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보가 뭐길래?
21 세기는 <정보의 시대>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아는 말이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서 헤엄칠 줄 모른다면 익사할 지경이다. 이런 정보의 시대에 새삼스럽게 ‘정보란 무엇인가?’ 한다면 멍청해 보이겠지만, 실은 <정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정보의 의미가 그만큼 광범위하며 아직까지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정보가 물리학의 영역에 편입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독일의 물리학자 클라우지우스가 처음 도입한 엔트로피라는 개념과 그 성질을 해석하기 위해서 볼츠만이 ‘질서’라는 더 새로운(물리적으로) 개념을 세웠으며, 엔트로피 이론을 공격하기 위한 사고실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맥스웰의 도깨비를 물리치기 위해서 항가리의 질라드, 프랑스의 브리유앵 등이 엔트로피와 정보의 관계를 밝혔고, 이 이론은 ꡒ정보는 부(負)의 엔트로피와 등가(等價)라는 근대적 개념의 원천이 되었다(자끄 모노, 우연과 필연)ꡓ. 이로서 물리학에 등장한 정보는 1948년 섀넌 Claude E. Shannon이 <통신의 수학적 이론>이라는 논문에서 엔트로피를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서 본격적인 물리학의 대상이 되었다. 정보는 부(負, 마이너스)의 엔트로피와 등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린다. 섀넌의 식에 의하면 어떤 계의 엔트로피와 정보양의 관계는 ;
엔트로피 + 정보 = 엔트로피의 최대 값(=상수) 이므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말은 곧 정보가 감소한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때 엔트로피는 절대로 감소할 수 없는(물리학에 의하면) 양이므로, 그렇다면 정보는 항상 감소하기만 하며 절대로 증가할 수 없는 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닫힌 계>, 즉 한정된 부분에 국한할 경우에만 성립하는 법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풀린다. 우리가 머리 속의 정보의 양을 증가시킬 때에는 머리 바깥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므로 머리 속에 보유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얼마든지 증가시킬 수 있다. 물론 우주 전체를 하나의 <닫힌 계>로 설정하면 우주 전체의 정보는 증가할 수 없다.
그런데 필자의 경험으로 물리학 특히 열역학에서 엔트로피의 개념을 배운 사람은 엔트로피와 정보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 두 개는 서로 너무나 이질적인 양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수학의 기본인 덧셈 뺄셈에서 서로 다른 양은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소주 두 병 더하기 안주 한 접시”는 그 각각을 값어치로 환산하여 술값 계산 시에는 가능하지만, 물리(수학)적인 더하기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니 <엔트로피 + 정보 = 상수>라는 공식에서 엔트로피는 정보와 등가(等價)라야 하는데, 그 두 개념의 상호 관련이 쉽지가 않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엔트로피와 정보는 둘 다 <상호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참고;아직까지 ‘정보’의 정의는 학계에서 확립되어 있지 아니하다. ‘형태’, ‘의미’등의 개념으로 정의하는 학자도 있지만, MIT의 컴퓨터 학자인 에드워드 프레드킨Edward Fredkin처럼 ‘우주에서 가장 구체적인 것은 정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모든 존재 그 자체, 또는 존재의 구성원(元)이 정보라는 것이다. 불교의 만법유식(萬法唯識)과 동일한 말이 된다). 엔트로피의 본질이 <관계>라는 것은 <열역학 제2법칙> 편에서 다시 설명 드리겠다. 이제 정보의 본질에 대해서 따져볼 차례다.
섀넌이 정보의 수학적 처리기법(그의 논문은 통신에 관한 것이었다)을 만들었다면 위너 Nobert Wiener 는 생물의 생리 현상, 자동제어, 통신 등 일반적인 정보를 다루는 종합적인 <정보학>으로서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인공두뇌학‘이라 번역된다)를 창시하였다. 그 연대가 섀넌과 동일한 1948년 무렵이란 것도, 두 사람 모두 미국인이라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생명체와 엔트로피(정보)의 관계를 처음 언급했던 것은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이다. 그는 ꡒ생명이란 무엇인가?ꡓ라는 저서에서 생물이 섭취하는 것은ꡐ부의 엔트로피ꡑ라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생명체는 외부로부터 질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능력과 정보가 생명의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부의 엔트로피’는 섀넌의 공식에 의해서 ‘정보’이다. 슈뢰딩거는 분자생물학의 아버지라고 까지 불리며, 현재 유전공학이 속해 있는 분자생물학에서 정보와 엔트로피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위너는 ꡒ정보는 에너지도 물질도 아니다ꡓ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 심리학, 철학에서는 ꡒ정보는 물질도 정신도 아니다ꡓ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정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만,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니다. 정보는 에너지도 물질도, 정신도 육체도 아닌 <제3의 존재>라는 것이 그 의미다. 심지어 독일의 물리 철학자인 바이츠제커 C.F.von Weizsacker는 ꡒ에너지는 정보다ꡓ라고 말한다.
이상의 말들을 종합하면 정보는 바이츠제커의 말처럼ꡐ에너지ꡑ라는ꡐ존재 그 자체의 표현ꡑ일 수도 있고, 물질과 에너지, 육체와 정신의 <관계>일 수도 있다. 정보에 대한 이러한 엇갈리는 해석들은 양자이론에 의해서 존재의 객관적 실체가 현대 철학의 실재론(實在論) 논쟁의 한 큰 주제가 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양자이론에 의하면 사물은 우리에게 <관측되는 정보>로서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대상에 대한 정보일 뿐, 그 실체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와 대상을 관계 짓는 것도 정보이며, 우리에게 있어 <대상 그 자체>도 역시 <정보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과 외부와의 관계를 정보라는 <제3의 것>으로만 규정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동일한 논리가 모든 존재들 사이에 성립한다. 모든 존재 그 자체와, 그리고 그 존재들 사이의 관계가 우리에게 있어서 곧 정보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실체를 확인한다는 일은 그것을 측정하여 정보를 얻는 일이며, 이때 그 대상이 단독체, 즉 다른 것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측정’하는 일 그 자체가 이미 그것과 측정하는 사람 또는 측정 장치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며, 우리는 그 <관계>를 측정하는 것이다.
위너가 정보를 패턴pattern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패턴은 곧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위너가 말하는 패턴에는 시간적 패턴과 공간적 패턴이 있다. 시간적 패턴, 즉 시간적 관계는 음악, 언어처럼 시간을 통하여 형성되는 관계를 말하며, 공간적 패턴은 미술처럼 동일 공간상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패턴은 그 형태에 내포되어 있는 질서를 통해서 인식될 수 있다. 즉 질서는 관계의 구조와 양상에 내포되어 있는 정보의 양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국 기보(棋譜)를 연구하는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패턴에서 질서(정석, 행마)를 찾아내고, 다시 거기에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다. 하급자의 바둑보다 조훈현-이창호의 대국 기보에는 분명히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 때의 질서는 곧 열역학 제2법칙에서 볼츠만이 엔트로피의 근거로 도입했던 질서와 동일한 관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엔트로피와 질서와 정보는 이렇게 상호 연결된다.
ꡒ관측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ꡓ는 양자역학자의 말처럼 외부와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외부와 관계를 가지며 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실현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관측, 즉 대상과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보를 통해서 이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는 정보>라는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이츠제커의 ꡒ에너지는 정보다ꡓ라는 말에서 에너지는 물질을 포함하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의 물질과 에너지 등가 원리에 의해서 물질과 에너지는 같은 것의 다른 나타남임은 알고 계실 것이다. 바이츠제커의 말은 <존재는 정보>라는 말과 동일하다. 저명한 물리학자이지만 진보적인 가설의 제시로 인하여, 보수적인 성향 위주인(이점은 과학의 기본 원칙 중의 하나인 ‘오캄의 면도칼 원칙’ 때문이다) 과학계에서 이단적인 학자로 취급받기도 하는 데이비드 보옴은 이렇게 말한다.
“사고와 물질 간에는 유사성이 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물질은 ”정보“에 의해서 결정된다. ”정보“는 공간과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말을 인용하고 있는 “The Dancing Wuli Master"의 저자 게리 쥬카브의 말처럼 마치 티베트의 불교도들이 쓴 것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보옴 교수가 1977년 버클리에서 물리학자들에게 했던 강의에서 인용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양자역학적 실재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보라는 포장지 속에 실체가 따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셔도 좋다. 실제로 그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오히려 양자역학은 <존재=정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보>라는 말의 이처럼 광범위한 개념은 말씀 드린 대로 현대과학의 최신 개념이지만, 동양 철학에서는 이미 옛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불교의 한 교파인 유식종(唯識宗)은 이름 그대로 “만법유식 萬法唯識”을 그 교리의 토대로 하고 있다. 유식종은 인도의 법상종(法相宗)에서 나온 것인데,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의 현장법사(602~664)가 중국으로 들여와서 해석 보급한 종파다. 그래서 유식종은 법상종, 또는 현장이 있던 절의 이름을 따서 자은종(慈恩宗)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법유식”은 “모든 존재와 그 법칙은 오로지 식(識)(에 의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法)”은 모든 존재와 존재의 법칙과 진리를 포함하는 것이다. “제법무상(諸法無常)”이란 말도 모든 존재는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며, 결국 이러한 가르침들은 <모든 것은 식의 변화일 따름>이라는 내용이다. 유식론에서는 사물 곧 존재는 감각기관(前五識)의 활동에 의해서 발생하는 감성(말라식)에 의해서 내 마음속에 형성된 영상이다. 그리고 이 영상은 다시 의식의 언어작용을 통하여 대표, 정리된다는 것이다.
이 유식론의 논리는 “모든 존재와 그 법칙은 정보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현대 과학 철학이 풀이하는 <정보론>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뿐만 아니라, 식이 정보처리 능력(기전)이라는 것과, 모든 존재는 <정보라는 관계> 위에 있다는 나의 가설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계>는 인연, 즉 <직접적인 이유(’因‘;원인이 되는 정보)와 간접적인 관계(緣>의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 ’연(緣)‘은 곧 ’관계‘이며 정보인 것이다.
그리고 “일체불이식(一切不離識)”, 즉 모든 것은 식(마음)을 벗어나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는 우리 의식에 대하여 <정보>이며, 그 ‘정보’로서의 영향력과 우리 의식의 정보처리 능력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형성되는 ‘정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제법(행) 무상”, “오온 개공(五蘊 皆空)”, 그리고 집착을 끊으라는 가르침 은 그 <존재(실재)론>에 있어서 현대의 양자역학과, <인식론>에 있어서 정보이론과 동일한 개념 위에 있다.
`정보 in-formation'이란 단어의 어원에는 '형성`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 일상적인 용어로서 정보란 동일한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어떤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의미를 담은 신호(패턴)의 집합이라 정의할 수 있다. (ꡐ정보ꡑ그 자체는ꡐ에너지의 무늬ꡑ라는 표현과 같이ꡐ존재의 상호 관계ꡑ이지만, 여기서는ꡐ정보ꡑ의 상대적인 대외적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정보는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의 특성은 한 마디로 ꡒ무형의 영향력ꡓ이다. 그 자체로서는 힘이 아니지만 상대에게 영향을 가할 수 있다. 에너지가 아닌 의식이 물리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러나 의식이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므로 의식은 `정보'의 형태로 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외에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기‘의 실체와, 앞서 딘 대린 Dean Darin'의 “염력은 의식으로부터 물질로 정보가 이동하는 현상”이라는 정의가 바로 이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reality들은 <정보>라는 형태로서 존재하며, 그 존재의 <상호관계>는 <정보>라는 형태로서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거대한 두 가지 업적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의 정의를 빌려 다시 한 번 존재와 정보의 관계를 정리해보자. 다음은 한스 페이겔스의 “The Cosmic Code 우주의 암호(1982, 이호연 역으로 1989년 범양사 출판부 간)”에서 인용한 것이다.
-. 중요한 물질적 실체는 장(field)들의 무리이다.
-. 장들은 특수상대성 이론과 양자론의 원리들을 따른다.
-. 한 점에서 장의 세기는 실험물리학자들에 의해 관측된 기본적 입자들인 장과 관련된 양자들을 발견할 확률을 준다.
-. 장들은 상호 작용하며, 그들과 관련된 양자들의 상호 작용을 뜻한다. 이 상호 작용들은 양자들 자신에 의해 중개된다.
-.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이처럼 물리학자들은 물질을 <장>으로 정의하고 인식하고 표현한다. 물질은 바로 <장>이라는 것이다. <장>은 어느 한 점에서의 소립자의 정보이다. 그리고 장의 상호 작용, 즉 장의 관계 역시 <정보>라는 말 이외의 다른 적합한 표현이 없는 것이다.
에클스는 “The Self and It's Brain"에서 칼 포퍼의 이론은 인용하여 ꡒ물질-의식-정보ꡓ라는 세 가지의 ꡐ세계ꡑ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물질계 <--> 의식계 <--> 정보계
풀이하면 물질과 의식은 독립적인 존재로서 상호작용하며, 물질과 의식 이외에 ‘정보계’가 존재하는데, ‘정보계’는 의식하고서만 상호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 정보는 의식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계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도식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질계 <--> 정보 <--> 의식계
즉 물질계와 의식계는 <정보>를 그 매체로 하여 상호 소통 및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定義)로서 우리는 양자이론이 이론으로서는 완벽함에도 불구하고 물질계의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양자이론이 우리 일반인들의 인식 체계에 해괴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실체로서의 정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보>라는 새로운 개념에 대하여 길게 설명을 시도하였지만, 아마도 아직 정보의 명확한 의미를 이해하시기는 다소 어렵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필자 역시 <정보>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자신이 없으며, 현대 과학 철학에서도 <정보>는 아직까지 미완성에 가까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슈뢰딩거가 “생물이 섭취하는 것은 (영양소, 에너지라기보다는)”부의 엔트로피(정보)“이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현대 생물학에 있어서도 <정보>는 중요한 개념으로 취급되고 있다. 특히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는 자동제어 기계와 생물의 정보를 그 주요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할 때에 생물학자인 동료와 공동작업을 했었다.)
참고로 생물과 정보와의 관계에 대한 과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겠다.(김용정 박사의 저서 “과학과 철학”, 범양사 출판부, 1996에서 인용).
“우리는 외계에 순응하든가 또는 반대로 외계에 대하여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계와 우리들 사이를 왕복하는 것이 정보이다”(N. Wiener,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1950)
"생물은 정보를 받아들여 보존하고 행동을 결정하며, 그 정보를 탐색, 선택, 조직하는 특별기관을 가진 존재이다. (W. H. Torpe, & O. L. Zangwill, "The Brain as an Engineering Problem" 1961)
앞서 우리는 <식 識>이란 글자가 <정보와 정보 처리 기능>을 의미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제 현대 과학에서의 <정보>를 고찰함으로서 <존재 그 자체와, 존재의 상호관계>라는 궁극점에서 불교 철학과 현대과학이 서로 만나서 합치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 장의 끝으로, 프레드킨 E. Fredkin의 견해를 참고로 소개 드리고자 한다(“3인의 과학자와 그들의 신, Three Scientists & Their Gods", Robert Wright, 정신세계사, 1991.에서 발췌 인용).
프레드킨은 컴퓨터 과학자이다. 그는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유적인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인 소립자들의 움직임(상호작용)은 실제로 물리법칙에 엄밀하게 의존하여 진행된다. 이때 소립자 그 자신들과 그 움직임은 컴퓨터 내부의 정보처리 과정과 동일하다. 실제로 소립자의 움직임으로서 우리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 물론 현재의 기술로서는 아직 불가능하지만 원리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다. 과학서적에 “당구공 컴퓨터”라는 이름으로(때로는 반 농담처럼) 인용되는 것의 원리를 만든 사람이 바로 프레드킨이다. 프레드킨의 ‘우주컴퓨터’는 에너지의 소모 없이, 즉 엔트로피를 증가시키지 않고 작동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소립자의 상호작용은 가역적이므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현실에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는 물론 에너지를 소모한다. ‘우주 컴퓨터’와 현실의 컴퓨터의 차이는 무엇인가? 프레드킨에 의하면 현실의 컴퓨터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기억의 삭제’에 의한 것이다. 즉 정보의 형성과정에 불가피한 (과거)정보의 손실이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이미 열역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제 11편 <엔트로피와 정보, 그리고 식>에서 말씀드릴 “맥스웰의 도깨비” 역설을 깨뜨린 이론의 가장 최신판이 바로 “맥스웰의 도깨비는 다음 정보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 이전의 정보를 삭제하는 과정에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프레드킨의 ‘우주 컴퓨터’는 ‘정보를 삭제’할 필요가 없다. 소립자의 상호작용은 가역과정이므로 엔트로피가 증가할 수 없다. 소립자의 ‘기억-정보’는 그 소립자의 현재 상태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시점에서 소립자의 운동방향을 반대로 할 수 있다면(이것은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과 동일하다) 소립자는 과거의 상태로 돌아간다. 즉 모든 정보는 손실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소립자는 정보 그 자체>라는 정의의 과학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즉 소립자의 상태의 변화는 곧 정보의 변화이며, 이것을 불교 철학에서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만법유식, 그리고 제법무상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가지를 더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립자의 움직임에는 미소한 비가역성이 있다는 점이다. 양자이론에 나오는 파동함수의 붕괴(수축)과정이 그것이다. 후에 상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이 과정에서 소립자는 기계적인 인과율에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킨다. 소립자의 식(정보)은 프레드킨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우리는 프레드킨의 이론에 양자이론을 적용해야 한다. 프레드킨과 현대 철학과 과학의 <정보>는 소립자의 <식>을, 그리고 양자이론은 소립자의 <기>를 보여 준다. 이제 우리는 <식>이라는 말과 <정보>라는 말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식>은 <정보와 정보의 꼴림, 경향>, 즉 <정보와 기>를 합친 것이다. <만법유식>의 <식>이 단순한 정보의 의미가 아닌 이유가 이 때문이다. <식>은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의지로서의 <기>를 포함한 것이니까.
6. 의식(意識)과 氣
지금까지 우리는 <기>라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으며 경험에 의해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작용 내지 현상의 실재 가능성의 근거를 찾아 다녔다. 이 말에는 약간의 논리적 모순이 있다. 과학은 경험 즉 현상을 그 토대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라면 과학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더라도 당연히 그 실재는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과학은 <기>를 `초자연현상'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리는가? ꡒ경험ꡓ그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기는 물리적인 측정 가능 양(量)이 아니기 때문에(적어도 아직 까지는) 학문적인 경험 즉 실험으로서는 확인이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에 대한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다. 즉 객관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 현상이 왜 객관적이지 못한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이 기는 의식의 작용인데, 의식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 중에서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의식이다. 의식이야말로 `주관'의 `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 이외의 다른 의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른 의식에 대하여 조사해 볼 수 있는 길은 어떤 조건하에서 그 의식의 반응, 즉 행동을 통하는 간접적인 방법뿐이다. 그래서 의식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인 심리학이 점점 행동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근래의 심리학은 의식을 영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능의 차원에서 다루려 한다. 이것은 마치 양자역학이 소립자의 행동만을 관측, 예측할 수 있고 그 본질에는 접근할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양자역학의 문제도 그 원인이 소립자의 식 때문이며, 인간의 의식의 문제도 '의식` 때문인 것이다.
<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하다. 나는 그 정의의 하나로서 <생물은 의식을 가진 것>이라 제안한다. 이 정의는 기존의 생물에 대한 관념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인간 이외에도 많은 동물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식물, 그리고 더 하등생물인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과연 ꡐ의식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생명의 탄생> 편에서 예로 들었던 아메바 뿐 아니라, 이러한 예도 있다.
ꡒ점액세균 콘드로마이세스 아우란티쿠스 Chondromyces auranticus의 일생은 바람결에 실려 다니다가 적당한 수분을 지닌 땅 위에 내려 앉은 작은 레몬 모양의 포자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곧 땅 위에서 발아하여, 막이 파열된 포자로부터 수천의 막대모양 박테리아들이 쏟아져 나온다. 움직이는 부분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데도, 이들은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는 동안 각각의 박테리아는 모두 포식과 증식을 반복하면서 다수의 집단을 형성한다. 이들 사이에 연속적인 합병이 이루어짐에 따라 그것은 다시 규모가 큰 집단으로 서서히 발전해 간다. 마침내 그것은 육안으로도 충분히 관찰 가능한 크기를 가진 무색의 거름 찌꺼기와 같은 덩어리로 성장한다. 그리고 토양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때로는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먼 곳까지 이동하기도 한다. 그 진행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개의 박테리아는 마치 열을 지어 먹이를 찾아다니는 병정개미와 같이 바로 앞 박테리아의 뒤를 바짝 따라 붙은 상태로 움직여 나아간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한 경우에는 아주 기묘한 사태가 벌어진다. 집단의 행진은 곧 중단되며, 개개의 박테리아는 모두 흙 찌꺼기와 같은 물질을 분비해 낸다. 그리고 이를 접착제로 삼아 마치 쌀가마니를 차곡차곡 위로 쌓아 올리듯 밑의 박테리아 위에 다른 박테리아가 올라타고, 다시 그러한 일이 계속 반복되어….높이 일 밀리미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만한 높이에까지 이른 집단은 대기 중에 포자를 방출함으로써 같은 생존 싸이클을 반복하는 것이다.ꡓ(라이얼 왓슨, ꡒ생명 조류 Life Tide, 박용길 옮김, 고려원미디어 발간ꡓ에서 인용)
이러한 예를 보면 박테리아가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물론 박테리아들이 어떤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ꡐ의사 소통ꡑ을 하기 위해서는 ꡐ의식ꡑ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ꡐ의식ꡑ이 단순히 박테리아의 유전자에 그러한 행동이 모두 입력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박테리아의 DNA에는 그러한 정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아메바의 예와 같이, 동일한 유전 정보를 가진 동일한 개체들이 제각기 다른 ꡐ임무ꡑ를 수행한다는 사실은 동일한 유전정보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탄생> 편에서 말씀드릴 형태(개체)발생의 문제와 같다. 최소한 개개의 박테리아들은 ‘개성ꡑ을 가지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처럼 ꡐ의식ꡑ은 가장 하등 생물인 박테리아뿐만 아니라, 동일한 결정을 계속 형성함으로서 ꡐ번식ꡑ하는 단백질의 일종인 프라이온 prion 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가서 물질의 가장 기본 단위인 소립자에게서도ꡐ의식’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따라서 이 절의 앞에서 생명체의 정의를 ꡐ의식을 가진 것ꡑ이라 했던 것은 글을 풀어 나가기 위해서였음을 여기서 확실히 해 두고자 한다.)
< 의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
ꡒ나는 무엇인가?ꡓ 라는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되는 의식과 자아의 문제는 인간이 아직까지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제일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자아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되어 자아를 (완전히)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로 귀착되는 자기언급의 순환 논리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원래 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고민거리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의식 속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자아란 자기인식과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인식'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외부에 작용할 수 없는 것이니까. 요절한 수학의 천재이며 인공지능의 선구자인 알란 튜링 Alan Turing이 ꡒ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ꡓ하는 글에서 제안한 ꡒ모방 게임 imitation game"처럼 우리는 `생각'만으로는 기계(컴퓨터)와 인간의 의식을 구별할 수 없다. 기계와 인간의 다른 점은 자기인식에서 나오는 의지이다. 의지야말로 ꡓ나는 무엇인가?ꡒ 하는 질문에 ꡓ나는 나이다ꡒ 라는 대답을 주는 것이다(아! 우리의 `의지'도 자기언급의 모순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나는 모순을 회피하기 위해서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답이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철학, 그리고 과학에 있어서도 가장 큰 문제는 <심신 문제 mind-body problem>이다. <심신 문제>란 ꡐ의식과 육체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ꡑ 하는 것이다.
사실 의식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뇌 세포의 전기-화학적인 작용의 결과 또는 부수적인 현상인지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마도 물리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의식의 실재 여부를 판단 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ꡐ의지ꡑ의 유무를 들겠다. 만약 유물론적 기계론자들의 주장처럼 의식이 물질의 기계적인 작용이라면, 그리고 물질이ꡐ의지(식)ꡑ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ꡐ물질ꡑ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의식에서 의지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ꡐ의지ꡑ역시ꡐ의식’의 일부분이므로 그 실재 여부를 판단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자유 의지> 편에서 다시 자세하게 검토하겠다.
나는 의지가 곧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의지를 가지고(포함하고) 있으며, 의지가 나를 (외부에 대한)나이게 해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서론>에서 말씀 드렸듯이 <식=의지에 의해서 발휘되는 기>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의)식과 기의 관계를 따져보려는 이 단원의 주제이니까.
기계에 자아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다.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Douglas Hofstadter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는 능력을 집어넣으면 컴퓨터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호프스태터의 생각에 찬성한다. 내가 소립자의 식을 주장하는 것은 내가 신비주의론자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내가 철저한 환원주의적 인과율론자로서, 인간의 의식이 신에 의해서 주어진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라 소립자의 식의 조직적 집합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생각에는 범심론, 유물론, 기계론, 환원주의, 통합주의가 모두 들어 있다. 컴퓨터가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는 이러한 나의 생각--소립자의 식으로부터 인간의 의식의 형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 연구의 한 학파를 이루고 있는 <기능주의>는 인간의 뇌를 하나의 기계로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기능주의는 `하나의 생각이 다음 생각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뇌 세포의 기능과 독립적인 의식의 요소를 인정한다.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물질과 독립적인 의식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ꡒ하나의 생각이 다음 생각의 원인이 된다ꡓ는 사실은 의식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에 의지가 있다면 그 근원인 소립자의 식도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나의 생각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사실 철학사상 -- 아니, 인간이 생긴 이래로 <정신과 육체>의 二重性 문제, 소위 mind-body problem 만큼 인간의 ꡐ정신ꡑ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온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과연 <정신>이라는 것이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곧 <영혼>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로도 직결된다. 모든 종교는 사후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만약 사후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을 동안 최대한의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선도 도덕도 사랑도 모두 가식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정신은 물질의 작용일 뿐이라고 보는 환원주의적 유물론은 그 유래가 오래다. 영혼의 존재를 믿었던 플라톤과 달리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던 에피쿠로스Epicuros 등은 당연히 “사후세계가 없다면 삶의 의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그 대답은 당연히 “현세에서의 최대한의 쾌락의 추구”이다. 따라서 영혼의 존재를 믿었던 플라톤에게는 “선(善)한 것이 쾌락”이었지만, 영혼의 사후 존재를 믿지 않았던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는 “쾌락이 선”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쾌락주의자를 에피쿠로스의 이름을 따서 epicurean 이라 부른다(에피쿠로스 학파가 추구했던 쾌락은 인생의 괴로움에서 해방된 “아타락시아”라는 평정 상태로서, 타락적인 향락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절제와 인내가 필요하다고 했음을 참고하시라). 이처럼 정신과 육체(물질)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크게는 정신과 육체를 동일시하는 일원론과 정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이원론으로 나눌 수 있지만, 자세하게 분류하자면 일원론과 이원론도 몇 가지 입장으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 뇌(신경)생리학자인 R. Sperry와 J. C. Eccles 의 견해를 참고해 보자. 두 사람 다 뇌의 작용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학자들이다.
스페리는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적 일원론을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이론은 <멘탈리즘mentalism>이라 한다.
ꡒ멘탈리즘이란 심리학에서는 행동주의 혹은 물질론과 대비되는 것이다. 멘탈리즘은 의식이 행동을 결정하거나 행동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그리고 마음의 특질은 비물리적 혹은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이제 우리는 그것을 뇌 과정의 창발적 특성이라고 보고 있다.ꡓ
스페리는 신경세포에서 신호를 발신하는 일에 있어서 뇌세포 자체는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결정(명령)은 마음이나 의식이라고 하는 상위의 뇌의 특성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은 프리고진 등의 <산일구조> 이론, 즉 열역학적으로 비평형에 있는 계에서 질서가 자발적으로 ꡐ창발ꡑ된다는 이론과, 카오스 이론, 즉 복잡계에서 질서가 창발될 수 있다는 이론(사실상 프리고진의 이론과 카오스 이론은 질서의 창발에 있어서 그 궤를 같이 하는 이론이다)에 의해서 뒷받침되어, 현재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이다. (물론 의식은 뇌세포의 전기-화학적 작용의 결과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의식은 물리법칙에 의해서 규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철저한 환원주의적 견해를 가진 과학자의 숫자는 더 많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의식은 육체와 독립적인 존재는 아니되, 독자적으로 육체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ꡐ정신적ꡑ인 것으로서ꡐ실재하는 것ꡑ이라는 말이다. 물론ꡐ스페리의 정신ꡑ은 육체가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에클스는 심신이원론을 주장한다. 그는 유명한 과학철학자인 K. Poppers 와의 공저 ꡒThe Self and Its Brain, 1977ꡓ에서
ꡒ나의 인격적 독자성, 즉 나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자기 의식은 나 자신의 자기 탄생에 대한 창발적 설명으로는 분명하게 밝힐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의 자기 의식하는 마음 또는 독자의 자기 또는 혼의 초자연적 기원이라고 불리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어떻게 하여 나의 혼은 진화적 기원을 가진 나의 대뇌와 연락하도록 되었는가ꡓ(김용정, ꡒ과학과 철학ꡓ, 범양사 출판부, 1996. 에서 인용)
이제 기와 관련해서 의식의 본질을 살펴보자.
의식에 대한 기능주의는 의식의 본질적 성분이 `정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의식이 만들어지고 움직이는 원인은 뇌 세포의 전기 화학적 작용이지만, 그 결과 즉 의식 그 자체는 전기 화학적 작용 그 자체가 아니라는 입장인 것이다. 브라암스가 여러 가지 음표를 악보에 기입하여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음표들과 교향곡은 별 개의 `존재'라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종래의 기계론적, 환원주의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전기 화학적 작용이나 음표라는 형이하학적인 것과 의식이나 교향곡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논리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전체주의이다. 그러나 전체주의 역시 형이상학적인 것과 하학적인 것들 사이를 함수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는 다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뿐이다.
이 문제의 근본은 의식이 실재인가 관념인가 하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내가 줄곧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은 ꡒ의식은 실재ꡓ라는 것이다. ꡒ브라암스의 교향곡 파사칼리아가 실재한다ꡓ라는 것과는 다르다. 의식은 현상이 아닌 실재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 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이 말이 된다.
그러나 ꡒ의식이란 무엇인가?ꡓ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방금 `의식의 본질적 성분은 정보'라 했지만, `정보'라는 말 역시 `의식' 못지 않게 애매한 말이다.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오히려 `의식'보다 더 낯이 선 개념이다. 그러니 `실재로서의 의식'의 실체를 표현하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표현이지만 우리에게는 달리 더 좋은 표현이 없다. 우리의 `의식의 멍에`인 언어의 한계인 것이다('나의 능력의 한계`라는 것이 옳겠지만).
`의식'은 `정보'를 그 기반으로 한다. 앞 서 나의 정의에 의하면 의식은 정보 그 자체와 정보처리 및 교환 능력이다. 그런데 물리학자, 과학철학자인 장회익 교수는 그의 저서ꡒ삶과 온생명ꡓ 에서 ꡒ의식은 주체적으로 느껴지는 정보체계의 총체ꡓ 라고 정의하고 있다. 장교수와 나의 의식에 대한 정의에는 <주체적>이라는 단어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의지’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 책의 앞부분에서 ‘기’에 대한 정의를 생각할 때에 ‘주체성’을 그 기준으로 했었음을 기억하실 것이다. 결국 의식이란 <의지를 포함하는 정보 작용>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의식에 대한 장회익 교수와 나의 정의는 일치하는 것이다.
실은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서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하였다. 왜냐 하면 <의지, 주체성>이 과연 우리의 의식에 기본적인 능력, 본질로서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생물학과 철학에서 현재 미해결 과제로서 많은 학자들의 논쟁 거리가 되어 있다(실은 이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과학적인 답을 얻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의지> 편에서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우리는 의식의 대외 영향력, 즉 기는 ꡒ정보의 전달ꡓ일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었다. 이 결론(가정)에 의해서 의식과 기의 작용을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 정보의 전달 과정에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적용되지만 ꡐ교감(交感)ꡑ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거시적인 세계, 즉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서 모든 과정이 에너지의 소모를 필요로 하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정보의 전달, 즉 기가 발휘될 때에 에너지가 필요(소모)할 것이라는 선입감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의식은 기의 에너지를 어디서 공급받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의식이 뇌 세포들로부터 받는 전기 화학적인 에너지에만 의존하는 것이라면 의식의 작용도 전기 화학적인 작용의 결과일 뿐이라는 결론이 되고, 그렇다면 의식도 물질적인 것(현상)이라는 결론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 대다수 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로서, 상당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뇌의 총체적인 작용 기전은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못하였지만, 뇌 세포들 사이의 정보(신호)전달 기전은 거진 알려져 있으며, 그 과정은 분명히 전기-화학적 과정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와 식>의 근거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나는 아예 과학적 근거를 배제하였을 것이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기, 식 역시 알려진 물리법칙을 벗어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과학적 사실에서 기와 식의 실재를 인정할 수 있는 빈틈을 찾을 수 없다면 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기를 느낀다고 말하더라도 기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의식이 물질적인 현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자유의지와 식>에서 더 자세하게 검토할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과 식>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기본적 물리작용의 과정은 에너지의 소모를 수반하지 않는 가역과정이다. 비가역과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거시세계에서의 현상인 것이다. `우리'가 바로 프리고진이 말하는 ꡒ소산(산일)구조dissipative structure"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소립자의 작용 등 기본 물리적 과정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에너지 보존법칙이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두 개의 전자가 서로 만나서 서로를 밀쳐내는 힘을 주고받은 다음 서로 멀어지는 물리적인 상호작용 과정에서 두 전자의 에너지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상호작용 또는 정보의 교환작용에 있어서 반드시 에너지의 소모가 수반되는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따라서 의식의 작용도 대부분은 에너지의 소모를 수반하는 과정이지만, 그 가장 기초에 있어서는 에너지의 소모가 없이 순수하게 정보의 교환(ꡐ감응ꡑ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의식은 그 대부분을 물질적인 작용에 근거하고 있지만, 물질적인 현상과는 독립적인 작용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예일대학 물리학, 자연철학 분야의 명예교수인 H. Margenau는 ꡒ뇌나 신경이나 감각기관 같은 복잡한 신체 시스템에서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너무 작기 때문에 확률론적인 양자역학적 효과가 지배하므로, 복잡한 유기체에서 에너지는 자동으로 공급된다. 마음이 이 과정에 작용 즉 심신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마음이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ꡓ
즉, 의식은 마치 양자역학에서 소립자의 존재양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가 확률장인 것처럼 일종의 장으로서 존재하고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확률장은 에너지장이 아니다. 공간적 위치나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의식이 뇌에 정보를 줄 때에도 에너지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의식을 ꡐ확률장ꡑ과 유사한 형태로 보는 가설은 형태창조장 morphogenic field 가설과 매우 유사하다.
뇌세포의 시냅스에서의 신호전달에 대한 연구로 1963년도 노벨상을 수상한 J. C. Eccles는 ꡒ의식이 물질에 작용하는 것은 확률장과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ꡓ 그리고 그는 ꡒ주체적 의식이 대뇌보다 우위에 있다….이와 같이 무엇인가 중심적인 핵, 즉 내적인 자아라고 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우리들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무엇인가 별다른 존재로서 사후에도 잔존해 남는 것ꡒ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ꡒ의식은 신경중추에 작용하여 신경현상의 동적인 시공 패턴을 변용시켜 신경현상 이상의 고차의 해석적 제어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ꡒK.C.Popper & J.C.Eccles, The self and its brain, 1977ꡓ)
ꡒ…그러므로 나는 나의 독자의 자기 의식하는 마음 또는 나의 독자의 자기 또는 영혼의 초자연적 기원이라고 불리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전혀 새로운 일단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어떻게 하여 나의 영혼은 진화적 기원을 갖는 나의 대뇌와 연락하게 되었는가? 이 초자연적 창조라고 하는 생각에 의해서 나는 나의 자기의 독자성이 유전적으로 경정되어 있다고 하는 전혀 있을 수 없는 논의를 회피할 수가 있다. 나의 대뇌의 유전적 독자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험된 자기의 독자성이 자기나 영혼의 독립적 기원에 관한 이 가설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 자기나 영혼은 대뇌와 연결됨으로서 나의 대뇌가 되는 것이다ꡓ
즉, 의식이 확률장을 통해서 시냅스 소포의 방출확률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의식(대뇌)의 작용을 제어한다는 가설이다. Torpe 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신적인 현상이 생리학적 내지 생화학적 현상을 추월한다는 의미로 정신은 물질을 초월한 존재라 하였다.
기는 의식 또는 식의 자연스러운 작용의 일부분이지, 기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ꡒ기 문화권ꡓ이라 불리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기'는 알았지만 `식'을 깨닫지 못했다. `식'을 깨달은 것은 불교뿐이다. 기 문화권에서는 기를 우주의 본질로 간주하지만 불교에서는 오온(五蘊) 중의 하나인 식의 외부 작용 기전으로 볼뿐이다.
`일체 유심조 一切唯心造`인 것이다.
7. 자유의지와 식 -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뉴턴이 운동법칙을 발견한 이후, 서구에서는 오랫동안 <기계론적 우주관>이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군림해 왔다. 라플라스 Laplace는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 수 있다면 우주의 과거와 영구한 미래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런 생각은 곧 <결정론determinism>과 직결된다. 우주의 모든 존재 - 시공간과 물질 - 는 물리법칙의 엄격한 적용을 받으므로, 우주의 현재와 미래는 우주의 초기상태에 따라 물리법칙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코스대로 진행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 생각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설자리가 없다. 우리의 생각도 감정도 모두 뇌 세포 속의 소립자들의 운동에 의한 것이라 한다면, 그 소립자들의 움직임은 초기상태에 의하여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의식은 물질 입자들의 움직임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생성 소멸하는 과정이요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상대성이론으로 시공간이 상대적이며, 또 양자역학 특히 불확정성 원리가 발견됨으로 해서 허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의지의 문제는 다시 등장하였다. 의식은 정말로 기계적, 물질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의식의 외부 작용인 의지 역시 기계적, 물질적이라는 결론이 되고, 우리의 의식도 의지도 결정론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나의 의지'라는 것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들의 물리법칙에 따른 움직임을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곧 의식이 물질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ꡒ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ꡓ하는 문제는 아직까지 미해결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 ꡒ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ꡓ가 의미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과 물질은 분리된 것이라는, 즉 정신계와 물질계가 서로 독립된 것이라는 <이원론>은 고대에서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원론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은 물질 즉 육체와 독립적인 존재이므로 `자유'로운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뇌 세포의 구조와 기능, 작용에 대한 지식이 늘어갈수록 `자유의지'의 존재는 의심과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기능주의자들의 이론대로라면 두뇌는 신경 세포들의 집합이며 의식이란 곧 전기-화학적 작용 그 자체이다. <부현상론>에 의하면 의식은 그저 뇌 세포 사이의 전기-화학적 작용의 `부산물'이며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판단들은 컴퓨터의 그것처럼 입력된 지각을 대상으로 뇌 세포 속의 기억(프로그램, 데이터)이 `자동적'으로 내리는 출력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일견 어이없는 생각처럼 보인다. 아니, 그렇다면 아까 데이트할 때 영화를 보러 가자, 싫어, 호프집엘 가자 하고 애인과 다투었던 것은 무어란 말인가? 항상은 아니지만 허용된 여건 범위 내에서라면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면 `자유의지'는 당연한 것 같지만, 그래도 뇌의 신경 세포들간의 전기-화학적 작용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과학적 근거는 없다. `나의 의식'이 `나의 의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특히 신경생리학자, 생화학자들이 `독립적인 의식'을 부정하고 기계론적 내지 환원주의적 `의식관'을 가지고 있는 지를 안다면 아마도 당신은 상당히 놀랄 것이다(오히려 물리학자들 중에 의식의 실재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의식의 실재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자존심이나 인권을 침해받기 싫어한다는 것도 재미있다). 사실 아직은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이 없다. 우리의 지식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실재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개의 조건이 필요하다.
-. 물질계와는 독립적인 물리적인 실재로서 의식이 있어야 한다.
-. 의식은 물질과 상호작용 할 수 있어야 한다.
첫 째 조건은 정신이 세포들의 전기-화학적 작용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뇌 세포와는 독립적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의식이 물질의 전기-화학적 작용에 전적으로 지배되는 것이라면 의식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뇌 세포들의 복잡한 신호의 교환의 결과일 뿐이라는 기계론적 결론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제어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문제mind-body problem은 고대 그리스 이래 현재까지도 철학의 주요 논쟁의 대상인 만큼, 그리 간단히 살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제 11편 <엔트로피와 정보, 그리고 식> 에서 의식이 육체와 독립적으로 형성되고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겠다.
두 째 조건은 정신과 물질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물질이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신 역시 물질에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생각'은 뇌 세포에게 명령을 내릴 방법이 없다. 뇌 세포에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정신'은 있거나 말거나한 존재다.
위 두 가지 조건 중에서 두 째 조건은 비교적 쉽게 수긍이 가능하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관찰자의 의식이 소립자(물질계)에 작용할 수 있다고 인정할 만한 근거가 있다. 물론 신체와 독립적인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선행 조건이니까 그러한 양자역학적 사실은 이 단계에서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 첫 째 조건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적 사실(지식)의 범위 내에서는 아직까지 첫 째 조건에 대하여 선듯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다만 우리들의 믿음뿐.
도대체 의식은 무엇인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의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역시 자유의지와 마찬가지로 아직 누구도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논리적으로도 `의식'이 `의식'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의식'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주체가 바로 `의식' 그 자체인 것이다. `자기언급의 모순'을 피할 길이 없다.
아무리 뇌에 백억 단위 숫자의 신경세포가 있다지만, 그것만으로 `의식'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 상당수는 `그렇다'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두뇌만큼 성능이 우수하고 훌륭한 프로그램만 있다면 컴퓨터도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프리고진을 위시해서 많은 학자들이 `의식'은 뇌 세포의 복잡한 자기조직화의 결과로 `창발'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 생각은 최근 카오스 이론의 발전으로 더욱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다.
우리의 두뇌는 카오스 계의 좋은 예이다. 카오스이론에 의하면 무작위적 행동과 질서의 자발적 출현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 즉 혼돈 속에서 질서가 자발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카오스 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조직화의 성질은 계들이 놀라운 효율성을 가진 조직화된 복잡성을 갑자기 그리고 자연발생적으로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카오스 계(두뇌)의 복잡한 조직과 기능 속에서 의식이 저절로 생길 수 있다'는 견해이다. 카오스 계의 예측 불가능성은 비결정론적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환기시켜 드린다. 그래서 이 이론은 우리가 갈망하는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이 생각에 의하면 `의식'을 위해서 굳이 <소립자의 식>이 있다는 가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 생각은 상당한 이론적 근거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는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자유의지가 부정된다면 인간은 소립자의 우연한 집합체일 뿐이며 의식은 뇌 세포들의 전기-화학적 작용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 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컴퓨터처럼 입력에 의해서 결정된 출력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조직화'라는 `상위의 법칙'도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소독약으로 박테리아를 죽이는 일과 김정일이 북한 주민들을 굶겨 죽이는 일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소립자의 우연한 집합체'인 애인, 처자식과 부모, 친구, 동료들을 사랑할 이유가 무엇인가?
의식이 ꡒ카오스 계의 자기조직화 효과ꡓ에 의해 창발된 것이라는 이론(가설)은 기계론적 결정론과는 그 포인트를 약간 달리 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카오스 계의 예측불가능성이 우리에게 일종의 `의사(疑似)자유의지'를 부여한다. 이 예측불가능성은 카오스 계의 초기조건에 대한 고도의 민감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미래 - 자신의 다음 판단과 행동 -을 알 수 없으므로' 그것이 결정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라는 생각이다. 논리적으로는 틀리지 않은 생각이다. 그러나 예측불능성이 비결정적인 것이라 오해하면 안 된다. 카오스 계가 아무리 예측 불가능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초기조건에 의존한다. 즉 초기조건이 결정되면 그 이후의 진행은 `기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카오스 계 자체가 어떤 임의의 행동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PC에 내장되어 있는 난수 발생 프로그램에 대하여 난수를 알고 PC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와야 할 것이다. ꡒ아니, 난수는 아무런 규칙이 없는 수열인데, 어떻게 PC의 규칙(프로그램)으로 난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가?ꡓ 그렇다. PC에서 얻을 수 있는 난수는 `의사疑似'난수이다. 난수발생 프로그램에 초기조건이 동일하게 부여되면 PC는 동일한 난수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나름대로의 규칙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므로 엄밀한 정의의 난수가 아니다. 인간의 두뇌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복잡한 카오스 계라는 사실도, 그래서 우리 두뇌의 민감성과 예측 불능성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기계론적 결정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의 생각', `나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뇌 세포를 구성하고 작용하게 하는 물질 입자들일 것이라는 논리적 귀결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생각 -- 카오스 이론자들 --을 납득할 수 있는가? 단지 우리가 `부자유스럽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만으로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나는‘의식‘은 ‘의지의 작용’이라 본다.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따져 볼 수 있는 방법은 이렇다. 의지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작용하여 동일한 원인에서 다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도록 하는 작용(능력)이다. 의식을 부정하는 기계론적 유물론자들의 주장의 근원은 이 ‘작용’을 물리적인 실재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유물론자들의 생각대로라면 항상 동일한 원인에서는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이 점을 과학적으로 살펴보자.
기계론적 유물론의 출발은 뉴턴의 역학 법칙부터이다. (거의)모든 물리작용은 가역적이다. 가역적이란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원인에서 결과가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 역으로 결과에서 원인을 밝혀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기계적인 과정(알고리듬)만 있을 뿐, 다른 어떠한 ‘작용’의 개입도 없다는 것이다. 결과는 원인으로부터 오로지 정해진 알고리듬(절차)에 따라 기계적 결정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동일한 원인 -> 동일한 결과>라는 논리는 양자역학에서 부정된다. 양자역학에서 소립자들이 그 존재를 드러내는 과정(관측, 다른 입자와의 작용)은 ‘확률적’이다. ‘확률적’인 것은 ‘기계적’인 것과는 다르다. ‘원인->결과’의 과정이 일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어떤 ‘작용’이 개입하고 있다는 결론뿐이다. 사람의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도 그것이 ‘확률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호킹과의 공동 연구로 우리에게 잘 알려wu 있는 뛰어난 수학 물리학자인 영국의 로저 펜로즈 Roger Penrose는 "황제의 새 마음 Emperor's New Mind" 에서 의식은 알고리듬, 즉 정해져 있는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의식의 이러한 특징을 소립자의 확률적인 양태와 결부시켜서, 양자역학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면 의식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의 행동이 왜 확률적인가는 당연히 자극과 반응 사이에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를 소립자에도 적용할 수 있다. 물리학은 그 가장 기본인 소립자에서부터 '의지'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검토는 다음에도 계속 될 것이다.
카오스 이론에서는 우리의 두뇌가 카오스 계이므로 원인의 미소한 차이가 결과의 큰 차이를 만들어 내므로 '원인->결과'의 과정이 예측 불능이다 라고 주장한다. 카오스 이론은 확실히 기존의 기계론보다는 발전한 이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두뇌가 카오스 이론에 충실하다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미친 사람의 것이 되어 버린다. '카오스'라는 말 그 자체가 '혼돈', 즉 '아무런 법칙이 없는 상태'이다. 카오스 이론은 '혼돈'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질서(법칙)의 실마리를 찾아 낸 것에 불과하다. 비록 질서가 깃 들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카오스 계는 이름 그대로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카오스 이론은 아직까지 그 질서가 어떻게 생겨 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의지'의 실재함을 입증할 수 있는 예를 보자. 아래의 두 예는 라이얼 왓슨의 "Life Tide"에서 발췌 인용한 것이다.
듀크 Duke 대학의 Helmut Schmidt 교수가 1970년 실시한 실험 논문에 의하면, 적외선 히터가 설치된 방에 고양이를 넣고서 히터를 컴퓨터에 의해서 이진(二進) 난수적으로 자동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도록 장치해 두었다. 히터가 켜져 있는 시간과 꺼져 있는 시간이 컴퓨터에만 의존한다면 반반씩이 된다. 그러나 추운 날에는 분명히 켜져 있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결과가 나왔다.
유트레히트 Utrecht 대학의 시보 슈텐 Sybo Schouten 교수가 1972년 발표한 자신의 실험 결과 논문은 더욱 놀랍다.
"먼저 반으로 나눈 우리 한쪽에 레버(손잡이 막대)를 설치한 다음, 위쪽의 지시등에 불이 켜지면 곧 레버를 당기도록 10 마리의 쥐를 훈련시켰다. 성적이 좋은 경우에는 물을 주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훈련을 마친 다음 이번에는 한 마리는 지시등만 있고 레버는 없는 우리에,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반대로 지시등은 없고 레버만 있는 우리에 따로 넣어 서로 멀찌감치 떨어진 두 방에 이들을 격리시켰다. 한쪽 우리 안의 지시등이 켜지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한쪽 우리의 레버가 당겨지는 것이 확인되면, 이에 대한 포상으로 두 개의 우리에 물이 공급되도록 하는 장치도 물론 잊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앞서와 달리 이번에는 사람이 직접 관련하지 않아도 되게끔(주;인간의 초심리적 -- 염력 등의 초능력 현상의 개입 소지를 없애기 위하여) 지시등의 스위치를 이진난수(二進亂數)식 셀렉터로 조정되도록 한 것은 물론, 실험 결과 역시 컴퓨터에 자동 기록되도록 배려하였다는 점이다. 이 실험 결과 확률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높은 점수를 보여주었다. 다음에는 첫 번 째 우리, 즉 지시등만 있는 우리를 비우고서 실험을 실시하였는데, 이 경우 역시 이론적인 확률보다 높은 점수가 나왔다."
이러한 실험 결과에 의하면 '의지'는 분명히 실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일한 확률적 과정이 지배하는 인간(동물)과 소립자의 반응에는 동일한 논리로서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의 우주공간 기원설, "다이슨 천체" 등으로 유명한 천체물리학자 프리만 다이슨 Freeman Dyson 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의식이 단지 우리 뇌 속에서 화학적 사건들에 의해 수행되는 수동적인 부수 현상이 아니라, 분자 복합체들에게 한 양자 상태와 다른 양자 상태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능동적 행위자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은 이미 각 전자들 속에 내재해 있다."
관점을 조금 바꾸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소립자들이 미소한 `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양자역학의 연구결과를 보았다. 이러한 소립자들의 `식'이 모여서 원자, 분자의 식을 이루고, 분자들이 모여서 세포의 식을 이루며, 세포의 식이 모여서 생명체의 `의식'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을까?
사실 이 생각은 소립자의 `식'을 인정하는가 아닌가 하는 점을 제외하고는 카오스이론과 동일하다. 소립자들의 무수한 `식'에서부터 수 백억 개 뇌 세포들의 보다 큰 식이 인간의 `의식'을 이루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카오스 이론의 자기조직화에 의한 창발성 이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물질만'이 모여서 `의식'을 이루어낸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물질과 `식'이 모여서 `의식'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편이 더 타당성이 있지 않을까?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현상'이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계의 어떤 '고차원적 성질'이라 결론 짓는 것보다는, 계의 구성 단위 입자들의 식이 자기조직화 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보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생명의 탄생, 진화, 의식의 형성--이런 현상에 대하여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낮은 확률의 '우연`을 믿는 것보다는 그 근거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소립자의 조그마한 식`을 믿는 것이 훨씬 더 확률이 높지 않을까? 그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소립자에게 식이 있든 없든, 아니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결과는 동일하지 않은가? 소립자의 `식'은 `소립자의 것'이다. 그러니 소립자들이 모여서 `의식'을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그 `의식'은 소립자 즉 `물질'로서 만들어진 것이지, `의식'이 물질계와 독립적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이 문제에서 소립자의 식을 도입하는 일은 `오캄의 면도칼' 원칙에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다. 사실 양자역학자들이 소립자에 대하여 나보다 몰라서 소립자의 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물리학이라는 한정된 목적에 있어서는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오캄의 면도날로 잘라버린 것뿐이다.
8. ‘있음’과 ‘없음’
지금까지 우리는 정보와 의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직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즉 과연 <정보>나 <의식>은 실재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에클스 등의 견해를 인용하여 물질과 의식과 정보가 각각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의식과 정보의 실재 여부는 좀더 엄밀한 검토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석해 본 것은 정보와 의식의 특성일 뿐, 그것의 실재 여부를 입증한 것은 아니다. 만약 정보, 의식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결국 ‘기’, ‘식’ 역시 아무런 근거 없는 가상적인 무엇일 뿐이다. 이제 정보와 의식의 실재 여부를 따져 보아야할 차례다.
< 존재>란 무엇인가? >
제목이 너무 거창해서 어려워 보일진 몰라도 쉽게 말하자면 ‘있다’라는 말을 사용(적용)할 수 있는 대상은 무엇 또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막상 말을 이렇게 바꿔 놓고 보면 또 너무나 쉬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아니,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더 따질게 뭐람?” -- 이렇게 반문하신다면 동어 반복(同語 反復)의 오류를 범하시는 거다. ‘있다’라는 것은 ‘있다’라는 말(논리) 이외의 다른 말(논리)로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있다’, ‘없다’를 가름하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철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실재론 實在論>은 그 역사가 그리스 시대의 플라톤부터 양자역학의 기반이 정립된 지금까지 미해결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문제를 더 깊이 따질 생각은 없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상식적이고 실용적인 답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우리는 ‘있다’라는 말을 실체와 현상 두 가지에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상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간접적인 영향으로서, 존재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키리코의 그림에는 신비한 고독감이 있다”라는 표현에서 ‘그림’은 실체이며 ‘신비한 고독감’은 우리가 느끼는 현상이다. 이것은 그림이 주는 여러 정보들 -- 구도, 선, 형체, 색, 명암, 질감 등을 바탕으로 우리 의식이 재구성 해낸 것이지, 그림 그 자체가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이러한 유(類)의 현상은 실재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기’라는 것이 과연 실재이냐 아니면 현상을 나타내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실체로서의 ‘기’를 인정할 수 있으려면 그 실재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있다’라는 것은 ‘우리가 그 영향을 측정할 수 있다’라는 의미이다. 만약 그 영향을 측정할 수(쉽게 말해서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영향의 측정은 객관적으로, 즉 세계 인류 중 누구 하나라도 아무나, 그리고 어떤 측정 장치를 사용하든지 관계없다. 측정할 수 있으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이것을 그 대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외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그 기준이 된다. 물리학은 ‘측정 가능한 것’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의지, 사랑, 믿음 등은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하지 않으므로(적어도 현재로서는) 물리학의 대상이 아니다. ‘식’, ‘기’가 ‘있다’라고 할 수 있으려면 측정이 가능해야 한다. 이것을 ‘있다’의 첫 째 기준으로 하자.
다음 기준으로서, <실체>는 그 단독으로서 성립되어야 한다. 다른 실체(들)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속도는 <거리/시간>으로 표시되는 양이다. 거리, 시간 중 하나라도 없으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속도란 인위적인 -- 가상적인 양일 뿐 <실체>는 아니다. 이런 기준에서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시공간과 소립자뿐이다. 그리고 소립자에는 힘을 전달하는 입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힘도 따라서 <실체>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시공간과 소립자 이외의 것들은 일단 ‘현상’이라 해도 좋다. ‘사랑’, ‘희망’ 등이 ‘없다’라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무엇’의 작용으로 나타나게 되는 부차적인 ‘현상’이라고 엄밀하게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심리학의 한 학파에서 의식을 ‘부차적 현상’이라는 견해를 가지는 것과 동일한 관점이다.
이렇게 기준을 정하고서 살펴본다면 <정보>는 실체인가 현상인가 하는 문제가 저절로 대두된다. <정보가 뭐길래?> 편에서 정보를 ‘관계’라 일단 정의했었다. 당연히 ‘관계’는 존재의 부차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기준에서 ‘관계’로서 정의된 정보는 현상이지 지금 여기서 생각하는 실체가 아니다. 다만 주의하실 것은 <정보 = 관계>라는 식은 정보를 설명하기 위해서 편의상 정의한 것이지 엄밀하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말한 <정보>는 실체가 가진 정보와 실체들 사이의 관계를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정보에서 간접적인 것을 제외한 실체적인 것만을 추출해 내어야 한다.
정보를 다른 관점에서 분류하면 <자연적인 정보>와 <인위적인 정보>로 나눌 수 있다. 자연적인 정보는 우리가 사물의 관찰, 측정으로 얻는 일차적 정보이며, 인위적인 정보는 이 시간 현재의 증권시세처럼 일차적인 정보를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이차적인 것이다. 이제 이차적 정보를 제외하고 일차적 정보로 대상을 국한하자.
일차적 정보는 그 근원이 자연, 즉 사물 그 자체(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를 <실체>라 할 수 있다. 사물의 실체가 우리에게 있어 <정보>라는 양태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립자의 질량, 전하, 스핀 등의 기본 물리량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제 <에너지(존재)는 정보이다>라는 바이츠제커의 명제가 이해되실 것이다.
물리학은 한마디로 <자연 정보>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물리학의 대상에는 일차정보와 이차정보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시간, 거리, 질량, 전하 등 기본적 물리량 이외의 물리량은 모두 이차적인 것이다. 속도, 가속도, 운동량, 열량 등은 모두 이차적이다. 일차적인 것과 이차적인 것의 차이가 그리 쉽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리량을 표시하는 단위(‘차원’이라 한다. 이 차원은 시공간의 차원과는 그 ‘차원’을 약간 달리하는 것이다. 이처럼 ‘차원’이란 말에는 몇 가지의 ‘차원’이 있다)는 거리(공간, L로 표시함), 시간(T), 질량(M), 그리고 전하(e)의 네 가지로서 나타낼 수 있다. 우리는 이 네 개의 기본량만을 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지나치게 엄격한 정의이다. 예를 들어서 ‘힘’은 <질량X거리/시간의 제곱 ML/TT>로 표시되는 양이므로 이차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느낄 수 있는 <힘>을 실체가 아닌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힘>은 질량, 전하, 그리고 특정 소립자들의 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이차적인 현상인 것이지, ‘힘’이라는 실체가 우주 시공간 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실체>의 정의를 약간 넓혀서 힘을 실체라는 범주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식, 기>라는 것이 실체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일차적인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엄밀하게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실은 나의 이러한 노력은 이 같은 ‘생각과 따짐’만으로 그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식>은 소립자가 우리에게 주는 정보의 배경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며, 거기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양자역학은 이미 그러한 ‘정보의 배경, 더 깊은 곳’은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 즉 실재의 궁극에 이르러서는 한계에 부딪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가설 연역적(假說 演繹的)으로 <식>이라는 가설적인 존재가 그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현상들을 물리 법칙들과 논리적인 모순 없이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물질, 즉 존재의 궁극적인 본질을 추구하는 양자역학이 스스로 그 이론적 한계를 드러(밝혀)낸 바와 같이 실은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실체> 그 자체를 직접 확인할 수가 없다. 우리는 관측할 수 있는 <현상>을 바탕으로 하여 거꾸로 <실체>를 연역해 내는 것이다. 가설 연역적인 방법은 모든 존재와 법칙의 추구 및 검증에 언제나 적용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식>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이 생기론이나 동양 철학에서의 ‘기’처럼 우주 공간 아무 곳에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소립자의 한 성질로서 소립자에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식>을 찾아서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도움을 받아 소립자를 찾아 가보자.
[출처] 기와 과학 (5-8)|작성자 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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