것을 `알고서' 파동처럼 그 두 개의 틈새 모두를 통하여 지나간다는 것이다.

전자는 관측자(의 요구)와 호응하면서 틈새가 하나일 때와 두 개일 때를 분간하는 것이다.

또한 `두 개의 파동'으로 나누어진 후에도 틈새 뒤의 입자측정장치를 만나는 순간 자신의 과거를 바꾸어 가면서까지 `

하나의 전자(입자)'로 되돌아온다.


이런 전자를 어찌 ꡒ질량과 전하를 가진 하나의 점ꡓ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전자에게도 어떤 `식'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비록 그 `식'이 지극히 미소한 것이라서 즉 의지가 미약해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지만(그래서는 큰일 나지만), 차폐 막에 부딪치는 순간에 전자는 틈새의 숫자에 따라서 `파동이 될까, 입자가 될까? 하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또한 입자측정장치를 만났을 때 전자는 `어느 쪽의 측정장치에 반응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이 말에 대해서는 파동함수에서 상세하게 검토해 보겠다), 자신의 과거를 바꾸어 정리해야 한다. (어떤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하는 인간보다 더 낫지 않은가?)

흔히들 소립자를 아주 작은 당구공처럼 -그저 크기와 질량을 가지고 있을 뿐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소립자는 질량 외에도(질량이 없는 광자도 있다) 전하, 스핀, 아이소스핀, (중, 경)입자수 등의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는 복잡한 존재이다. 더구나 파동-입자의 양면성까지를 고려한다면 <단순한 작은 물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전의 과학자 ? 환원주의자들의 목표요 꿈이었던 ꡐ우주의 부품(部品)ꡑ을 발견하는 일에 성공하긴 했지만 막상 찾아 낸 것은 ꡐ단순한 조각ꡑ이 아니라 복잡 정교하고 활기에 가득 차 있으며 심지어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ꡐ무엇ꡑ이었다.

물리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해 보자.

ꡒ양자역학의 가장 중요한 신비는 어떻게 정보가 그렇게 빨리 퍼지게 되는가? 또 어떻게 그 입자가 두 개의 틈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또 그 밖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정보가 여기서 일어날 것 같은 것을 결정하기 위하여 모아지게 되는가? 에 있는 것이다.ꡓ<Henry Pierce Stapp; 로렌스 버클리 실험실>


소립자가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물리학자도 있다.

"의식은 양자역학적 현상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발생하는 모든 일은 궁극에는 하나나 그 이상의 양자역학적 사건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주에는 거의 무수한 수의 다소 분리된 의식을 갖지만 언제나 사고력은 갖고 있지 않은 實在들이 서식하고 있다. 아울러 그 실재는 우주의 세분화된 작용의 원인이 된다.ꡒ <E. H. Walker>


전자는 자신의 크기만큼의(실은 전자는 크기가 없다만) `식'과 `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이처럼 과학적인 사실에 의해서 그 타당성이 분명히 입증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자를 그 대상으로 설명하였지만, 다른 소립자의 경우에도 완전히 동일하다.

(전자야말로 소립자 중에서도 으뜸이라 하겠다. 전기의 원천이며 모든 화학반응, 원자가 분자를 이루고 분자가 결합하여 물체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모두 전자의 역할이다.)


<불확정성 원리>


심지어 소립자는 `있다', `없다'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하나의 소립자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소립자를 관측하였을 때에만 성립한다. 그 이전과 이후에는 `있다'라고도 `없다'라고도 말 할 수 없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소립자는 존재로서의 가장 기본 요소인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확정될 수가 없다. 우리가 관측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확정되는 것은 오로지 관측되는 순간이며, 관측하더라도 위치와 운동량이 함께 확정될 수는 없다.

이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쉽게 이해할 수도 없으며, 이해하더라도 받아드리기 어렵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뿐만 아니라, 양자역학 이전까지의 철학, 물리학 등에서는 <객관적 실체>가 당연히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었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객관적 실체>란 없다, 소립자들은 유령 같은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양자역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탐구 대상이었던 `존재의 소자(素子)'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발견된 순간에 모래알처럼 유령처럼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 달아나 버린 것이다.


아래의 간단한 식이 불확정성 원리다(앞의 식과는 다른 또 하나의 식이다).


△x△p≥h

△x는 위치의 오차(범위)이며 △p는 운동량의 오차(범위), h는 플랑크의 상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간단한 식이 물리학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리고 치열했던 논쟁을 불러 왔던 것이다. <객관적 실체>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자들 간의 `수십 년 전쟁'이었다.

위 식의 의미는 존재의 위치와 운동량의 오차(범위)는 그 곱한 값이 플랑크의 상수 값보다 절대로 더 작게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위치를 정확하게 결정하(되)면 운동량은 그 범위가 엄청나게 큰 값으로 ꡐ퍼져ꡑ버리는 것이다. 또한 운동량--예를 들어서 속도를 제로에 가깝게 하면 그 위치는 우주 공간에 가득 찰 정도로 넓은 범위로 퍼져 버리는 것이다.

ꡒ아니, 엄청 정밀한 측정장치를 사용하더라도 그렇단 말인가?ꡓ

그렇다. 이미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ꡒ흐음, 그렇다면 우리는 ꡒ존재ꡓ를 오차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인데, 뭐 그렇더라도 플랑크의 상수가 워낙 작은 값이니까 별 문제 없지 않은가?ꡓ

그렇다. 실생활에서는 아무런 문제없다. 그러니 걱정하실 건 없다.


또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ꡒ비록 우리가 오차 없이는 측정 확인할 수 없더라도, 하나의 소립자가ꡐ있다ꡑ면 그것은 어떤 위치에, 얼마만한 크기의 운동량을 가지고 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정확한 값은 알지 못하더라도 존재 그 자체는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ꡒ

당연한 생각이다. 굳이 정확한 값이야 얼마면 어떠냐. ꡒ그것(운동량)은 거기(위치)에 있다ꡓ라는 것은 알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왜 식의 이름이 거창하게끔ꡒ불확정성 원리ꡓ인가? ꡒ원리ꡓ라는 거룩한 단어의 남용이 아닌가? -- 아니다. 우리는ꡒ그것이 거기에 있다ꡓ라고 말 할 수 없다.


물리학이 그 도구로 사용하는 수학은 비록 추상적인 것이지만 현실세계와 아주 잘 대응된다. 이 말은 수학이 실제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서 P. Dirac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최초로 (부분적이나마)결합시켜서 유도한 식의 결과가  반입자의 존재를 표시하였는데, 반입자는 당시로서는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그러나 반입자는 그후 발견되었다. 올바른 원리에 기초하여 올바르게 유도된 식이 현상과 대응되지 아니한 일이 없다는 말이다. (실은 양자역학에 이르면 이론과 현상이 반드시 일대일 대응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철학과 과학이 양자역학을 만나서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확정성 원리는 어떤 의미인가?

단순히 우리가 측정 오차 없이는 관측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존재 그 자체가 오차를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그렇다.


제일 간단한 수소원자를 생각해 보자. 수소원자는 양성자 한 개의 핵 주위를 전자 한 개가 돌고 있는 것이다. 쿨롱의 법칙에 의하면 전자는 양성자와 서로 잡아당기니까 전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 약 천억 분의 일 초만에 핵 속으로 잡혀 들어 가버리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주의 모든 원자들이 한 순간에 없어진다(초신성의 폭발 후에 남은 중성자별이 바로 엄청난 압력(중력)에 의해서 전자가 원자핵 속의 양성자에 붙잡혀서 모두 중성자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양성자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는 원자의 대략적인 모형이 밝혀진 후, 양자이론이 정립될 때까지 이 문제는 과학자들을 무척 곤란하게 만들었었다. 도대체 왜 전자는 양성자에 끌려가서 합체하지를 않고서 그 주위만 뱅뱅 돌고 있는 것일까?  바로 불확정성 때문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전자는 질량이 작기 때문에 <질량 곱하기 속도>인 운동량이 너무 작아서 그 위치의 범위가 크다. 그 범위가 원자핵의 크기를 초과하기 때문에 원자핵 내부의 좁은 공간에는 갇혀 있을 수가 없다. 전자는 원자핵의 양성자가 끌어당기는 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불확정성 원리 때문에 원자핵 속에 갇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엄청나게 강한 힘에 맞먹는 것이다. 중성자별처럼 강한 힘이 아니면 전자를 좁은 공간에 묶어 둘 수가 없다. 소립자는 심지어 ꡐ아무 것도 빠져 나올 수 없다ꡑ는 불랙 홀 black hole에서도 탈출할 수 있다. 스티븐 호킹을 유명하게 만든ꡐ불랙 홀의 증발ꡑ현상이다. 이 현상은 작은 불랙홀(불랙 홀의 크기는 얼마든지 작을 수도 있다)에서는 더욱 심해진다.

소립자는 이처럼 `자유롭고자'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의 식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성질은 운동량 즉 외부와의 작용량이 작을수록 더 커진다. 원자핵의 크기는 곧 전자의 자유 영역의 크기인 것이며 전자는 그 내부의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자의 파동성 때문에 파동의 마디가 정수가 되는 위치, 즉 정상파를 이룰 수 있는 위치에 집중된다. 이 위치들이 원자핵 내부의 전자의 괘도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단순히 우리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함께 정확하게 알(측정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자의 존재 그 자체가 위치와 운동량에 있어서 동시에는 확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운동량이 작은 소립자는 그 위치가 넓은 공간에 퍼져 있다는 결론이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물리학에서 전자는 크기가 없는 `점입자로 취급된다.'

크기조차 없는, 공간의 한 점에 불과한 전자가 그 위치마저 애매하다면 도대체 전자는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점點>은ꡐ넓이가 제로이고 위치만 있는ꡑ것을 말하는데, `위치가 없는 점'이란 개념은 쉽게 납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만약 전자가 크기를 가진다면 그 전하(電荷, 전자의 전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전하는 전자의 내부에 고르게 퍼져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전기는 같은 종류끼리 서로 밀어내는 힘을 발휘하며, 이 밀어내는 힘을 계산해보면 그 힘이 무한대가 된다.

그런데 크기가 없다고 해도 역시 전자의 자기(自己) 에너지가 무한대로 되어버린다는 다른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다.  전자는 그 전하에 의해서 주변 공간에 전기장을 형성하며, 이 전기장의 크기는 전자의 반지름에 반비례하므로 전자가 크기가 없는 점입자라면 그 반지름이 제로가 되어 전기장(의 에너지)의 크기가 무한대라는 계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결국 양자역학에 의하면 전자는 크기가 있어서도 안되고 없어서도 안 된다는 모순적인 입자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재규격화 이론, 비국소장 이론 등이 제안되었지만, 전자의 크기는 현재도 양자역학의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어쨋건 전자는 존재한다. 우리는 전자의 질량과 전하의 크기를 소수점 아래 몇째 자리까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하는 속어적인 표현처럼 ꡒ아무 것도 없이 ꡐ기ꡑ만 살아 있다ꡓ라는 말이 바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가?

최근의 <초끈 이론>에서는 모든 소립자들을 `미세한 끈'으로 취급하므로서 이 문제를 피한다. 그러나 그 ꡐ초끈ꡑ의 크기는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크기의 최소한계인 플랑크의 길이(10의 마이너스33승cm) 이하이므로 결국 물리학적으로 크기가 없는 것과 같다.


전자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소립자의 존재는 `어디에 어떤 상태로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소립자를 `뚜렷하게' 인식할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 왜? 소립자들이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으므로. ꡒ어떤 위치에 얼마만한 운동량을 가지고서ꡓ 존재하지 않으므로.

문제는 여기서 끝나질 않는다. ꡒ어디에도 없다ꡓ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했지만, 우리가 위치와 운동량을 함께 알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고서 그 위치나 운동량 중 어느 하나만을 알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ꡒ어디에도 없던ꡓ 소립자가 측정하는 순간 `어디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또 위치를 정확하게 안다면 운동량을 알 수가 없으며, 운동량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을 물리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ꡒ정해진 어떤 양의 운동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ꡓ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ꡒ질량도 속도도 결정되지 않은ꡓ 입자는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아닌가? 물론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서 위치와 운동량 중 어느 하나만을 측정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한가지를 측정할 수 있다면 왜 두 가지를 함께 측정할 수는 없는가?

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다. 전자는 그 위치가 측정될 때는 운동량을 드러내지 않으며, 운동량이 측정될 때는 위치를 숨긴다.

아니 근본적으로 이것은 측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 두 가지의 양이 측정하기 전까지는 결정되어 있지 아니하며, 어떤 측정방법으로서도 두 가지를 한꺼번에 측정하여 전자의 `존재'를 결정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 측정에 의해서 한 가지가 결정된다면 왜 두 가지가 다 결정되지 않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전자-소립자는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 자유를 가져야 하며,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소립자의 `자유를 위한 의지'를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생기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작은 소립자도 우리가 절대로 그 전모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존재이다. 소립자의 실재에 대한 논의(實在論)는 지금도 물리학자뿐 아니라 철학자들의 주요 논쟁거리이다.


아무리 길게 설명하더라도 애매 모호하다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질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말이나 기존개념으로 이해하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애매 모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ꡒ입자는 관측하기 전까지는 어떤 위치와 상태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ꡓ. 또한 관측하더라도 위치와 운동량을 함께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앞에서 ꡒ존재의 정의ꡓ를 ꡒ위치와 운동량ꡓ이라 했는데, ꡒ위치와 운동량ꡓ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소립자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다. 분명히 있다. 소립자는 우리의 신체를 비롯하여 우주의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니까 있기는 분명히 있다.

그러면 ꡒ어디에 있는가?ꡓ -- 관측되기 전까지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ꡒ어떤 상태인가?ꡓ -- 관측되기 전까지는 어떤 상태도 아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이렇게 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다. 죄송하긴 하지만 물론 내 책임은 아니다. 그러면 누구의 죄인가? 창조신의 죄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달리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러면 창조신에게 따져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그럴 수야..... ꡒ양자역학은 뭐하고 있는가? 왜 책임 있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가?ꡓ 양자역학을 탓하지 마시라. 양자역학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변명한다. ꡒ양자역학은 그 이론으로 밝힐 수 있는 것만 취급할 뿐, 그 이상의 근본적인 것은 다루지 않는다. 더 이상 요구하지 말라ꡓ. 소위 ꡒ코펜하겐  해석ꡓ이다. `더 이상'은 우리가 침범할 수 없는 소립자의 자유 영역이다. 우리의 의식이 자유로운 것처럼 소립자도 고유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소립자의 식이며 기인 것이다.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며, 진리의 탐구는 의문과 의문의 추구로써 수행된다. 그런 과학에서 양자역학의 ꡒ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ꡓ라는 태도는 사실 몹시 기이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ꡒ불완전한 이론ꡓ이라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소립자가 가지는 성질은 운동량뿐만이 아니다. 전하, 스핀 등 여러 가지 물리량이 있다. 이런 모든 양들이 관측되기 전까지는 `결정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다. 위에서는 가장 단순한 위치와 운동량만을 예로 든 것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을 제외한 일반인들은 물론 - 끝까지 이런 이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ꡒ소립자는 `어디에 어떤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자이론에 의하면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나 양자이론은 실험과 현상을 틀리지 않게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 양자이론이 틀렸다기 보다는 어딘가 결함이 있는 불완전한 이론이라서 이러한 `이론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ꡓ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상대성 이론이 아니라, 1905년에 발표했던 `광양자 이론'이었는데, 광양자 이론은 양자이론을 탄생시킨 중요한 기초 이론 중의 하나이다. 그러함에도 아인슈타인 자신은 죽을 때까지도(벨의 이론이 나온 것은 아인슈타인의 사후이다) 양자이론의 기본 개념인 `존재의 불확실성'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것이 유명한 ꡒEPR 상상실험ꡓ이다. 상상실험 또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란 실제로는 수행이 불가능하지만 상상 속에서 해 볼 수 있는 실험을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불완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와 생각을 같이했던 동료학자들인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세 사람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EPR 상상실험ꡒ을 창안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래에 소개한 것은 아인슈타인 등이 처음에 제안했던 상상실험과는 내용이 약간 다르다. 1951년에 데이비드 보옴David Bohm이 수정한 것이다.)


< 감마선이 두 개의 전자-반전자 쌍을 만들어 내는 경우를 생각하자. 그 두 개의 전자 중 하나는 우회전 스핀을 가질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좌회전 스핀(`스핀'이란 `회전'을 의미하는 물리량인데, 볼링 공에 회전을 준 것과는 다르다. 전자는 크기가 없는 점点 입자인데 어떻게 회전할 수가 있는가? 이처럼 소립자의 세계는 우리가 기존 관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들로 가득 차 있다)을 가질 것이다. 양자이론에 의하면 어느 쪽이 우회전, 어느 쪽이 좌회전 스핀을 가질 것인지는 관측하기 전까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라고 말한다. 즉 관측으로 결정되기 전까지는 각각의 전자와 반전자가 좌-우 회전 스핀을 가질 확률이 반반씩이다.

이제 둘 중 하나의 스핀을 측정해서 그 스핀이 우회전이었다 가정하자(동일한 감마선을 다른 관측자 또는 동일한 관측자가 다른 시간에 측정했다면 좌회전일 수도 있다. 이처럼 관측 이전까지는 좌-우가 결정되어 있지 아니하며, 관측되는 순간에 비로소 확률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양자역학 이론이다). 그러면 다른 전자는 좌회전 스핀을 가진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물리법칙에 의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나의 전자가 측정을 거쳐 스핀이 확정되었으므로 이제 다른 전자의 스핀 역시 확정된 것이다.

그러면 측정되지 아니한 전자의 스핀이 확정되는 것은 언제인가? 처음부터 그러니까 측정하기 이전부터 결정되어 있던 것일까? 양자이론대로라면 처음의 전자가 관측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렇다면 측정되지 아니한 전자는 측정된 전자가 측정된 시점을 어떻게 알며, 또 측정된 전자가 그 이전까지는 좌우 어느 쪽으로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가 측정되는 순간에야 우회전 스핀을 가지게 되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그 두 개의 전자는 분명히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가? 정보를 전달할 수단이나 시간이 없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ꡒ국지원리(principle of local cause)"는 물리학 이전에 지극히 상식적인 모든 현상의 본질이 아닌가?

양자이론을 따른다면, 가능한 가정은 한 가지뿐인 것처럼 보인다. 두 개의 전자 사이에 어떤 정보전달 수단이 있어서 하나가 측정되는 즉시 다른 전자에게 측정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에 다른 전자는 방금 관측으로 결정된 상대편의 상태를 알게 되고, 거기에 맞추어서 자신의 상태를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만약 두 전자-반전자가 십억 광년쯤 떨어진 후에 측정한다면? 그래도 결과는 동일하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기에서 결정적(아인슈타인의 생각에)인 문제가 대두된다.

ꡒ정보의 초광속 전달ꡓ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전자가 측정되는 순간에 십억 광년 떨어진 다른 전자가 동시에 정보를 알게 된다면 그 정보는 초광속으로 전달된 것이다. 그런데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정보는 절대로 초광속으로 전달될 수 없다. 이 것은 상대성 이론의 기본 가정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상대성 이론이 옳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험상으로나 확실하다. 따라서 양자이론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당시 상대성이론은 실험으로 확인되어 있었고, 양자이론은 아직 초창기에 있었다. 상대성 이론에 기득권이 있었던 것이다.) >

자, 과학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 사이에 모순이 생겼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은 것인가? 그래서 이 상상실험의 이름은 "EPR paradox(역설)ꡒ이라 불리기도 한다. 도대체 소립자들은 ꡒ어디에 어떤 상태로ꡓ 존재하는 것인가 아닌가? 우리가 측정하기 전에 말이다.


양자이론파들의 입장이 난감해졌다. 정보의 초광속 전달을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양자이론의 근간인 불확정성 이론이 무너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양자이론의 아버지 격인 닐스 보아(Niels Bohr)는 이렇게 해석- 실은 `가정'이라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하였다.

ꡒ그 두 개의 전자는 함께 생겨나서부터 측정되는 그 순간까지 분리된 두 개의 전자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체이다.ꡓ

이러한 생각은 양자이론을 완전히 이해하고서 존재의 본질을 파악한 사람이 아니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측정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전자는 독립된 두 개의 전자가 되는 것이며, 측정 이전까지는 `두 개의 전자'라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두 개의 전자가 생기려는 경향, 의지'만 있다는 의미다. 이 가정에 의하면 정보의 초광속 전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분리된 두 개의 입자'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체'인 바에야 정보의 전달이 문제될 수 없는 것이니까. 물론 이러한 생각은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라서 그 개념을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기야 쉽다면 그 작은 소립자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이처럼 길고 장황할 필요가 없으리라.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통합체', 또는 ꡐ관측되기 전까지 소립자는 어떤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ꡐ존재하려는 의지ꡑ 그 자체일 뿐이라는 생각은 양자역학자들의 가정이었을 뿐, 확실한 것은 실험 또는 관찰결과로 말하는 것이 과학이니까 말이다.


1964년에 유럽공동체핵물리연구소 CERN에 근무하던 John Bell이 EPR 사고실험을 실제의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론)을 발표했다.

벨의 정리 또는 벨의 부등식이라 불리는 이 이론은 광자(빛)의 편광(偏光)상태를 측정(검출)할 수 있는 편광판 두 개를 사용하여, 한 광원에서 나온 두 개의 광자의 편광상태를 측정하는데, 두 편광판의 각도를 조금씩 어긋나게 회전시켜서 각각의 편광판에 검출되는 광자들 사이의 관계를 측정함으로서 실제 실험이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옳다면 이 때 측정되는 두 개의 광자들의 편광상태 사이에는 `벨의 부등식'이 성립해야 한다.

'사고실험`인  EPR과 달리 벨의 이론은 실제로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실험은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엄밀하게 수행되었고, 그 결과는 아인슈타인(EPR)이 틀렸으며, 양자이론이 옳다는 것이었다.


벨의 이론과 그 실험 결과는 아인슈타인과 양자이론 사이의 오랜 다툼을 끝내었다.

벨의 이론과 그 실험은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왜냐면 그 만큼 `존재의 애매 모호한 본질'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ꡒ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실험결과가 거꾸로 나왔다면 나는 무척 놀랐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있다'와 '없다`를 분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단히 서운하게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인 물리학은 우리에게 '있다`와 '없다`는 서로 확실하게 구별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소립자들은 누군가가 `측정' 즉 상호작용을 거치기 전까지는 어떤 실체(`객관적 실체'라 표현한다)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허깨비처럼 그 존재의 가능성과 경향, 의지만 확률의 파동으로서 허공 중에 너울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ꡒ그것은 있다. 그러나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지 않다.ꡓ - 이 말이 말이 되는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양자이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존재의 근본적 실체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실체는 진정한 실체(객관적인 실체)라 하기 어려운 것이다. `존재'를 탐구하는 양자이론은 `존재의 확인이 불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아니, 우리의 개념으로서는 `존재하지 아니함'을 보여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더 비슷할 것이다.

누구도 하나의 소립자가 `어디에 어떻게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ꡒ어디에 어떻게ꡓ 있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측정하기 전까지는 소립자는 그저 허공 중에 유령처럼 - 아니다. 그 어떤 말로서도 표현할 수 없다. ꡒ불립문자ꡓ, ꡒ언어도단ꡓ 등의 불교 표현이 양자이론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수학식이다. 그러나 수학식은 언어로서 표현되는 우리의 일반적인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전자 등의 경입자(렙톤)들과, 그리고 양성자 중성자 등의 많은 중입자(바리온)들을 구성하는 쿼크가 `있다'는 사실을 알 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입자들이 존재와 허상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ꡒ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ꡓ이란 불경의 말씀은 양자이론을 몰랐던 사람의 말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다. 닐스 보아나 하이젠베르그 등의 양자물리학자라도 모든 존재의 실체에 대하여 이 같은 표현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하나의 소립자는 측정하기 전까지는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아니하다가 측정되는 바로 그 순간에야 그 존재를 스스로--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이 현상이 ꡒ관측자의 의지ꡓ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소립자의 의지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ꡐ관측자의 의지ꡑ라 하더라도 결국 그 근원은 소립자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다. 최소한 ꡐ상호 작용ꡑ은 인정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더 이상의 해석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입을 다물어 버린다.


이것까지는 비록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자.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측정되지 아니한 전자는 측정된 전자와 어떻게 서로 연락하는가? 그것도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에 관계없이 순간적으로 말이다. ꡒ하나의 통합체?ꡓ - 당신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 ꡒ하나의 통합체ꡓ가 어떻게 관측되는 순간에 두 개로 나누어질 수가 있는가? 그것도 두 개를 관측한 것도 아니고 둘 중 하나만을 관측했을 뿐인데....

두 개의 전자는 분명히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양자이론에 의하면 그 거리는 일 미터이든 백억 광년이든 관계없이 동일하다. 크기도 없는 점입자인 전자가 백억 광년이란 거리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서 `하나의 통합체'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양자이론의 대부격인 닐스 보아의 말이지만 너무 무리한 가정이 아닌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ꡐ단순히 하나이니까…ꡑ 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가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보아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통합체'라는 가설을 내세운 이유는, 양자이론에 의하면 두 입자들 사이의 정보교환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ꡒ정보의 초광속 교환의 불가능함ꡓ은 상대성 원리의 초석이다. 이 가정이 무너지면 상대성 원리 그 자체가 무너진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벨의 정리와 그 실험결과는 ꡒ정보의 초광속 교환ꡓ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성 이론이 틀린 것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상대성 원리는 수많은 실험과 관측결과에 의해서 올바르다는 것이 확인되어 있다.

이 골치 아픈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아는 ꡒ하나의 통합체ꡓ 가설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ꡒ하나의 통합체ꡓ라면 `정보교환의 속도'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정보교환 그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다. `하나'이니까.... 여기서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두 입자들 사이에 분명히 정보가 교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입자들은 그 자신의 내부에 ꡐ정보ꡑ와 그 ꡐ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능력ꡑ을 갖추고 있는 것이며, 양자역학의 대부 보아도 이를 인정한다는 점이다.


ꡒ하나의 통합체ꡓ 가설을 그대로 `믿어도' 된다. 물리학에서는 `믿는다'라는 표현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물리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의 해석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정관념'은 이 가설을 그리 쉽게 받아들이려 하질 않는다. 어떻게 ꡒ하나의 통합체ꡓ가 인간의 관측에 의해서 수 십억 광년 떨어진 거리에서 동시에 독립된 두 개로 분리될 수 있을까? 더구나 ꡒ초광속 정보교환ꡓ을 통해서 말이다.

앞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입자의 위치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만약에 십억 광년 떨어져 있는 두 입자라면 그 입자(하나의 통합체)의 존재 가능 범위는 지름이 십억 광년인 구체의 표면 가까운 어디가 된다. 쉽게 말하면 그 `통합체'의 상상적 크기가 그만하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ꡒ하나의 통합체ꡓ 가설이 틀렸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ꡒ하나ꡓ가 아니고서는 거리에 관계없이 순간적인 정보의 교환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양자이론은 우리에게 기존관념의 파격적인 수정을 강요한다. 세계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과는 그 근본에 있어서 너무나 다른 것이다.

엄밀한 해석에 의하면 Bell의 실험에 있어서 `정보'는 초광속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상대성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의 `정신'과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물리학자 한스 페이겔스 H. Pagels는 ꡒThe Cosmic Code"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ꡒ두 입자 사이에 정보는 초광속으로 전달되지만, 그 전달되는 정보는 난수적이므로 제3자가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되지 못한다.ꡓ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정보의' 초광속 전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성 원리와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 상대성 원리는 관측될 수 있는 `정보'의 초광속 전달을 금지할 뿐이다. `객관적인 정보'--즉 외부에 대하여 어떤 의미, 영향력을 가진 메시지--가 아니라면 초광속으로 전달된다 하더라도 관계없는 것이다. 벨의 이론과 그 실험결과가 예를 들어서 텔레파시의 이론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페이겔스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존재의 불확실성'의 배경에 있는 `초광속 정보 전달 문제'는 일단 형식상 해결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페이겔스의 이론은 그 현상을 다른 존재--인간이 초광속 정보전달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 두 입자들 사이에 정보가 초광속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초광속으로 전달되는 무엇이 있다>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페이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ꡒ객관적 실체와 정보의 초광속 전달은 상보적이다ꡓ.

즉 모든 존재(소립자)는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소립자 외부의 존재(예를 들어 인간)가 이 정보의 초광속 교환을 이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ꡐ상보성 원리ꡑ는 소립자의 파동성과 입자성이 상보적이라는 보아의 상보성 원리를 더 궁극적인 차원으로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이 서로 상보적이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양자역학은 이렇게 말한다. ꡒ관측자(인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실체란 없다. 양자역학이 보여줄 수 있는 것만을 요구하고 더 이상을 기대하지 말라.ꡓ - ꡒ코펜하겐 해석ꡓ의 `off-limit 팻말'이다. 결국 양자역학은 소립자 수준에서의 물리를 우리에게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물 본질>이 아닌 <우리가 관측한 현상>일 뿐이다.

이처럼 양자역학은 이론 그 자체로서는 틀림이 없는 완전한 것이지만 그 탐구 대상인 소립자의 `실체'에 더 이상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금지한다. 양자역학은 관측대상의 확률적 예측과 관측결과는 말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있을지도 모르는'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수단이 없는 것이다. 물론 양자역학은 `실체란 (양자역학적으로)존재하지 않는다'라고까지 표현한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이것이며,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함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야기시켰던 장본인인 하이젠베르그마저도 한 때는 양자 체계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활동하는 성향 혹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그 체계가 어떻게 측정기에 둘러 싸여 있는가에 따라서 그런 성향은 다른 방식으로 이끌려져 나온다`고 생각했었다.

이에 대하여 폴 데이비스 Paul Davies는 "우주의 청사진 ; The Cosmic Blueprint"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ꡒ하이젠베르그는 의식의 문제로 보어를 물고 늘어졌다. 의식의 존재는 양자론의 확장의 필요성에 대한 증거가 아닌가? 보어는 `의식이 자연의 일부분이어야 한다는.......얼핏 보기에 상당히 믿을 만해 보이는 주장이 양자론에서 제기된 것처럼,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또한 매우 다른 종류의 법칙들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대답했다ꡓ.

이러한 모든 사실과 현상과 그 해석에 대해서는 당신의 판단에 맡긴다. `백 명의 양자역학자들이 백 개의 해석을 가질 수 있다'면 당신도 당신 자신의 해석을 가질 권리가 있다.


< 우주적 통합체 가설 >


현재 물리학자들 중에서 정통적 또는 다수의견은 아니지만, David Bohm 등의 학자들은 ꡒ하나의 통합체ꡓ 가설을 더욱 확장시킨 ꡒ우주적 통합체ꡓ 가설을 주장한다.

입자 두 개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아니한 `하나의 통합체'라면, 우주 전체가 그물 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유기적 통합체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의미다. 황당한 생각으로 보이겠지만, 양자물리학의 대가인 Bohm의 명성만큼이나 부정하기 어려운 가설이다.

이 이론의 근거는 이렇다. 어떤 소립자 두 개가 서로 작용(충돌이든, 힘의 교환이든)했다 하자. 그 후에도 두 소립자들은 관측으로 확인되기까지는 어떤 상태로 확정되어 있지 않다. 즉 보아가 말한 `하나의 통합체'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립자들이 다시 다른 입자들과 작용하면 이제 ‘하나의 통합체’가 ‘네 개’로 늘어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통합체’는 계속 그 범위가 늘어가는 것이다. 그 도중에 ‘관측 행위’가 있다하더라도 이제는 그 관측자(장치)까지를 포함하여 더 넓은 범위의 ‘하나의 통합체’가 생겨나게 된다. 우주 내에 있는 수많은 소립자들은 항상 서로 반응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한에 가까운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많은 소립자들이 모두 `통합체' 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거리가 몇 백억 광년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즉 우주 전체는 <하나의 통합체>라 하는 것이 옳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과 관련된 수학적 연구로서 폰 노이만 Von Neumann은 입자의 관측시의 파동함수의 수축을 다루는 양자적 측정 과정의 수학적 모델을 만들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한 입자의 파동함수는 전체 측정 계(장치)의 측정에 의해서 수축(입자가 미확정이며 확률적으로만 존재하는 파동함수상태로부터 확정된 입자상태로 전이하는 것)하지만, 전체 계를 나타내는 파동함수는 수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관측되는 입자와 관측장치까지를 포함하는 전체 계는 아직 미확정 상태인 ‘하나의 통합체’ 상태를 유지한다는 증명이다. 이 것은 양자이론에서의 유명한 ꡒ고양이의 파라독스ꡓ를 수학적으로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양자이론적 모델이기도 하지만, 세부적인 설명은 생략하겠다. 이 이론의 요지는 측정대상인 하나의 소립자로부터 전 우주가 파동함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보옴Bohm의 ꡒ우주는 하나의 통합체ꡒ라는 견해를 수학적으로 받침 하는 것이다.

불랙홀, 화이트홀, 웜홀 등의 명명자인 물리학자 죤 휠러 John Wheeler 는;


ꡒ이제 우리는 <관찰자>라는 낡은 용어를 폐기하고 대신 <참가자>라는 새로운 말을 사용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약간 어리둥절하겠지만, 이 우주야말로 모든 주민의 직접 참가에 의한 산물인 것이다.ꡓ라고 단언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들 즉 ꡒ하나의 통합체ꡓ, ꡒ초광속으로 전달되는 무엇ꡓ 등이 <기>의 존재와 그리고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사후식의 우주적 네트워크>를 나타내고 있다 생각한다. <초공간과 기>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기>는 초공간적 존재일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초광속 전달'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따라서 양자역학 이론의 너머에 있는 소립자들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마저도 포기한다면 모를까,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소립자들의 기> 외에는 달리 설명이 없는 것이다.

즉 우주 전체는 하나의 통합체라 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 ꡒ초광속으로 전달되는 무엇ꡓ에 대하여 하나의 가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두 입자들 사이를 초광속으로 묶어주고 있는, 또는 정보를 전달하는 어떤 작용이 있다. 이 작용은 `기(氣)'이며, 기는 입자의 식(識)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기 자체의 인과율적 본질에 의해서 초광속 정보 전달을 금지하는 기존 물리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상대성 이론이 초광속 정보 전달을 금지하는 것은 그것이 인과율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소립자의 기는 소립자의 식, 즉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의지는 인과율을 그 전제와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립자의 기가 인과율의 근원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립자의 기가 소립자의 판단과 의지, 즉 식의 작용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소립자의 기에 의한 초광속 정보 전달은 인과율을 깨뜨리지 않는다.


< 파동함수> : 존재하려는 경향


소립자는 관측되는 그 순간 외에는 확정되어 있지 아니하고 유령 같은 상태로 있다고 말씀 드렸다. 만약 이 말 그대로라면 소립자의 존재는 `제 멋대로' 아니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이다. 이래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아무리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보통 때에 소립자의 위치는 파동함수로서 나타낼 수 있다. 파동함수란 가상적인 파동을 표시하는 식인데, 어떤 위치에서의 이 파동의 진폭을 제곱한 것이 그 위치에 소립자가 존재할 확률이 된다. 즉 우리는 소립자가 어느 위치에 있을 것임을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알 수 있다' 라기 보다는 소립자는 그 위치에 `확률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말처럼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은 소립자는 파동함수로 계산되는 확률밀도에 따라서 확률적으로 `존재하려는 경향'만 가지고 있을 뿐, 지금까지 길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확정된 상태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관측한 바로 그 순간에야 비로소 잠시 확정되는 것이다. 그것도 위치와 운동량 중 어느 하나만.


앞서 <상보성 원리>의 ꡒ이중 틈새 실험ꡓ에서 언급하였던 것으로서, 이중 틈새 뒤에 전자 측정 장치를 설치하면 그 둘 중 하나의 측정 장치에 전자가 관측된다는 사실을 파동함수 측면에서 설명 드리겠다.

설치된 두 개의 전자 측정 장치 중 어느 쪽에 전자가 측정될 것인가 하는 예측은 확률적으로만 가능하다. 만약 전자가 아니라 M-16 소총이라면 충분히 예측이 가능할 것이지만, 전자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은 확률적이므로, 가령 전자총의 방향이 오른 쪽 틈새를 겨냥하였더라도 왼 쪽 측정장치에서 측정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양자역학(파동함수)로써 계산할 수 있는 것은 확률뿐이다. 그리고 확률로 말하자면 전자는 틈새가 아니라 아예 틈새가 있는 차폐 막 전체를 빙 둘러서 형광 스크린에 도달할 확률도 극히 작으나마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전자를 쏜다면 틈새가 없더라도 차폐막을 통과하여 스크린에 도달하는 전자가 나오게 된다.


물리학에서 어떤 식이나 변수는 항상 그에 대응하는 양(물리량)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높이나 길이, 속도, 힘, 에너지 등등. 그런데 파동함수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뿐이다.

파동함수는 `확률'을 표시한다(정확하게는 그 진폭의 제곱이 확률이다). 그러나 `확률'이란 실재적인 대상과는 <관계없는> 관념일 뿐이다. 동전을 던지면 앞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반반이다. 그러나 그 확률은 우리가 생각 속에서 기대하거나 예상하는 것일 뿐, 동전은 확률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던질 때와 바닥에 떨어질 때의 물리적 조건에 따라 앞면이 되기도 하고 뒷면이 되기도 할뿐이다. 예를 들어 동전을 던질 때 계속해서 앞면만 다섯 번 나올 확률은 1/64이다. 그러나 만약 네 번 던져서 계속 앞면이 나왔을 때, 다음 다섯 번째 다시 앞면이 나올 확률은 1/64가 아니라 1/2인 것이다. 이처럼 확률이란 통계적인 개념을 통해서 실제와 관계를 가질 뿐, 확률의 측정대상인 물체와는 무관한 것이다. 소립자의 작은 식이 통계확률 이론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우리가 소립자의 존재에 대하여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파동함수가 소립자의 `실재'가 아닌 `관념', 즉 확률만을 나타낸다는 것은 물리학자와 철학자들을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사실이다.

과학에서 확률이 쓰이는 경우는 정보의 부족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동전을 던질 때 동전에 가해지는 힘의 작용점과 그 세기, 낙하지점의 표면 상태 등에 대한 완전한 정보가 있다면 우리는 동전의 어느 면이 나올 것인가를 어렵지 않게 계산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완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행동이다. 인간의 행동에는 의지라는 요소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작용하기 때문에 그 확률적인 성격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그 원천적인 본질에 기인하는 것이다.

소립자의 확률적인 특성은 정보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소립자가 인과율에 작용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의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 물리학의 숙제 중의 하나이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정보의 부족’이라 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소립자의 상태를 표시하는 파동방정식은 그 수식 자체로서는 완전하다. 소립자의 초기 상태가 주어지면 파동방정식을 세울 수 있으며, 세워진 식은 시간의 변화에 대한 소립자의 상태의 변화를 결정론적으로 확실하게 나타낼 수 있다. 다만 그 식이 나타내는 것, 즉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정보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확률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확률적인 성격이 그 소립자의 측정 시에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측정 시점 이전의 파동방정식 상태에 있을 때에는 그 변화가 기계적 결정적이다. 확률적인 것이 어떻게 기계적 결정적인 과정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무척 신기한 일이다. 이것은 소립자 즉 물질의 근본 특성이 불확정적이기 때문인데(불확정성 원리), 그 불확정성은 결국 인간의 의식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의지’ 즉 인과율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 -- 적어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과율과 의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계속 언급하겠다).


소립자가 `존재를 위해서 자유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 `존재하려는 경향만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소립자가 <식과 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게리 쥬카브 Gary Zukav는 ꡒThe Dancing Wuli Master"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ꡒ양자역학은 소립자를 <존재하려는 경향> 혹은 <생기려는 경향>으로 본다. 이러한 경향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은 확률의 견지에서 표현된다. 소립자는 어떤 것의 양을 뜻하는 `양자(量子; quatum)를 말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ꡓ.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한 물리학자 하이젠베르그 Heisenberg는 이렇게 말했다.


ꡒ그것(소립자의 본질적 성향)은 어떤 것으로의 경향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말하는 잠재력(potentia)이라는 옛날 개념을 양(量)으로서 해석한 것이다. 그것은 사건에 대한 이데아와 실제적인 사건사이의 가운데에 있는 이상한 종류의 물리적 실재(physical reality"를 도입했다.ꡓ (physics and philosophy", 1958.)


ꡒ경향ꡓ은 `의지'를, `의지'는 `자유'를 각각 그 본질적 근거로서 필요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립자가 ꡒ경향ꡓ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곧 의지와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며, 이것이 곧 소립자의 식인 것이며, 식은 어떤 형태로든지 외부와 상호 작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 작용수단이 <기>인 것이다.


<관찰자와의 교응>


또한 위에서 말씀드린 소립자에 대한 여러 가지 과학적 사실들은 `소립자의 존재가 관측자의 의식과 교감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소립자를 관측한다는 일은 아무리 보아도 `소립자를 창조하는 일'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소립자를 파동함수에 의한 확률적 상태로부터 어떤 실재(reality)로 이끌어 내는 것은 관측자라는 의미다. 관측자가 소립자의 파동성을 관측하고자 하면 소립자는 파동으로서 관측되고, 입자성을 관측하고자 한다면 입자로서 관측된다. 그리고 소립자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정된 상태(객관적 실체)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 소립자는 관측행위, 즉 관측자와의 교응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확인되어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볼프강 파울리 Wolfgang Pauli의 말을 인용해보자

ꡒ내부의 중심으로부터 영혼은 외향적으로 바깥의 물리적인 세계를 움직이는 것 같다.ꡓ


불랙홀, 화이트홀, 웜홀 등의 이름을 만든 물리학자 John Wheeler는 이렇게 말했다.

ꡒ어떤 현상도 관측된 현상이 되기 전까지는 실재적인 현상이 될 수 없다.ꡓ


Henry Stapp은 미국 Atomic Energy Commission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ꡒ....... 소립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실재물(entity)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외부에 있는 다른 사물에 도달하는 일종의 관계이다.ꡓ


스�의 이 말은 제5편 <정보가 뭐길래?>에서 우리가 정보를 <관계>라 했던 것과, 그리고 존재 그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서 <정보>라 했던 것을 뒷받침 해준다. 그리고 “외부에 있는 다른 사물에 도달하는 일종의 관계”라는 말은 소립자의 식이 발휘하는 기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소립자가 관측자의 의식과 작용한다는 것은 곧 소립자 자신이 관측자의 의식과 교감할 수 있는 `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소립자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들은 소립자가 `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소립자의 식과 기>


물질의 기본 입자인 소립자에게서 <식>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식과 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초 작업이다.  이제 그 마지막 단계로서 소립자의 <내부>를 조사해 보자.  <내부>라 했지만, 양자이론에 의하면 전자 그리고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인 쿼크 등은 크기를 가지지 않으므로 <내부>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내부, 즉 크기가 없다면 자기(自己)에너지가 무한대로 발산해 버리는 문제가 있음을 앞에서 말씀 드렸다. 그렇다고 크기가 있다면 역시 여러 가지 모순적인 문제가 생긴다는 것도. 이것은 물리학에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비국소장 이론 (1947)>, <소영역 이론(1966)> 등이 제안되었다. 중간자의 예언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의 유가와 히데키(湯川 秀樹) 박사가 제안한 이론이다. 이 이론의 요지는 소립자가 4차원을 넘어서 5차원 방향으로 크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영역 이론은 시공간 자체가 기본적 최소 크기의 단위로 양자화(量子化) 되어 있으며, 역시 5차원 쪽으로 미소한 크기(ꡐ퍼짐ꡑ, 또는 ꡐ시공간의 흔들림ꡑ)를 가진다. 쉽게 말하자면 4차원 시공간에 있어서는 소립자가 크기를 가질 수도 없고 가지지 않을 수도 없다는 모순이 있으므로 그 크기를 5차원에 속한 것이라 하면 해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소립자의 자기 에너지 발산 문제뿐만 아니라, 질량, 스핀 등의 성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내부자유도까지 해결(확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소립자에 크기를 부여하는 것을 ꡒ소립자를 확장시킨다ꡓ라고 한다.

자, 이제 우리는 소립자의 내부(비록 미소하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4차원을 넘어선 5차원 시공간이긴 하지만)를 조사해 볼 수 있는 셈이다.

소립자의 확장은 소립자의 내부에 인과율을 깨뜨리는 효과가 수반된다. 역으로 -- 아니, ꡐ바로ꡑ 말하자면 소립자는 5차원 시공간 속에서 크기를 가지고 있어야만 모순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질량 스핀 등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데, 이때 인과율을 깨뜨리는 ꡐ능력ꡑ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소립자 내부에서 인과율의 파탄 과정(이유)은 이렇다.

                                               

<그림 1>                             


                      A      ---->    B   


<그림 2>




시공간 내에서의 물체의 직선 이동은 그림 (1)과 같이 각 부분들이 중심점과 동일한 거리와 방향만큼 이동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라면 소립자가 4차원 시공간 내에서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경우와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즉 자기 에너지의 발산 등의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립자는 그림 (2)와 같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내부의 각 점은 반드시 그 중심점에 대하여 원래와는 다른 위치로 이동해야만 한다. 이 움직임은 시간과 공간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소립자의 내부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순서>가 흐트러지는 결과가 되고, 시간과 공간의 <순서>의 흐트러짐은 곧 인과율이 깨어진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소립자는 그 내부적으로 인과율을 <창조>하는 능력(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과율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의지>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인과율은 원인이 정해져 있는 순서와 절차를 기계적으로 밟아서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법칙이다. 이 순서, 절차를 알고리듬(algorithm)이라 하는데, 예를 들어 컴퓨터 프로그램은 이 알고리듬의 집합이다. 컴퓨터와 인간 의식의 차이는 알고리듬을 기계적으로 따르는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자유롭다면, 즉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의식은 알고리듬을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수차 검토되겠지만, 영국의 수학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 Roger Penrose는 ꡒ인간의 의식은 알고리듬을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는다(ꡒ황제의 새 마음 Emperorꡑs New Mindꡓ) 라고 단정한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에는 어떤 내부자유도, 즉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소립자가 그 내부적으로 알고리듬을 따르지 아니하며, 인과율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은 소립자가 ꡐ기계적ꡑ이 아니라는 것을, 즉 일종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실은 인과율이 파탄되는 위와 같은 과정을 <우연>이라는 요소를 도입하여 설명할 수도 있다. 대다수 물리학자들의 견해다. 그러나 ‘우연’은 ‘필연’의 반대, 즉 어떤 법칙, 절차, 알고리듬에 따르지 않고 난수적으로(random) 진행되는 사건(현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계적 결정론에 의하면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원인 없는 결과’라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식>이라는 의지의 근원을 부정하는 기계론적 입장은 그 스스로 모순을 가지고 있게 된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자끄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란 책에서는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우연’이라는 비논리적인 것에 의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는 과학자의 고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소영역 이론은 인과율의 파탄뿐만이 아니라, 시간의 비가역성과도 관계가 있다. <그림 2>에서 처럼 소립자 내부의 시공간의 비인과적 변이(變移)는 난수적이므로 비가역적이다. A에서 B로 변이한 후의 상태 B는 상태 A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소립자가 자신의 내부의 모든 부분의 변화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물론 이 시간 비가역성은 소립자 내부에 국한되는 것이지만, 소립자가 다른 것과 관계할 때에 비가역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더 상세한 것은 제 11편 <엔트로피와 정보, 그리고 식>에서 “파동함수의 붕괴(collapse, 수축)”을 설명할 때에 말씀드리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양자역학이 밝혀 낸 범위 내에서 소립자의 주요 성질들을 살펴보았다. 글이 너무 장황하였으므로 요점을 정리해 보자.


-. 소립자는 그 단독으로 있는, 즉 관측되기 전에는 확정된 상태가 아니다. 이 상태에서 소립자는 입자도 파동도 아니며, 전하, 스핀 등의 기본물리량도 미정인 것이다. 소립자가 관측에 의해서 확정될 때에는 <정보>를 필요로 한다. 이 <정보>가 전하, 스핀 등 소립자가 하나의 ‘소립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다. 소립자는 항상 짝을 이루어 생성-확정-소멸하므로, 함께 생성된 두 개의 소립자 중 관측되는 하나는 관측자의 ‘의지’와 상호 작용하여 정보가 확정되며, 다른 하나는 관측된 소립자의 정보를 관측 순간에 즉시(초광속은 거리에 관계없이 순간적이다) 전달받아서 확정된다.


-. 소립자가 관측에 의해서 확정되는 과정, 즉 파동함수의 수축(state vector reduction)은 확률적이다. 관측자의 입장에서 ‘확률적’이라는 것은 곧 소립자의 입장에서 ‘임의적’이라는 것과 동일하다. 소립자의 주체성, 즉 ‘의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소립자의 기본적 성질--질량, 전하, 스핀 등의 기본 물리량은 소립자의 <정보>이다.  파동-입자 상보성, `하나의 통합체'적 성질, 불확정성 원리가 말해주는 소립자의 자유 의지 등은 소립자의 <정보>가 수동적인 ‘상태’로서의 <정보>가 아니라 ‘정보 처리 능력’을 포함한 능동적인 기능임을 보여준다. ‘임의성’, ‘확률’ 등은 소립자의 ‘의지’, 즉 <기>이며, 소립자의 ‘식’은 이 모든 성질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 입자의 `물질성'은 파동-입자의 상보성으로 이루어지며, 입자 전체는 물질-식(정보)의 상보성으로 이루어진다.(Bell의 정리 및 그 실험결과에 대한 페이겔스 등의 해석으로부터).


-. 소립자의 상호작용(힘)은 소립자의 `물질성'이 발휘하는 물리적인 힘이다. 소립자의 기는 물리적인 양으로서 측정이 불가능한 `식의 전달', 다른 말로 `정보의 전달 현상'으로서 나타난다. 관측자와의 교응, EPR paradox에서 두 입자의 초광속 정보전달 등이 그 보기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소립자는 단순히 `작은 알갱이'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의 다양한 물리량과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존재를 위하여 자유를 필요로 하는 기기묘묘하고 신비로운 `존재의 근본'인 것이다. 서론에서 나는 ꡒ의지는 외부의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려 하는 성향ꡓ이라고 정의하였다. 소립자는 외부의 자극 -- 상호작용, 관측--에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간의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생각이나 행동--을 다만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꼭 같이 소립자의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 역시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소립자가 그 존재의 일부를 관측에 의해서 드러내더라도 그 시점에서 결정되는 소립자의 존재는 소립자의 `꼴리는 대로'이지, 관측자든 누구든 그것을 간섭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또한 소립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소립자의 성질과 작용은 시간 대칭적이고 가역적이다. 이중 틈새 실험에서 보았듯이 소립자는 틈새가 한 개인지 두 개인지를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다. 소립자는 심지어 관측자와 교감하여 필요에 따라서는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과거를 변경하기도 한다.

또한 비국소장 이론, 소영역 이론은 소립자가 그 내부적으로 인과율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모든 과학적 사실들을 고려할 때, 소립자에게도 자유의지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비록 그것이 소립자의 크기만큼 미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소립자가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식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인 기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물리학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는 소립자의 여러 가지 성질들 -- 질량, 전하, 스핀 등등 -- 역시 소립자가 가진 ꡐ식ꡑ의 일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역으로 <식>이 질량, 전하 등과 함께 소립자의 성질의 일부라 정의해도 좋다.

우리 인간의 의식과 소립자의 식 사이에 그 양적인 차이 외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소립자의 식을 무시하는 것은 마치 다른 인종을 열등한 영혼이라고 차별함으로서 결국 자신들의 영혼을 더 열등한 것으로 만들었던 인종차별 주의자들의 어리석음과 같을 것이다.

소립자의 식을 인정한다는 것이 소립자 물리학이나 양자역학 이론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립자의 성질을 <식>이라 부른다고 해서 물리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왜 굳이 소립자의 식을 인정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가?

`성질'은 수동적인 것이요 `식'은 능동적인 것이다. 소립자의 성질에서 의지를 엿 볼 수 있으므로 소립자는 이미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작은 알갱이'가 아니라, 능동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존재의 기본단위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의 요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수동'과 `능동'의 차이에 의한 효과가 미시세계인 소립자의 수준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거시적인-- 세계에서 얼마나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10. 카오스 이론


카오스 chaos 이론은 초끈 이론과 함께 과학 이론들 중에서 최신의 이론이다. <카오스>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인데, 태초의 <혼돈상태>를 의미한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전혀 질서가 없는 상태가 <카오스>인 것이다.

이 이론의 발단은 1960년대에 로렌스라는 기상학자가 기상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던 중, 어느 날 `귀찮아서' 변수(예를 들어서 바닷물 표면의 온도) 하나를 소수점 아래 다섯 자리에서 잘라버렸더니 그 결과가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계산되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면서 부터이다. 여러 가지 변수(현상)들이 유기적으로 상호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계(복잡계, 카오스 계)에서는 이처럼 초기조건의 극히 미소한 차이가 그 최종 결과에 가서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물리학을 `가장 거만한 학문'이라는 농담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이 `우주의 모든 것'을 그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는 물리학의 이론으로서 이해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심리학은 분자생물학으로, 분자생물학은 화학으로, 화학은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작용, 변화는 물리학의 네 개의 힘(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니 이 4 개의 힘만 적용하면 되는 것이다. 현재 물리학자들이 추구 중인 힘의 통일 이론의 이름을 `모든 것의 이론 theory of everything'이라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실 물리학의 연구대상은 '우주의 모든 것`이다. <기>나 귀신 등의 초자연적 현상도 만약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확인될 수 있다면 물리학의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동안 물리학에서 연구 대상으로부터 제외되어 왔던 분야가 많다. 난류(유체가 어지럽게 흐르는 것), 기상현상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현상들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기초적인 이론에 경험식이나 실험결과로 얻어진 계수를 사용하여 근사적으로 계산할 뿐이다. 만약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의 흐름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하려면 슈퍼 컴퓨터를 몇 시간 동안 가동시켜도 불과 수 초 동안의 흐름밖에 추적할 수 없다. 물의 흐름은 이론적으로는 압력과 중력, 유체 내부 및 관벽(管壁)과의 마찰만으로 결정되지만 그 실제의 현상은 이처럼 복잡한 것이다. 물론 그 입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이론은 완전히 밝혀져 있다. 그래서 이런 분야는 새로 밝혀낼 수 있는 이론이 없으므로 물리학이 아니라 공학의 분야에 속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엔트로피와 정보, 그리고 식> 편에서 설명드릴 열역학 계도 카오스 계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접하는 현상들은 거의 모두가 카오스 현상이다. 시냇물의 흐름, 바람,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물, 주가지수의 오르내림, 그리고 변덕스러운 연인의 마음.......

이런 복잡한 계의 전체적인 현상들을 해석할 수 있는(현재로서는 해석하려는) 이론이 카오스 이론이다. “카오스chaos”와 “복잡 계complexity”는 같은 말이다. 더 `멋지다'는 이유로 카오스라는 단어가 더 널리 알려지고 사용되고 있지만, 요즘은 아예 두 단어의 합성어인 ꡒ카오플렉시티 chaoplexityꡓ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카오스'라는 말이 인기를 얻어 대중화된 큰 동기가 New York Times 지의 기자 James Gleick가 1987년에 ꡒChaos; making a new science"라는 책을 써서 히트친 일이었다. 그런데 400 페이지(한글판)에 달하는 이 책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도무지 카오스가 어떤 것인지 이해가 어렵다. `기 과학' 류의 책들과 꼭 같다. 둘 다 그 원인에 대한 이론이 완전히 밝혀져 있지 아니한 현상에 대하여 책을 썼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오스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 자신도 카오스 현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초끈 이론처럼 현재 연구가 진행 중에 있는 이론이다.)

카오스 이론을 설명한 글에는 반드시 ꡐ선형(線形)ꡑ방정식, ꡐ비선형(非線形)방정식ꡑ이란 말이 나온다. ꡐ선형ꡑ이란 기본적으로 원인과 결과가 비례하는 관계를 말한다.  예를 들면 y=ax 의 관계다.  좀 더 나아가서 y1=f(x1) 이고 y2=f(x2) 일 때, y1+y2=f(x1)+f(x2) 가 되는 관계, 즉 복합적인 결과(함수값)가 그 각각의 원인(변수)에 대한 결과의 합이 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복잡한 현상들을 원인에 따라 쉽게 나눌 수도 있고, 역으로 원인 별로 그 결과를 계산해서 합하면 전체의 결과가 얻어지는 단순한 계를 말한다.

이에 비해서 비선형계는 좀더 복잡하다. 원인들끼리 서로 작용하여 결과를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일정하게 비례하지 않고 이중(제곱) 삼중(세제곱)으로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관계이다. 비선형방정식은 일반적인 방정식의 풀이 방법으로 해(解)가 구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ꡐ복잡계ꡑ인 것이다.


카오스이론의 출현이 늦었던 것은 컴퓨터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복잡계'라는 말 그대로 카오스 계는 그 풀이가 쉽게 구해지지 않는 비선형방정식으로 표시되는 데,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진 지금에는 컴퓨터를 사용한 축차계산법으로 풀이를 구하거나 그래픽 시뮬레이션으로 카오스 계의 연구가 가능해진 것이다. 카오스 계의 한 특징인 <주기성>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 <주기성>에 대하여 유명한 말이 있다. ꡒ영국 해안선의 총 길이는 얼마인가?ꡓ라는 질문이다. 관련 지리학 책에 나와 있는 해안선의 길이는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길이'일 뿐, 정확한 길이는 절대로 구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바닷물과 모래사장, 또는 해변의 바위가 닿는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한없이 꼬불꼬불하니까 그것을 어떻게 잴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해안선의 모양이다. 실제로 바닷가에서 눈으로 보는 해안선의 형태와, 지도(상세한)에 그려져 있는 형태, 그리고 공중에서 항공 촬영한 형태가 서로 매우 닮았다는 점이다. 즉 미세한 부분에서의 형태가 거대 규모에서 주기적으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치계산에 의한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만델브로트 집합을 그래픽으로 나타내면 대입하는 수치에 따라서 한없이 다양한 형태의 주기적인 모양들을 볼 수 있다. 한 부분을 확대하면 다시 원래 모양과 유사한(self-similar) 형태가 거듭 나타난다. 이 주기성을 만델브로트는 ꡒ프랙탈 fractal"이라 이름하였다. `조각, 부분'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신조어(新造語)인데, 전체와 부분은 유사한 형태를 반복적으로 나타낸다는 뜻이다. 카오스 계는 그저 복잡하고 질서 없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 속에 정연한 일종의 질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카오스 이론에서 나온 유명한 말 중에 ꡒ나비 효과 butterfly effect"라는 것이 있다. 카오스 계가 초기조건에 지극히 민감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인데, “북경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나르면 그것이 며칠 뒤 워싱턴에 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의미다(ꡐ북경의 나비ꡑ라는 말은 아마도 징기스칸의 유럽 침공 때 생긴 서구인들의 황인공포증을 나타낸 말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북경’ 대신 ‘아마존’의 나비라 한다). 비록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이 말이 틀린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구가 ‘폭풍의 행성’은 아니다. 어떤 카오스 계는 일방적인 발산을 막고 어떤 특정한 점으로 수렴하려는 특성이 있다. 즉 스스로 안정되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기상이 지구 전체적인 규모와 장기간의 시일에 걸쳐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그래서 이다.

이러한 내재적인 질서의 발현은 비평형 상태에 있는, 즉 내부의 움직임이 활발한 상태에 있는 복잡 계의 부분적 요동에 의해서 질서가 자기조직화 하여 나타난다는 프리고진의 연구 결과와 그 기본 원리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ꡐ질서ꡑ만 있다면 그 이름이 혼돈을 의미하는 ꡐ카오스ꡑ일 수가 없다. 뭐라 해도 카오스 계의 본질은 <예측 불능성>에 있다. ꡐ북경의 나비 한 마리ꡑ가 불러 일으키는 워싱턴의 폭풍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초기조건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원인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그 결과에 가서는 엄청난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자연계의 실제 현상은 거의 대부분이 카오스적이다.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카오스 이론의 초기 조건 민감성에 따른 예측 불능성을 기계론적 결정론의 돌파구로 삼고자 한다. 이러한 생각에는 상당한 타당성과 가능성이 있다. ꡒ예측 불능ꡓ은 분명히 ꡒ미결정ꡓ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 보자. ꡒ결정되어 있으나 우리가 그것을 예측할 수 없는 것ꡓ인가, 아니면 ꡒ결정되어 있지 아니하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예측할 수도 없는 것ꡓ인가? 카오스 이론은 일단 초기조건이 주어지면(결정되면) 그 이후의 전개는 ꡐ기계적ꡑ이다. 따라서 ‘결정되어 있으나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음ꡑ이다. 카오스 이론으로 기계적 결정론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초기조건을 양자역학적 효과가 나타나는 소립자에까지 확장 적용한다면 ꡐ비결정적ꡑ이다. 그러나 그 ꡐ비결정ꡑ은 양자(量子) 그 자체의 확률적 양태 때문이지 카오스 이론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카오스 계의 다른 특성으로 <자기조직화> 현상이 있다.

<자기조직화>는 평형 상태로부터 먼, 즉 복잡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는 계가 고도로 조직적인 복잡성의 상태로 갑자기 도약하는 현상을 말한다. 카오스 계 내에서의 무작위적 행동(움직임)과 질서의 자발적 출현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혼돈 속에 질서'가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혼돈의 가장자리(the edge of chaos), 즉 비평형 상태에 있는 계들은 완전히 불안정한 상태가 아니면서도 변화에 대단히 민감하다. 예측불가능성과, 창조적이고 일관된 조직화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자기조직화의 중요한 성질은 계들이 놀라운 효율성을 가진 조직화된 복잡성을 갑자기 그리고 자연발생적으로 창출(創出)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뇌는 수백 억 개의 수천 종류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50가지가 넘는 각종의 신경전달 물질들의 전기-화학적 작용에 의해서 가동되는 카오스 계의 좋은 예이다. 이처럼 복잡한 계에서 어떻게 <의식>이라는 `순수한 질서'가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가능한 것이 바로 카오스 계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카오스 계 내에서부터 자기조직화에 의해서 저절로 질서가 발생한다는 현상을 <자기조직화에 의한 창발>이라 한다. 이 <자기조직화>는 생명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의식의 형성(또는 기전)을 설명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ꡐ창발 創發 emergentꡑ이론은 1923 년 C. L. Morgan 이 ꡒEmergent Evolutionꡓ이라는 책에서 제안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그 후 벨기에 대학의 프리고진 연구팀의 비평형 열역학 계의 연구와 그리고 카오스 이론의 등장으로 많은 전체(통합)주의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인데,  그 요지는 기본 구성 요소들의 성질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어떤 특성이 ꡐ전체ꡑ에서 ꡐ새롭게, 저절로ꡑ 생겨난다는 것이다. ꡐ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ꡓ라는 명제가 여기서 생긴 것이다. ꡐemergentꡑ는 ꡐ창발ꡑ, ꡐ발현 發現ꡑ, ꡐ돌현 突現ꡑ 등으로 번역된다).


일리야 프리고진은 그의 유명한 저서 ꡒ혼돈 속의 질서 Order Out of Chaos"에서 이러한 현상이 생명의 탄생과 진화뿐 아니라 정치 경제 등 사회적 현상까지 설명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주장’이라 표현하기에는 좀 그렇다. 그는 이 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열역학 제 2 법칙, 즉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닫힌 계>의 질서를 흐트러지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만, <열린 계>에 있어서는 질서의 창출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때 그 “계”는 외부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즉 외부의 질서를 흐트러지게 함으로서 자신의 질서를 구축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계의 구조적 특성을 그는 <소산(또는 산일)구조 dissipative structure>라고 표현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비가역성”이 그 근원이다. “비가역성”은 “무작위성”을 낳고, “무작위성”은 “불안정성”을 초래하며, 이 “불안정성”이 “자기조직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비가역성”은 (계의)단위입자들의 동역학적 고찰로서는 유도할 수 없다. 쉽게 말해서 “비가역성”은 물리학의 기본 단위인 소립자와 또한 물리학의 기본 법칙인 운동의 법칙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성질인 것이다. 그래서 “비가역성”은 -- 그리고 열역학 제 2 법칙은 제 1 차적(기본적) 법칙이 아니라 제 2 차적 법칙이다. “비가역성”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시간 비대칭성”이다. 물리학의 모든 기초법칙들과 상호작용은 기본적으로 “시간 대칭적”이다. “시간”이란 것은 인간이 인과율에 의해서 인식할 수 있는 “개념” 또는 “현상”이지 소립자나 시공간의 기본적 성질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당구공을 친 다음 얼 마 후에 시간을 역전시키면 -- 공의 진행방향을 반대로 돌리면 처음 친 공은 원래 있던 자리에 돌아 올 것이다. “가역적”이다. 그러나 복잡 계에 있어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깨어진 그릇은 다시 붙일 수 없으며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가 없다. 이것은 분명히 “비가역적”이다. 물체의 움직임을 다루는 동역학의 이론 어디에도 “비가역성”은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현상들은 “비가역적”이다. 이러한 “비가역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복잡 계> 그 자체의 성질이라고 프리고진은 주장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엔트로피가 현격하게 증가하는 불안정한 동적 체계에서 나타나는 무작위성(randomness)이 비가역성을, 비가역성은 “소산구조 dissipative structures”를, “소산구조”는 고도화된 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이다.


ꡒ무작위성ꡓ이란 `아무 법칙도 내재되어 있지 않으며, 외부에서 적용할 수도 없다'는 의미다. 무작위성은 무작위수 random numbers를 통해서 그 `특성(아무런 특성이 없다는 특성)'을 잘 알아볼 수 있다. 요즘은 "무작위수(난수)" 발생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는 PC가 널리 보급됨으로 해서 없어졌지만, 전에는 통계학이나 품질관리 관련 서적의 부록으로 난수표가 반드시 실려 있었다. 무작위수는 아무런 법칙이 없는 숫자의 나열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어떤 수열이 무작위수임을 증명할 방법도 없다. 증명의 수단이 법칙인데 아무런 법칙이 없는 것을 `무슨' 법칙으로 다룰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무작위수의 실용적 정의는 ꡒ무작위수가 아님이 판명되지 아니한 수열ꡓ이다.(주;‘모순’, ‘우연’, ‘무작위수’ 이런 것들은 실제로는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무작위성이 어떻게 비가역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동력학(뉴턴의 운동법칙뿐 아니라 양자역학까지 포함한)의 이론대로라면 불가능하다. 모든 물리(역학) 법칙들 뿐 아니라 무작위성도 그 본질상 분명히 시간 대칭적인데 어떻게 시간 비대칭(비가역)성을 만들어 내는 일이 가능한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그 이론적 가능성을 “엔트로피와 확률 사이의 연계성”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엔트로피도 확률도 모두 어떤 실재적인 물리량이 아닌 개념적인 성질이다. 그 본질적 바탕은 '개념`이라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마치 양자이론이 양자의 실체를 베일로 가려 놓고는 <접근 금지 ; 양자(quanta)의 영역임>이라 선포한 일과 같다.

나는 <소립자의 식과 기>를 도입하면 식과 기로부터 비가역성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며, 양자역학의 ꡒ코펜하겐 해석ꡓ이 떨쳐버리지 못하는 <접근금지>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립자의 '의지`가 비가역성의 모태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열역학 제2법칙> 편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다.


생물의 진화는 시간의 비대칭성을 보여주는 비가역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진화는 물질의 본질적 성질에 의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물리법칙으로 -- 환원주의적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고, 비가역성을 다룰 수 있는 열역학 제2법칙으로서만 설명할 수 있다고 프리고진은 주장한다. 그는 물질의 기본적 성질과 물리법칙들을 “있음 being"으로, 물질`들'과 법칙`들'이 복잡계에서 자기조직화하는 현상을 “됨 becoming"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됨 becoming"은 물질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2차적'인 법칙이며 그것이 바로 카오스 계의 자기조직화 현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자기조직화 현상은 소립자 또는 기본 단위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존의 물리법칙이 아닌 `고차원적'이며 `현상적 법칙'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허구적' 법칙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생명의 탄생, 진화뿐 아니라 의식까지도 물리법칙으로 분석할 수 있고 파악, 설명이 가능하다는 환원주의적 기계론은 프리고진의 이론에 의해서 부정된다. 그리고 <전체 계>를 `통합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전체주의> 또는 <통합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ꡒ신이 생물을 창조할 때에 카오스 이론을 사용하셨다ꡓ라는 말처럼, 생물의 구조는 카오스 이론이 적용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혈관의 분포는 사람마다 다르다. 만약에 자신의 유전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더라도 그 혈관의 배치상태는 서로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혈관의 배치는 DNA에 의해서 그 위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DNA의 유전정보가 실행에 옮겨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카오스적 특성'에 의해서 카오스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DNA에 불필요한 정보의 부담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카오스적으로 배치 형성됨으로 인해서 혈관이 가장 효율적으로 배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혈관 특히 모세혈관은 모든 세포와 접할 수 있도록 배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서투른 배관공(DNA의 배관설계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이 설계 시공한다면 우리 몸은 혈관으로 가득 차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혈관은 우리 몸의 약 5% 정도일 뿐이다. `복잡성'은 이처럼 경우에 따라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카오스 계 - 자연의 모든 복잡한 현상 속에는 엄연한 질서와 효율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질서와 효율성은 생명이나 진화, 의식 등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수준의 작품을 `저절로' 만들어 내기까지 하는 것이다. 카오스 이론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러한 `카오스 현상', 그리고 그 특성과 결과는 알지만, 그 원인은 알지 못한다. 왜, 어떻게 그런 결과가 가능한 것인지는 카오스 이론에 나오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되 먹임 작용 feedback>이다. 되 먹임은 결과가 원인에 영향을 미치는 process를 말한다. 계 내에 되 먹임 작용을 가지고 있는 비교적 단순한 계를 - 화학반응, 효소의 촉매작용, 생물집단의 개체 번식 숫자 등 -- 대상으로 한 수치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그러한 현상을 엿볼 수 있는 수준을 아직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카오스 이론이 `금주의 인기 가요' 톱 텐에 오르고, 수많은 과학자와 수학자들이 달려들었지만, 초기 이후 지금까지 별 다른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먹이 감은 없는데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들만 우글거리고 있다”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카오스 이론의 수학적 기틀을 세운 만델브로트도 그의 저서 <자연의 프랙탈 기하학 The Fractal Geometry of Nature"에서 ꡓ자기유사성 self-similarity에 대한 연구가 자연의 얼개를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지만, 자기유사성의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은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ꡒ고 인정한다. '자기유사성`은 만델브로트의 업적인 프랙탈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이 환원주의의 한계성을 노출시켰으며, 우리에게 자연을 보는 새로운 안목을 틔워준 공로가 있음은 사실이다.

이 이론의 요지는 카오스 계에는 환원주의적 방법으로 다룰 수 없는, 보다 더 복잡하고 조직적인 `현상'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복잡한 혼돈상태에서(안정된 평형상태에서는 이러한 성질,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질서(정보)가 저절로 생겨날(창발될)  수가 있다는 발견은 매우 놀랍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현상'은 구성단위의 성질이나 움직임의 분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전체적인 규모에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것은 종전까지 전혀 있으리라 예상하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책 ꡒ혼돈 속의 질서ꡓ가 그처럼 유명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점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관찰된 결과가 그러해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카오스 이론이 나오기 이전까지 모든 과학자들이 무심히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자기조직화>등의 ꡒ2차적 법칙ꡓ이 없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오히려 없는 편이 훨씬 더 당연해 보이는 것이다. 불과 수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었지 않은가? 이러한 점에서 <전체주의>는 <환원주의>의 기계론적 입장에서 볼 때에 아직은 일종의 <신비주의>이다. 근래의 <신과학 운동>이 환원주의자들로부터 공격당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의사(疑似)과학까지 “신과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더욱 그러하지만).

카오스 계의 이러한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명의 탄생과 기>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지만 역시 <식과 기>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오스 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입자들의 <식>이 <기>로서 발휘되어 <자기조직화>라는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 내는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다.

카오스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자기조직화 특성이 자연계의 근본적 물리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과, 보다 상위의 어떤 2차적 법칙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생기론> 등의 신비주의적 색채를 지닌 `무엇'을 가정하려는 생각에는 일제히 반대한다. `신비적'이라는 단어는 과학계에서 가장 기피되고 멸시받는 말이다. 내가 앞에서 ꡒ과학의 역사는 신과의 투쟁 역사이다ꡓ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시라. 학자들은 카오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다. `신비적 특성'이란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탐구의 목표는 자연에서 <비가역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비가역성>은 물질의 근본적 성질인가 아니면 카오스 계의 통합(전체)적인 성질인가? 여기에 카오스 이론의 문제가 집약되어 있다. 더 상세한 것은 다음 <엔트로피와 정보, 그리고 식> 편에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여기서는 물질 입자들이 모여서 생명과 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로서 카오스 이론의 자기조직화 현상(효과)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단순하다.


[소립자의 식은 원자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의 미소한 식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92종의 원자는 92 가지의 다양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원자의 식은 소립자의 식에 비해서 이미 현저한 수준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원자가 구성하는 분자는 그 종류와 기능의 다양함에 있어서 글로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인체를 구성하고 모든 생체작용을 수행하는 약 백만 종의 체내 단백질분자를 보라. 이처럼 작은 식이 모여서 상위의 식을 만들 때에, 카오스 계의 자기조직화 효과에 의해서 그 식의 수준은 조직의 복잡도(複雜度)에 지수적으로 비례 상승할 것이다. 인체는 약 10의 24제곱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단백질 분자가 모여서 이룩한 것이다. 그 복잡도를, 그리고 그에 의한 자기조직화 효과를 상상해 보라. 그리하면 인간 의식의 수준이 어째서 소립자나 단백질 분자의 식보다 그처럼 더 높은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1. 엔트로피와 정보, 그리고 식



ꡒ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도가 실린 주사위이다. 그리고 이제 물리학의 주목적은 주사위가 어떤 규칙들에 의해서 의도가 실려 있는가 하는 문제와, 우리 자신을 위해 그 법칙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일이다.ꡓ(조셉 포드, James Gleick의 ꡒChaos, making a new scienceꡓ에서 인용)


이제 카오스 계와 같이 많은 입자들로 이루어진 계를 통계역학으로 다루는 분야인 열역학을 통하여 그 `주사위'에 담겨 있는 <의도>란 바로 입자들의 <식>이요 <기>라는 나의 생각을 좀 더 상세하게 검토해 보겠다.

서두의 <식과 기의 정의>에서 <식>은 `의지'이며 <기>는 `의지의 발현'이라 했다. 그리고 <소립자의 식과 기>에서 소립자의 모든 기본적 성질들이 바로 소립자의 <식>이며, 기존의 물리법칙에서는 소립자의 <식>을 수동적인 의미의 `성질'로만 인정하기 때문에 소립자의 <기>를 간과했다고 말씀 드렸다. 소립자의 양태에서 <기>를 배제하고서 `성질'만으로도 양자역학, 동력학 등 기본적 물리법칙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의 근본입자인 소립자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과, <식과 기>의 효과가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카오스 계에 대해서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기존의)물리학에 의하면 소립자의 본질이 아닌 ꡒ비가역성(非可逆性)ꡓ이 어떻게 계--소립자들의 혼란한 집합 --에서 생길 수가 있는가? 그리고 그 ꡒ비가역성ꡓ이 어떻게 생명을 ꡒ자기조직ꡓ할 수 있는가? 볼츠만을 괴롭힌 끝에 자살로까지 몰고 간(프리고진에 의하면)  ꡒ비가역성ꡓ의 문제는 ꡒ확률ꡓ이라는 비실재적인 개념보다 소립자의 <식과 기>라는 실재를 근거로 할 때 확실한 설명이 가능하다. ꡒ자기조직화ꡓ라는 `창조적'이며 `목적적'인 현상을 <식과 기>를 배제하고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프리고진의 글을 인용해보자:


ꡒ우리는 비가역 과정의 미시적 이론이 지니는 몇 가지 어려움을 기술하였다. 그것이 고전적이든, 양자론적이든 동력학과의 관계는 간단할 수 없으며, 그와 같은 측면에서 비가역성과 이에 대응하는 엔트로피 증가는 동력학의 보편적 결과가 될 수 없다. 비가역 과정의 미시적 이론에는 보다 부가적인 특정한 조건이 요구될 것이다. 우리는 가역 및 비가역 과정이 공존하는 임의의 다원론적 세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물론 그와 같은 다원론적 세계는 받아들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ꡓ(ꡒ혼돈 속의 질서 Order out of Chaos")


물론 프리고진이 물질의 <식과 기>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동력학이 대표하는 기존의 물리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인 비가역성이 거시적 계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이 현상의 설명을 위해서 미시적 이론(소립자)이 보완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무엇인가 새로운 조건'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ꡒ오늘날 가장 활발한 연구주제 중의 하나는 비가역성을 물질의 구조 속에 “새겨 넣을”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이다”


이 말 역시 <식과 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끌어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ꡒ비가역성을 물질의 구조 속에 새겨 넣을 수 있는 방법ꡓ이 무엇인가? 바로 <식과 기>를 인정하는 일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공간은 분명히 물리학의 연구 대상이다. 그러나 시간은 물리학의 연구 대상이라 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하면 시간은 도대체 정말 ‘있기’나 한 것인지조차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간은 두 사건들 사이의 변화의 정도로서만 측정되고 또한 그것에서 추론 연역된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마치 <화폐>처럼 가상적인 량으로 보이는 것이다. 금본위(金本位) 제도하에서 발행되지 않은 현대의 화폐는 그 가치를 ‘상호 인정’함으로서 통용될 수 있는 것이지, 화폐 그 자체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흐르고 있는 강물 같은 시간’ -- 이런 것은 시인의 머리 속에 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시간을 최초로 물리량으로서 다룬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과거, 현재, 미래‘ 이런 시간적 구분도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미 과거인 사건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미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간은 공간처럼 길게 펼쳐져 있는 사건들의 무대이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고 있는 현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미래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미래의 정보를 얻을 수 없으므로 ’미래‘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과 미래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이 사실은 결정론의 근거가 되고 있기도 한다). 모든 자연 현상은 시간에 대해서 대칭적이다. 이 사실의 의미는 시간이 지금처럼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든, 그 역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흐르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물리 이론적으로 그러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는 <시간 대칭성>이라 한다. 이처럼 시간의 근거는 자연 현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한다‘라는 현상으로부터 우리는 모든 사물의 변화의 배경에(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모든 현상에 적용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린다) <시간>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이 있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소위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이라 부르는 것이다.

“비가역성”은 시간 비대칭 즉 “시간 대칭성의 파괴” 라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다. 이 “시간 비대칭”은 어디에서 유래되는 것일까?

“시간 비대칭”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바로 <의지>다. <의지>란 <인과율>에 있어서 원하는 바대로의 <결과>를 창조하기 위해서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조정하려는 `꼴림'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어떤 ꡐ의지ꡑ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과정은 순전히 기계적, 즉 물리 법칙적이다. 그런데 기계적, 물리적인 모든 법칙은 <가역적(可逆的)>인 것이다. 즉, 원인에 의해서 결과를 확실하게 예측(결정)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역으로 결과에 의해서 그 원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 어디에서도 우리는 비가역성을 찾아 낼 수 없다. 고전적인 결정론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비가역성이 실현 가능하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 제3의 작용 요소가 개입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 요소를 카오스 또는 열역학 계의 구성 원소(입자)에서 찾아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양자역학에서 소립자가 기계적이 아닌 확률적 인과율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곧 소립자가 그 제3의 작용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나는 그 제3의 작용 요소를 식이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소립자의 식과 그 식의 성질--의지, 즉 ‘기’를 가지고 있다는--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소립자의 식이 작용, 개입한 확률적인 인과율은 비가역성을 창출하여 “원인의 후에 오는 결과”로서 우주에 시간의 눈금을 새겨 나가는 것이다(열역학적 시간의 화살). “비가역성”은 프리고진과 과학자들이 고심할 필요가 없이 이미 물질의 식과 기 속에 새겨 넣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프리고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주는 글은 그의 책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ꡒ오늘날 물리학에서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기초소립자의 문제이다. 그러나 기초소립자는 기본이기는커녕 훨씬 그 이상이다. 에너지가 점점 높아 갈수록 구조의 새로운 껍질이 벗겨진다. 어쨌든 소립자란 무엇인가? .........소립자 개념은 통상의 개념만으로는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운 어떤 “자율성”을 필요로 한다.ꡓ



“자율성”은 곧 주체성을 그 바탕으로 하는 의식과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프리고진과 그의 연구 팀이 수십 년간 집중해 왔던 연구과제가 <비평형 열역학>이다. 이 분야의 연구에 있어서 그는 개척자요 현재까지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에게 1977년 노벨상을 안겨 준 것도 물론 이 분야의 연구 업적이다. 일반적인 열역학은 평형상태를 주로 다룬다. ‘평형상태’란 보든 구성 입자들이 평형을 이루어서 안정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에 비해서 프리고진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인 <비평형 열역학 계>는 입자들이 활발하게 상호 작용하고 있는 역동적인 계이다. 그러한 계의 일부분에서는 당연히 ‘요동’이 있으며, 이 ‘요동’에 의해서 자기조직화 등의 성질이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이론의 요지이다. 이것은 개별 입자에서는 너무 미소하여 찾아보기 어려웠던 <식과 기>가 많은 입자들이 활발하게 작용할 때에 그 전체적인 효과에 의해서 관찰 가능한 상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프리고진의 연구와 그리고 그것과 이론적 궤를 같이 하는 카오스 이론은 소립자의 식과 기가 만들어 내는 현상에 대한 것이다.


ꡒ혼돈 속의 질서ꡓ를 창출하는(프리고진에 의하면) 열역학 제2법칙을 검토해 보자. 이 법칙의 다른 이름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이것은 어떤 계에서 모든 작용은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의 해석과 적용은 여러 분야에 걸쳐 있지만, 가장 포괄적인 해석은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 또는 `정보가 소실되는 방향'이라고 정의되는 것이다.

이 법칙은 이론 물리학의 원조라고도 일컬어지는 독일의 클라우지우스 R. Clausius가 1865년 ꡒ열은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 쪽으로 흐르지 못한다ꡓ라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원리를 법칙화 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 원리에서 ꡒ에너지의 이용 효율은 100%가 될 수 없다ꡓ라는 결과가 유도된다. 즉 자연의 모든 과정에 있어서 언제나 ꡐ이용 가능한 에너지의 손실ꡑ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클라우지우스는 여기에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ꡒ자연계의 엔트로피는 극대를 향하여 증대한다ꡓ라는 ꡒ엔트로피의 법칙ꡓ을 제창하였다.

언뜻 보면 매우 당연한 이론이지만, 이 이론은 당시의 물리학계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 왔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언젠가 이용 가능한 에너지를 모두 잃고서 전체의 온도가 동일해져서 아무 것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ꡐ종말ꡑ을 맞게 된다는 결론이다. 이 생각은 그전까지의 ꡒ우주는 영원히 정상 상태를 유지한다ꡓ라는 믿음을 깨부셔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법칙은 그 이론적 근거를 뒷받침하기가 어렵다. ‘어째서 열은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흐르지 못하는가?ꡑ하는 질문에 이론적으로 대답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열역학 계의 에너지(열) 효율이 100%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동차 엔진의 효율은 기껏 20 수 %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제약 때문이 아닌가? 엔진의 소재를 내열성이 높은 세라믹으로 바꾸고 연소실의 형태를 개량하는 등의 방법으로 열효율은 이론적으로 100%에 이르도록 높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현실은 마찰 등의 작용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약을 가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100%의 효율이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연은 불완전한 것>이 아닌가?--이러한 사고방식이 당시까지는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할 수 있는 모든 현상에 있어서 이 법칙은 성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법칙의 이론화에 ꡐ성공ꡑ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드비히 볼츠만이다. 그는 열운동을 하는 기체 분자들의 운동을 통계역학적인 방법으로 계산하여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확률적>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아마도 과학에ꡐ확률적으로 옳은 이론ꡑ이 등장한 것은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과학자는 확률ꡑ을 좋아하지 않는다.ꡐ옳으면 옳고 틀리면 틀린 것이지, 어떻게 ꡐ확률적ꡑ으로 옳을 수 있는가?ꡑ 말이다. 그리고 이ꡐ확률적 이론ꡑ은 이론적으로 이미 약점이 있다. 당시의 천재 과학자 푸앵까레가 ꡐ긴 시간 범위에 있어서 확률은 의미가 없다ꡑ라는 ꡒ회귀 이론(푸앵까레 싸이클)ꡓ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ꡒ회귀이론ꡓ에 의하면 비록 짧은 시간 내에서는 엔트로피가 확률적으로 증가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면 제로에 가까운 확률적 상태도 발생할 수 있으므로 언젠가는 다시 엔트로피가 감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백 마리의 원숭이에게 키보드를 마음대로 두들기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중 한 놈이 황석영씨의 소설 “장길산”을 우연히 쳐 낼 확률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법칙’을 어찌 ‘법칙’이라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전자기 현상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ꡒ맥스웰 방정식ꡓ으로 유명한 맥스웰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공격하기 위해서 ꡒ맥스웰의 도깨비ꡓ라는 이름의 상상실험을 제안하였다. 이 상상 실험의 내용은 이렇다.

<기체 분자들이 들어 있는 상자에 작은 구멍이 뚫린 간막이를 설치하고, 구멍에는 마찰이 없어서 여닫는 데에 에너지 소모가 없는 문을 장치하여서 ꡐ도깨비ꡑ가 열고 닫을 수 있게 한다. ꡐ도깨비ꡑ는 온도가 높은 분자가 오면 문을 열어 주고 낮은 분자가 오면 닫는다. 그리하면 온도가 높은 분자들만 한 쪽으로 모을 수 있다. 원래의 상자 내부는 기체분자가 고르게 섞여 있는 평형상태, 즉 엔트로피가 극대치인 상태이지만, 나중에는 상자 간막이 양 쪽의 온도가 달라지게 된다. 이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이다. 따라서 ꡐ도깨비ꡑ는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다>

이 상상실험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괴롭혔다. 이론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ꡒ맥스웰의 도깨비ꡓ는 20 ~ 30 년 후에야 질라드, 브리유앵 등에 의해서 간신히 부정될 수 있었다. 맥스웰의 도깨비의 문제는 도깨비가 기체 분자의 온도(속도로 나타난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ꡑ 라고 가정하였다는 데 있다. 즉 ‘정보’를 얻는 일에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는다고 -- 그래서 ‘정보’란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 가정하였던 것이다. 질라드는 도깨비가 기체 분자의 온도라는ꡐ정보ꡑ를 얻기 위해서는 빛을 비춘다든지 하는 등의ꡐ에너지 소모ꡑ를 필요로 한다는 밝혔다(주;이것은 실은 엄밀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소모가 따르지만, 이론적으로는 가역적인 정보처리 능력을 가진 컴퓨터가 가능하다. 앞서 프레드킨의 우주컴퓨터가 바로 이것이며, IBM의 찰스 베네트Charles Bennett, 롤프 랜다우어Rolf Landauer 등이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 사실은 제 17편 <사후식의 세계>에서 살펴보게 될 사후식의 네트워크의 형성 가능성의 바탕이다).

에너지 소모가 있으면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그리고 브리유앵은 도깨비가 기체 분자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증가시키는 엔트로피는 도깨비가 그 정보를 이용하여 감소시킬 수 있는 엔트로피 보다 작지 않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서 ‘맥스웰의 도깨비’를 물리쳤다. 이렇게 하여ꡐ정보ꡑ가 ‘질서’를 통해서 물질세계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엔트로피는 계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들의ꡐ관계의 변화ꡑ를 규정짓는 양이다. 그리고 질서와 정보는 입자들의ꡐ관계의 패턴ꡑ인 것이다.


사실 열역학 제2법칙은 이상한 법칙이다. 이것은 ꡒ비가역성ꡓ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법칙이 왜 성립하는가를 뒷받침 해주는 뚜렷한 이론적 근거는 없다.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 ꡒ비가역성ꡓ 그 자체를 물리학에서는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확률과의 연계로서 설명하지만, 실은 알고 보면 그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술책이다. 천재 푸앙카레가 이미 `확률에는 시간의 방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물질과 상호작용의 기본인 소립자에서 비가역성을 찾지 못한다면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결국 소립자의 식과 기를 인정하지 않으면 카오스 이론도, 열역학 제2법칙도 그 뿌리를 찾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열역학 제2법칙은 그저 모든 관찰된 현상이 그러하다는 것뿐이며, 모든 물리법칙의 기본인 `보존의 법칙'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에너지도, 운동량도, 전하, 스핀 등 모든 물리량은 모두 항상 보존되는데, 어째서 정보만은 항상 감소하기만 하는 것일까? 그 이유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법칙에도 그런 현상은 없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연에서는 잃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는 법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와 현상이 보존적이며 대칭적이라는 것은 물리학에서 하나의 큰 원리이다. 실제로 엔트로피 또는 `유용한 에너지'가 소실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전체적인 ꡒ에너지 보존법칙ꡓ은 여전히 성립한다. (실은 ꡐ유용한 에너지가 감소한다ꡑ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ꡒ에너지의 유용함이 감소한다ꡓ라고 표현해야 정확한 것이다.)

그러함에도 열역학 제 2 법칙이 `정보의 일방적 감소'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그 법칙에 무엇인가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다른 측면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무래도 열역학 제2법칙은 `어떤 더 큰 법칙의 반 쪽'인 것처럼 보인다. 이 법칙보다 보다 더 상위 법칙인 <보존의 법칙>과 겹쳐서 생각해 보면 그 전모가 드러난다.

열역학의 제1법칙은 ꡒ에너지 보존의 법칙ꡓ이다. 물리학에서 기본 공리로 인정되는 원리는 <보존 법칙>과 <최소작용의 법칙>이다. 보존 법칙은 시공간과 물질 등의 모든 존재가 대칭성을 그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되는 것이다. 운동량 보존의 법칙은 공간의 대칭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에너지 보존 법칙은 시간의 대칭성(균질성)에서 나온다. 모든 소립자들의 기본 구조 역시 대칭성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최근의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의 “초super”는 “초대칭super symmetry"의 줄인 말이다. ‘초’란 말은 ‘대칭성을 초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크고 높은 대칭성’이란 뜻이다.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 전하 보존의 법칙 등 물리학에는 대략 12 가지의 보존의 법칙이 있다. 쉽게 말해서 <모든 물리적인 양(존재)는 보존된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외는 없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사라진 정보는 어딘가에 형성, 보존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열역학 제 2 법칙에 의해서 엔트로피는 증가했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다. 적어도 에너지의 형태로서는 말이다. 계의 에너지 총량은 불변이다. 도대체 무엇이 없어졌는가? `유용함', ꡑ질서ꡑ, `정보' 등의 `형이상학적 물리량'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그냥 사라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라진 정보'는 어딘가에 어떤 형태로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보존 법칙>에 의해서 당연해 보이긴 하지만, 이 과정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소립자가 `결합'한다는 것은, 소립자의 존재 즉 본질이며 내가 <식>이라 말했던 원래의 `미결정인 자유로운' 상태로부터 `결정되고 속박된' 상태로 전이하는 것을 말한다. 소립자는 결합과정에서 `자유'라는 식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적인 말로써 실재적인 성질을 표현하는 데 무리가 있지만, 더 적당한 표현을 찾기가 어렵다. <파동함수의 수축>이라 표현한다 해서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말씀드린 대로 소립자의 본질이나 양자역학 이론의 내용은 말로서는 표현이 불가능에 가까우며, 근본적으로 개념과 실재가 공존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양자역학의 난해함의 탓으로만 돌리고서 그냥 넘어 갈 수는 없다. 조금만 더 살펴보자.

  자연의 본성에는 비가역성이 없다고 했지만, 실은 자연의 가장 기본적 존재인 소립자에서 우리는 비가역성의 낌새를 찾을 수 있다. 소립자가 관측으로 확정되기 이전까지는 파동함수에 의해서 표시될 수 있다. 파동함수 그 자체는 시간에 따라서 결정론(수학)적으로 진행(변화)한다. 따라서 파동함수의 시간을 반전시키면 다시 이전의 상태(경로)를 따라서 파동함수 즉 소립자의 양태도 반전된다. 파동함수는 그 자체는 분명히 가역적이다. 그리고 파동함수는 소립자의 양태를 확률적으로만 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즉 파동함수가 소립자를 완전하게(결정적으로) 나타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소립자의 위치를 파동함수로 표시하려면 파동 모양으로 퍼진 상태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위치의 진폭이 가장 크게 나타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소립자가 관측되는, 또는 다른 입자와의 상호작용을 하는 순간, 그때까지 퍼져 있던  파동함수는 ꡐ붕괴(collapse 수축)ꡑ하여 위치(또는 운동량)가 한 점으로 결정된다. 이때 그 위치(또는 운동량)는 파동함수가 표시했던 확률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니 확률이 아주 낮던 의외의 위치에 나타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비가역적이다 파동함수의 붕괴 이후에 어떤 위치에 확정된(나타난) 입자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 갈 수 있는 정보가 없다. 예를 들어서 원래의 파동함수에서 확률 0.3이었던 위치에 입자가 나타나게 되었다면, 나타난 이후의 상태에서 원래의 파동함수를 역으로 계산할 때, 새로 계산된 파동함수는 입자의 현 위치에서 나타날 확률이 가장 높은(예를 들어 0.5) 것으로 계산 될 것인데, 이것은 원래의 파동함수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입자의 확률적 성질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입자를 다시 원래 상태로(파동함수로)  되돌릴 수 있는 ‘정보’는 이미 사라진 것이다. 비가역성은 이렇게 나타난다.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은 양자역학의 지식을 필요로 하며,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는 ‘비가역적’이라는 주장을 펜로즈의 “황제의 새 마음”(박승수 역, 이화여자 대학교 출판부)에서 인용하고 있지만, ‘가역적’이라는 견해를 가진 물리학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펜로즈는 이렇게 말한다. “놀라운 것은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들 두 확률들이 동일하다고 그냥 묵묵히 인정해 버리는 것이다. 나 자신도 이와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앞의 책 546 페이지).

내가 파동함수 상태의 소립자가 ꡐ자유ꡑ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렇다. 파동함수 상태의, 즉 ꡐ미결정ꡑ 상태의 소립자는 확률분포에 따라 다양한 위치에 나타날 수 있다. 즉 다양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파동함수 수축 이후에는 물론 결정된 상태이다. 이것은 마치 처녀가 여러 배우자 후보들 을 가지고 있다가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 이전의 선택권이 모두 일시에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다시 그 이전의 ꡐ자유로운 선택권ꡑ의 상태로 돌아 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립자가 다른 것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서 `자유'를 잃고 확정된 상태가 되는 근본이 “파동함수의 수축‘이다. 이때 소립자의 ’자유‘, 즉 식이 외부와의 <관계>로 바뀌게 되고, 그 <관계의 패턴>이 <정보>로서 나타난다. 열역학 계에서 내부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에서 이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데, 전체적인 <관계>의 양, 즉 질서, 정보는 감소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그 이유는 질서, 정보 등은 열량계나 온도계로서 측정할 수 있는 물리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소한 것으로 보이는 정보는 다시 관측 가능한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자기조직화, 창발 현상이다. 보존의 법칙이 작용한 것이다. 이때 나타나는 자기조직화 등의 전체적인 효과는 전체주의 과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각 구성 요소의 성질의 합이 아닌 계 전체의 특성으로 관찰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효과 -- 새롭게 창발된 --를 그 구성 요소들과는 별도로 분리해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무엇>이 새로 형성되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다음 편 <생명의 탄생>에서 말씀드릴 ”형태 창조장“ 그리고 의식인 것이다. 한 마디로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엔트로피의 증가는 정보, 질서의 감소이다. 이렇게 감소된 소립자의 식이 모여서 의식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ꡒ잠간, 그러한 생각--과정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전체주의적 관점 그리고 열역학적 관점에서는 분명히 식(정보)이 소산되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육신이 다시 분해되어 구성입자들이 원래의 형태로 환원된다면 개개의 소립자 입장에서 볼 때에 `잃어버린 것'은 없지 않은가? 생명체의 일부가 되었던 소립자가 생명의 전과 후에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만약 아무 것도 달라지거나 잃어버린 것이 없다면 무엇인가가 새로 형성된다는 것은 보존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가?ꡓ--그렇다. 소립자의 상태가 생명체에 속하였다가 다시 분해된 후에 그전과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막상 열역학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분명히 엔트로피가 증가하였고, 엔트로피가 증가하였으면 분명히 무엇인가가 소산된 것이다. 왜 그럴까? 위에서 설명했듯이 소립자는 일단 상호작용 이후에는 다시 원래와 동일한 파동함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새롭게 얻은 파동함수는 원래의 함수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면 ꡐ무엇ꡑ이 달라졌는가? 그 차이는ꡐ관계ꡑ이다. 다른 입자와의ꡐ관계ꡑ에 변화가 생긴 것뿐이다. 여기서ꡐ관계ꡑ의 의미는ꡐ정보ꡑ와 같다. ꡐ정보ꡑ를 구성하는 패턴은 곧 ꡐ관계ꡑ를 말하는 것이니까. 계의 전체적인 ꡐ관계 상태ꡑ, 즉 ꡐ정보ꡑ에 변화가 생긴 것이며 그 변화는 물리(질)적으로 항상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당신은 아직까지 열역학 제2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열역학의 법칙 그 자체는 개개의 구성단위의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법칙의 적용 대상이 아니며,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물리학자 존 휠러의 말처럼 “분자에게 엔트로피가 뭐냐고 물으면 비웃을 것”이다. 그 법칙은 복잡 계의 근본 특성인 비가역성으로부터 나오는 전체적인 `결과적 효과'로서 표시되는 것이다. 이처럼 열역학 제 2법칙은 그리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비가역성에 의한 외부질서의 소산과 그에 수반되는 내부질서의 창출효과는 확실하게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전체적holistic 효과뿐이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물리학(양자역학)이 소립자의 특성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자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락, 그리고 펜로즈 등 많은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이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펜로즈는 ꡒ황제의 새 마음ꡓ에서 의식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 진화, 의식 등 카오스 계에서의 자기조직화, 창발에 의한 산물(産物)이 바로 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정보가 큰 조직적 형태로 집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구성입자들의 식과 기가 열역학 제 2 법칙에 의해서 `사라진' 대가로서 새로운 큰 `질서'가 창발되어 ꡒ자기조직화"한 것이다. 그것은 구성입자들의 식, 기 보다 훨씬 더 크고 높은 수준의 것이다. 지금까지 물리학에서는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열역학 제 2 법칙을 다루었으니까 그 법칙의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체주의자들은 이러한 자기조직화, 창발 현상이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설명할 수 있으므로 소립자의 식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 창발의 근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창발의 근원은 바로 소립자의 식과 기다.

`엔트로피'라는 용어는 물리적이지만 그 본질적 개념은 형이상학적이다. 물론 굳이 좁은 의미로서 물리량(`유용한 에너지의 양')으로 말하자면 할 수도 있지만, 현재의 물리 법칙으로 다루지 못하는 식(기)과 관련된 법칙을 다루다 보니까 ‘일방적으로 감소하기만 한다는’ 이상한 괴물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열역학 제2법칙 그 자체가 현상계와 완전 일치하는 바, 그 법칙 자체에 대한 의심의 여지는 없다. 따라서 이 법칙이 적용--실현되는 과정에서 식이 집적, 형성된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펜로즈의 주장처럼 앞으로 양자역학의 미흡한 부분을 보충해 주는 물리법칙이 발견되면 의식과 기도 자연히 물리적으로 다룰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주는 유효정보를 소모하여 <의식>을 형성해 가고 있는 공장인 것이다.

이때 엔트로피나 식은 모두 어떤 상태의 정보의 총량을 나타내는 말이지, 에너지와는 관련 없다. 에너지 보존법칙은 그대로 성립하니까. -- 이 점은 기억해 둘만 하다. 의식은 에너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니 의식에서 나오는 기가 에너지일 수가 없으며 또한 힘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식>과 <기>를 통해서 카오스 이론과 열역학 제 2 법칙을 검토해 보면 그 법칙들이 해명하지 못하는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내가 처음 <식>과 <기>의 존재 가능성을 과학적인 사실들을 통해서 검토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난관이 <오캄의 면도칼> 원칙이었다. 양자역학은 양자역학의 이론이 예측해 낼 수 있는 사실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며, 관측된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소립자가 <식>과 <기>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든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든 그 결과는 동일한 것이 아닐까? 소립자의 <식>과 <기>는 소립자 물리학과 양자역학이 밝혀 낸 바 그대로의, 소립자 자체의 본성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것을 굳이 <식>과 <기>라고 인정할 필요는 어디 있을까? 소립자가 <식>, <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모든 자연 현상은 동일할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이런 회의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소립자의 식과 기 측면에서 카오스 이론과 열역학 제2법칙을 검토해 보았던 덕분이었다. 소립자의 식과 기는 복잡 계의 창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카오스 계--복잡 계에서 고도의 질서를 가진 무엇이 저절로 발생할 수 있으려면 어떤 근거나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은 현상만을 다룰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하지 못한다. 양자역학의 관점과 같이 그저 `원래 그러한 것일 뿐'이라는 수준이다. . 그러나 소립자의 성질까지는 `원래 그러한 것'이라고 납득할 수도 있겠지만, 카오스 계처럼 무수히 많은 구성 입자들이 무작위적인 행동을 하는 계에서 생명이나 의식과 같은 고도의 질서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 그것도 `저절로' - 그 원인에 대한 의문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는 더 더욱이 그렇다.

ꡒ어떻게 “전체>부분의 합” 이라는 부등식이 성립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인과율에 어긋나지 않는가?ꡓ 그렇다. 분명히 인과율에 위배되는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사실이 아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아 보이는 것은 부분(소립자)이 가지고 있는 식識은 계산에 들어 있지 아니한데, 전체에는 그 집적된 식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성미자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 중성미자를 제외한 상태에서 원자핵 내부의 약력에 관한 계산을 맞출 수가 없었던 상황과 같다. 그 계산은 중성미자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서 비로소 맞출 수 있었으며, 파울리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예측되었던 중성미자는 나중에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열역학 제2법칙은 ꡐ감소ꡑ하는 것을, 그리고 그 법칙을 확장한 이론인 프리고진의 <산일구조 이론>과 카오스 이론은 ꡐ창발ꡑ, 즉 ꡐ덧 생겨난 것ꡑ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그 ꡐ감소ꡑ와 ꡐ창발ꡑ의 합은 여전히 제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 엔트로피의 증가량 = 창출된 의식(정보의 총합) >인 것이다. 이것으로서 우리는ꡒ전체>부분의 합ꡓ이라는 전체주의 이론의 모순적인 부등식을 “전체 = 부분의 합”이라는 합리적인 등식으로 대체할 수 있으며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보존의 법칙과 모순 없이 일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앞에서 소립자가 어떻게 인과율을 `창조'하는가를 보았다. 소립자는 그 식(의지)으로서 인과율을 만들뿐 아니라 원인(부분)보다 더 큰 결과(전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겉보기에만 그렇다는 말이다. 그 전체적인 계산은 우주의 기본 원리인 보존의 법칙을 만족시킨다. 우리는 단지 소립자에게 `소립자만큼'의 <식>과 <기>를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인과율의 근원을 찾았으니 이제 <비가역성>도 그 정체를 드러낸다. `원인의 후에 있는 결과'는 곧 시간의 방향성과 비가역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과율은 무작위성과 반대의 성질을 가진다. 과학자들은 소립자의 식을 무시한 죄로, 그토록 고생하면서도 자기조직화의 근원을 찾으려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작위성'의 혼돈(카오스)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카오스 이론이 더욱 발달해서, `자기조직화에 의한 질서의 자발적 출현'이 계의 구성 입자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현상이며, `카오스 계'라는 그 자체의 특성만에 의한 것임이 증명된다면 나는 소립자의 <식>과 <기> 가설을 다시 오캄의 면도칼로 잘라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현상에서 식과 기의 존재 가능성을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기>는 <생기론>에서의 <생기 entelechy>와 유사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철학과 과학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는 전체주의(holism, 통합주의)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현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과학 패러다임의 정통적인 방식인 환원주의(reductionism)가 어떤 계나 현상을 파악할 때에 그 구성원소를 분석함으로서 전체적인 현상(결과)을 이해 예측할 수 있다는 입장인 반면, 전체주의자들은 복잡한 시스템에서는 환원주의적 방법 만으로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아무리 소립자를 완전히 파악한다 하더라도 생명의 탄생을 소립자의 성질로부터 이끌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는 ‘부분’이 가지고 있지 아니한 추가적인 어떤 성질(물리량)이 있다는 생각이다. 카오스이론, 열역학이론 등이 전체주의적 이론이라 할 수 있겠다. 전체주의적 관점의 쉬운 예로 흔히 쓰이는 전광판을 예로 들어보자.


ꡒ전광판은  많은 전구들이 배열되어 있는 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광판은 멋진 동영상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다. 전구들을 하나씩 분석함으로서 영상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 동영상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나 아름다움을 분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광판의 동영상>은 <단순한 전구의 집합이 아니다>. 의식이나 생명현상도 이와 동일하다ꡓ.


전체주의는 부분적으로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환원주의적 관점(방법)에 돌파구를 열기 위한 새로운 시도이며, 상당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아직 미완성의 패러다임이며 그 이름처럼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위에서 예로 들은 `전광판'의 경우를 보자.

띠야르 샤르댕의 물활론을 부정하는 영국의 신경생리학자 도널드 맥케이Donald Mackay 는 ꡐ전광판의 동영상과 전구의 관계는 교향곡과 음표들과의 관계와 같다. 교향곡은 음표들의 집합이지만 음표들 만으로서는 설명(표현)할 수 없는 전체적인 효과가 있다. 샤르댕처럼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원자 속에도 약간의 의식의 흔적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ꡑ 라고 말한다.

전광판의 `전체주의적 결과'인 동영상은 전구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개의 전구들을 동시에 또는 차례대로 명멸하게 하는 정밀한 프로그램이 그 배후에 있다. 동영상은 빛을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구의 본성(환원주의)과 그 과정을 콘트롤하는 프로그램의 합작품이다. 이 프로그램을 `전체적인 무엇'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 프로그램 역시 프로그램 언어의 코드로 환원되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또 다른 예인 인쇄를 보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결론을 얻게 된다. 잉크제트 방식의 컴퓨터 프린터는 미세한 점으로 글자와 그림을 그려낸다. 여러분이 보시는 모니터의 화면 역시 동일하다. 전체주의자들은 `하나 하나의 점을 분석해서는 전체(글자, 그림)을 알 수 없다. 전체는 점과 다른 무엇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컴퓨터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이면 누구나 모니터 상의 하나 하나의 화소(畵素, 빛을 내는 단위)는 정밀한 프로그램에 의해서 콘트롤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완벽한' 환원주의의 작품인지를 알 것이다. 전체주의자들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에도 동일한 논리의 전제적 효과를 주장한다. 프로그램 코드 중의 if go end 등은 그 자체로서는 하나의 부호에 불과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드웨어를 움직여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받아 드리기 어려운 것이다. 프로그램을 해 보신 분들은 크게는 수백만 줄에 이르는 프로그램에서 하나 하나의 각 부호가 제마다 특정한 목적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단 하나라도 틀리면 전체 프로그램에 치명적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실제로 프로그램을 만들 때에 이런 사소한 실수(버그 bug)를 찾아내어서 수정하는 일이 절반 가까운 시간을 잡아먹는다. 이처럼 환원주의는 아직까지는 우리가 기댈만한 가장 신뢰성 있는 과학적 방법인 것이다.


전광판 위에 나타나는 동영상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은 전광판과는 관계가 없는 인간의 두뇌이다. 전광판 동영상의 아름다움, 메시지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명멸하는 전구들의 모임일 뿐, 아무런 효과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 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차적인 현상’이지 ‘실체’는 아니다. 따라서 열렬한 기독교리의 신봉자이며 전체주의자인 맥케이의 `전광판'은 전체주의의 좋은 보기가 못 된다. 전체주의의 다른 예인 개미를 보자.

<개미떼는 서로 협동하여 훌륭한 개미굴을 만들어 낸다. 입구를 만드는 놈으로부터 창고, 알을 보관하고 키우는 방, 여왕개미 방을 만드는 놈까지 상당한 수준의 조직성을 보여 준다. 불필요한 방을 만들거나 여왕개미 방을 두 개 만들지도 않는다. 개미떼에 소속된 각각의 개미 한 마리는 분명 개미굴 전체에 대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군대처럼 조직적인 지휘나 임무부여를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개미떼는 멋진 개미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

이 사례는 현재 생물학에서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신비에 가까운 예이다. 유의할 것은, 전체주의자들은 개미떼의 이러한 능력을 환원주의의 부족함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할 뿐, 능력 그 자체에 대해서는 조금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개미 한 마리 한 마리가 개미집을 짓는 설계도를 가지고 있으며, 집단 내에서 자기가 담당해야 할 임무에 대한 지시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동일한 개미 백만 마리를 모아 놓더라도 개미집을 짓는 일은 불가능해야 할 것이다.  개미 한 마리(환원)로서도 불가능하고 백만 마리(전체)로서도 불가능하다면 개미들이 전체주의자이든 환원주의자이든 개미집을 짓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함에도 세계 어디에나 훌륭한 개미집이 있다. (참고로, 집을 짓고 있는 개미떼에게 <기>를 방사(放射)할 때의 개미들의 반응을 관찰함으로서 <기>의 실재 여부를 확인하는 실험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와 유사한 에는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예에 대한 설명으로서 제안된 것이 “형태창조장”인 것이다. 그리고 형태창조장은 식과 기로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전체주의가 생명현상에 대해서 `비물질적인 생명력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환원주의적인 관점으로서는 생명은 `소립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소립자의 우연하고도 단순한 집합'만으로는 생명의 탄생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과학자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물질에는 생명력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는 <생기론> 또는 <물활론>이 있어 왔던 것이다. 전체주의는 생명현상의 근원을 소립자(또는 원자, 분자)에서가 아니라 `시스템'에서 찾으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생기론> 또는 <생명력>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전체주의가 `생명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신비적(비물질적)인 것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도 생명현상을 물리(아마도 카오스이론의)법칙이나 수학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하는` 것이다. 오캄의 면도날 원칙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복잡계의 자기조직화는 일부 화학반응이나 프랙탈같은 수치 시뮬레이션, 그리고 생명현상에서 '관찰`되고 있는 현상일 뿐, 그 근본적인 원리는 찾지 못했다.


결국 위에서 인용한 프리고진의 말처럼, 생명현상 등의 복잡계의 배경에 어떤 보이지 않는 작용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아마도 환원주의자는 인간을 이해함으로서 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며, 전체주의자는 그렇지 않다, 인간을 아무리 완벽하게 이해한다 하더라도 신을 이해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전체주의적 패러다임은 그 `전체적인 효과의 원인’을 규명해 내기 전까지는 부득이 `신비주의적'이라는 비과학적인 혐의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체주의는 환원주의와 서로 상보적인 관계 내지는 환원주의의 결점을 일부 보완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지, 전체주의가 환원주의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환원주의 패러다임의 기본 사상은 <인과율>이다. 모든 사물에는 그 원인이 있을 것이며, 원인을 분석 파악함으로서 전체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인과율>이 우리의 생각처럼 절대적인 진리이며, 우주의 모든 존재가 인과율에 의한 물리법칙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라면 환원주의의 논리적 결과는 <기계론적 우주관> 즉 <결정론>이다. 뉴턴이 운동의 법칙을 발견한 이후, 라플라스가 `우주의 모든 물체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이유가 그래서이며, 이러한 사고는 유물론에까지 이어졌다. 만약 <결정론>이 진리라면 우리는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할 이유를 잃게 된다. 인간은 존엄성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라 그저 소립자들의 우연한 집합체에 지나지 못하며, 아무 것도 자유롭게 결정하고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환원주의는 물리법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입장이므로 인과율을 고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신문제>, 즉 의식의 실재와 육체와의 독립 여부를 연구하는 철학, 과학 논리에 ꡒ물리적 폐쇄 원칙ꡓ이 있다. 원래의 표현은 ꡒ물리 영역의 인과적 폐쇄 원칙 The causal closure of the physical domainꡓ으로서, ꡒ모든 물리 현상의 원인은 물리적인 것에 한한다ꡓ 라는 원칙이다. 즉 물리적인 것, 다시 말해서 실재하는 것만이 다른 물리적인 것에 영향을 미칠 수 가 있다는 기준이다. 이 원칙은 소위 ꡒ초자연적 현상ꡓ(여기서ꡐ자연ꡑ이란 말은ꡐ물리법칙이 적용되는ꡑ이라는 의미다.ꡐ초자연ꡑ이란 표현은 ‘비물리적ꡑ,ꡐ비실재적ꡑ이란 의미를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다)을 논쟁(연구)의 대상과 과정에서 제외함으로서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과학적인 방법으로) 있는 범위 내에서, 물리적이 아닌 무엇이 물리적인 영향을 발휘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 원칙에 의하면 의식이 육체(물질)와 독립적인 존재로서 육체에 영향을 가할 수 있으려면 의식 그 자체도 물리적인 실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가정하는 <식>은 물리적인 실체이다. 내가 <식>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과학적인 근거와 논리만을 사용하는 것이 그래서 이다.

다행히도 <인과율>은 절대적으로 엄격하게 성립하는 물리 계의 근본적 본질이 아니다. 양자역학은 소립자가 인과율로부터 `약간' 자유롭다는 사실을 밝혔다. 불확정성 원리, 파동방정식의 관측시의 붕괴 현상 등이 그것을 알려 준다. 소립자의 세계(존재)는 위치와 운동량, 그리고 각종의 기본적 물리량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애매모호한 상태에 있다. `애매모호', 또는 `불확정'이란 말 그 자체가 이미 인과율의 `흐트러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인과율 역시 `애매 모호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소립자가 인과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파동방정식으로 소립자의 존재상태를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는 있다. 다시 말하자면 소립자는 확률적으로 인과율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 아니, 현대 과학은 ‘애매모호함’과 ‘확률적으로 흐트러진 인과율’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새로운 돌파구를 추구하는 펜로즈는 양자역학 이론의 보완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 보완의 내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추측하건대 우리가 찾는(완전한) 이론은 이 보다는 좀더 미묘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어떤 본질적인 종류의 비알고리듬적 요소들을 내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비알고리듬적 요소>는 곧 기계적 결정론적이 아닌 어떤 작용, 다시 말해서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작용하는 제 3의 요소(법칙 아닌 법칙)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합당한 것으로는 <식(의지를 포함한)>보다 더 알맞은 것이 없다. 더구나 그것이 “본질적인 종류의 것”이라면 말이다. 모든 물리학의 이론과 법칙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수학은 본질적으로 알고리듬적이다. 그 본질적으로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단지 카오스 이론을 포함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파동함수의 붕괴뿐이며, 현재의 물리학은 이 두 가지의 예외적인 현상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펜로즈 등이 추구하는 “완전한 이론”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비알고리듬적 요소”로서 <식과 기> 가설의 도입이 필요한 것이다.


육체와 독립적인 의식의 실재를 증명하는 일에 가장 큰 난관은 의식이 육체, 즉 물질적인 바탕의 뒷받침이 없이는 작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뇌사 환자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의학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뇌사자는 죽은 시체로 인정되어 장기를 추출하여 이식할 수 있다. 그래서 의식의 실재를 인정하는 학자들도 대부분은 <사후의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영혼(육체와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의식)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육체(물질)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열역학 제2법칙이 바로 그 근거를 준다고 생각한다.


이제 의식의 형성과 작용에 대한 나의 가설을 정리해 보자.

소립자가 모여서 생명체를 만들 때, 소립자의 식은 그 생명체의 의식을, 소립자의 기는 생명현상을 만든다. 그 과정은 프리고진이 밝혔던 바, 복잡 계의 자기조직화 효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열역학 제 2 법칙에 의해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엔트로피의 증가는 정보의 감소를 나타내며, 이때 감소되는(것처럼 물리적으로 관찰되는) 정보는 소립자의 식이 다른 식과 가지는 <관계>, 즉 <정보>이다. 이것이 보존법칙에 의해서 물질과는 독립적으로 형성되어 의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명과 의식은 상호보완적으로 <생명체>를 구성하고 유지한다. 생명현상은 죽음 즉 소립자가 다시 흩어질 때 사라지지만 의식은 보존법칙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물질 측면에서는 `from particle to particle'로 원 위치한 것이므로 생명현상은 사라져야 하지만, 의식은 이미 소산된 엔트로피가 보존되어야 하므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음 편 <생명의 탄생>에서 말씀드릴 형태창조장 역시 동일한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의 형태가 -- 단백질 등의 분자, 세포, 미생물 등 -- 형성되면 그에 해당하는 정보의 ꡐ감소 및 집적ꡑ으로 형태장이 형성되어 보존된다. 그리고 다른 동일한 과정에 적용된다.

아마도 이때 하나의 형태장이 여러 곳에 동시에 작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형태장은 마치 박테리아가 번식하듯이 그렇게 번식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형태장의 숫자가 적으나 나중에는 많은 숫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형태장이 적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사례들과 일치하고 있다.


 

12. 생명의 탄생


양자이론과 카오스 이론,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등이 밝혀낸 과학적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소립자가 식과 기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에 대한 근거를 얻은 셈이다. 이제 과학이론의 검토를 넘어 실제 현상으로서 소립자의 식과 기가 어떻게 생명을 탄생시켰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고 있는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신비가 <식 가설>에 의하면 쉽게 설명될 수 있음을 통하여 <식과 기>의 증거 중의 하나로 삼고자 한다.


현대과학은 크기의 작은 한계인 10의 마이너스 33승 센티미터 길이의 초끈부터 반지름 150억 광년 우주 저 끝까지를 대상으로 다룰 만큼 발전했지만, 정작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하는 원초적인 질문에는 대답을 못하고 있다. 지구상의 생명은 약 45 억 년 전 지구가 만들어진 이후 불과 7억 년 만인 38억 년 전 무렵에 생겨났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지구 초기의 화산, 운석, 지각과 대기의 불안정 등 여러 가지 환경을 고려한다면 지구상의 생명은 여건이 갖추어지자 말자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생명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는 유력한 가설조차 없는 상태이다. 사실 이 문제는 과학자들의 자존심을 상당히 상하게 하고 있다.

성경대로라면 생명은 창조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생명이 어떻게 해서 출현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많은 과학자들이 많은 가정과 학설을 발표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또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설은 <유기물 스프 설>이다. 지구의 나이는 대략 45억 년쯤이라는 것과, 태고 적의 대기는 지금처럼 질소와 산소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산소 대신에 암모니아와 메탄, 수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다수 과학자들의 의견이다(추측일 뿐, 화석증거가 없어서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산소는 바닷물 속의 미생물의 탄소동화작용에 의해서 만들어 졌으며, 대기 중에 산소의 농도가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은 불과 몇 억 년 전이다. 암모니아와 메탄 등의 유기물은 번개의 에너지에 의해서 단백질의 구성원인 아미노산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유명한 <밀러-유레이>의 실험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미노산은 빗물에 의해 바닷물 속으로 흡수되었고, 바닷물 속에서 아미노산들이 우연히 결합하여 생명의 모체인 단백질과 RNA와 DNA를 만들었으며, 생명은 이렇게 탄생하였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가장 간단한 생명체라도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는 확률이 너무나 너무나 낮다는 문제가 있다. 수치로 표시한다면 바이러스 하나가 원시 지구의 유기물로 가득 찬 바다 속에서 1 억 년 내에 저절로 조립될 확률은 10의 200만 제곱 분의 1에 불과하다. 지구의 바다가 아무리 넓고 깊더라도, 그리고 그 속에 유기물이 아무리 많았다 하더라도 확률적으로는 도저히 생명이 `우연히'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 그럴듯해 보이는 학설의 치명적 약점이다. 대부분의 생물학 책에는 이 가설에 의해서 생명이 탄생한 것처럼 나와 있지만 실은 과학자 자신들은 이 가설을 믿는 사람이 없다 해도 그리 과장은 아닐 것이다.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개량된 학설도 있다. 즉 <점토(粘土, 진흙) 인쇄설>이다.

점토는 미세한 크기의 구멍과 홈을 무수히 가지고 있다. 그 구멍과 홈들에는 흙의 주 원소들인 알미늄, 마그네슘, 칼슘 등의 원자가 있으며 그러한 금속 원소들은 점토 표면에 있을 때 약하긴 하지만 화학적 활성을 가지고 있다. 즉 특정한 원소들은 그 화학적 성질에 의해서 특정한 다른 원자나 분자를 끌어 당겨서 결합하려는 성질이 있다. 이런 원소들의 집합, 즉 점토 내의 구멍(홈)은 `우연히' 단백질을 찍어낼 수 있는 형틀이 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단백질이 계속 `인쇄'되어 나와서 결국 생명을 만들 수 있었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이 학설 역시 확률을 다소 높였다고는 하지만, 원래 `우연히' 단백질이 만들어질 수 있는 확률이 너무나 낮기 때문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질 못한다.

이 밖에 우주의 다른 곳에서 발생한 생명이 지구로 왔다는 설이 있다. 우주에는 많은 먼지가 있다. 오리온 성운 등 우리 은하계 내에 있는 성운들은 모두 우주 먼지의 집단이다. 이 먼지 속에는 각종의 유기물이 있다는 것이 분광측정에 의해 밝혀져 있다. 이 유기물들이 우주선, 자외선 등의 에너지를 받아서 생명이 탄생되었으며, 그것이 지구에 떨어져서 생명의 씨앗이 되었다는 설이다. 독감의 세계적 유행이 혜성이 지구 근방을 지날 때에 혜성에서 떨어져 나온 먼지들 속에 있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을 정도로 지구에 떨어지는 우주의 먼지, 운석의 양은 상당히 많다. 몇 해 전, 남극에서 찾은 화성의 운석에서 원시 생명체의 화석으로 추측되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발표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었던 일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설 역시 마찬가지로 생명발생의 확률이 문제가 된다.

어떤 가설도 생명이 `우연히' 발생하기에는 그 확률이 처참할 정도로 낮다는 약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장 간단한 바이러스의 DNA 조각 하나를 `우연히' 만들려 해도 150억 년의 우주 역사와 지름 300억 광년의 우주의 크기를 가지고서는 ꡐ너무 작아서ꡑ 도저히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탄생의 과정은 아직까지 과학의 가장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창조신에 의한 <창조설>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가 그래서 이다.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인간적’인 관점에서) 고등생물인 인간부터 척추동물, 무척추동물, 식물, 단세포 생물, 박테리아,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그 진화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생명이 있다. 사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조차도 그리 확실하지 않다. 가장 하등생물인 바이러스는 DNA와 껍질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생물처럼 결정이 될 수도 있다. (바이러스가 가장 먼저 생겨난 생물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의 세포 속에서만 번식할 수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보다 늦게 생긴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인 신진대사와 번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 상에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생명의 기본인 RNA, DNA는 그것 자체로서는 생명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큰 고분자일 뿐이다. RNA는 DNA보다 훨씬 더 단순한데, 전에는 DNA가 있어야 RNA가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알려졌으므로 생명의 탄생은 곧 DNA의 탄생이라 생각했었으나, 그 후 일부의 RNA는 효소 단백질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므로, 생명의 탄생을 DNA보다 간단한 RNA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좀 더 쉬워 진다. 생명의 탄생을 위해서는 DNA 이외에도 단백질이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그런데 필요한 단백질은 DNA와 RNA가 있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DNA는 단백질을 만드는 설계도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설계도는 단백질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다.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같은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이 경우에는 닭과 달걀이 한꺼번에 ‘우연히’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RNA는 설계도의 기능도 단백질 효소의 기능도 일부 가지고 있기 때문에 RNA가 생명의 시초였을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 것이다.

몇 년 전 광우병(狂牛病) 소동으로 유명해진 프라이온 prion 이라는 단백질은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프라이온은 뇌 조직 속에서 `번식'할 수가 있다. 자신과 꼭 같은 프라이온을 지속적으로 복제해 낸다. 그래서 나중에는 뇌가 프라이온으로 가득 차 버리게 되어서 치매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떻게 분명히 무생물(단백질)인 프라이온이 자신을 복제할 수가 있는가? 이 현상은 결정의 성장과는 다르다. 결정의 성장은 작은 결정이 큰 결정으로 되는 것으로서, 그 원자(또는 분자) 하나 하나의 단위에서는 지극히 단순한 현상이지만, 프라이온은 사람이나 소의 뇌 속의 모든 곳에다가 그저 자신을 계속 복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라이온을 ‘병원체’, 즉 병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물론 프라이온은 단백질이므로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 소독약이나 고온에도 ‘죽지’ 않는다.

이쯤 되면 과연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지 않은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기 위하여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생기론 vitalism>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금 세기의 철학자 베르그송 등을 거쳐  생물학자 한스 드리슈(Hans Dreisch)에 의해서 주장되었던 학설이다. 생명현상이 일반 물리법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생기 entelechy>라는 `살아 있는 물질(생명) 속에서 작용하는 인과론적 요소의 존재'를 가정한 것이다. ‘인과율적’이라는 표현에 유의하셔야 한다. 이 말은 ‘인과적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다. 즉 ‘식’ ‘기’와 같이 경향, 방향성으로서의 목적, 곧 ‘의지’를 가진 것이다. 생기에 대한 이 정의는 필자의 것이 아니라, 생물학자들의 일반적인 정의임도 염두에 두셔야 한다.

이 설은 소립자가 <식>과 <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지만, 생기론은 <생기>라는 물질과 독립적인 존재를 가정한 것이다.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들과 무생물의 입자들은 완전히 동일한 입자이지만, <생기>가 `집합 조직한' 입자들은 생명체가 되고 그렇지 아니한 것은 무생물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물질과 별개로 존재하는 <생기>가 관찰되지 않고 있으며, 그 존재를 인정할만한 원리적 근거도 없으므로 <생기>를 가정한다는 일은 결국 창조신을 가정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된다. <생기론>은 생명현상이 <기계론적 생명관>으로서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생겨났던 것이다. 현재 <생기론>은 거의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것의 도입이 필요하였던 이유는 -- 즉 기계론의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 있다.

생명체의 여러 특성들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처럼 <목적론>이 있다. 생명체는 마치 예정된 코스 -- 목표를 향해 인도되는 것처럼 질서 있고 목적에 맞는 방법으로 행동하고 성장한다. 노벨상 수상자이며 파스틔에르 연구소 소장이었던 자끄 모노는 <환원론자>이면서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잇다.


ꡒ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예외 없이 공통적인 근본 특성들 중 하나는 목적 또는 계획을 부여받은 대상들이 된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 계획이나 목적은 그들의 구조에 나타나며 그들의 행위를 통해 수행된다.ꡓ(“우연과 필연”, 자끄 모노는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이러한 ꡐ합목적성ꡑ이 물질(소립자)의 기본적 성질로부터 ꡐ우연히--또는 ꡐ저절로ꡑ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현재 과학계에서의 생명현상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기계론>을 검토해 보자. `물리적' 측면에서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기계론 mechanism>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생물은 물리적 법칙에 의해 구성(탄생)되고 움직이는 `복잡한 기계'일 뿐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다만 그 구조, 조직의 복잡한 수준의 차이이며, 생명체의 모든 기능(의식을 포함한)은 분자 수준에서의 화학과 물리법칙에 의하여 생겨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유전자 - DNA의 기본 구조가 밝혀지고 그 각 부분의 기능을 알아내기 위한 게놈 프로젝트의 완료가 몇 년 이내로 예상되고 있는 현재, 거의 모든 생물학자들의 생명에 대한 견해는 <기계론>이다. 언젠가 DNA를 인공적으로 조립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조립된 인공 DNA로서 완전한 인공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현재도 DNA를 조각 내고 원하는 위치에 다른 조각을 끼워 넣기도 하는 등의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만약 <생기>가 물질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DNA를 조각 낼 때 그 DNA의 <생기>는 `파손'되어 없어져야 한다. 즉 그 생기에 의해 `살아 있던' DNA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다른 조각을 붙이더라도 그 DNA는 `죽은' 것이므로 생명체로 자라날 수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DNA는 시험관 속에서 효소를 사용하여 자르고 이어 붙일 수 있으며, 그래도 `생기'를 잃지 않는다. 즉 ꡐ생기ꡑ는 물질 입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처럼 DNA가 필요한 분자(영양소)들만 있으면 생명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기계론>의 강력한 받침이 된다. <기계론>은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환원주의>이다. 생명체를 분석하면 결국 분자에까지 이르듯이, 분자를 DNA라는 설계도의 청사진대로 조립하면 생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부정할 근거는 없다. 현재 분자생물학의 궁극적 목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기계론> 역시 아직 설명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생명의 탄생을 설명하지 못한다. 현대의 유전자 공학으로서도 DNA의 `기성품'을 분석하고 조작할 수는 있지만 분자들을 재료로 DNA를 조립하지는 못한다. DNA를 조각 내고 다시 이어 붙이는 기술과 DNA를 조립하는 기술은 그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DNA는 적당한 효소를 사용하여 원하는 곳을 자를 수도 있고 이어 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컴퓨터의 모뎀 카드를 바꾸는 작업에 비유한다면 DNA를 만드는 일은 반도체의 원재료인 규사와 철광석, 구리광석을 가지고서 컴퓨터를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도구도 공장도 없이 말이다. 더 더욱이 자연에서의 생명의 탄생은 환원주의적 사고의 근본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목적론>적 특질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물론, 박테리아같은 최하등 생물도 영양을 섭취하여 번식하고, 환경이 나쁠 때는 포자 형태가 되어 좋은 환경이 오기를 기다린다. 단순한 `분자들의 집합'이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나타낼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을 `본능'이라 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문제의 회피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한 `목적' 또는 `본능'이 `분자'들에게 왜 필요한 것인가? 물론 기계론적 ‘우연’에 의한 진화론의 설명도 가능하다. `그렇게 행동하도록 <우연히> 조합된 DNA를 가진 것들만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우연히> 조합된 유전자가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을 확률 역시 생명의 탄생확률처럼 제로인 것이다.

생명의 탄생과 진화 등 생명현상에 있어서 기계론적 <환원주의>를 따르기 어려운 이유가 또 있다. 생물의 ꡒ형태 발생(morphogenesis)" 문제가 그것이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된 하나의 수정란은 한 개의 세포이며 한 개의 DNA를 가지고 있다. 이 한 개의 세포가 두 개로, 다시 네 개로 분열하면서 어떤 세포는 머리를, 어떤 세포는 심장을, 어떤 세포는 근육을 만들고 어떤 세포는 혈액이 되어 신체 내부를 돌아다니게 된다. 이 과정은 오래 전부터 생물학의 수수께끼이다. 생체의 개체발생은 DNA라는 청사진에 의하므로, 이런 모든 과정은 DNA에 수록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우선 떠오르는 생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세포가 동일한 DNA를 가지고 있으며, 세포가 분열할 때 DNA는 동일하게 복제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두 동등한 세포들인데 어째서 어떤 놈은 눈이나 입이 되어 연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달콤한 입맞춤을 즐기며, 어떤 놈은 똥꼬가 되어 숨어 지내야 하는가 말이다. 무엇이 그 엄청나게 복잡하고 섬세한 과정을 지휘하는가?

DNA에는 그것이 들어 있는 세포를 어떤 특정한 세포가 되도록 작용하는 부분이 있는데, 근래의 연구로 DNA에는 각 부분의 활성화를 제어하는 일종의 스위치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서 눈이 될 세포는 눈이 되는 스위치가 켜지고 간이 되어야 하는 세포는 간이 되는 스위치가 켜진다. 그러나 이 발견은 세포분화의 기전의 한 단계를 밝혀 낸 것일 뿐, 해답은 되지 못한다. 의문은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눈이 될 세포는 자신이 눈이 되어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고서 그에 해당하는 `스위치'를 작동시킬 수가 있는가? 우리 몸에는 60조 개의 세포가 있다. 그 많은 세포들이 어떻게 틀리지 않고서 제각기 `자신의 목적'을 알 수가 있는 것일까? 하나의 세포(수정란)에서 동일하게 복제되어 나온 세포들이 말이다.

신경세포를 제외한 일반 체세포들 사이의 정보전달은 화학물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화학물질을 통한 정보전달은 모든 세포에 동일한 내용이 동일하게 전달되므로 이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환원론적 관점에서는 각 세포들의 임무에 대한 정보가 DNA에 수록되어 있고, 그 정보가 전체 세포에 `전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DNA라는 분자 수준의 극미세 구조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자의 전사, 복제가 어떻게 10 Cm 단위 크기의 태아 몸에 대하여 전체적인 조정을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기존의 생물학적, 화학적, 물리학적인 어떤 메카니즘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가? 없다. 이 문제는 생물을 분자 단위에서 다룰 정도로(분자생물학) 발달한 현대의 생물학에서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3대 과제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다른 두 가지는 생명의 탄생과 중추신경계의 작용(의식)이다.)

우리는 하나의 달걀(달걀은 단 하나의 세포, 수정란이다)을 볼 때, 그 각 부분이 병아리의 머리, 날개, 털, 다리 등이 되도록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병아리가 되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DNA일 뿐이며, 달걀의 거의 대부분은 DNA가 병아리로 성장하기 위한 영양분이다.

개구리 알이 부화하여 올챙이가 되는 과정에서 그 맨 처음 단계, 즉 하나의 세포인 알(모든 알은 한 개의 세포이다)이 두 개의 세포로 복제 분열되었을 때 한 쪽의 세포를 뜨거운 바늘로 찔러서 기능을 잃게 만들면, 나머지 하나(절반)의 세포만 자라서 반 쪽 짜리 올챙이가 된다(물론 살지는 못한다). 그 첫 번째 분열 때부터 이미 각 세포들은 다른 임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세포의 분열 특히 DNA의 복제는 ꡒ동일복제ꡓ이다. 복제과정에서 서로 다른 `스위치가 켜지도록' 복제되지는 않는다. 일단 우리가 모르고 있는 어떤 복제의 메카니즘이 더 있어서 분열 할 때마다 각 세포에 저마다의 임무에 해당하는 스위치가 켜지는 것이라 가정하자. 인체를 구성하는 약 60조의 세포를 그 하나 하나마다 그처럼 엄밀하게 콘트롤하는 일이 가능할까?

전에는 무척추동물 이하 식물에 이르기까지의 하등생물은 아무 세포 하나 만으로서도 전체 개체를 쉽게 키워낼 수 있었으며, 현재는 유전공학의 발달로 고등 동물도 아무 것이나 하나의 세포에서 DNA를 채취하여 원래의 동물과 꼭 같은 동물을 복제하여 키워 낼 수 있다. 최근의 복제양 돌리는 그런 방법으로 복제된 것이다. 사람의 경우라면 60조 개의 세포 하나 하나에 제 각기의 임무를 부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최초의 수정난자의 DNA에 들어 있으며,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 의해서 성장이 완료된 후의 60 조 개의 체세포 하나 하나에도 모두 동일한 프로그램이 역시 그대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모순이 아닌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상황이다.

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가장 흔한 생물현상 -- 이것은 모든 다세포 생물의 번식 때 일어나는 것이다 -- 에 관한 연구 결과, ꡒ세포는 그 핵(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부분)과 세포질 사이에  다이나믹한 균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핵 유전자의 형질발현을 위해서는 먼저 세포질로부터의 시그날signal이 있어야 한다ꡓ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실은 우리의 의혹을 더 증폭시키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뿐,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DNA 그 자신의 유전정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세포질이 어떤 메카니즘으로 DNA의 복제에 필요한 signal을 발생할 수 있는가?

또한 이 사실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절반씩 물려주신 DNA와 ꡒ완전히 동일하지 않다ꡓ는 것이다. 즉 우리는 `DNA 기계가 아닌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우리는 DNA라는 설계도대로만 시공되는 것이 아니라, `공사 진행' 시의 주위 여건에 따라서 영향을 받아 시공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라이얼 왓슨의 말을 인용하면;

ꡒ이는 결국 우리들의 자기동일성(identity) 역시 양친의 유전자는 물론, 우리 육신을 구성하는 세포 내부의 무수한 타자(他者)가 발하는 지령에도 일부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우리는 뭇 중생들의 울안에 갇혀 지내오고 있었던 것이다.ꡓ


형태발생의 `신비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안된 <형태 창조 장 morphogenetic field>이라는 것이 있다. 생물학자인 루퍼트 셀드레이크 Rupert Sheldrake(1942~ )가 제안한 것인데, 이 가설은 <기>의 존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매우 흥미로운 가설이다(셀드레이크는 히말라야에서의 명상 수도 중에 이 가설의 실마리를 깨달았으며, 그는 나중에 철학자로 변신하였음도 흥미 있는 참고 사항으로 알려드린다). <형태 창조 장>은 전자기장, 중력장처럼 `공간의 어떤 틀'로서 `장'내에 있는 물질(세포)에게 형체를 형성할 수 있는 정보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의 태아가 잉태되어 세포분열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태아에게는 다 자라서 출산 준비가 완료되는 시점까지 태아의 세포분열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형태 창조 장>이 와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의 태아를 위한 장, 물고기 알을 위한 장 등 모든 생물의 종류에는 각각 <형태 창조 장>이 준비되어 있어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진화에 의해서 종이 변경될 경우에는 그에 맞는 <장>이 새로 창조된다는 것이다. 얼핏 <삼신 할머니>를 연상하게 하는 이런 생각을 서양의 생물학자가 발상했다는 것이 신기하게 보일 정도로 이 문제는 중요하다. (형태창조장은 의식에 대한 불교의 ꡒ훈습(薰習)설ꡓ과 거의 동일하다. 흥미롭지 않은가?)

셀드레이크의 가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형태창조장>은 일단 형성이 되면 다른 곳에서도 같은 <장>이 만들어지며, 그것에 의해서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 형태(생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형태적 공명 morphic resonance>이라 이름지었다.

<형태창조장>을 입증할 수 있는 한 사례는 아프리카 오지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다. 일찍 문명이 발달했던 지역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은 문명에 있어서 약 일만 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문명인과 같이 교육시키면 그 학습진도는 동일하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이었던 계산이나 복잡한 언어 능력을 일만 년 동안이나 그러한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 왔던 사람들이 동일한 수준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진화론에 어긋나는 것이다. <형태창조장>은 미국의 태아에게나 미개인의 태아에게나 거의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장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생물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나는 지금까지 생물과 무생물을 어떤 식으로든지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태아의 성장과 유사한 무기물의 결정의 성장에도 적용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실제로 그러한 실례가 있다.


< 예전에는 글리세린은 액체이며 결정화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상온의 특정 온도(섭씨 18도) 부근에서 쉽게 결정화한 현상이 발견되었는데, 곧 세계 어디서나 글리세린이  결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글리세린은 쉽게 결정화 시킬 수 있다.

>

이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일본의 어느 섬에 사는 원숭이 떼 중에서 어느 날 한 마리가 흙이 묻은 고구마를 씻어서 먹으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곧 섬 안에 있는 다른 원숭이들도 고구마를 물에 씻어서 먹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 멀리 바다 건너 일본 각지의 다른 원숭이들도 모두 씻어 먹는 것을 저절로 깨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형태창조장>이 태아(배)의 발생이나 결정의 성장뿐만 아니라 의식의 형성과 학습에도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 <형태창조장>들은 비물질적인 것으로서, 기존의 일반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셀드레이크는 <형태 창조 장> 가설의 실험방법으로서 인간의 학습에 대한 몇 가지 방법을 제안했었는데, 그 실험 결과는 <아직은 확인 불능>이었다. 그러나 이 학습에대한 형태공명 가설의 강력한 증거로서 셀드레이크가 제시한 동물실험 결과는 무척 흥미가 있다.

1930년대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William McDougall이 쥐를 복잡한 미로에서 빠져 나오도록 훈련(학습)시키는 실험을 했다. 미로 내부에서 엉뚱한 길로 가는 쥐는 전기충격을 맛보게 된다. 물론 오래 학습 받은 쥐일수록 잘못된 길로 가는 횟수가 줄어든다. 그런데 훈련 받은 쥐들의 후손들은 처음의 쥐들 보다 훨씬 더 빠르게 훈련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20 세대쯤 내려가면 잘못된 통로로 나가는 횟수가 1/5로 줄어드는 것이다. 언뜻 상식적으로 당연해 보이지만, 이것은 ꡐ획득(후천)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ꡑ라는 유전의 법칙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실험 결과는 어떤 생물학적 이론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당시의 유일한 ? 그리고 그럴사한 반론은 ꡐ똑똑한 쥐들은 전기충격을 덜 받았을 것이며 따라서 살아 남은 확률이 높다. 결국 후손 쥐들은 똑똑한, 즉 유전형질이 우수한 쥐들만 남게되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ꡑ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반론은 맥두걸이 ꡐ멍청한ꡑ 쥐들만 골라서 그 후손으로 동일한 실험을 하였으나 그 결과는 역시 동일하였으므로 부정되었다. 그 후 다른 학자들도 동일한 실험을 거듭했지만 모두 동일한 결과를 얻었을 뿐이었다.  이 실험 결과는 아직까지도 <형태장> 가설 이외의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제시한 현태 발생에 대한 가설 중에 형태창조장 외에 <화학적 구배(기울기)> 가설이 있다. 프리고진은 카오스 계의 특징인 ꡒ이중 갈래치기 bifurcationꡓ에 의해서 세포 분화 중인 수정란의 각 부위에 어떤 ꡐ화학적 구배(句配; 기울기)ꡑ가 생기게 되며, 이 구배의 차이에 의해서 각 부위는 생물의 각 특정 부위로 성장하게 된다고 설명한다(ꡒ혼돈 속의 질서ꡓ). 프리고진이 그림으로 예시해 놓은 ꡐ화학적 구배ꡑ는 형태창조장과 다를 것이 없다. 프리고진은 형태 창조장이 카오스 계의 창발적 효과일 것이라고 추측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그리고 ꡐ화학적 구배ꡑ의 근원이 되는 원리에 대한 설명이 아직 불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카오스 계인 비평형 열역학 계의 창발적인 현상일 것이라는 추측뿐.


생명의 탄생을 소립자의 기를 통하여 고찰해보자.

소립자가 모여서 원자를, 탄소, 수소, 질소 등의 원자가 모여서 아미노산 분자를 만들고, 아미노산 20 종이 수십 개 내지 수 천 개 모여서 단백질을 만들고, 다시 엄청 난 숫자의 단백질 분자가 모여서 우리 몸을 만들고 생리작용을 연출해 낸다. 이제 우리는 단백질의 <식>과 <기>를 인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소립자의 식과 기는 너무 미약하므로 도저히 그 드러난 효과를 관찰할 수 없을 것이나, 단백질은 뼈를 제외한 우리 몸의 거의 전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모든 생리작용을 담당하고 있는 재료인 만큼, 소립자나 원자보다는 <인간>에 더 가까운 것이며, 따라서 그만큼 식과 기의 효과가 클 것이니까 말이다. 기는 `의지(식)의 발현'이라 했다. 소립자가 기를 가지고 있다면 이 체내 단백질의 합쳐진 식은 소립자의 식보다 훨씬 더 클 것임은 당연하다. 이렇게 큰 식이라면 `우연히'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RNA, DNA 등의 핵산과 협동하여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기초적 단계에서는 식의 작용이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충 수만 조(兆) 개 이상의 단백질 분자가 모여서야 우리 몸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생체의 전체적인 발생 과정인 형태발생보다 더 세부적인 생리 현상으로서, 분자 개체 발생이 있다. 이 현상은 형태 발생에 비해서 매우 단순하므로(그 자체로서는 매우 복잡하지만) 우리는 이 현상을 해석하는 데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체내의 단백질은 약 백만 종류가 있는데, 모두 우리 세포 내에서 아미노산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진다. 음식물을 통하여 섭취하는 단백질은 위장과 소장에서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흡수되는 것이지, 단백질 형태로 흡수되지는 않는다. 단백질의 제조를 위한 정보는 모든 세포의 DNA에 수록되어 있다(신체 각 부위의 세포별로 만들어 내는 단백질의 종류가 다르다). 이 정보는 RNA에 복사되어 세포 속에 있는 리보솜이라는 단백질 제조 공장에 전달되고, 여기서 정보에 의해서 필요한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만들어질 때의 단백질은 20 종류의 아미노산들이 약 일 백 개 내지 일 만 개씩 연결된 긴 고리 형태인데, 이 긴 고리의 연결 순서는 DNA로부터 전달되어 와서 리보솜에 의하여 연결작업이 수행되지만, 연결된 후에는 체내에서 요구되는 기능에 맞도록 입체적으로 뭉쳐 스스로 얽혀져서 ꡒ구형(球型) 단백질ꡓ이 되어야 한다. 수백 개의 링이 연결되어 있는 벨트를 이리저리 구불구불 접어서 공처럼 뭉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 때 접혀 얽힐 수 있는 방법의 가지 수는 무수히 많으며, 그 각각의 뭉친 형태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 몸에 맞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 중에 한 가지 뿐이다. 만약 한 부분이라도 다르게 접히면 그 기능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단백질의 입체특이성이라 한다. 그 접는 방법은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백 내지 만 개의 아미노산 고리들은 제각기 다른 모든 아미노산 고리들의 움직임을 `알고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마치 북한 어린이들의 마스게임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 접히게 되어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을 뿐더러, 자칫 해로운 물질이 될 수도 있다. 놀랍게도 단백질은 마치 접히는 방법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수백 수천 개의 다른 아미노산 고리들의 현재의 위치와 움직임을 서로 알고 협동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스스로를 접는다. 이 현상은 생화학자들에게 큰 수수께끼이다.

자끄 모노 Jacques Monod는 ꡒ우연과 필연(1970)ꡓ에서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ꡒ아미노산의 약 절반은 소수성(疏水性;물을 배척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물(세포질 내의) 속에 있는 소수성 분자들은 서로 모이려는 작용이 있다. 그래서 뭉치게 되는 것인데, 뭉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중에서 가장 열역학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뭉치게 된다.ꡓ

이것은 거의 모든 생화학자들의 견해(추정)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렇게 복잡하고 긴 고리가 어떻게 항상 최적의 형태로 뭉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전혀 답하지 못한다.  모노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현상을 원자 수준까지 해석하면 그 개개의 원자들의 결합은 물리법칙을 따르고 있을 것임은 당연하다. 나는 자연의 어떠한 현상도 물리법칙을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접힘 또는 뭉침의 과정은 너무나 신기한 것이라서 원자의 결합 방식에 대한 물리 법칙 만으로서는 도저히(적어도 현재까지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물리학자이며 전체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폴 데이비스 Paul Davies는 ꡒ우주의 청사진 The Cosmic Blueprint(1989년)ꡓ에서 자끄 모노의 견해를 부정한다. 최종적으로 뭉친 형태는 가장 낮은 에너지 레벨로 -- 그래서 가장 안정된 상태로가 아니라, 거의 비슷한 에너지 레벨을 가지는 다른 뭉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몸 속에서 뭉쳐지는 형태가 열역학적으로 가장 안정된 상태라 하더라도 그 뭉치는 과정의 설명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과정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그처럼 최적의 형태로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게 저절로 접힐 확률은 거의 없는 것이다.

이 현상을 환원론적으로도, 또 전체론적으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물학에서 <식>과 <기>를 배제하고서는 생명현상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체내에서 만들어진 단백질은 스스로 접힐 줄 알만큼의 <식>과 <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단백질에 해당하는 형태 창조장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아미노산 고리들이 각각 다른 모든 고리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알고서 수 백 수 천명의 곡예사들이 공중그네 곡예를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모양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이 현상은 <형태창조장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특정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아미노산을 순서대로 연결하는 것까지는 리보솜의 역할이지만, 그것을 접는 일은 그 특정 단백질의 <형태창조장>과 단백질 사이의 <기>의 상호 작용인 것이다. 이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만약 같은 단백질이 체내에서가 아니고 시험관(또는 원시 바닷물) 속에서 우연히 형성된다면 체내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저절로 접혀지지 않을 것이다.(주; 이에 대해서는 반증이 될 수 있는 예가 있다. 구형 단백질은 몇 개의 단위 조각 sub-unit 로 구성되며 비교적 쉽게 서브 유니트로 분리 될 수 있다. 이렇게 분리한 단백질을 다시 원래의 조건하에 두면 원래의 단백질 분자로 결합한다. 이 때 그 시험 용액 속에 수 백 종의 다른 단백질을 두어도 각 서브 유니트들은 원래의 구형 단백질 분자를 정상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세포 속의 리보솜은 약 30 종의 단백질과 3 종의 핵산으로 구성된 분자량 백만 단위의 단백질 집합체인데, 시험관 속에서 리보솜을 조각 내어 세포 속과 동일한 여건을 만들어 주면 그 조각들은 다시 모여서 리보솜을 형성한다. 박테리오 파지라는 바이러스는 조각이 된 후에도 정상 적인 여건 하에서 다시 원래대로 박테리오 파지가 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는 것이다. 물론 단백질의 sub-unit나 리보솜, 박테리오 파지의 조각은 아미노산 보다 훨씬 더 크다. 나는 이런 현상들이 형태 창조장 이론을 부정하는 예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입증하는 예라고 본다. 아미노산보다 훨씬 더 큰 분자인 단백질 분자는 당연히 아미노산 보다 더 큰 식과 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즉 더 큰 규모에서는 식의 작용이 더 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험관이나 바닷물 속에서도 수 천 수 만 분의 일의 확률로 그렇게 접힐 수도 있겠지만, 인체 내에서는 `반드시' 한 가지 순서-방법으로만 접혀져야 한다는 엄격한 제약이 있다. 조금만 다르게 접혀져도 그 단백질은 독이 되어 버린다. (우리 몸은 매우 예민한 것이라서 이물질의 침입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우리 몸의 면역기관은 다른 단백질을 병균과 똑같이 공격한다.) 따라서 단백질이 체내에서 그처럼 특수한 방법으로 접히는 것은 다른 무엇의 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다른 어떤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로서 “형태 창조장”이 가장 유력하다는 것이 형태 창조장 설의 요지이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분자 수준인 단백질이 <식>을 가지고 있으며 <기>를 발휘할 수 있다면, 그 기본 구성입자인 소립자들도 미소하나마 <식>과 <기>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단백질 분자가 생명의 한 부분이 되려고 그 <식>과 <기>를 발휘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소립자들 역시 당연히 그러하리라는 것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단백질 분자가 `단순한 물질' 분자가 아니라, 약간의 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형태 창조장 가설이 옳은 것이라면 원시 바닷물 속에서 생명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것이 설명된다. <식>과 <기>가 없었다면 영원히 불가능했을 일이 이제 가능해진 것이다. 단백질 수준의 <식>은 너무 미약해서 그리 쉽게 생명을 탄생시키지는 못했지만, `불과' 수 억 년이란 비교적 빠른 기간 이내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다시 수만 개 이상의 단백질이 모여서 만든 세포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박테리아 등의 미생물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단세포생물인 어떤 종류의 아메바는 생존환경이 악화되면 cAMP라는 세포의 신호전달 물질을 분비하여 가까이 있는 아메바들을 불러모으는데, 약 십 만개의 아메바들이 모여서 길이 2 밀리미터 정도의 집합체를 이룬다. 어떤 놈들은 머리 부분이 되고 어떤 놈들은 꼬리 부분이 된다. 이 집합체는 ꡒ그렉스 grexꡓ라는 애칭으로 불리는데, 마치 한 마리의 생명체와 같이 행동하기 시작한다. 외부의 자극 - 열과 빛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으며, 시속 일 밀리미터의 속도로 보다 나은 번식환경을 찾아서 기어다니는 것이다. 그러다가 적당한 환경을 만나면 아메바들은 각각의 역할에 따라서 몇 개의 작업조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번식용 포자 생산을 위한 일부의 아메바들만을 일종의 캡슐에 넣어 봉한 뒤 땅위에 단단히 고정된 가늘고 긴 끈 모양의 줄기 위에 이것을 옮겨 놓는다. 이 캡슐들은 특정 기체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어서 서로 의사소통도 가능하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캡슐로부터 포자들이 쏟아져 나올 때에 캡슐들끼리 뿐 아니라 줄기까지도 포자가 잘 흩어질 수 있도록 구부렸다 폈다 하는 것이다. 이처럼 단세포생물인 아메바까지도 종족의 번식을 위하여 조직적이고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은 라이얼 왓슨의 ꡒ생명조류 Life-tide"에서 발췌하였는데, 일리야 프리고진은 ꡓ혼돈속의 질서ꡒ에서 cAMP에 작용하는 두 가지의 효소의 농도변화에 의해서 조직적인 행동을 위한 아메바들의 의사소통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현상을 자신의 이론의 기반인 ꡓ복잡계에서의 자기조직화 현상ꡒ의 예로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프리고진의 설명은 효소의 되먹임feed-back에 의한 아메바의 집합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뿐, 나머지의 행동 - 마치 한 마리의 다세포 아메바처럼 - 에 대한 설명은 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 생각처럼 아메바의 <식과 기>를 가정할 때에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립자의<식>과 <기>를 인정하면 생명의 탄생이 곧 납득될 수 있다.

물론 소립자의 <식>과 <기>는 너무나 미소하여 인식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소립자의 식과 기>에서 말씀드린 대로 `심증' 이상의 물리(현상)적 증거의 관측은 어렵다. 그리고 원자 수준 정도에서도 그 <식>과 <기>가 너무 미약해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관측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소립자나 원자에 있어서는 물리적인 성질과 식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단백질의 접힘 예는 <기>가 매우 강한 인체 내에서의 일이니까 그처럼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관찰이 가능할 정도로 뚜렷이 드러나는 예는 카오스 계에서의 <자기조직화, 창발> 현상이다.


이제 생물학자의 가설인 <형태창조장>을 좀더 살펴보자.

물리학 용어인 <장 field>은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운 개념이다. 아니, 개념이라 할 수도 있고 실재라 할 수도 있는, 우리들의 일상적 인식가능의 범위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가장 쉬운 보기로서, 물리교과서에 전기나 자기 주위에 쇳가루를 뿌려놓고 툭툭 건드려주면 쇳가루들이 전자력선을 따라서 나비의 날개처럼 줄을 이루는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전기나 자기, 중력 등 외부에 영향(힘을 포함한)을 미치는 것은 모두 그 주위에 <장 場>을 형성한다`라고 말한다. <장>의 작용, 즉 외부에 대한 영향력은 위치에 따라서 그 방향과 세기가 정해진다. 양자역학에서는 많은 종류의 장을 다룬다. 물리에서의 <장>의 개념은 <기>의 개념과 아주 비슷하다. 학술용어의 한글화 추세에 따라서 <장>을 <마당>이라고 부르던데, <마당>은 '들판'이라는 의미의 영어인 `field'를 그대로 옮긴 `장場'이란 말을 다시 그대로 한글로 옮긴 것이다. 물리학에서 <장>의 원래 의미는 `세력권 내의 세력의 분포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와 관련이 있다. 전`기', 자`기'는 각각 전장, 자장을 공간에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탄생> 편에서 언급했듯이, 배아세포(수정란)가 세포 분열을 거듭하여 생명체가 될 때에 각 세포의 분화는 그 세포의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오른 쪽 팔이 될 위치의 세포를 왼 쪽으로 이식하면 그 세포는 왼 팔이 된다. 원래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면 오른 팔이 되었을 것은 물론이다. 삼신할머니, 불교의 훈습설과 같은 이 이론이 결코 미신이나 종교의 교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형태 창조장>은 무수히 많은 <식의 집합체> 중의 하나이다. 소립자들이 원자를, 원자들이 분자를, 분자들이 어떤 물체를 만들 때마다 그 구성입자들의 <식>이 모여서 물체의 <식>을 형성한다. 우리의 의식은 당연히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들의 <식>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다. 형태 창조장이 작용하여 하나의 단백질이 만들어 질 때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서 하나의 새로운 형태 창조장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만들어진 창조장은 보존법칙에 의해서 존속 유지되어서 다시 다른 단백질이 만들어 질 때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용이 <기>로서 나타날 것임은 물론이다.

위의 생명 탄생과 각종 생명현상의 설명에서는 제외하였지만, 최근 카오스이론의 등장으로 생명의 탄생을 카오스이론을 통해서 해석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이 많이 있다. 복잡 계 내에서의 자기조직화 현상이다. 쉽게 말하자면 옛날 바닷물 속에 있던 많은 유기물들은 카오스 계이었으며, 그 복잡한 구성과 움직임(반응)은 카오스 이론에 의하면 필연적으로 생명체 같은 고도의 자기조직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이론은 저명한 생화학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이 제안한 후(그의 유명한 저서 ꡒ혼돈 속의 질서 Order out of Chaos")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말씀드린 바처럼 프리고진 등의 주장은 신과학 운동의 큰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아직 가설의 단계이며 그 구체적인 원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과학자들이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하는(그러한 현상의 관찰과, 비교적 단순한 일부의 현상에서는 수식적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자기조직화에 의한 창발 현상'은 <식과 기 가설>에 의해서 생명의 탄생과 동일하게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프리고진 등의 학설은 <식과 기> 이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체내의 각종 단백질들은 신체를 구성하는 역할뿐 아니라 각 종의 호르몬 등의 효소로서 우리 체내의 거의 모든 생리현상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몸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의 모든 생리작용이 단백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섬유처럼 긴 모양의 쇄상단백질은 주로 인체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으며 위에서 소개한 구형단백질은 주로 인체의 생리작용을 담당하고 있다. 인체에서 합성되는 단백질의 종류는 약 백만 가지이다.  우리 몸은 단백질로서 이루어지고 단백질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단백질의 구성재료인 20 종의 아미노산은 쉽게 만들거나 얻을 수 있으나, 아미노산을 체내에 필요한 형태의 단백질로 만들기는 무척 어렵다. 그 연결 순서와 뭉쳐진 후의 형태를 알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는 DNA의 유전 정보 중에서 일부 알려져 있는 단백질제조 부분을 잘라내어 대장균의 DNA에 주입하여 단백질을 만들게 한 다음 단백질을 추출해 내는 방법으로 몇 가지 단백질을 제조하고 있다. 인슐린, 성장호르몬 등이 그 예인데, 유전자 공학 산업이 거의 다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만약 <기>를 사용하여 체내에 필요한 구형단백질을 인공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인류의 질병치료와 건강증진에 기여하는 바는 이루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지대할 것이다. 인슐린, 성장호르몬 외에도 무수하게 많은 생체 효소 단백질을 낮은 가격으로 생산한다고 가정해 보라. 뿐만 아니다. 우리 몸 속에서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와 같은 병원균을 물리치는 항체 역시 같은 단백질이다. 암 세포의 성장과 사멸을 주관하는 것도--우리 인체 내의 모든 생리 작용은 단백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결국 생체 단백질의 생산은 완벽에 가까운 건강을 의미하는 것이다.


13. 생물의 진화와 의식


지금까지 우리는 양자역학의 발견들을 통하여 소립자가 식과 기를 가지고 있으며, 소립자의 기와 식이 생명을 탄생시켰고, 소립자가 모여서 우리의 육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카오스 이론의 자기조직화에 의한 창발과, 열역학 제2 법칙 및 보존의 법칙을 통하여 의식을 만들고, 의식은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기를 통하여 육체(물질)와 상호 작용한다는 것 등을 살펴보았다.


얼마 전에 미국의 모 주의 교육위원회에서 <진화론>을 교과서 내용에서 삭제하도록 결정하였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지가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요즘도 인터넷 등에서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의 <창조론> 옹호자들의 주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진화론>을 뒷받침 해 주는 과학적 사실들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을 불식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진화론> 그 자체에 약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ꡒ우연(돌연변이)ꡓ과 ꡒ자연선택ꡓ을 이론의 기초로 한다. 즉 생물 유전자가 어떤 이유로 우연히 복제과정에서 변화(돌연변이)가 생기면 그 변화에 의해서 다른 특성(형질)을 가진 후세가 태어나고, 그 후세의 변이된 특성이 생존경쟁에 유리하다면 살아 남게 되어서 새로운 종이 된다는 학설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모든 생물적 현상에 의하면 <진화론>이 가장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학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자연계에는 ꡒ돌연변이ꡓ와 ꡒ자연선택ꡓ만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진화의 현상들이 많이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기존의 <진화론>은 `옳은' 학설이기는 하지만 완전하지 못한 학설이라는 것이다.

ꡒ개미ꡓ에 대한 여러 가지 저술로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에서 한 예를 인용해보자.


ꡒ양의 간에 기생하는 간충(肝蟲)의 알은 양의 변으로 배출된 다음 달팽이에게 먹히고, 달팽이의 끈적끈적한 분비물을 통해서 달팽이의 몸밖으로 나온다. 달팽이의 분비물은 개미의 먹이가 되는데, 간충의 알들은 개미의 위장에서 부화하여 위장 벽을 뚫고 나온 다음, 개미가 죽지 않도록 자신의 분비물로 위장 벽을 막아 준다.

이제 간충의 새끼들은 개미의 몸 속 여러 곳에 퍼지는데, 몇 몇은 개미의 다리로 가고, 그 중 한 마리는 개미의 뇌로 들어가서 개미의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 밤중에 - 다른 개미가 다 잠들어 있을 때, 간충이 지배하고 있는 개미는 마치 몽유병자처럼 개미집을 나와서 양이 제일 좋아하는 풀잎 맨 위로 올라가서 아침이 오기를, 그래서 양이 그 풀을 뜯어먹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양에게 먹히지 않으면 아침에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개미는 정신을 차리고 개미집으로 돌아가서 정상적인 생활을 한 다음, 다시 밤중에 풀잎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ꡒ

이 사례는 1980년에 M. Love가 "Natural History"에 "The Alien Strategy"라는 제목으로 보고한 것인데, 이런 일이 ꡒ우연에 의한 필연ꡓ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진화론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생체 내에서의 자기조직화 현상으로 모든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프리고진도 이 사례를 ꡒ혼돈 속의 질서ꡓ에 인용하고 있지만, ꡒ어떻게 이런 일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도록 선택되었는가ꡓ하는 의문으로 끝내고 있다.

이 사례에서 주목을 끄는 점은 개미의 뇌에 들어가서 개미의 행동을 지배하는 간충의 새끼이다. 이놈은 개미의 눈을 통하여 외부세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개미의 다리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움직일 수 있다. 즉 개미의 뇌와 자신의 뇌를 모뎀으로 컴퓨터를 연결하듯이 연결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개미를 조종하여 목표로 하는 풀의 맨 위에 있는 이파리 끝까지 갈 수 있다. 의학의 발달로 동물의 두뇌 전체를 이식하는 것은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한 부분만을 이식 또는 외부와 연결하여 그 두뇌를 지배한다는 일은 앞으로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간충의 새끼의 뇌와 개미의 뇌가 많은 신경생리학자들의 주장처럼 전기-화학적인 `신경 회로적'으로 연결되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일은 외계의 생물이 인간의 몸 속에 들어와서 인간을 지배한다는 공상과학 영화처럼 비현실적이다. 차라리 <기>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으며 <기>를 통하여 개미의 뇌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비공상적'일 것이다.

중추신경계의 작용, 즉 의식이 순수한 전기-화학적 작용에만 의한 것이라는 견해는 이 사례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부정된다. 뇌 세포 사이의 정보 전달에는 전기-화학적 작용 이외에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현재 우리가 물리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방식으로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나의 <기에 의한 의식의 정보 전달> 가설의 근거이다.

물론 뇌 세포의 일반적인 작용과 신호전달에는 전기-화학적 과정이 분명히 지배적이다. 나는 다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한 ꡐ무엇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ꡐ무엇ꡑ이 <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 이외에도 수많은 생물들이 돌연변이설로서는 도저히 설명도 납득하기도 어려운 진화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파브르의 ꡒ곤충기ꡓ처럼 우리들 가까이 있는 몇 몇 생물들만 관찰하더라도 <진화론>보다는 <창조설>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의식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해명이 되겠지. 그때까지 기다리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 우리는 죽기 전에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이는지를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진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일까? 과학계에서의 진화에 관한 학설을 살펴보자.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대하여 환원주의적 관점을 가진 자끄 모노는 진화를 ꡒ우연에 의한 필연ꡓ이라 말한다. 돌연변이라는 우연이 반복되어 필연적으로 진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의 유전자의 유전정보는 DNA의 이중나선 상에 있는 <뉴클레오티드>로서 기록 보관되고 전달되는데, 뉴클레오티드는 각 첫머리 글자를 따서 A, T, G, C라고 표기되는 네 가지가 있다. 이중나선의 양쪽에 수많은 ATGC 뉴클레오티드들이 배열되는데, 항상 A는 T와, G는 C와 서로 결합하여 이중나선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DNA가 복제될 때에는 이중나선이 두 개의 줄로 풀어지면서 풀어진 각각의 줄에 새로운 줄이 입혀지면서 두 개의 새로운 DNA가 형성된다. 이때, A:T, G:C라는 결합쌍에 따라서 새로운 줄이 생기므로 복제된 DNA는 원래와 동일한 정보를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종의 유전정보에 변화(돌연변이)가 일어나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자끄 모노;ꡒ우연과 필연 Chance and necessityꡒ에서 발췌 인용)


1. 어떤 뉴클레오티드 쌍이 다른 쌍으로 바뀌는 경우(예를 들어 A:T가 G:C로).

2. 하나 또는 몇 개의 뉴클레오티드 쌍이 탈락되거나 추가되는 경우.

3. DNA의 일부분이 거꾸로 배열되거나, 반복되거나, 자리를 바꾸어 유전정보가 뒤섞이게 되는 경우.


이런 3 가지 유형의 변이들은 `외부의 고의적인 조작이 없다면` 우연에 의해서만 일어날 것이다. 이와 같은 유전자의 우연한 변화가 원시 미생물로부터 우리를 만들어 내었다는 주장이다. 자끄 모노에게 ꡒ우연ꡓ은 '신`이다. ꡒ우주에는 목적이 없으며(목적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오래 동안 우주와 생명체의 현상을 해석하는 철학론이었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비로소 인류는 스스로의 미래를 개척할 예지와 용기를 가질 수 있다ꡓ고 그는 주장한다(ꡒ우연과 필연ꡓ의 역자 소개 말에서). 좋은 말이다.

사실 유전자의 변화는 위의 세 가지 경우 이외에는 고려해 볼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 다만 아직 미심쩍은 것은 과연 저러한 `우연'이 진화라는 눈부시도록 정교하고 조직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자끄 모노는 박테리아의 변종발생 확률을 근거로 한 수치적인 계산 예를 제시하고 있다.


ꡒ박테리아의 유전자가 변형되어서 새로운 기능의 단백질을 `우연히' 만들어 내게 될 확률은 한 세대마다 약 백만 내지 일억 분의 일이다. 그러나 박테리아는 불과 몇 방울의 배양액 속에도 수십 억 마리가 있다. 여기서 생길 수 있는 특정한 기능의 돌연변이체의 숫자는 10 ~ 1000 분지 일 정도의 확률이다. 모든 돌연변이체의 숫자는 십만에서 백만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등생물은 박테리아 보다 개체 수는 적지만 유전자의 숫자가 천 배 이상이다. 즉 개개의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천 배 이상인 것이다. 유전자의 숫자가 가장 많은 인간에게 유전자의 변형에 의한 유전질환이 많이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ꡒ


확실히 이와 같은 주장은 타당성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진화에는 또 이런 예가 있다. 바퀴벌레나 상어는 일억 년 이상 조금도 진화하지 않고서 원래의 모습과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생물을 ꡒ화석생물ꡓ이라 하는데, 화석 자료에 의해서 수천 만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실라칸스라는 물고기가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부근에서 발견된 사실은 당시 매스컴을 통해서 널리 보도되었었다. 약 십 년 전에는 일본의 한 팀이 살아 있는 실라칸스의 생태를 촬영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만약 진화가 ꡒ필연적인 것ꡓ이라면 어째서 화석생물들은 그 ꡒ필연ꡓ으로부터 예외일 수 있는가? 자끄 모노는 이런 현상을 ꡒ역설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ꡓ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ꡒ생물의 어떤 종의 굉장한 안정성이라든지, 진화가 수십 억 년간에 걸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든지, 세포의 기본 화학적 `설계'의 보편성이라든지 하는 것은 명백히 합목적적인 시스템이 지니는 고도의 일관성에 의해서 비로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데 이 일관성이 진화에 있어서 안내역과 브레이크 역할을 동시에 행하여 온 것이며 또한 그에 의해서 자연의 룰레트가 부여하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하는 막대한 기회(주:돌연변이의 발생 확률) 중의 극소 부분만이 받아들여져서 확대되고 짜여져 온 것이다.ꡓ


물론 이 글에서 그는 ꡒ합목적적인 시스템ꡓ이나 ꡒ일관성ꡓ이란 말의 의미를 ꡒ목적론ꡓ에서의 그것과는 차이를 두고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ꡒ목적론적ꡓ인 개념을 배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 ꡒ종의 안정성의 이유ꡓ인 ꡒ성공적인 돌연변이의 낮은 확률ꡓ이 어째서 특정한 생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30만 년 내지 백만 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 종의 수명에 비해서 일억 년 이상인 바퀴벌레나 상어, 잠자리, 바다나리 등의 종의 수명은 지나치게 길지 않은가? 종의 수명이 길다면 그만큼 진화의 우연한 기회는 더 많아지지 않는가?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대한 연구에서 당시 세계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노벨상 수상자요 파스틔에르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던 자끄 모노도 진화에 있어서는 이처럼 다소 이중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진화론>의 기본 원리가 ꡒ우연에 의한 필연ꡓ이라는 자끄 모노의 학설이 진화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생명의 진화를 ꡐ우연ꡑ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은 많은 과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ꡒ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ꡓ의 저자 리차드 도우킨스Richard Dawkins (영국, 1941 ~ )는 그의 저서 ꡒBlind Watchmakerꡓ에서 자연도태에 대하여 ꡒ누적적 도태론ꡓ을 주장하고 있다. 자연도태는ꡐ우연히ꡑ(여기서는 chance가 아니라 random 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차이는 chance에는 ꡐ기회ꡑ라는 약간의 의지적인 요소가 있는 반면 ꡐrandomꡑ 은 완전히 난수적인 우연을 말한다)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어떤 진화한 기능)가 선택되면 그 위에 다시 그 다음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 난(蘭)의 어떤 종류는 꽃 부근에 벌의 암컷의 하반신과 흡사한 모양을 만들어서 벌을 유혹한다. 이 경우에 꽃이ꡐ우연히ꡑ벌에게 꿀이 아니라 암컷의 몸을 닮은 것으로 벌을 유혹하는 데 성공하였다면, 그 뒤에는 더욱 비슷한 것, 그리고 냄새까지도 갖춘 것을 남기도록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물론 기존의 자연도태설 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이론이다. 그러나 그 이론적 근본에 있어서는 역시ꡐ우연ꡑ이라는 짙은 안개 속에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진화의 누적적 방식은 ‘목적성’이라는 의지적인 요소의 실재를 우리에게 인지시켜 주는 것이다. (ꡒBlind Watchmaker 눈먼 시계공ꡓ 이란 말은 창조론자들에게는 매우 불경스러운 표현이다. 이 말의 연유는 이렇다. 창조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노력은 예로부터 많이 있었지만, 그 중 비교적 강력한 논리가 ꡒwatchmakerꡓ 논리이다.

ꡒ당신이 사막 한 가운데에서 시계 한 개를 발견했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그 시계의 복잡한 구조와 기능을 보고서 누군가 그 시계를 만든 사람(watchmaker)이 ꡐ있을ꡑ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막의 모래와 바람과 햇볕이 시계를 저절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니까. 우주, 그리고 지구상의 생물들은 시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다. 그렇다면 우주와 생명을 만든 ꡐ누군가ꡑ가 존재할 것이다. 그 ꡐ누군가ꡑ가 바로 창조신이다.ꡓ

이 논리는 ꡐ그토록 복잡 정교한 우주와 생명을 만들 수 있는 존재(창조신)는 우주와 생명보다 더 복잡 정교할 것이다. 시계공장이 시계보다 더 복잡 정교한 설비와 기술을 필요로 하듯이. 그렇다면 창조신 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한ꡐ무엇ꡑ이 있어야만ꡐ창조신ꡑ을 만들 수 있을 것이 아닌가?ꡑ하는 순환논리에 의해서 모순이 되어 버린다. 결국 복잡 정교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더 복잡하고 정교한 상위의 존재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도우킨즈는 생명의 탄생과 진화가ꡐ우연ꡑ에 의한 시행착오, 즉ꡐ맹목적ꡑ이라는 의미로 창조신의 논리를 빗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생명의 탄생뿐만 아니라 진화현상을 카오스 이론으로 해석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진화도 생명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복잡 계의 자기조직화에 의한 결과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카오스 현상> 편에서 자세하게 말씀 드린 것처럼 `이론적이지 못한 이론'이다. 즉 아직까지는 `그와 유사한 경향이 관찰된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생명의 탄생 과정을 유추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채택하는 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화가 DNA의 변화에 의해서만 일어 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DNA는ꡒ복잡 계ꡓ가 아니라 정반대로 고도의 질서를 가지며 극히 안정되어 있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복잡 계의 이론을 끌어다 적용시킬 명분이 없는 것이다. “복잡 계”의 요건은 열역학적 비평형 상태 하에서 활발한 국부적 요동이 있어야 하는데, DNA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DNA의 변이는 의도되지 아니한 ‘우연’일 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진화론>의 설명에 자끄 모노의 견해를 지지한다. DNA의 염기쌍이 인간의 경우 30 억이나 되지만, 그 구조는 복잡 계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DNA가 복잡 계라면 진화는커녕 생명의 존속마저도 불가능할 것이다. 복잡 계 -- 카오스 계는 ‘혼돈 속에 있는 질서’를 나타낼 뿐이다. 그 기본은 ‘’질서‘가 아니라 혼돈’인 것이다. 또한 DNA가 복잡 계의 이론을 적용시킬 수 있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복잡 계의 자기조직화, 창발 효과가 이미 입자의 식과 기의 작용에 의한 것임은 물론이다.


여기서 잠시 최근 컴퓨터의 발달에 힘입어서 첨단과학의 한 분야가 되어 있는 인공지능 이론을 살펴보자.

미국의 유명한 수학자 폰 노이만 Von Neumann이 제안했던 <자기복제 기계 self-reproducing automata>란 자신과 꼭 같은 기계를 계속 생산해 낼 수 있는 기계를 말한다. 물론 만들어진 기계 역시 자신과 같은 기계를 계속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번식기계>인데, 실은 모든 생물들이 다 일종의 <자기복제 기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천체물리학자 프리만 다이슨은 이 아이디어를 미래 우주개발 사업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예를 들어서 산소가 없는 화성에 토양(흙은 규소, 철, 알미늄 등이 산소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을 분해하여 산소를 생산할 수 있는 자기복제 기계 한 대를 보내면 이 기계가 계속 번식하면서 산소를 만들어 내므로 화성의 대기에는 곧 산소가 풍부해질 것이다.

폰 노이만은 <자기복제 기계>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 이론은 그 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여러 학자들이 증명하였다. 그래서 <자기복제 기계>를 <노이만 머신>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노이만 머신>을 한 층 더 발전시킨 모델로서 <다윈 머신Darwin machine>이 있다. <다윈 머신>은 단순한 자기복제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진화시켜 나갈 수 있는 기계를 말한다. <진화론>의 선구자인 다윈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은 물론이다. <다윈 머신>은 아직까지 그 가능 여부가 이론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ꡒ노이만 머신ꡓ이론이 랭튼 Langton 등에 의해서 증명된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물론 모든 생물은 그 자체로서 노이만 머신이므로 굳이 이론적으로 그 가능성을 증명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생물의 진화가 단순한 <우연>에만 의한 것이라면 생물은 <노이만 머신>에 해당하는 것이지, <다윈 머신>은 아니다. 자끄 모노의 유명한 책 <우연과 필연>에서 표현된 것처럼 ꡒ우연의 필연성ꡓ일 뿐이니까 말이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 와서 이 번에는 자연계 전체의 진화현상을 생각해 보자.

위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ꡒ우연ꡓ에 의한 진화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많은 `신기한' 진화의 사례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수십 억 년 전 미생물로 시작된 생명이 지금 인간의 수준으로까지 진화하였다는 사실과, 그리고 인간 외에도 수 백만 종의 다양한 생물을 만들어 낸 것을 보면 생물은 <노이만 머신>이 아니라 <다윈 머신>이라 보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ꡒ우연ꡓ만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어 보이는 수많은 진화의 사례들을 고려하면 더 더욱 <생물>은 스스로를 진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다윈 머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겠다.

아마존 유역에 사는 메뚜기의 한 종류는 위에서 보면 길이 10 Cm의 작은 악어로 착각할 만큼 훌륭한 위장술을 가지고 있다. 가짜 눈, 반쯤 벌린 악어의 입과 이빨 모양의 그림까지 , 그 천적인 새들 뿐 아니라 위장인 줄 알고 있는 사람까지도 선 듯 손이 나가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악어모양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새들은 크기에 관계없이 그 색과 형태를 통해서 대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이 메뚜기는 악어들이 사는 강변의 진흙 밭에서 천적인 새들을 겁내지 않고 항상 느긋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이상 라이얼 왓슨의 ꡒLiferide"에서 발췌 인용). 앞에서 말씀드린 유전자의 우연한 변이로 이런 진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창조론을 따르지 않는 나 자신도 이러한 진화의 과정에 무엇인가 어떤 ‘목적론적인 작용’이 개입하였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우연에 의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생물진화에 가장 크게 작용해 왔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문제는 그것 만으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기관 중 가장 정교한 눈을 보자. 눈은 수정체와 망막, 신경섬유 다발, 그리고 시각정보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뇌 세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시스템이 `돌연변이의 누적'만으로, 또는 갑자기 생겨날 확률이 얼마일까? 설계도나 안내가 없이 그처럼 복잡 정교한 시스템이 `우연히' 그리고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을 수 있는가? 차라리 창조설 쪽이 훨씬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위에서 생물의 ꡒ다윈 머신ꡓ 개념을 말씀드린 것은 나는 생물이 자기진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지에 의해서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지'란 바로 <식>이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ꡒ우연에 의한 필연ꡓ 역시 진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로서 인정한다.


그렇다면 돌연변이 외에 <의식>이 생물의 DNA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일까?

의식이 물질 - 특히 자신의 신체에 작용할 수 있다면 당연히 DNA에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원리상 그렇다는 말임을 주의하셔야 한다. 기공사들이 몸 속에서 기를 순환시키듯이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DNA는 너무나 미세한 분자이며 그 구성도 너무나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DNA를 수정할 수 있다는 증거가 있다.


ꡒ선천선어린상홍피증 先天性魚鱗狀紅皮症ꡓ이란 병이 있다. 피부의 지방 및 땀을 분비하는 조직의 기능이 저하되어 피부 전체가 원시시대의 물고기 비늘처럼 거무스름한 각질로 변하는 무서운 병이다. 이 병은 유전적인 것이므로 치료 방법이 없다. 병의 원인이 되고 있는 DNA의 해당 부분을 수정하지 않고서는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 1951년까지는 불치병이었다. 런던의 퀸 빅토리아 병원의 A. Mason 박사는 이 병에 걸린 16세 소년을 대상으로 최면술을 사용한 치료를 시도하였다. 1951년 2월 10일부터 시작된 초기 치료에서는 왼 쪽 팔에만 주의를 집중시켰는데, 2월 15일로 접어들자 나무껍질처럼 굳어 있던 외피가 벗겨지면서 정상적인 피부가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10일 째에는 어깨까지 팔 전체가 정상을 찾았다. 몸 전체는 몇 달만에 회복되었으며, 그 소년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후, 수많은 이와 같은 예가 보고되었다. 선천성선상모반증, 선천성조경증 등의 유전질환 외에도 고혈압, 대장염, 알레르기, 사마귀, 결핵 등의 체질적, 세균성 질환까지도 최면술로 치료되었다는 보고들이다.ꡒ (라이얼 왓슨, ꡓ생명조류 Lifetideꡒ에서 발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최면술>에 의해서 치료되었다는 것이다. 환자 자신의 의지(의식)만으로서는 자신의 DNA를 조작 변경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DNA를 조작한 것일까? 어떤 지능체가 자신보다 더 높은 지능체를 설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고려해야만 한다. 만약 의식이 DNA의 설계대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DNA의 작품인 의식이 DNA 자체를 개선할 수 있는가? 하는 논리적 문제 말이다.

생물은 <다윈 머신>일 것이라는 생각을 말씀드렸지만, `자신의 가장 어려운 상대는 바로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가 강아지 보다 지능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보다 더 높은 지능체를 상상할 수 있는가? 단순히 암기력이나 빠른 숫자 계산력이 아닌 분석,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에서 말이다.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하는 논리학의 문제이다. `나는 거짓말쟁이 이다'라는 말처럼 자신에 대한 자신의 행위는 흔히 `자기언급 모순'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논리를 그 기반과 수단으로 하는 수학(논리학)에 있어서도 ꡒ어떤 논리적 체계도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없다ꡓ라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있다. 따라서 나는 생명체가 다윈 머신일 것이라는 나의 생각을 더 이상 입증하려 들지 않겠다. 이것은 직관, 믿음의 문제인 것이니까(실은 생명은 다윈 머신의 정의에 해당한다. 즉 다윈 머신이다. 지금까지의 진화 결과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생명체가 ꡒ자기진화 기계ꡓ이더라도 ꡒ자기만에 의한 진화ꡓ의 속도는 무척 느릴 것이다. 그러나 생물 진화의 역사를 보면 초기에는 무척 느렸지만 약 5 억 년 전부터는 급작히 빠른 속도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5억 3천 만 년 전의 캄브리아 기(期)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생물이 갑자기 생겨났기 때문에 “유전자 폭발”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당시의 생물 화석을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이상한 종류가 많다. 어째서 지구상에 생명이 처음 탄생한 이후 30억 년 이상을 미생물 형태로 머물러 있던 생물이 불과 5 억 년 전부터 그 진화의 속도가 이처럼 폭발적으로 빨라졌을까? 당시에 의식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던 형태 창조장에 의한 정궤환(바른 되먹임, positive feed-back) 효과를 제외한다면 이때의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 생물학자들은 다세포 생물의 출현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이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말씀드린 바처럼 미생물의 경우에는 그 번식(세포분열)주기가 짧기 때문에 빠른 진화에 훨씬 더 유리하다. 그럼에도 어째서 미생물은 30억 년 동안이나 진화하지 않고 -- 지금까지도 -- 그대로 있었을까? 결국 미생물과 다세포 생물의 식의 수준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식만으로 <자체 유전자 조작 self-DNA-operation>을 통한 <자기진화>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기에는 논리적인 문제가 있다.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식>과 더 큰 <기>를 가진 <무엇>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사후식(死後識)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한다.


<사후식>들은 당연히 서로 교응이 가능할 것이며, 엄청나게 많은 숫자(양)의 사후식이  집적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 데이터의 양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합쳐놓은 분량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 <사후식>의 총합의 분량만큼 강할 것이다. 약 10억 년 이전의 단세포 생물 시대에는 생물의 식도 사후식도 그 수준이 ‘단세포적’으로 낮았을 것이다. 캄브리아기 시대의 생물들은 이미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분석하여 자신의 행동을 그 결과에 맞추는 정보 처리능력, 즉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식과 모든 식의 집합체인 사후식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을 것이며, 사후식이 형태 창조장을 통하여 진화의 과정에 참여(feedback)하게 됨으로서 폭발적인 진화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후식의 집합체>가 마음대로 또는 그리 쉽게 DNA를 조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인간의 지식 수준이 - 결국 <사후식>의 지식수준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아무리 생물이 <다윈 머신>이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개량하는 일이 그리 쉬울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사후식>에 의한 진화는 ꡐ우연과 필연ꡑ에 편승하여 시행착오적으로 진행될 것이므로, 그 속도는 상당히 느릴 것이며, 실제 생물의 진화과정이 그것을 뒷받침 해준다. 최초의 원시 단세포 미생물이 지구상에 생겨난 것은 지구가 형성된지 약 7억 년 만인 38억 년 전이었다. 미생물의 식은 너무 미약해서 그것들의 사후식은 집합체를 형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후식의 도움에 의한 진화의 속도 역시 매우 느렸을 것이다. 실제로 원시 미생물은 약 30억 년 동안 거의 진화하지 못하였다. 비록 느린 속도였지만 진화가 계속되어 그 사후식도 누적되어 커짐으로서 진화의 속도는 점차 빨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누적'의 효과는 수학적으로 `지수적'인 결과를 낳는다. 약 5 억 년 전부터 진화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여 생물은 지구 역사에 비하면 매우 짧은 기간 동안에 지금과 같이 다양해지고 번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구가 오늘 새벽 영시에 생겼다면, 최초의 박테리아는 새벽 05:20에, 다양한 생물이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은 밤 21:40, 윈시 인간의 출현은 자정 20초 전, 그리고 인류 문명은 불과 자정 0.1초 전이다.


< 진화의 목적은? >


진화의 이유와 속도 외에 그 <목적>을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지금까지 생명체에 있어서 <목적론>은 근거 없는 가설이라고 팽개치기에는 너무나 뚜렷한 `현상적 사실'이다. 생명의 탄생과 진화는ꡒ우연에 의한 필연ꡓ이라고 주장하는 환원주의자인 자끄 모노 역시도 이에 동감하고 있다. (ꡒ우연과 필연ꡓ, 그는 ꡐ동감ꡑ은 하지만 언젠가는 결국 분석에 의해서 해석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생명의 탄생> 편에서 인용하였던 글을 다시 인용하겠다.


ꡒ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예외 없이 공통적인 근본 특성들 중 하나는 목적 또는 계획을 부여받은 대상들이 된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 계획이나 목적은 그들의 구조에 나타나며 그들의 행위를 통하여 수행된다.ꡓ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은 구조와 행위 속에서 그들이 목적을 추구하고 결정하는 것을 받아들이려는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목적론적 성질을 인식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한다. 그러므로 최소한 겉으로 드러난 바로는 여기에 뚜렷한 인식론의 모순이 존재한다ꡒ.


물론 그는 그 `목적 또는 계획'이 ꡒ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에 의해 부여된다고 생각한다. 소립자들이 원자와 분자를 이루는 것까지는 소립자의 본질적 성질이 그러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생명체를 이루고 나면 문제가 달라진다. 왜 모든 생물은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일까? 왜 지극히 하등생물인 박테리아마저 `오로지 번식'만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생물학자(F. Jacob) 의 표현처럼 ꡒ모든 세포는 두 개의 세포가 되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는 것ꡓ일까?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아메바는 생명의 기본 단위로서 그저 소립자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이것이 그냥 `우연히 그렇게 동작하도록 우연히 만들어진 DNA를 가진 생물들만 살아 남았기 때문'인가?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의 집단 조직적 행동이 DNA에 `우연히' 주입될 수 있는 것인가?

진화는 더욱 어려운 문제를 던진다. 왜 남조류 같은 원시 단세포 생물들은 다세포 생물로, 또 다세포 생물들은 식물과 동물로 진화하는 것일까? ꡒ진화ꡓ라는 표현은 과연 정확한 것인가? 코끼리는 박테리아보다 더 `진화'한 생물인가? 자연계에서 생존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코끼리보다 박테리아가 더 유리하지 않은가? 인간이 AIDS 바이러스보다 더 `고등'하다는 평가는 무엇을 기준, 근거로 한 판단인가? 인간은 AIDS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하지 않는가? 자기복제 분열을 거듭하는 미생물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서 번식능력이 없어지면 스스로 노화 사망하는 다세포생물이 어째서 `진화'한 생물인가? `진화'란 인간의 어리석고 헛된 자존심의 충족을 위한 자위개념이 아닌가? 이처럼 <자의식>을 가진 인간 이외의 생물에 있어서는 `진화'라는 개념을 말 뜻 그대로 인정할 근거는 없다. 아니 개미가 어떤 기준에서 박테리아보다 더 `진화한' 생물이란 말인가?

인간이 돼지나 들풀 한 포기보다 더 진화된 생물이라서, 그래서 더 행복한가? 무리를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목숨을 버리는 개미나 벌에 비해서 생의 집착에 괴로워하는 인간이 석가의 가르침처럼 고통의 바다 속에 있는 것이라면, 진화는 지옥으로 가는 편도 차선인가?


자, 왜 생물은 `진화'하는 것인가? `진화'가 자끄 모노의 생각처럼 ꡒ우연에 의한 필연ꡓ이라면 무엇이 그 `필연성'을 요구하는가? 그 근거는 자연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과 그 의식은 자끄 모노의 생각처럼 `우연'이 거듭되어, 또는 프리고진의 생각처럼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현상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 필연적으로 그리고 저절로-- 생겨난 우연의 사생아인가?

`진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진화에 어떤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생존경쟁에 있어서 박테리아보다 더 불리한 인간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된 생물이 아닌가? 박테리아는 처음 탄생하였던 원시시대의 그 생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박테리아는 자기복제분열로서 현재까지 수십 억 년의 수명을 누리고 있다), 그 숫자에 있어서도 압도적이다. 질 좋은 한 줌에는 세균과 진균 각 일 억, 원충 3 천 만 마리가 살고 있다. 3 천 평 정도의 흙에 있는 박테리아의 무게는 무려 수 톤에 달한다.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박테리아만큼 성공적인 생물이 있는가?

생물의 진화과정은 `실패의 연속'이다. ꡒ화석자료는 실패한 진화 사례들의 창고이다ꡓ라는 말처럼 생물의 진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 생물학계에서는 한 종의 평균수명을 약 30만 년 내지 백만 년으로 잡는다. 일억 수천 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하였던 공룡은 지금까지 지구상에 있었던 종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물이었다 할 수 있다. 공룡은 왜 멸종했을까? 약 6천 5백만 년 전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지름 10 Km의 운석이 그 원인이라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화석자료는 이미 그 이전부터 공룡의 종류와 숫자는 현격하게 감소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진화가 다른 종과의 생존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라면 공룡은 지구의 생물사상 가장 진화한 종이었다. ꡒ티라노사우르스 렉스ꡓ보다 더 강한 육상 생물은 없었다. 그러나 유카탄 반도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기 전에 생물 종으로서의 공룡은 이미 그 수명을 마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인기 소설 ꡒ쥬라기 공원 The Jurasic Parkꡓ에서는 공룡의 멸종이 카오스 이론에 의한 필연적인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소설에서는 유전 공학자들이 인공적으로 공룡을 재생시킬 때 번식능력을 제거했지만,  ‘생명체’라는 카오스 계의 창발 효과에 의해서 공룡이 스스로 번식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도, 그리고 카오스 계인ꡐ생명ꡑ을 대상으로 하는 공원 전체가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것도 역시 카오스 이론에 의한 ꡒ우연적인 필연ꡓ이라는 것이 그 소설의 배경이다.) 생물의 진화는 이처럼 그 대략적인 현상만을 보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 투성이 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의 근거인 <의식>이 생명현상에 있어서 과연 그렇게 `우월한' 특성인가? 그렇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있다. 나는 우리의 <의식>에 기대고 싶다. 한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의식> 아니겠는가. <의식>이야말로 그 멀고도 오랜 생물 진화의 결실이라 생각한다. 의식의 수준 이외에는 진화를 진화라 할 명분이 달리 없다.

진화에 있어서 <의식의 형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자.

리차드 도우킨즈로 대표되는 기계론적 관점을 선호하는 분자생물학자들, 그리고 그 당사자인 DNA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식의 형성>은 분명히 `의도된 것'은 아닐 것이다.

도우킨즈는ꡒ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DNA의 로보트일 뿐이라고 말한다. DNA는 DNA 자신의 생존과 유지(번식)를 위해서 우리의 몸을 만들고 의식을 형성하며, DNA 자신이ꡐ늙기(DNA 도 세포 내에서 복제를 거듭하는 동안 노쇠 현상을 겪는다. DNA에 변형이 생기는 것이다. 이 변형은 아주 가끔 진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암이 되는 등의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전에ꡑ다시 다른 새로운 육체를 만들기 위해서 그 동안 자신이 만들어서 움직이고 있던 육체를 죽여 버린다. 그리고 그 새로운 육체(우리의 자손)로 옮겨가는 것이다. DNA는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생물에게 ꡐ본능ꡑ을 강제로 부여하고 있다. 성욕, 식욕은 물론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도 DNA가 구 보존을 위해 우리에게 강제하고 있는ꡐ임무ꡑ인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ꡐ나ꡑ는 유전적,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실은 DNA의 일시적인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심지어 DNA는 <진화>를 거부하고 대항한다. 그 장치로서 DNA는 ‘자살’을 감행한다. 모든 다세포 생물은 늙어 죽는다. 왜?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유전자의 변이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진화이론에 의하면 유전자의 변이야말로 진화의 원동력이다. DNA에는 진화를 막는 기전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DNA에게 있어서 <진화> 그 자체가 의도되지 아니한 것임은 물론, 진화는 DNA를 위협하는 적이다. 이런(DNA의) 관점에서 본다면 진화는 분명히 퇴화인 것이다. DNA의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동일복제에 의한 보존이다.

(띠야르 샤르댕의 물활론의 요점인 물질에 진화의 방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가설은 이러한 사실로서 부정될 수 있다. 만약 진화를 지향하는 ‘벡터’가 물질에 들어 있다면 유전자는 완전한 카오스 계의 특성을 지니도록 ‘설계 제작’되었을 것이며, 단세포 생물처럼 그 수명이 영구할 것이다. 그러나 물질의 식은 의식 수준으로 조직화되기 이전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미소하다.)


의식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의식은 분명히 DNA의 통제권 밖에 있다. 우리 몸의 발생과 생존, 번식에 의한  DNA의 보존 등 DNA의 지배를 받고 있는 다른 모든 생명현상과 달리 의식은 DNA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때로 `자학적' 행동을 하기도 하며 더러 자살하기도 한다. 실제로 인간의 DNA에는 뇌를 만들기 위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다. 뇌는 유아기에 뇌 세포들을 서로 연결하여 조직하는 시�스 연결망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잘 구성되는가에 따라 그 성능이 좌우된다. 이 과정은 뇌의 학습능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DNA에는 뇌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자료만 있을 뿐이며, 뇌는 학습능력과 카오스 이론의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현상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다.

도우킨즈는 (인간의)의식이 DNA의 수십 억 년에 걸친 압제에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혈우병 등의 유전적 질환을 가진 환자라면 DNA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도태되어야 하는 불량 유전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혈우병에 걸린 어린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의식은 분명히 DNA가 그 `이기적인 본성'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생명현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ꡒ의식의 주요 기능인 지능은 생존경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한다ꡓ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유물론적인 관점을 배경으로 하는 여러 주장들 -- 기능주의, 부현상론 등에 의하면 의식은 단지 뇌 세포들의 유기적인 활동에 의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허상일 뿐이며, 뇌 세포들의 그러한 기능은 생존경쟁력을 높여서 결국 DNA보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합리적이며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뇌를 만들기 위한 DNA의 정보량은 약 10억 bit 인데, 이중에서 중복, 무의미한 정보를 제외하면 약 1 억 bit 이다. 이에 비해서 완성된 뇌의 구조 정보량은 약 10조 bit 이다. 그 차이는 무려 10 만 배에 달하는데 모두 학습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획득한 정보이다. 생물이 생존할 수 있는 근본적 이유는 DNA의 정보보다 더 고도의 것(의식)을 학습을 통하여 구축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학습에는 DNA 정보의 보충과 환경적응이라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사실 생물 진화의 가장 큰 무기는 학습 기능의 획득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뇌와 컴퓨터의 기능의 차이도 학습 능력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학습>은 무엇인가? 바로 <정보의 처리 능력>이다. 뇌의 가장 뛰어난 기능인 가설을 세우고 다시 feed-back으로 그 가설을 수정 개선하는 과정은 곧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학습 과정은 <생명의 탄생> 편에서 설명한 <형태 창조장> 가설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들은 다시 <자끄 모노>의 ꡒ우연ꡓ으로 귀착된다. ꡒ우연ꡓ은 문제의 회피일 수도 있고 대답일 수도 있다. ꡒ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ꡓ라는 변명과 같이 말이다.ꡒ우연ꡓ은ꡒ모순ꡓ처럼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개념이다. ꡒ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ꡓ라는 말은 실은 ꡒ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른다ꡓ라는 의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ꡒ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가 없다ꡓ라는 의미이며, 그래서 ꡒ인과율을 벗어났다ꡓ라는 의미이다.

그렇다. 우리의 의식은 DNA를 넘어선 것이다. 의식은 기계론적 인과율로부터 일정 부분의 자유를 획득한 것이며, 비록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있어서 그 초기에는 DNA에 의존하여 그 지배를 받아 왔지만 이제 인간은 주체성을 확보하였다.  21 세기의 유전공학은 DNA 개조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이런 여러 문제들을 살펴보고서 나는 <진화과정은 사후식의 작용이며, `식'의 작용이므로 그 동기--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목적은 `의식의 형성'과 `의식 자체'의 고양(진화)>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의식이 하등생물이나 무생물의 그것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에 일단 동의한다면 모든 진화의 결과(목적)는 <의식의 향상>이라는 결론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식의 향상> 외에 다른 관점--예를 들어 종족의 유지(번식)라는 점에 있어서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화'와 `퇴화'를 구별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니, 의식 이외의 기능상의 진화는 곧 퇴화인 것이다. 생물은 단순할수록 자연선택에 유리하다.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적 관점에서라면 진화는 퇴화이며, 인간은 현재 생물계에서 가장 하층까지 퇴화한 종인 것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 Karl Popper는 ꡒ동물계에 있어 의식의 대두는 생명 그 자체의 기원에 필적하는 위대한 신비일런지도 모른다.ꡓ 그리고 신경학자 로저 스페리 Roger Sperry 는 ꡒ의식의 등장이야말로 진화의 전 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ꡓ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류의 진화에 있어서 의식 형성의 중요성은 간과하기 쉽지만,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화를 검토하고서 얻은 결론은 이제 다음과 같다;


-. 생물의 진화과정에는 어떤 높은 수준의 의식체가 작용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진화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의식체는 사후식의 네트워크이다.


-. 생명과 의식은 상보적으로 서로를 진화시켜 왔으며 생명과 진화의 목적은 의식의 고양(高揚)이다. 즉 사후식의 네트워크의 자체 고양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 결론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항들은 <사후식의 세계>에서 검토해 보겠다.


(주;ꡒ우연과 필연ꡓ에서의ꡐ우연ꡑ은 단순한ꡐ우연ꡑ이 아니다. 그 영어표기인ꡒchanceꡓ는 ‘우연ꡑ과ꡐ기회ꡑ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ꡐ우연ꡑ이 완전 수동태인데 비해서 ꡐ기회ꡑ는 능동적인 무엇, 즉 ꡐ의지ꡑ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우연‘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ꡐ우연ꡑ에서는 ꡐ우연ꡑ밖에 나올 수 없다. ꡐ우연에 의한 필연ꡑ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 ꡐ우연ꡑ에 내포되어 있는 <식>의 작용으로 ꡐ우연ꡑ은 ꡐ기회ꡑ가 되고, ꡐ기회ꡑ는 ꡐ필연ꡑ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출처] 기와 과학 (9-13)|작성자 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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