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기와 과학 1~4

자유지향 2008. 6. 4. 23:21

 

   1. ‘기(氣)’가 뭐길래?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공학 공부를 한 사람이다. 나와 비슷한 성장 배경의 사람들이 대개들 그러하듯이 나는 무당이나 점, 사주 등을 미신이라 생각해 왔으며, `기氣' 같은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는 불교 신자 집안 출신으로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또 본인의 말에 의하면 `기'가 강해서 웬만한 무당이나 복술인(卜術人)들은 자기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단다. 사실 나는 온갖 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서 단학, 명상, 기공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고 책을 따라서 흉내도 내 보았지만, 시작한 동기가 믿음이 없이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던지라 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련기간을 가지지 못했다. 반면, 아이들 엄마는 기공이고 뭐고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잠시 정신을 집중시키고 두 손바닥을 마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기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분하고 억울하게'도 애들 엄마로부터 `기'도 느끼지 못하는 ‘하등동물’ 취급을 받아왔던 터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기도 뭣한 일이고, 유행하는 `단丹'. `선 禪' 이런 것을 지도하는 학원엘 다니기에도 맘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 하면 수련 몇 달이면 '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과학적, 객관적 근거가 없는 '기`란 것에 대하여 미심쩍어 하는 불신감이 약간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UFO, 아틀란티스 등의 고대문명, 동서양 모두에 널리 퍼져있는 유령 이야기, 환생, 최면술에 의한 전생 기억 -- 이런 신비주의occult 이야기들처럼 말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파룬궁(法輪功)>이란 기공수련회가 규모가 너무 커지다 보니 중국 당국의 견제를 받게 되어서 무더기로 체포되는 소동이 있었지만, 사실 중국에 가보면 아침마다 공원에서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유명한 기공사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은 호텔에서 기공사에게 척추안마를 받아 본 적도 있지만 결과는 `글세, 이 정도라면 안 하니만 못 하쟎아?' 였다. 그 기공사가 엉터리였는지 아니면 내가 기감을 느끼는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일억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집단최면에 걸려서 헛것을 믿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 어느 주간지의 <기> 관련 특집기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도 기공 수련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아직까지 나 같은 일반인들은 도대체 `기'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을 믿지 않을 도리도 없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최소한 궁금증이라도 풀어야 숨이 터질 입장이 된 것이다.

`기'의 원산지는 동양, 특히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이지만, 서구에서도 `기'에 대한 연구는 오래되었다. 기뿐 아니라 여러 가지의 초능력 연구소들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조시대의 퇴계, 율곡 선생의 `이기론' 논쟁이 역사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오래되었고, 특히 요즘은 사회 곳곳마다 `기'가 유행이다. 곳곳에 수련도장 간판이 있고 서점에 가면 `기氣'자가 들어 있는 제목의 책들을 수십 종류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학계를 보더라도 이공학(理工學) 계통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국정신과학학회>가 설립되어 있어서 기 현상을 연구의 한 분야로서 다루고 있으며, 기에 대한 책도 내가 알기로 두 권이나 공동 저술(논문 모음)로 발행하였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내가 알고 싶어하는 `기란 무엇인가?', 즉 ?기?의 정체에 대한 이론적 근거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기껏 `생체 에너지, 공간 에너지, 우주 에너지, 정보를 담은 에너지' 등의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짐작’뿐이다. `기氣', `단丹', `선禪', `명상瞑想' 이런 유(類)의 서적들을 뒤져보아도 `기'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체계적인 설명이나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책마다 사람마다 제각기 설명과 주장이 다르다. 심지어 모 대학교수의 저서로서 `기과학'이라는 제명의 책도 그 내용을 보면 전혀 과학적이 아니다. 아래에 내가 인용한 일본 과학자인 마루야마 도시아끼 丸山 敏秋의 “기란 무엇인가? <氣-論語부터 신과학까지, 1986>”라는 책에도 동양 고전에 나오는 ‘기’에 대한 소개와 일반적인 기현상(氣現像)에 대한 소개뿐, 기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이란 것은 일반 과학 이론들처럼 현상과 기존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합당한 논리와 알려진 물리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설을 말한다. 그 가설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 결과까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표된 책들에 나와 있는 ‘기’에 대한 설명, 주장들은 그에 대한 근거가 너무나 막연하다. 그저 옛 글에 이러저러하게 나와 있으며, 기공하는 사람들의 느낌이 이러저러한 것 같다는 말뿐이다. 이래서는 ‘기’의 실재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기’란 그저 집단 내지 자기최면에 의한 가상적 효과이거나, 두뇌의 작용에 의하여 우리 신체가 신경생리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반증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과학은 관찰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가설을 수립하고, 그 가설을 실험으로 확인(검증, 반증)하는 과정이다. 먼저 <기 현상>을 기존의 물리법칙으로서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이나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과학적일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비슷한 예로서 ?무슨 띠는 금(쇠 金)이요 무슨 띠는 목(木)이므로, 목이 금에게 장가가면 안 된다(金克木)?라는 식의 사주팔자 풀이는 `무슨 띠가 어째서 금인가??하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사실적 근거가 없으므로 과학적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도대체 `기'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지구상의 수억 이상의 사람들이 믿고 또 느끼고 있다는 `기'가 어째서 이러저러한 것이리라 하는 설명조차 찾을 길이 없단 말인가? 서양 사람들이 `기'를 무시한다고 `기'분(氣分) 나빠할 처지가 못 된다. 나는 공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며 평소에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과학적 근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인 근거란 관련 현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로서, 물리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기'란 것이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확실한 것이라면 `기'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타당한 가설 정도는 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그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가설'조차 없는 것을 실재(實在)라고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들을 동원해서 `기'의 과학적 근거를 유추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가설의 수준이다. 그러나 과학 이론들과 합치되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가설이라면 이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의 존재와 작용'을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반신반의로서 시작된 연구가 뜻밖에도 내가 가진 과학지식과 그리고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들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주장(종교의 교리를 감히 이렇게 표현함은 과학의 기본인 객관적 입장을 지키고자 해서이다)들'까지도 `기'에 의해서 상당부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를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기'에 대한 글을 쓰기까지에 이르게 된 동기이다.


가설의 도입과 그 전개에 있어서는 `나의 생각과 추측'을 최대한 배제하고 나름대로 과학적 이론과 사실만을 그 근거로 삼고자 노력하였으며, 인용과 참고에 있어서는 그 근거가 확실한 자료와 해당 부분의 공신력이 충분히 인정된 학자들의 저술만 채택하였다.

나의 가설은 현상으로서의 ‘기’로부터 출발하지만 물질의 ‘식(識)’을 거쳐 의식과 영혼 그리고 사후세계에 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기’에 대한 생각이라면 언젠가 과학이 밝혀 줄 것이라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영혼과 사후세계에 까지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 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매 순간마다에 직접적으로 가장 필요한 지식인데, 내가 죽기 전까지 과학이 이 모든 것을 밝혀 내어서 내게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긴데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러니 비록 ‘가설’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나름대로 가장 가능성이 크고 타당해 보이는 것을 찾아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의 조그만 소망은 <기>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기'의 근원과 작용기전이 확실하게 밝혀지기를 바란다. 현대 과학의 진보 속도를 보면 그리 머지 않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2. 동양 사상(東洋 思想)에서의 기氣.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기'라는 말에 대한 검토와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서점의 수많은 `기'에 대한 책들과 또 일상용어로서의 `기'의 다양한 의미가 서로 헛갈려서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에 대해서 혼란을 느꼈던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의 학문`이 정립되어 있지 아니하여 사람들마다 제각기 그 사용하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므로, 나의 독단으로 내린 정의는 잘 못된 것일 염려도 있다. 다만 내가 내린 바 '기`에 대한 결론과, 통상적으로 쓰여져 내려온 '기`의 정의가 그리 다르지 않으므로 이렇게 서두에서부터 '기`의 정의를 감히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전단계로서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라는 말과 그 의미를 살펴보자.


`기'란 말은 동양문화권에만 있는 개념으로서 오래 전부터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 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더 오래 된 갑골문자 시대에는 찾아 볼 수가 없으며(주;‘三’자 비슷한 모양으로서 맨 아래의 가로 ‘一’의 끝이 아래로 처져 있는 글자로서, ‘바라다’라는 의미의 글자를 ‘氣’자로 보는 견해도 있어나, 다수 학자들은 ‘걸 乞’자의 원형으로 본다), 논어(論語)에서는 식기(食氣;식욕), 사기(辭氣;말씨, 말투) 등의 예 이외에 혈기(血氣)라는 용례가 있을 뿐이다. 맹자(孟子)에는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기‘의 본산이요 종주라 일컬어지는 도가(道家)의 시조인 노자(老子)에는 ’기‘가 불과 3회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의 공자, 맹자, 노자 시대까지에는 ’기‘가 뚜렷한 실체나 개념으로 체계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라는 말과 개념이 정립되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장자(莊子)부터이다. 도가(道家)의 노자(老子)를 이은 장자(노자의 약 2백년 후의 인물)는 기를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기본이며, 나아가서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기초 원소라 생각했다. 생과 사를 기의 취산(聚散;모이고 흩어짐)으로 보는 생각이 여기서 나온다.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故曰 通天下一氣耳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기의 모임이다. 기가 모이면 생명이 되고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옛부터 이르기를 천하에 ‘기’ 하나뿐이로다 한다”

후한(後漢) 시대의 왕충(王充)은 모든 것이 `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도 인간도 `기'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했다. `기'를 `음(陰氣)'과 `양(陽氣)'으로 나누는 음양설과 `기'의 변화를 금, 수, 목, 화, 토의 다섯 가지로 분류 분석하는 오행설도 대략 이 무렵에 확립되었다(전국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음).


宋代에 기의 개념이 사상적으로 전개되어. 정이천(程伊川)과 주자(朱子)가 기의 변화를 가져오는 내재적 원리로서 <리(理)>를 내세워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주자는 理는 그 자체로서 형질도 없고 움직이지도 정지하지도 않지만 기의 내재적 원리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모든 사물은 理와 氣의 상호작용에 의거하며, 理는 형이상(形以上)의 통일의 원리이고 氣는 형이하(形以下), 즉 존재하고 변화하는 실체로 보았다. 당시의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음양이 서로 작용하는 원리를 <이(理)>라하고 <이(理)>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기(氣)>라 하였다. 주자(朱子)는 이선기후(理先氣後)라 하여 이가 기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주자의 생각은 <식이 기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나와 유사하지만, 그후의 다른 학자들의 생각은 다소 차이가 있다. 대체로 리기일원(理氣一元)을 지지하는 편이었으며, 理보다는 氣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것은 理를 개념적인 것으로, 氣를 실재하는 우주만물의 존재와 변화의 기본적 원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氣의 배경으로서 理가 도입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理는 곧 자연의 법칙, 즉 현대 과학 용어로 하자면 물리(物理)법칙이다. 서양의 과학이 법칙을 추구함으로서 현재와 같은 성과를 이룬데 비해서 동양에서는 법칙을 밝히는 일에 소홀하였고 따라서 과학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도 법칙의 존재와 필요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理라는 개념은 ‘법칙’을 넘어서 氣가 실재할 수 있는 논리적 바탕을 제공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기의 배경에는 식(識)이 있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상통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유학(儒學)에서의 理는 識과는 차이가 있다. 실은 그 ‘차이’가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동양사상에 있어서 氣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 또는 기능의 근원”(마루야마 도시아끼)이며, 물질의 원소, 생기(生氣), 정신기능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물질, 생명, 마음의 三界가 모두 기의 소행이고, 자연의 모든 변화는 기의 움직임(動靜)이다.

이러한 생각을 현대 물리학에 비교하면 기는 물질(소립자), 에너지와 모든 상호작용(물리학에서는 ‘힘’을 포함한 상호작용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을 합친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온 생기론(生氣論)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3. 氣란 무엇인가? -- 氣의 정의(定義)


이처럼 동양의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는 그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그러한 상태로서는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질과 에너지는 이미 현대과학에서 거의 구명되었으며 생명력으로서의 생기(生氣) 역시 생리학과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과학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에 등장하는 넓은 ‘기’의 개념에서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아니한 부분은 무엇인가?

‘기’를 ‘氣’만이 아니라 ’理‘를 합친 개념으로서 파악하되, 거기에서 물리학적으로 규명된 물질과 에너지(힘)를 제외하면 <상호작용(변화)에 대한 의지>만 남게 된다. 근래 우리 나라의 <기철학>의 주창자인 도올 김용옥 선생은 저서 <기철학 산조>의 머릿글 “탄현술(彈弦述)”에서 <기는 물(物)의 의지(意志;꼴림, 하고자 함)>이라 정의하고 있다. 나는 김용옥의 기에 대한 정의가 가장 정확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의 생활 용어로서 주로 사용하는 `기'는 `경향'이라는 의미와, 생체 작용으로서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생기(生氣), `살기(殺氣)', `한기(寒氣)', `끼(氣)가 있다'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는 그냥 수동적인 `어떤 상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태'가 능동적으로 외부로 표출되거나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상태의 주체'는 `생기', `살기'에서처럼 인간이나 동물 등의 생물이기도 하고 `한기'에서처럼 무생물이기도 하다. `경향'은 좀 더 상세하게는 `의지의 표출, 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도올의 “기는 의지(꼴림, 하고자 함)”라는 말과 합치하고 있다.

이외에 `기'는 `기가 막힌다', `기운(氣運)' 등으로 생체나 우주 내의 어떤 `힘'의 흐름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과 그 때의 의미는 근본적인 것 즉 `정의'가 아니라, 2 차적인 것이라서 부(副)현상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어 일단 제외한다. 나중에 <생체 내의 기>에서 다시 검토될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경향, 꼴림>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지, 의, 정>, 즉 이성, 의지, 감정으로 분석한다. 여기에 의하면 의지는 의식의 한 부분(작용)이다. 그러나 <의식>이라는 말은 그리 쉬운 말이 아니다. 과학 특히 요즘의 첨단분야인 인공지능 연구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기계(思考機械)>의 가능성까지 인정하는 추세이며,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하는 문제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상세하게 검토해 볼 것이다.

일단 <의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단순한 기계(조건반사)적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게 하며,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외부의 원인과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


요는 의지란 인과율에서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개입 작용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목적성 - 한마디로 `주체성'을 가진 것이다.

주의할 것은 <기 = 의지>라는 것은 아니다. 도올 선생께서도 괄호를 붙여놓았듯이, `꼴림, 하고자 함'은 `의지에서 발휘되어 나오는 것'이지 의지 그 자체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지`는 주체적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경향; 꼴림?이라는 형태로 '기`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계(조건반사)적'이 아니고, 외부에 대하여 `요구'를 작용시킬 수 있으려면 추가적인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의지’란 어떤 목적이나 의도, 즉 방향성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의 설정 내지 지향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정보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맹목적인 ‘꼴림’이 되고 마는데, 맹목적이라면 ‘의도’나 ‘방향성’이 없는 것이다. 이 정보처리 능력을 인간에 비유한다면 분석, 판단하고 선택하는 지적 능력이 될 것이다. 이 <분석, 판단, 선택>은 심리학 용어로는 `이성'에 가장 가깝다. 사실에 있어서 이성은 의지의 바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와 감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의식'의 각기 다른 면일 뿐이며, 항상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의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의미의 의식도 너무 좁다. 부족하다. ‘기’--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육체적 본능과 무의식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의식보다 더 폭 넓은 무엇--우리 인간의 삶의 이유와 목적에 관련되는 모든 <경향>이 의지와 기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가장 유사한 개념이 불교의 유식설(唯識說)에서 설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의식과 본능을 포함한 <식 識>이다. 나는 `식'이란 말이 마음에 든다. 식이란 ‘안다’는 뜻이며, ‘안다’는 곧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상과 다른 것의 차이를 알 수 있으며, 그 차이가 행동의 선택의 바탕이 되는 기초적인 판단능력을 말한다. 나는 앞으로 모든 물질--소립자들까지도 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식에 의해서 기를 발휘한다는 내 생각의 근거를 제시할 것인 바, 그러한 내 생각은 `범식론(凡識論)'이라 할 수 있겠다. 범식론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서 범심론(汎心論)이 있다. 모든 물질에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다.

`식(識)'이란 말의 의미는 상당히 포괄적이다. 철학에서의 가장 큰 두 개의 주제인 인식론(認識論)과 실체론(實體論)의 근저에 있는 동양적 개념이 식이다.

불교(유식론)에서 말하는 식은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끼는 다섯 개의 식(전오식; 눈, 귀, 코, 혀, 피부의 다섯 감각)과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 등의 팔식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식’이란 글자의 의미는 ‘식별’, ‘인식’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안다’의 범주에는 ‘느낌(感覺)’도 포함되어 있다. ‘안다’와 ‘느낀다’를 합하면 ‘정보를 받아들인다’라는 말이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 이론과 섀넌의 정보(communication) 이론 등에 의해서 1940년 대 말경에 등장한 ‘정보’는 현대 물리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있다.)

동사로서의 ‘식’은 ‘정보를 받아들임‘이지만, 명사로서의 ‘식은’ ‘지식’ 그리고 ‘아뢰야식’ 등의 용례에서와 같이 ‘정보 그 자체’이다.  이로서 ‘식’은 <‘정보 그 자체’와 ‘정보를 교환(처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도구로서 사물을 인식할 때에 명사와 동사의 복합적 의미로 인식하는 경우는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영어 단어에서 대부분의 동사는 동시에 명사이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철학, 물리학에 있어서도 ‘질료와 형상’, ‘체(體와 용(用)’, 즉 ‘존재와 현상?을 과연 분리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의 `상상'의 출발점은 기였지만, 기의 성질과 이론적 근거에 대한 검토에서 기의 배경이 되는 무엇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얻은 결실이 <식識>이었다. 실제로 이 글은 <기>에 대한 글이 아니라 <식>에 대한 글이다. <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식>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를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의 정체에 대하여 납득할만한 가설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나는 <기>의 배후에 있는 <식>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에 나는 <식> 역시 <기>처럼 하나의 애매 모호한 개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식>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사실 <기>의 수준에 그치는 생각이었다면 나는 굳이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식>의 깨우침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으며, 삶의 목적을 알게 해주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의 자만심'이겠지만, 나는 다른 이들이 오랜 공부와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을 함께 나누려 하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느낌으로서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기’라는 작용이 있다(實在한다).

작용으로서의 ‘기’가 있으려면 그 근원인 ‘식識’이 있어야 한다.

`기'는 `식'이 외부에 대하여 발휘하는 ‘의지(꼴림, 경향)일 것이다.>


기는 식에 의해서 발휘될 수 있다. 따라서 식은 기의 전제조건이므로 기가 있으면 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식은 그 자체 만으로서는 존재의 의의가 없으므로(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식이 있으면 기도 있다. 즉, 기와 식은 상호보완적이며 함께 있는 것이다. 식 그 자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식이 물질을 포함한 외부에 작용하는 수단인 기는 물리적이라야 한다. `물리적'이라 함은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법칙'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아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기’의 작용은 알려진 물리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기는 물리적인 어떤 것일까?

기는 에너지가 아니다. 기는 힘도 아니다. 에너지나 힘이라면 물리적으로 측정이 가능할 것인 바, 아직 아무도 그 측정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기’를 옛 선현들의 정의와 같이 물리적인 힘, 그리고 소립자의 여러 근본적 성질을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리학에서 밝혀 낸 소립자의 성질은 일단 제외하고서 ‘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형의 물질이 아닌 무형의 것으로서, 에너지와 힘을 제외한다면 어떤 가능성이 남는가? 물리학 책을 다 뒤져보면 딱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나오는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라는 말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가장 폭 넓은 의미로서는 `정보'의 개념이다. 기는 식이 외부 대상에 전달하는 정보일 것이다.  즉 ‘경향, 꼴림’은 외부에 정보의 형태로 작용한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정보>는 이 책의 주 연구대상의 하나이다.

미국 네바다 대학의 <의식 연구소> 소장인 딘 대린 Dean Darin은 "The Conscious Universe” (“의식의 세계”, 도서출판 양문, 1999. 주;이 책의 영문 제명은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주”라는 의미이다)에서 염력(念力)을 “의식과 사물과의 상호작용”이라 정의하면서 아울러 “실험에 의하면 염력은 의식으로부터 물질로 정보가 이동하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식과 기는 어떤 형태의 실재일까? 소립자의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 형태가 파동적이라는 점과, 기를 감지하는 사람들이 대개 기를 파동의 형태로 느낀다는 점에서 기도 일종의 파동과 유사하거나 같은 형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오차가 작을 것이다. 이 생각은 기, 즉 식의 작용이 홀로그래피와 같을 것이라는 가정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물리학이 밝힌 바와 같이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파동이다. 존재의 정의는 ‘차이(差異)’이다. 주변 혹은 다른 존재와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에 의해서 주변과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정의한다. 물론 ‘차이’와 ‘영향력’은 동일한 것이다. 파동은 순수하게 ‘차이’만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파동의 그림인 사인sin 곡선은 어떤 무엇이 주기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단순한 존재의 형태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 이론으로서 모든 존재와 힘을 한꺼번에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도 소립자와 힘 모두를 극히 미세한 끈의 진동으로 해석하려는 이론이다. 그러나 식과 기를 수학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 `형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파동이든 입자든 장(場)이든.


소립자--물질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기론>은 그리스 시대부터 있어 왔던 생각이며, 유명한 철학자 베르그송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금세기 초에도 생물학자 한스 드리슈 등이 신봉하던 이론이었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 또는 그 존재는 동양에서는 보편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를 의지 또는 식의 외부 작용수단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생각은 찾아보기 어렵다.(이경숙 저 “마음의 여행”에는 “기는 바로 영혼의 실체인 정보의 활동이며....‘서로를 알리려는 힘’이라 나와 있다. 정신세계사, 1999, P258). 물론 본질인 식과 현상인 기는 별 개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로 통합하여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식과 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의식과 사후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기라는 개념에 가까운 것 만으로서는 부족하며, 식이라는 기의 근원이 되는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기일원“이냐 ”이기이원“이냐 하는 옛 논쟁에 비유한다면 나의 생각은 ”식(이)일원론“이라 하겠다. 그러나 <기>라는 말과 개념이 이미 널리 익숙해져 있으며, 본질과 현상은 굳이 서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앞으로 <식>과 <기>가 다소 혼용될 것임을 미리 사과 드린다

참고로, 오랫동안 생명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이었던 <생기론>과 나의 생각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다. <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생기론>은 물질에 생명(생기)을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다. 물질에 생기가 작용하면 생물이 되고, 작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물질--무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이 생각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이와 유사한 생각으로 물활론, 범신론, 범심론 등이 있는데, 그 중에 특히 이 책과 관련하여 인용할만한 이론으로서 띠야르 샤르댕Teilhard de Chardin(1881-1955)의 물활론이다.

띠야르 샤르댕은 프랑스의 신부였으며 철학자, 고생물학자로서, 물질과 정신(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는 간격을 설명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새롭게 정의한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스칼라 양, 즉 그 크기만 있고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양이다. 샤르댕은 에너지가 방향을 가진 벡터 양이라 가정한다. ‘방향성’은 앞에서의 <기 = 꼴림, 경향>이라는 정의와, 그리고 ‘기’가 방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식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동일한 논리 위에 있다. 에너지의 ‘방향’은 곧 에너지의 ‘의지, 생기’이다. 샤르댕은 에너지(모든 물질의 존재와 그 변화의 근본은 에너지이라는 물리 기초를 염두에 두시라)에 진화를 추구하는 방향성으로서 의지, 즉 ‘기’가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서 생물 그리고 인간은 이 에너지의‘정신적 벡터’의 작용 결과이며, ‘정신적 벡터’는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것이므로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최후의 완전 진화한 상태를 지향하여 나아가는(진화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는 이 최종적인 상태(목표)를 <오메가 포인트>라 하였다. 이 생각은 불교에서 모든 존재가 그 불성을 찾아서 해탈(성불)하게 되는 것이라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이 것은 나의 <식--기> 가설과 상당히 일치한다. 다만 샤르댕은 ‘정신적 벡터’의 방향, 즉 그 본질이 ‘지고(至高)의 선(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것은 다소 비약이 아닐까 한다. 소립자가 가지고 있는 미소한 에너지, 그것도 그 일부분에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미 담겨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기에는 논리에 비약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검토는 <사후식의 세계> 편에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가설은 나름대로 물활론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안된 가설로서 현대에도 신과학 방면의 과학자들이 즐겨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가설들은 물리법칙이나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생명현상(생명의 탄생과 진화)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가설이지만, 현대에 들어서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부정되고 있다.

샤르댕을 제외한 다른 <생기론>이 물질과 생기가 독립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데 비해서 나의 생각은 모든 물질--그 근원인 소립자는 <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 그 자체는 분명히 물리적인 존재로서 물질과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소립자와 소립자의 집합체인 생명체 사이에는 그 <식>의 수준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것은 <범심론 panpsychism>과 비슷하다 하겠다.

생기론 또는 물활론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물의 <합목적적 성격>을 인정하는 가 아닌가에 달린 것이다. 모든 생물은 전체로서는 물론, 그 기본 단위인 하나의 세포까지도 어떤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목적성>이 어떻게 해서 생겨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명의 탄생과 진화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물론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곧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리적인 전제로 한다.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들의 생각은 ‘우연’과 ‘자연도태’에 의해서, 통합(전체)주의자들의 생각은 복잡계의 제2차 법칙적 특성(창발)에 의해서 생겼다는 쪽이다. 양측 공히 자신 있게 내 세울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나의 가설은 <식>, 즉 능동적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소립자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식>은 곧 <정보>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보’란 말의 의미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 철학에서 말하는 바, <정보는 정보를 낳는다>라는 명제와 같이 능동적인 <정보>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인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상호 결합되는 접점에서는 물질의 존재, 즉 ‘객관적 실체’와 ‘정보의 초광속 전달’은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보성인 것이다. 상세한 것은 <소립자> 편에서 아인슈타인의 EPR 상상실험과 보아의 “하나의 통합체”이론,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하여 밝힌 죤 벨 Jhon Bell의 정리 및 그 실험 결과를 통해서 말씀 드리겠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식과 기의 정의>이다.

이제 과학적 사실들이 위와 같은 기의 정의와 부합되고, 그리고 과학 이론들이 <기>에  대하여 알려진 여러 가지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자.


 

4. 현대 과학에서의 기氣.


<과학의 역사는 `신'과의 투쟁 역사이다>. 이 말에서 `신'을 `자연'으로 대체하면 보통 쓰이는 문구가 된다.

원시인들에게 모든 자연 현상들은 <신의 힘>으로 보였다. 화산, 지진, 번개, 태풍, 비, 해와 달, 계절의 변화,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온갖 질병들....... 이런 모든 자연 현상들이 옛날 사람들에게는 맹수와 같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신의 존재의 증거였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연을, 그리고 그 자연의 배후에 있는 지배자로서 신을 섬기기(외경 畏敬) 시작하였을 것이다. 고대의 모든 문명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신(화)들은 결코 인간 중심적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보듯이 신들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로서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할 뿐이며 인간은 신들의 종 같은 존재이다. 기독교가 그 시작에 있어서는 매우 불리한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장 성공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다는 점'이다. 이처럼 근세 이전의 인간(특히 서양인)에게 자연은 `무지에 의한 공포'였던 것이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도전'이 바로 과학이었다. 중세암흑기는 자연(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을 종교가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두려움'이 `도전(과학)'을 눌렀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현상을 `신의 힘'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그 원인을 이해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은 과학의 힘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 Ilya Prigogine은 그의 유명한 저서 <혼돈 속의 질서 Order Out of Chaos>에서 ?뉴턴이 런던의 왕립협회에 <프린키피아 Principia를 제출하였던 1686년 4월 28일이 인류 역사를 통해서 가장 위대하였던 날 중의 하루?였다고 말한다. 프린키피아에는 운동의 기본법칙과 함께 질량, 가속도, 관성 등에 대한 원리적인 개념과 중력의 법칙이 설명되어 있다. 옛날에는 `물체의 움직임'마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비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의 떨어지는 시간이 동일하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였다고 전해지)기 전까지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운동과 변화의 배경에는 `원동자(原動子)'가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운동과 변화가 저절로 생겨났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자 아퀴나스는 그 `원동자`가 바로 신이라 하였다.

뉴턴의 위대함은 그가 수학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우주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신의 의지'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자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자연은 그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놀라운(당시로서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법을 지키지 않는 독재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법을 준수하는 민주적 지도자를 맞이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인간은 이제 적어도 `자연적인 범위 내에서는' 신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연은 `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연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두려움이 모두 미래에 대한 예측의 불확실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연법칙이 인간에게 안도감을 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뉴턴의 업적은 중력과 운동의 법칙뿐 아니라 미적분이라는 수학의 기법을 발견(`발명'이라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사실 과학에 있어서 어떤 법칙을 찾아내는 것은 발견이라 할 수도 있고 발명이라 할 수도 있다. 그저 각자의 관점 나름이다)하였다는 점이다(라이프니츠도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으로 미적분을 발견하였다. 그처럼 중요하고 또한 그리 쉬운 것도 아닌 원리의 발견이 그리스에서 수학이 시작된 이후 약 2천 년만에 갑자기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신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과학사에는 이와 같은 우연한 동시성의 사례가 많다. 이러한 일이 “형태창조장”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과학 특히 물리학은 미적분이 없다면 아무 일도 못한다. 자연은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원인과 과정을 파악함으로서 결과를 예측하기 위한 것이 과학(무릇 모든 학문이 다 그러하지만)인 바, <변화>를 다룰 수 있는 수학의 기법이 바로 미적분이다. 속도는 <거리/시간>의 공식, 즉 길이와 시간의 측정(관찰)만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속도의 변화인 가속도는 미적분이 라는 새로운 개념 하에서가 아니면 계산이 불가능하다. 모든 물리작용의 근본인 `힘'은 물체에 가속도를 준다. `속도의 변화'가 모든 운동의 기본 성질인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왜 뉴턴이 운동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고서도 그 법칙을 발표하기 전에 미적분 연구를 위하여 20년이란 세월이 걸렸는지 이해하실 것이다(“자연의 법칙”을 밝히는 것이 신 -- 로마 교황청의 분노를 사게 될까 두려워해서 발표를 미루었다는 설도 있다). 인간은 드디어 자연을 이해, 예측하고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수학이라는 `언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는데 아름다운 수학을 사용했다?--천재물리학자 P. Dirac의 말이다.


같은 동양으로 분류되지만 그 문화의 근원이 서양 쪽에 가까운 인도에서는 인생(자연 속에서의 삶)을 `고해'로 보고서 그 `고해'에서 벗어나기(해탈) 위한 노력으로 불교 교리를 발견하였다.

<자연과의 융(조)화>를 `도道' -- 자연과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의 원칙 -- 의 기본사상으로 삼았던 동양(중국문화권)에서는 그 공포의 정도가 훨씬 덜하였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인간과 (거의)대등한 존재로서 인간을 존재할 수 있게 해주고 함께 더불어 존재하는. 말뜻 그대로의 `자연'인 것이다. 물론 중국인에게도 `하늘'은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이었다. `천지인'의 글자 순서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그러나 중국의 우주관은 서양보다는 분명히 인간적이다.


이처럼 고대의 4대 문명권들 중에서 뚜렷한 사상적 체계를 만들었고 그 사상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3대 문명권(서양, 인도, 중국)에서는, 제각기 그 자연관에 따라서 독특한 방식으로 자연을 상대한다. 그 각각의 성과에 대하여 나의 개인적 생각으로서는 그 중에서 서양의 과학과 인도의 불교가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여기서 불교는 종교로서가 아닌 철학으로서의 불교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중국의 철학은 서양, 인도보다 열등한가? 물론 아니다.

서양과 중국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객관과 주(직)관>의 차이라 생각한다. 과학은 `객관성'을 그 바탕으로 한다. 엄밀한 논리와 -- `논리학'은 객관성의 확보를 그 목적으로 한다 -- 실험에 의한 증명으로서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이에 비해서 동양의 학문방식은 `직관' 위주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교 역시 그러한 바,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오히려 중국 문화권에서 더욱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전개일 것이다(인도에서 불교가 발전하지 못하였던 이유는 불교교리가 불교보다 먼저 있던 힌두교의 교리와 계급제도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철학(과학 특히 물리학의 모태는 철학이다. 물리학이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은 일세기가 채 안 된다. 그 중간과정에서는 `과학철학' 또는 `자연철학'이라 불려졌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원 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이다)과 중국의 철학을 비유한다면 과일나무의 열매를 따려 할 때, 과학은 나무 아래에 나무 넓이만큼의 높은 단을 쌓은 다음 과일을 따는 것이며, 중국철학은 긴 막대기로 과일을 따는 것이라 비유할 수 있다. 과학적인 방법은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모든 열매를 확실하게 딸 수 있다. 직관적인 방법은 빠르고 쉽다. 그러나 장대가 닿지 않아서 따지 못하는 열매도 있고 땅에 떨어져서 부숴 지는(틀린 지식을 얻게되는) 열매도 생긴다. 중국문명은 그 시작이 다른 문명권보다 한참 뒤지지만(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초기 청동기 문명은 약 6천년 전부터, 중국은 약 4천년 전부터이다) 훨씬 더 빠르게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직관적 깨우침?의 덕분이다. 20 세기의 과학이 발견한 자연의 신비한 사실들 중 상당 부분을 중국에서는 이미 이천 수백 년 전에 `깨닫고' 있었던 것이며, 근래에 과학과 동양철학을 연계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그래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직관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물리법칙은 우리에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준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깨우침'은 `믿거나 말거나'이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의 차이는 크다. `믿는다'라는 일은 `알지 못한다'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알면 아는 것으로 그만이지, `믿으려는' 의지까지 동원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동양의 철학이 2천 수백 년간 `고전의 인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동안에 서양의 과학은 그 기초를 다진 후 한 장 한 장씩 지식의 벽돌을 쌓아 올려서 높은 탑을 만들어 왔다. 특히 20 세기에 들어서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의 발견 등 과학의 발전속도는 엄청난 가속도가 붙어서 `질주'하고 있다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눈부시다. 과학자들은 이제 그 진리의 탑의 완성이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서양의 과학자 철학자들이 물리학에서 발견된 최근의 사실들을 동양의 옛 지혜가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 말하는 것을 동양의 지혜에 대한 찬사로 오해하지 말라. 그것은 그저 `동양인들도 엉터리는 아니었구만~'하는 것일 뿐이다. 서양인들이 쌓아 올린 과학의 탑은 이제 동양의 지혜를 추월하려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스티븐 호킹은 20 세기 내에 대통일이론(GUT; Grand Unified Theory, 요즘은 전자기력, 약력, 강력 외에 중력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의 이론 Theory of Everything(TOE)'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다)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한 일이 있다. 물론 20 세기가 지나버린 지금 호킹의 예측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과학자들은 자신에 차 있다. 천 년 이상 지속되었던 기독교에 의한 중세암흑기는 인류역사상 가장 어리석었던 일이었다. 만약 암흑기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적어도 서기 2500년대에 살고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가혹한 저주인가! 그러나 더 이상의 과학의 발달이 인류에게 행복이 아닌 불행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증명되거나, 또는 기독교의 신이 존재하며, 그 최후의 심판이 중세암흑기에 의해서 그만큼 연기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의 축복이었을 테니까, 결론은 아직 섣부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영주 부석사의 고려시대 목조 대웅전으로서, 천 년도 안 되었지만, 그리이스, 로마시대의 석조 건물들은 이천 수 백년, 이집트의 피라밋과 신전들은 3천 년 이상 남아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반성이란 말이 무엇하다면 적어도 <과학적인 (사고)방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 활용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지난 2 천년 동안 인류문화의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발명품을 공모한 적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방법>을 추천한 것을 보고 무척 놀랐던 일이 있다.

물론 <객관과 직관>은 어느 한 편이 옳다고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서로 상보적인 것이다. 과학이 객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과학은 알려진 사실 또는 논리를 바탕으로 미지의 부분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하는 방법으로 발전한다. 그 새로운 가설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직관이 필요한 것이다. 19 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하 Ernst Mach는 ;


?물리학은 측정 가능한 대상들과 사건들의 과학이다. 관측된 양들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과 이론적 개념들을 제외시켜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아인슈타인은 마하의 원칙에 따라서 `빛의 속도는 관측자에 따라서 변한다'는 기존관념을 버리고, `빛의 속도는 모든 관측자에 대하여 일정하다`는 이론적 관측적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상대성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자신도 이렇게 말한다;


?기록된 현상들의 모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 마음의 자유로운 발상이 더해져야 한다?.


직관은 운전사요 객관은 엔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객관과 직관'의 중간에 있다. 사고의 기본적 성향은 동양적이되, 학교에서의 교육은 객관적인 서양의 과학을 배웠다.


동양의 `직관적 지혜'의 위대한 업적의 하나로서 나는 <기>를 들겠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처럼 중국문화권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개념'이 <기>가 아닐까 한다. 중국문화권 특히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는 우주 그 자체이며, 만물의 생성과 변화, 생명까지도 `기의 모이고 흩어짐(聚散)'으로 파악한다. ?기운(氣運)? 즉 `기의 운행'은 모든 변화의 기본인 `힘'을 가리키는 것이다(동양에서의 `힘'의 개념은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 동양에서의 기는 자연의 모든 작용과 변화, 그리고 그 잠재력까지를 총칭하는 것이다. 과학으로 말하자면 물질의 근본인 소립자와 상호작용의 근원인 힘, 그리고 소립자와 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에너지 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물질과 힘은 ?에너지?라는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옛 사람들과 현대의 기 연구자들이 기를 에너지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이기론>은 동양의 <물리학>이었다. 이와 기, 음양과 오행(五行)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존재와 변화의 이치를 해명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과학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서양의 과학이 갖추고 있는 ‘실험에 의한 확인’ 과정이 결여되어 있는 바, 이것은 옛말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의 의지, 작용’으로 보지 않고, 이치를 따져 이해하고 파악하려 한다는 근본 관점에서 과학적인 것이다.

내가 <기>를 연구하기 위해 철학, 물리학, 생물학 등의 서양 서적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서양인들은 <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서양인들은 불교교리와 도와 주역에 대하여 연구하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기>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기>라는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고 따라서 애매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기>란 물리학의 ‘소립자’와 `힘'과 `에너지'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니까 과학적으로는 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는 대상이 못될 것이다. 반면 동양인들은 <기>에 대하여 너무나 일상적인 것(적어도 그 개념이라도 말이다)이라서 오히려 무관심할 정도인 것이다. 아마도 서양인들의 눈에는 우리가 <기>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이 동양인들의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성격 탓으로 보일 것이다.

이처럼 서양인들과 동양인들의 자연관은 그 기본적 관점에서부터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서양인들은 자연은 그저 시공간과 물체의 현상이고 물체는 작은 모래알 같은 소립자들의 덩어리일 뿐이라 생각하며, 자연과 신을 분리하여 자연은 신이 만들어 놓은 단순한 물질이라 생각한다.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신과 인간과 자연은 서로 별 개의 것이다.

반면, 동양인들은 자연과 인간을 동격으로 생각한다. 자연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므로 자연을 다스리는 `신'의 개념이 불필요하다. 자연 그 자체가 신이요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실체와 변화의 근본을 <기>라 하는 것이다. 그 우주관에서 이미 서양은 환원주의요 동양은 전체(통합)주의적이다. (서양에서도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옛 그리스 시대의 자연관은 전체주의적이었다.)

여기서 근래 많은 논쟁의 근원이 되고 있는 <환원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환원주의(reductionism)는 대상을 그 구성원소로 분해하여(환원) 원소들의 본질과 상호작용을 파악함으로서 대상 전체를 이해하려는 방법, 관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아무리 복잡한 자연현상이라도 그것을 파악, 이해 및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환원주의 패러다임의 창시자는 데까르트 Rene Descartes(1596-1650)이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서 유명한 데까르트는 과학사에 물질과 정신이 각각 독립적인 존재라는 심신 이원론과, 물질기계론, 그리고 환원주의의 3대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모든 물질은 그 성질을 나타내는 기본인 분자로, 분자는 다시 92종의 원자로, 원자는 전자와 양성자와 중성자로,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로 분해할 수 있으며, 그래서 모든 물질은 전자로 대표되는 여섯 종류의 경입자(렙톤)와 여섯 종류의 쿼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립자의 상호작용, 즉 ‘힘’은 힘을 전달하는 소립자들의 매개작용임을 밝혀 내어, 인간의 지식 범위를 자연의 궁극점 가까이 까지 도달하게 한 것은 환원주의 과학의 위대한 업적이다.

전체주의(holism, 통합주의, 전일주의全一主義 등으로 번역됨)는 대상의 구성원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성질을 전체(유기체, 시스템)에서 발견하려는 방법이다. 이 두 방식의 차이는 인간의 `의식'을 보는 관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인간은 소립자의 덩어리이며, 의식은 소립자들의 상호작용에 따른 `현상'이라는 관점이 환원주의이며, 이에 반해 의식은 개개의 소립자들의 상호작용 만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며 소립자들의 전체적인 모임에 어떤(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2차적(전체적)인 법칙과 그 효과가 있어서 의식이 만들어진다는 관점이 전체주의이다. 생명체나 의식이 소립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명과 의식은 소립자를 아무리 분해하더라도 결코 찾을 수 없는 어떤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최근 <신과학(new-science, new-age science)라는 이름으로 대두되고 있는데, 그 계기는 1865년 독일의 클라우지우스가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의 법칙)을 발견하면서부터라 할 것이다(상세한 것은 제 11편 <엔트로피와 정보, 그리고 식> 참조). 열역학 계의 구성 입자들의 역학적 고찰로서는 찾을 수 없는 2차적인 특성 - 엔트로피가 일방적으로 증가한다는 - 이 전체 계에서 뚜렸이 관찰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 전체주의의 패러다임은 20세기에 들어서 인간의 인식과 학문의 범위가 대폭 확대되고, 컴퓨터의 발달로 복잡한 계(카오스)를 다룰 수 있게됨에 따라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대두되고 있다. 전체주의적 입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과학 분야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일리야 프리고진 등의 비평형 열역학, 카오스 이론, 시스템 이론, 가이아Gaia설, 그리고 약간 넓은 범위라면 게임이론, 인공지능, 인지과학, 공생진화론(진화는 미생물과의 협동으로 진행된다는 설) 등이 있다. 동양의 학문은 거의가 전체주의적이다. 특히 한의학이 그렇다. 서양의 의학이 환부(患部)에 집중하는데 비해서 한의학은 병을 몸 전체의 시스템의 문제로 다룬다. 적어도 몸 각 부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환원주의 대 전체주의 패러다임은 현재 과학(철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체주의는 환원주의적 관점에서는 설명이 불가능한(현재까지는) 생명 현상 등을 통해서 환원주의의 완고함을 공격하며, 이에 대하여 환원주의는 그 이유를 과학이 아직까지 미완성이기 때문이며, 그렇다고 과학에 해명되지 아니한 신비주의적 요소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응수한다. 즉 앞으로 과학이 더 발달하면 모든 문제를 환원주의적 방법으로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체주의는 아직까지 하나의 새로운 사조(思潮, 패러다임)일 뿐, 학문적으로 이론적 기반이 확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에 대한 환원주의의 공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소위 <신과학>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신과학>은 위에서 예를 든 분야와 같이 정통적 과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론들과, 그리고 <의사(疑似)과학>이라 불리는 분야를 총칭하는 것으로 혼용(混用)되고 있어서 상당한 오해를 받고 있다. <의사과학>의 대상은 기氣, 氣功, 피라밋과 히란야 등 특정한 형태가 어떤 효과를 가진다는 설, 지하의 수맥이 인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설, 공간 에너지 설 등과 심령과학, 무속, 지리풍수 등 전통적인 과학의 입장에서 그 근거를 찾지 못하므로 미신이라 인정되고 있는 분야를 말한다. 그리고 다소 애매한 분야로서는 상온핵융합, 반중력장치, 강한 전자기장에 의한 공간이동 등이 있다. 편의상 정통과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론들을 A형, 근거가 희박한 설들을 B형이라 하자(이것은 세민환경연구소장 홍욱희씨가 신동아 2000. 2월호에 “신과학 논쟁 존 더 치열하게 붙어라”라는 제명의 기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A형 신과학에 대한 환원주의의 공격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환원주의적 방법으로서도 현재 미해결인 생명현상 등을 풀 수 있을 것이므로 전체주의적 관점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요지다. 특히 전체주의가 어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론을 내놓지 못하고 단지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식의 ‘현상적’ 문제만을 제시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으므로, 전체주의란 과학의 패러다임이라기 보다는 철학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카오스 이론>과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서 상세하게 검토하겠지만, 사실 전체주의는 아직까지 그 이론적 기반이 없거나 매우 취약하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 ‘전체’와 ‘부분의 합’ 사이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는 것이다. 전체주의적 현상을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다. 

<일원 짜리 백 개를 모으니까 백 십원이 되기도 하고 이 백 원이 되기도 하는데, 그 차이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일원 짜리는 그냥 일원 짜리인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러므로 그 차이는 ‘백 개’라는 전체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리고 환원주의의 생각은 물론 그 일원 짜리는 실은 일원이 아닐 것이다 라는 쪽이다.

자, 당신은 어느 쪽인가? 물론 전체주의 대 환원주의의 논쟁의 근원이 이렇게 단순한 비유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이 비유와 동일한 것이다. 아무래도 그 차이는 ‘일원 짜리’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적어도 상식적인 사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숨어 있는 무엇’이 물질의 식이라는 것이 나의 가설의 요지이다. <소립자의 식> 편에서 검토하겠지만 물리학 -- 그 중에서도 물질의 근본 성질을 연구하는 분야인 양자역학은 아직까지 미완성이다. 양자역학은 소립자의 실체를 완전하게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그 이론 속에 자체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즉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마치 미니 스커트 아래의 미끈한 다리를 보여 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며, 그 이상은 접근 금지인 것과 같다. 어떤 학자들은 물질의 본질에는 아직 우리(물리학)가 접근할 수도, 파헤칠 수도 없지만 양자이론의 한계를 넘은 어떤 ‘무엇’이 있으며, 그 ‘숨어 있는 무엇’을 물리학자들은 <숨은 변수 hidden variable>, 또는 <감추어진 질서implicated order>라 이름지었는데, 아직 가설의 단계로서 학계에서 공인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존재의 근원에는 아직까지 현대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숨어 있는 무엇’이 있다. 즉 수 억 명의 사람들이 느끼고 증언하고 있는 <기현상(氣現象)>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물리학에서는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현상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기나 식은 현재 물리적으로 측정할 방법이 없다. 우리의 의식, 의지를 물리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기 중에서 가장 강한 인간의 기도 그것이 의식과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객관적인 측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의식은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이며, 그 근원이 예측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므로 물리적인 방법으로서는 도저히 정량적으로든 정성적(그 방향에 대한 예측)으로든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환원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메워지지 않는 공백이 <기는 물(物)의 의지, 꼴림, 경향>이라는 비물리적 특성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기와 식을 규명하는 일에 있어서 그 기본 해석은 환원주의적 방식을 지키되, 그 접근은 전체주의적 관점을 택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식에 대한 검토에서 더욱 확실해 진다.

물론 환원주의자와 전체주의자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환원주의를 그 기본 패러다임으로 하고 있으며, 다만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하는 데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이 옳고 틀림을 메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뉴턴 이후 현재까지의 과학의 기본 방식은 환원주의이다.

서양은 물리학을 통하여 우주만물에 작용하는 중력과 전하(전기)를 가진 입자들 사이의 전자기력을, 심지어 원자핵의 내부에서만 작용하는 약력(약한 핵력)과 강력(강한 핵력)까지 발견하여 우주만물의 변화의 기본작용을 밝혔다. 과학의 탐구는 그 기본작용을 파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힘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지금 물리학자들은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을 연구하고 있다. `왜?'라는 질문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서양인들 - 과학자들이 <식과 기>를 그들의 학문에 도입한다면 성과가 있을 것이다. 모든 학문의 으뜸이라 자만하는 물리학은 <기>를 제외하고서는 양자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생각처럼 `불완전한; 학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환원주의적 과학의 방법은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카오스 이론, 더 이전의 양자 역학에서 이미 벽에 부딪치고 있다. 과학의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는 생명의 탄생과 진화도 전체주의적 관점(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과 움직임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으며, 인간이 <의식>이란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도 철학과 과학계의 숙제요 주요 논쟁거리인 의식에 대한 문제 역시 환원주의의 ‘완고함’에 지친 많은 학자들이 전체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다. 근래의 <신과학 운동>이 그 힘을 얻고 있는 이유이다.

“실재 세계의 모든 새로운 것을 수학 법칙과 수학적 용어로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라졌다”--양자역학이 성공적으로 기반을 잡은 후에 나온 물리학자의 한탄이다.


전에 나는 <기>를 실재하는 물리적인 무엇이 아니라, 플로지스톤(phlogiston ; 열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때에 가정하였던 열의 원소)이나 에테르처럼 잘못 가정된 개념 내지는 상징적인 허구라 생각했었다. 동양인들이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물리)법칙을 수학적으로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러한 법칙 대신에 내 세운 `가설'에 지나지 못하며, 물리법칙이 발견된 지금에 와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그런 것으로만 생각했었던 것이다. 아마도 서양인들과 과학자들 그리고 기의 존재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서양에서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초자연현상--물리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썼지만, 두 손을 든 상태이다. 초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가장 권위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라이얼 왓슨Lyall Watson의 말을 인용해 보자. 라이얼 왓슨은 의학, 식물학, 화학, 수학, 심리학, 물리학, 동물학, 해양동물학, 인류학 부문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옥스퍼드 대학 교수이다.


“심령현상으로 생각되는 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행해져 왔다. 전자력, 원자력, 중력, 음향효과, 화학현상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도입되었다. 많은 지적 거물들이 이 작업에 몰두했지만, 그 성과는 고작 보잘것없는 빈대 몇 마리 정도에 불과했다. 물리학자들의 경우는 소위 평행우주론, 초공간에서의 양자역학적 터널설, 시간 역류설, 마이너스 질량의 유자(幽子)설 등 온갖 방법을 희롱하였다.......철학자의 경우는 마음과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논리의 갭을 메우기 위하여 각양각색의 자극적 가설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유심론, 유물론, 병행론, 상호작용, 창발인과율, 하강인과율, 등을 총망라한 결과, 그들은 결국 `이 문제가 해결될 전망은 없다'란 결론에 도달했다”.(“Lifetide 생명 조류”, 박용길 역, 고려원 미디어, 1992년“에서 발췌. 원전은 Popper, K and Eccles, J. "The Self and Practice")


“초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통제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이미 이들 현상이 기존의 인과율이 아닌 다른 법칙을 따르고 있어,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Lifetide).


내 생각이지만, 동양철학에서 일찍 氣의 존재를 깨달았지만 그것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氣를 `의지, 꼴림' 만으로서가 아니라 물리적인 힘과 물질, 에너지에다가 시공간까지를 포함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太極”, “太虛”, “無極” 등 우주의 근본을 “어떤 하나”에서 찾으려하였던 옛 사람들의 ‘전체적인' 사고의 결과였으리라. 주기론자(主氣論者)였던 화담 서경덕 선생은 <화담집>에서;


“태허는 허(虛인) 듯하나 허가 아니다. 그것은 허가 곧 기인 까닭이다. 허는 무궁하며 바깥이 없다. 따라서 기도 무궁하며 바깥이 없다. 이미 허라면 어찌 다시 기라 하는가, 이유는 허가 즉 기의 본질이며 모였다가 흩어졌다 함은 기의 묘용(妙用)이다.”


동양의 고전들이 다 그러하듯이 이 말씀도 옳다면 옳고 틀렸다면 틀렸다. 이처럼 기를   `식의 외부작용 수단'이 아닌 `모든 존재와 작용의 근본'으로 뭉뚱거려서는 그 실체적인 파악이 불가능한 것이다. 서양의 환원주의 과학에 비해 동양철학의 극단적인 관념주의적 전체주의적 성향이 만들어 낸 잘못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대과학에 의해서 물리적인 힘은 네 가지뿐이며, 기가 힘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사실 <기>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며 우주만상과 생명현상에 개재되어 있다는 생각은 기존의 과학적 사고방식이나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에, 허무맹랑한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없는 -- 그래서 `오캄의 면도칼'에 의해 잘려 나가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오캄의 면도칼 Ockham's razor" 원칙은 `실재하는 것이 확인되지 아니한 것을 가정할 때에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 한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가정은 꼭 필요할 때에만 최소로 해야하며, 동일한 결과를 주는 더 간단한 가정이 가능할 때에는 더 간단한 가정이 옳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기>를 생각하면서 가장 조심스러운 점이 바로 오캄의 면도칼 원칙이다. 소립자들의 여러 성질을 살펴보면 소립자가 비록 미소하나마 <식>과 <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수의 저명한 물리학자들까지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캄의 원칙에 의하면 소립자의 <식과 기>는 <소립자의 물리적 성질>이라 하면 그뿐인 것이지, 굳이 <식과 기>의 존재를 추가로 도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립자의 성질을 <식과 기>라 하면 <식과 기>이지만, 그냥 소립자의 본성이라 하면 또한 그냥 소립자의 성질인 것이다. 그러니 <식과 기>의 근본이라 할 소립자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식과 기>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 소립자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성질들 이외에 <식과 기>가 있다고 인정해야만 설명할 수 있는 그러한 사실(현상)들이 밝혀지지 않는 한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소립자의 성질에서 <식과 기>를 인정할 만 한 `심증'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확신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소립자에 관해서는 그러한 `심증'만 이야기할 것이며, 오캄의 원칙이 요구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그 이후의 여러 가지 과학적 사실들과 이론들을 통해서 제시할 것이다. 그 주요 검토대상은 생명의 탄생과 진화현상, 카오스이론과 열역학 제 2법칙, 그리고 (에너지 등의)보존 법칙(保存 法則)이다.

특히 생명의 탄생과 진화현상의 설명은 <식과 기>의 실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식과 기>를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카오스이론은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식과 기>가 작용하는 기전(mechanism)을 설명하는 일에, 열역학 제2법칙은 의식이 형성되며 형성된 의식은 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사용하였다.

기공사들이 발휘하는 <기>나 생체의 여러 가지 <기적 현상>들은 <기의 실재함>의 근거로 삼지 아니하였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즉 객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내가 <기>에 대해서 이렇게 연구하는 이유와 목적의 큰 부분이 바로 그러한 현상들의 사실여부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현상들이 기의 실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며, 이 연구의 시작의 연유가 된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식과 기의 실재함>을 인정함으로서 설명할 수 있는 많은 초자연적 현상들--귀신, 영혼, 무당이나 복술(점),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여러 종교들의 주장(가르침)에 대해서도 <식과 기>의 근본성질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들이 실재의 현상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사후세계나 귀신 등은 그저 상상(occultist들의)이나 종교의 관심 대상일 뿐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하지만 ---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 생명의 진화 현상과 관찰 보고된 몇 가지 물리적 사실들, 그리고 동물 행동과학적 사실들은 그것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식과 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인 것이다. ( `초자연적 현상`이란 말은 이치 상 있을 수 없다. 실재하는 모든 현상은 자연적 현상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초자연적`이라 함은 '아직 해명되지 아니한 현상`과 '잘 못 관찰된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옳은 것이며, 그래서 '아직 해명되지 아니한 현상의 해명`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소립자부터 생명체에,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가르침(예측)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리법칙과 관찰 보고된 현상들이 <식과 기>의 실재를 입증하며, <식과 기>는 그러한 모든 현상들을 설명해 준다. 나는 아직까지도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인지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다. 어떻게 이처럼 <식과 기>와 모든 현상(자연 및 초자연)들이 서로를 설명하고 입증하는 유기적인 맞물림이 가능한 것인가? 심지어 `Boot-strap'식의 자기언급에 의한 순환 모순이 아닐까? 하고 전체적인 흐름을 곰곰이 따져 보기도 했었다.

나의 글에 인용된 물리법칙과 과학적 사실(현상)들은 모두 학계에서 공인되었고 잘 알려진 것들이지만, 형태창조장 이론 등 아직 공인되지 아니한 분야에 있어서는 그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의 생각(가설)을 일부 인용하기도 했다. 조심스러운 것은 가설에 가정을 더하는, 즉 가설을 바탕으로 그 위에 다른 가설을 수립하는 일이다. 이러한 수법은 폰 데니켄 등의 사이비 오컬티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다. 어느 한 사람이 내 놓은 근거가 박약한 가설을 다른 사람이 인용하고, 다시 원래 사람이 그것을 재인용하는, 그래서 그 가설이 마치 학계에서 널리 알려지거나 공인된 학설인 것처럼 분칠 위장하는 일 말이다. 이런 수법은 UFO, 고대문명 등의 책을 팔아먹기 위해서 흔히 동원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라면 <식과 기>를 입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과학적 사실들을 검토할 필요 없이 <생기론>이나 <물활론> 그리고 몇몇 물리학자들의 개인적 견해를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사실은 나의 생각--글에도 가정에 가정을 더한 사례를 찾아보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후식의 세계>부분이 그러한데, 이것은 그 내용상 부득이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부분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함께 거론함으로서 읽는 이들을 잘못 유도할 소지를 줄이고자 하였다.)


이처럼 <식과 기>는 소립자로부터 모든 자연현상, 그리고 사후세계까지 작용하는 것이므로, <식과 기>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는 단편적인 사실과 이론을 열거하는 것으로는 체계적인 설명이 곤란하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얻은 바, <식과 기>에 대한 생각을 미리 정리해서 말씀 드리는 편이 이해를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처럼 결론부터 내세움으로서 독자들에게 `황당한 생각'이라는 첫 인상을 줄 염려가 있지만 부득이하다.

그 전에 노벨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죄르지 Szent Gyorgyi의 글을 인용해 올리겠다.


"소립자를 모아 원자핵을 형성하면 이미 소립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창조된다. 이 핵 주위에 전자를 배치하여 원자를 만들거나 원자를 모아 분자를 형성한 경우에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생물계에도 이것을 속행하여 분자가 보여 거대분자가 되고 거대분자가 세포 내 소기관(예를 들어 세포핵,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리보솜 또는 세포막)을 형성하고 마침내 이것들이 모두 모여 위대한 창조의 신비인 경탄할만한 내부규제를 구비한 세포를 형성한다. 다음으로 이 세포가 모여 고등동물과 점차 복잡한 개체(예를 들면 당신)를 만든다. 각 단계마다 보다 복잡하고 섬세한 성질이 생겨나 최종적으로 기본적인 규칙은 불변이지만 무생물계에서는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성이 생겨난다."


이 책에서 앞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가설과 그에 대한 근거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 소립자는 질량, 전하, 스핀 등의 알려진 물리적 성질 이외에 미소하나마 <식>을 가지고 있다. <식>은 `의지'를 가진다.


-. <식>의 의지는 외부에 <기>로서 영향을 미친다. 즉 <기>라는 외부작용을 가진다.


-. 생명체의 탄생은 근본적으로 소립자의 <식> 즉 `의지`가 작용함으로서 가능하였다. 이 과정은 일리야 프리고진 등이 발견한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효과>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 소립자들이 결합해서 원자, 분자 그리고 생명체 등 더 큰 집합체를 만들 때에,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서 정보가 소실된다. 소실되는 정보는 소립자의 <식의 관계>이며, 물리학의 에너지보존법칙과 같은 보존법칙에 의해서 그 정보(식)는 시공간 내에 보존된다. 이것은 물질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이 된다.


-. 이렇게 형성된 <식>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우리의 의식이 되고, 사후에는 소멸되지 않고 초공간 내에서 <의식계>를 구성하며, <의식계>는 물질계와 상호 작용한다. 생물의 진화는 물질계(생명)에 대한 <의식계>의 작용의 결과이다. 나는 이 <의식계> 중에서 인간의 사후식들이 인터넷처럼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우주식>이라 정의하였다.


-. 우주식은 생물의 진화과정에 개입하고 기여하며, 생명의 탄생 및 진화의 목적과 결과는 보다 높은 수준의 <우주식> 즉 <우주식의 자체적 고양(高揚)>이다.


-. 인간의 윤리, 도덕, 그리고 사랑과 자비 등 종교의 가르침은 우주식의 자체적 고양을 위한 우주식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사항이며 업보는 그 강제 수단이다.


[출처] 기와 과학 (1-4)|작성자 우현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와 과학 9~13  (0) 2008.06.04
기와 과학 5~8  (0) 2008.06.04
Alien Species  (0) 2008.06.03
본질  (0) 2008.06.03
연속우주론  (0) 2008.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