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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과학 14~17

자유지향 2008. 6. 4. 23:41

 

  14. 초공간과 식


지금까지 나는 의식과 사후식(死後識)의 존재와 그 작용을 인정하는 데 있어서 다소 성급한 면이 있었다. 그것은 사후식과 살아 있는 의식의 상호작용 측면에서였다.

의식과 사후식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의 공간-장소는 어디일까? 우리의 인식체계에 의하면 존재는 존재의 터전을--그 장소를 필요로 한다. 보통 우리가 `어디 있는가?'하는 질문을 할 때에 그 대상은 형체를 가진 것--그래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위치를 말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ꡒ무형(無形)ꡓ인 것 같다. 만약 의식이 그 공간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 머리 속에는 의식을 위한 구멍이 뻥 뚫려 있어야 하지만, 그런 구멍은 없다. 누구나 살아 있는 의식은 우리의 머리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뇌 세포 속에는 물과 단백질과 핵산, 지질 그리고 다당류뿐이다. 이 점은 의식이 물질(두뇌)과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뇌 신경세포들의 전기-화학적 작용이라는 기능주의 또는 부현상론자들의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의식의 터전을 마련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의식을 폐기 처분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은 x, y, z 세 개의 좌표축으로 대표되는 3차원이다. 모든 경험과 과학적 사실에 비추어 이것은 확실해 보인다. 만약 우리 공간이 4차원이라면 우선 중력의 작용이 달라지게 되어서 달은 지구를,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안정된 궤도를 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3차원 공간이라는 전제하에 뉴턴의 중력의 법칙은 지구와 달의 궤도를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있으며 그 계산 결과는 실제 관측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공간이 4차원이라면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은 19 세기부터 많은 사람들의 상상을 자아낸 주제이다. 특히 지금 이 단원의 목적과 같이 귀신, 유령 또는 영혼의 존재 터전으로서의 4차원을 상상했던 사람들은 매우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상'에 그쳤던 <고차원 공간>은 있는 것일까?


뉴턴이, 그리고 아인슈타인 이전의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공간은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아인슈타인이 공간은 시간과 물질과 함께 서로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특히 시간은 공간의 3 개의 차원과 합해져서 4차원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서 시공간은 중력장 그 자체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사람들의 놀라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찬사와 함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던 것이다. (공간은 3 차원이요 시공간은 4차원이다. 공간의 3개 차원에 시간 1개 차원이 더해진 것이다. SF 등에 나오는 `4차원 공간'은 시공간으로 말하면 5차원 시공간이 되는 것이다).

물질은 그 중력으로 시간을 느리게 하며, 공간을 휘어지게 한다.

`휘어진 공간'? `휘어짐'은 더 높은 차원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우리의 인식체계 내에서는 그러하다. 2차원인 종이를 휘어지게 하려면 3차원이 필요하다(수학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4차원 시공간이 휘어진다면 4차원의 배경에 5차원 이상의 시공간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상대성 이론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던 <리만 기하학>의 창시자인 리만의 ꡒ공간이 3차원이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ꡓ라는 말에 의지하여 물리학에서 초공간의 가능성을 찾아보자.


양자역학이 아직까지 골치를 싸매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전자의 크기이다. 어떤 물리 책을 보아도 전자의 질량과 전하의 크기는 그 수치가 표시되어 있지만, 크기가 얼마라고는 나오지 않는다. 전자는 크기가 없는 `점 입자'로 취급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점'이라는 것은 기하학의 공리로서 `비현실적인 가상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크기가 없는 물체'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무언가 비정상적이다. 그래서 다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 크기가 없는 한 점에 전하가 집중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의 전기장에 의한 자기(自己)에너지를 이론적으로 계산해 보면 무한대의 값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실험으로 그 값을 측정해 보면 일정한 값으로 측정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재규격화 renormalization>이론이 만들어졌고 그에 의해서 이론적 계산치와 실측치를 일치시킬 수 있었지만, 그 방법은 석연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실은 이 방법은 실측치에 이론을 끼워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중간자의 존재를 예측하여 일본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유가와 히데키 등이 주장한 <비국소장 이론, 소영역 이론>에서는 소립자를 `시공간적으로 확장'시킨다. 전자는 4차원 시공간적으로는 크기가 없는 점이지만 5차원 또는 그 이상의 고차원 방향으로 크기를 가진다(확산)고 가정하면 자기에너지의 발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이 이론들은 우리의 시공간에 대한 기존 개념(4차원 시공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검토해 볼 수도 있다. 전자는 그 크기가 없지만 질량과 전하 등의 여러 성질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존재에 있어서 그것이 필요로 하는 장소(공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물질(존재)에 대한 인식체계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그 장소를 필요로 한다. 전자의 경우 그 장소는 아무리 해도 4차원 시공간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전자의 <공간>은 4차원 시공간을 넘어 선 초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전자기력 등 전자의 모든 작용은 3차원 공간(4차원 시공간)적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시 소립자의 세계로 돌아가 보자.

소립자의 물리량--즉 물리적 성질은 질량(에너지), 운동량, 각운동량, 스핀, 중(경)입자수, 전하와 하전스핀, 하이퍼차지(huper-charge;초전하)가 있다. 이 중에서 중(경)입자수, 하전스핀, 하이퍼차지는 외부 시공간과 관계없는 소립자의 내부적 성질이며, 질량(에너지), 운동량, 각운동량은 4차원 시공간과 직접 관련되는 성질이다.

<스핀 spin>은 매우 특수한 것이다. 'spin(회전)'이란 말 그대로 일종의 각운동량이라 할 수 있는 양인데, 소립자에 따라서 1/2의 배수 스핀을 가지는 것과 정수 스핀을 가지는 것이 있다. 전자 등의 1/2의 배수 스핀을 가지는 것은 <2 바퀴를 돌아야 원래 방향으로 돌아온다>. 전자에게는 일회전이 360도가 아니라 720도인 것이다. 수치로만 비교한다면 전자는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보다 2배의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회전'하는 물체라면 그 회전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핀의 회전축은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의 방향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조금 전, 전자의 크기 문제로 고차원을 필요로 하는 <비국소장 이론>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전자가 `보는' 시공간은 우리가 `보는' 시공간과 다른 것이다. 이래서는 전자에게 ꡒ4차원 시공간을 강요`할 수 없다. 아무래도 우리가 전자보다 못한 우리의 공간지각 능력을 한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공간과 시간은 서로 별 개의 것으로 인식되지만, 시간은 우리가 있는 4차원 시공간의 한 축(방향, 차원)일 뿐이다. 다만 시간은 공간과 달리 방향성이 있어서 우리는 공간에서 뒤로 돌아 갈 수는 있지만 시간에서 과거로 돌아 갈 수는 없다. 실은 상대성이론은 시간의 방향성을 정하여 주지 않는다. 열역학 부분에서 말씀 드렸듯이 물리학의 기초 이론에서는 시간의 방향성을 정해주는 <비가역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마치 공간이 상하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것처럼 시간도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전개되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미래는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 사실도 결정론의 한 근거로 쓰인다. 과학자들은 `미래가 이미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알 수가 없으므로 조금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라고 안심시키지만, 느낌이 야릇한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ꡒ소립자가 그 의지를 실현시키려는 기가 인과율을 만들고, 인과율이 비가역성을 만들며, 비가역성이 (복잡계의)자기조직화 효과를 창출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시간의 방향성이 정해진다ꡓ라는 생각을 말씀 드렸다. 상대성 이론의 가장 기본 조건은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것인데, 그 조건의 배경에는 다시 <인과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은 인과율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물질(질량)과 공간과 시간이 서로 상대적으로 변화한다는 이론이다. 소립자가 이미 인과율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상대성이론이 표시하는 `이미 거기에 있는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가 아니라, `미래의 시간은 이미 거기에 있지만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탄생은 `진공의 양자역학적 요동에서 생겼다'라는 것이 현재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는 이론이다. `진공의 양자요동'은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여 극히 짧은 시간 동안이라면 매우 큰 에너지의 입자도 저절로 생겨날 수 있는 현상을 말한다. 이렇게 생겨난 작은--물리학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플랑크의 크기인 10의 마이너스 33승 센티미터--입자우주가 생겨날 때의 마이너스 압력으로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게 되고(인플레이션), 팽창에 의한 상전이(相轉移)로 진공의 에너지가 풀려 나와서 물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우주--4 차원 시공간--이 생겨날 수 있었던 그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몇 차원 시공간일까? 물론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의 ꡒ도미마쓰-사토ꡓ 풀이로 유명한 일본의 사토 후미타카(佐藤 文隆)는 이렇게 말한다;


ꡒ시공을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만들면 되는가? 이 문제는 최근 연구되고 있는 초끈 이론과 얽힌다. 그러나 아직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일반적으로는 시공적이 아닌 것의 특수한 형태로서의 시공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즉 우리는 언제나 특수한 것을 먼저 보게 되고 그것이 일반적인 것처럼 속아 왔다, 그보다 스스로 속여 왔다.ꡓ(ꡒ양자우주를 엿보다ꡓ 전파과학사 역간)


우리의 우주는 시공간 4차원이라는 `특수한 것'이며, 그 배경에는 보다 ‘더 일반적인 시공간이 있다'라는 생각이다. ’더 일반적‘이라는 말은 ’더 큰 차원‘이라는 이야기다. 한스 페이겔스는 이 배경이 되는 ’모(母)시공간‘이 “다차원(多次元)”이라는 이론을, 그리고 알렉산더 비렝킨(1949 ~)은 “무한차원”이라는 이론을 발표하였다. 현재 우주론, 특히 우주의 탄생에 관한 이론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이론이 비렝킨의 이론이다.


진공은 텅 빈 `장소'가 아니라, 그 속에서는 수많은 입자들이 순간적인 쌍생성-소멸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 입자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그것들은 다른 차원과 우리 차원을 드나들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

불확정성 원리는 기존의 소립자들만 생겼다가 사라지도록 `허가'한다는 제한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생성-소멸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질량이 전자의 백 배쯤 되고 정수 스핀을 가진 전자라든지 등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 생성-소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ꡒ금지되지 않은 모든 것은 필수적이다ꡓ -- 쿼크 이론의 창시자인 머레이 겔만 Murray Gell Mann 의 말이다. 그런데도 생성-소멸하는 것은 우리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입자들뿐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임의의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는 범주에 들지 않는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장의 내용처럼 그 `존재의 터전'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다른 차원 말이다.


현재 물리학계에서 관심과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ꡒ초끈 이론 Super-string theory"에 의하면 우리의 시공간은 4차원이 아니라 10차원이다. 그러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으며, 중력장 등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4차원 이외에 나머지 6차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플랑크의 크기 이하로 `자그마하게 돌돌 말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초끈 이론이란 플랑크의 크기 만한 끈의 진동 상태에 따라서 모든 소립자가 만들어진다는 이론인데, 아인슈타인 이후 모든 물리학자들의 꿈이요 소원인 ꡓ대통일 이론ꡒ의 강력한 후보이다. 다른 이론들은 전자기력과 약력, 강력의 세 가지 힘은 하나로 통일할 수 있으나 중력을 통일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초끈 이론에 의하면(시공간의 차원을 높이면) 중력이 `저절로' 통합된다. 초끈 이론은 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일 뿐 아직까지 완성된 이론은 아니다. 그 이론에 사용되는 수학이 너무 어려워서 21 세기에나 완성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 물리학은 ꡒ차원의 벽ꡓ에 부딪쳐 있는 것이다. 초끈 이론은 그 수학이 너무 어렵고, 미완의 이론이라서 물리학자들 사이에도 이론(異論)이 분분하며, 엉터리라고 반대에 열을 올리는 학자도 있다. 그래서 나도 더 세부적인 내용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내가 이해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 차원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초끈 이론은 10차원(공간 9, 시간 1차원)의 이론인데, 우리가 존재하고 인식하는 시공간은 4차원이다. 10차원에서는 입자들의 질량도 없으며 물리적인 상호작용(힘)들은 동일하다. 즉 대통일 이론의 목표인 `힘의 통일'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인 것이다. 10차원의 초공간이 `붕괴(물리학 용어로는 공간 대칭성의 파괴)'되어 4차원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힘이 분리되어 나온다. 먼저 중력, 다음 강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자기력과 약력이 분리되어 네 개의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차원이 `붕괴'되는 과정은 ꡒ인플레이션 우주론 Inflation Universe"에서 우주(시공간)의 온도의 변화를 통해서 파악된다. 우주의 탄생 시점(10차원 또는 그 부근)에서는 플랑크의 온도(고온의 극한)인 10의 32승K, 온도가 이보다 낮아지면 중력이 갈라져 나오고, 10의 28승K에서는 강력이, 10의 16승K에서 전자기력과 약력이 갈라져 나오는 것이다.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므로 위의 내용은 틀린 것일 지도 모른다. 초끈 이론에서 말하는 ꡒ6 개의 추가 공간이 간략화(플랑크의 크기로 축소) 되는 과정에서 네 개의 힘이 갈라져 나온다ꡓ라는 사실과, Inflation 이론에서 초기 우주의 팽창에 의한 온도 저하에 따라 네 개의 힘이 갈라져 나온다는 것을 결합시킨 것이다. 나는 6 개의 `잉여 차원'이 `붕괴한다'라기보다는, 고온에서 10차원적이던 통일력이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서 4차원적인 네 개의 힘으로 갈라진 것이므로, 그 과정의 배경인 10차원 시공간은 붕괴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우주는 여전히 10차원`적'인데 물질과 물리적 힘들이 4차원적이므로, `물리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물질을 포함한)의 인식체계에는 10차원 시공간이 4차원인 것으로 인식된다는 생각이다. 즉 우리는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과 힘의 물리적 한계 때문에 열 개의 차원 중에서 네 개의 차원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 서 말씀드린 바, 시공간이 5차원이라면 중력의 작용이 달라진다는 사실은 여기에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굳이 잉여 6 개 차원을 축소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편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담이요 상상이지만, 초끈 이론의 문제는 온도의 저하에 따라 6 개의 `잉여' 차원--에드워드 위튼에 의하면 이것은 굳이 공간적 차원일 필요는 없으며, 수학적으로는 6 개의 변수로 나타난다--이 차례로 영(零)이 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물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질량(에너지)과 운동량은 4차원 시공간 적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시간과, 운동량은 공간의 성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시간이 일정하게 흐르지 않는다면 에너지 보존법칙은 성립할 수 없으며, 우리는 꿈에 그리던 영구기관을 만들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소립자들은 분명히 더 고차원 시공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공간은 초끈 이론이 가르쳐 주고 있듯이 10차원이며, 다만 우리가 `물질적인 한계의 제약을 받고 있는 존재'이어서 4차원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가정 하에서라면 중력 등 물리적 힘이 4차원적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우리의 시공이 4차원이라야만 한다는 제한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우리의 우주(시공간)가 4차원이 아니라 ‘고차원이어야 한다는’ - 적어도 그래야 더 합리적이라는 이론은 이미 1920년대에 칼루자(Theodr Kaluza)-클라인(Oscar Klein)에 의해서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네 가지의 상호작용(힘)들 중에서 중력과 전자기력은 시공간을 <5차원>이라 가정하면 즉시 - 지극히 간단하게 하나의 힘(식)으로 통합 표시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여생을 바쳐서 하나로 통합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지금까지도 모든 물리학자들의 꿈이요 소원인 중력과 전자기력의 통합이 5차원 시공간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쉽사리 해결되는 것이다.

칼루자-클라인의 이론은 “5차원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현재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에 이어져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4차원 시공간 위의 고차원공간을 <초공간>이라 하자. 그렇다면 의식이 자리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다. 2차원이 1차원을 포함하며, 3차원 공간이 2차원을 포함할 수 있듯이 당연히 초공간은 우리의 4차원 시공간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의식이 초공간에 있는 것이라면 굳이 우리 머리 속에 동굴을 파고 있어야할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 머리가 있는 4차원 시공간과 겹쳐 있는 초공간 내의 해당 위치에 같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가정함으로서 육체와 독립적인 의식의 장소 문제가 해결 가능하며, 역으로 이 가정을 입증해 주는 현상이 기의 전달이다. 소립자의 <초광속 정보전달>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고차원 시공간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텔레파시는 실험 결과 거리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레닌그라드 대학의 생리학자인 레오니드 바실리예프 Lednid Vasiliev의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또한 그 실험에서 텔레파시는 전자기파가 아니라는 것도 밝혀졌다). 4차원 시공간에서의 거리는 초공간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이퍼 스페이스(hyper-space; 초공간), 웜홀을 이용한 우주여행 SF들이 이런 원리를 채용한 것이다.

초공간은 우리의 시공간과 별도로 있는 공간이 아니다. 2차원이 우리 3차원 공간 속에 함께 있듯이, 우리 4차원 시공간은 초공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4차원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까지 이론적으로 증명되지 아니한 나의 생각일 뿐이다.

의식뿐만 아니라 사후식과 우주식이 의식 또는 물질과 기를 주고받는(작용하는) 일도 이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사후식은 우리의 의식과 같은 차원에`도' 있으며, 우리의 의식, 그리고 육체와도 언제나 즉각적으로 기의 교감이 가능하다. 사후에 의식은 요단강을 건너서 머나먼 황천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초공간 거리 상으로 제로인 곳에 있는 것이다.




15. 초자연 현상과 기


라이얼 왓슨 Lyall Watson은 그의 저서 “Lifetide” 앞부분을 베니스의 다섯 살 짜리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클라우디아라는 이 소녀는 공의 안과 밖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 4차원 공간에서나 가능한 일을 클라우디아는 테니스 공을 잠시 손으로 만지작거림으로서 `펑'하는 가벼운 소리를 내며 간단히 뒤집어 놓는 것이다. 왓슨은 이 소녀가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집중력이 강하다는 인상과, 하루 저녁에 여러 차례 같은 시범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염력, 텔레파시 등의 초자연 현상에 대한 사례보고는 그러한 현상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사례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 다양함이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조건(신뢰성과 재현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과학적인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현상에 대하여서는 과학도 전혀 대책이 없으니까 말이다.


왜 초자연 현상은 그처럼 다양한 것이며, 재현성이 약한 것일까?

기존의 물리량들에 새로운 물리량으로서 <식과 기>를 도입하였으므로, 초자연현상이 <식과 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 가정하는 것이 일단 당연할 것이다. <식과 기> 가설을  초자연 현상들에 적용하여 가설이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염력(念力)>


염력은 기일 것이다. 앞서 딘 대린의 “염력은 의식으로부터 물질로 정보가 이동하는 현상”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정신력으로 강철 스푼을 휘게 만드는 염력은 의식이 발휘하는 기의 작용일 것이며, 텔레파시는 의식들 사이의 교감일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유리 겔라처럼 강철 스푼을 휘게 만들 수 있다면 염력은 벌써 당당하게 과학의 한 분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력의 강도는 사람마다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이며, 유리 겔라처럼 염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다. 또한 염력 즉 기는 의식에 의해서 발휘되는 데, 의식은 그 상태가 안정적이지 못하다. 물론 명상이나 선으로 수양이 깊은 사람이라면 별 문제이겠지만,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의식은 감정 등 그 상태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므로, 염력(기) 역시 기복이 있어서 육체적인 힘처럼 일정하지 못할 것이다.

염력으로 강철 스푼을 휘게 하고 심지어 부러뜨리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생각해보자. 스푼의 재료인 스텐리스 강(stainless 鋼)은 강철 중에서도 그 강도가 매우 높은 고급 강철이다. 스텐리스 강제 스푼을 휘거나 부러뜨릴 수 있는 세기의 힘을 사람의 연약한 육체에 가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손가락이나 뼈 정도는 쉽게 부러뜨릴 것이다. 하물며 심장이나, 더 연약하고 부드러운 뇌는 어떻게 될까? 내 가까운 사람 중의 한 사람도 강철제 스푼을 휘게 할 수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서 벌벌 떨어야 하지 않을까? 기가 염력 즉 힘이라면 기공사의 기 공격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직까지 염력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신빙성 있는 보고는 없다. 왜 그럴까?


1994년에 우리 나라에서 학계와 공동으로 공개 염력 실험을 한 일이 있었다. 그 실험에서 기공사가 스푼의 손잡이 끝을 쥐고 흔들면서 염력을 보내어 목 부분을 부러뜨린 후 그것을  분석한 결과, 부러진 면의 철 분자들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 약해지고, 그 약해진 부분에 흔들림에 의한 반복 응력(應力)이 가해져서 그 응력에 의하여 피로(疲勞) 파괴된 것 같았다고 그 결과가 보고되어 있다(한국정신과학학회 논문모음. ꡒ기와 21세기ꡓ에서 발췌 인용).


스텐리스 강철 스푼을 불과 600회 정도의 흔들기로서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그 분자의 결합 구조를 약하게 만들 수 있는 염력은 무엇일까? 그 보고서는 ꡒ앞으로 염력에 의해 어떻게 소재가 연화(軟化)되는지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ꡓ라고 끝맺음으로서 나의 궁금증만 부풀려 놓았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 기를 파동에 비유한다면 제각기 다양한 고유의 진동수와 진폭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강철의 철 원자들은 격자형태로 결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온도에 해당하는 운동에너지로써 진동하고 있다. 그 진동수에 공명하는 염력(기)을 원자에 가하면 공진 효과가 일어나서 그 원자들은 고열을 받는 것과 동일한 영향을 받게 된다. 그 공진의 진폭이 계속 증폭되어 한계를 넘으면 단단한 강철 스푼도 약해지는 것이다. 금속원자는 결합력이 강한 금속결합으로 일종의 결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공진 현상을 이용하면 금속결합력보다 훨씬 더 작은 힘으로도 결합을 해체 또는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공진 현상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부러지는 부분의 모든 원자들의 진동 위상을 동일하게 맞춰주어야 한다.

내가 알기로 염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서 누구나 강철 스푼을 휘거나 부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강철 원자의 진동수에 공명할 수 있는 진동수의 염력을 발휘하려면  아마도 기의 세기에 따라서 수련이 필요한 것 같다. 이처럼 부드럽지만 기가 가득한 사람의 신체조직보다, 물리적 강도는 수십 배 더 강하지만 일정한 진동수로 단순 진동하고 있는 강철 분자는 염력에 의해 쉽게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체의 조직도 강철 원자와 마찬가지의 열 진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공진 주파수의 기를 보내면 상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아직까지 보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인체조직은 외부의 기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이다. 최면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차가운 물체를 피부에 갖다 대면서 `아주 뜨거운 물체'라고 암시를 주면 피부가 화상을 입는다는 사례는 자신의 기가 암시에 의해서 자신의 피부에 화상을 입힌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므로, 기는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고 또한 외부의 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물질 특히 생명체는 자신의 기로서 주위에 일종의 보호막을 형성한다는 것이 기에 뛰어난 사람들의 생각이다. 기의 근원이 식, 정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 필자는 기의 존재 그 자체의 입증을 목표로 하고 있는 바, 그러한 기의 고차적 작용까지를 인정 내지 도입하기는 논리적으로 다소 비약이 있을 것 같아서 삼갈 뿐이다. 일단 현 단계에서는 염력의 현상과 <식과 기> 가설이 그러한 현상들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물리법칙에 위배됨이 없이 설명할 수 있는지 만을 살펴보겠다.


아마도 기는 서로 `기가 맞는' 기가 있는 것 같다. 기공의 용어로서 동기 감응(同氣感應) 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예에서는 기를 진동으로 비유했는데, 어떤 작용이 서로 간섭하여 공진하기도 하고 상쇄될 수도 있는 현상이 바로 진동이다. 또한 이것은 소립자와 상호작용 - 모든 물질과 힘의 근본적 성질이 입자-파동 양면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기 역시 그 성질이 파동의 본질적 정의와 일치한다. 스테인리스 강제 스푼을 부러뜨리려면 우선 철 원자들의 진동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맞는 공진 주파수의 기 파동을 낼 수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수련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씀 드린 것이다.

위에서 말씀 드린 `기로서 사람을 공격하기 어려움'의 이유가 “생체의 기 보호막”이 아니라, 주파수를 맞추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 때문일 수도 있다. 생체의 조직은 금속과 달리 수 많은 종류의 분자들의 집합체이므로 그 분자들의 열진동의 주파수가 균일하지 않다. 분자량이 수십만에 이르는 단백질 분자는 하나의 입자처럼 진동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공진시키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ꡒ생체 기의 자기방어 능력ꡓ과 ꡒ공진의 곤란함ꡓ 중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기를 느끼지도 못하는 나로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나의 생각에 의하면 <기>는 <식>의 작용으로서, 하나의 식이 다른 식에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이며, 그 자체는 물리적인 에너지가 아니다. 그러나 스푼의 금속원자에 전달된 기는 원자진동의 공진증폭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아무리 작더라도 물리적인 에너지나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여기서 두 가지의 가정을 생각할 수 있다.


1. <기>는 <식>이 다른 식에게 전달하는 정보인 동시에 식이 발휘하는 물리적인 힘이다.


2. <기>는 식의 정보전달 매체일 뿐이다. 스푼의 금속원자의 진동이 증폭되는 것은 원자가 매우 강한 의식으로부터 받은 정보에 의해서 자체의 내부에너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첫 째 가정은 기가 일종의 힘 또는 에너지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같은 것인데, 문제는 아직까지 <기의 세기>가 물리적으로 측정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기>는 물리적인 힘 네 가지(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 어느 것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리적인 힘이라면 아무리 미약한 힘이라도 충분히 측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기>는 ꡒ제 5의 힘ꡓ이라야 하는데, 이 역시 `힘'이라면 물리적인 현상이며 측정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가 물리적인 힘의 형태로 측정되었다는 믿을만한 보고는 없다.

그리고 기가 힘이라면 그 에너지의 원천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의식은 에너지가 아니다. 의식에서 물리적인 힘이 나올 수는 없다. 말씀드린 대로 의식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해서 손실된 소립자의 식이 모여서 된 것이며, 이 과정에서 에너지는 보존법칙에 따라서 보존되고 있으므로 의식은 <무형의, 비에너지적인 존재>라야 하니까 말이다. 의식이 <공간 에너지>를 꺼집어 내어서 사용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용 가능한 공간 에너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현재 전혀 없다. 따라서 이 가정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두 째의 가정을 살펴보자. 이 가정에 의한다면 스푼의 금속원자는 기를 통해서 `의식의 정보'를 받고 그 지시에 의해서 진동하는데, 그 진동에는 물론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에너지가 의식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염력'과 관련된 기적(氣的) 현상은 사실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내 판단으로서는 기가 힘(에너지)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염력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례의 보고는 많다. 흔하게는 고장 난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든지, 드물게는 정신을 집중하여 컵 정도의 작은 물체를 들썩거리게 한다든지 등의 사례--그 중에서도 신뢰할 만한 보고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들은 강철 스푼을 휘게 하는 것을 원자의 열진동 공명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현상이다. 진동은 공진현상을 이용할 수 있으므로 극히 미약한 힘의 반복(진동)으로 큰 힘을 낼 수 있지만, 운동은 단 1회의 작용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큰 물리적인 힘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위의 생각처럼 `식이 기를 통하여 대상 물체에 정보를 전달하고, 물체는 그 정보에 따라서 자체의 에너지를 변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실험 보고가 있다. (라이얼 왓슨의 “초자연 Supernature”, 박문재 역, 인간사, 1992.에서 발췌 인용)

벨파스트의 퀸즈대학 심리학자인 죤 벨로프 John Beloff의 아이디어에 의한 실험에 의하면, 방사성 원소(우라늄 질산염)의 자연 붕괴를 염력으로 촉진 또는 억제할 수 있었는데, 실험 데이터는 그 현상이 염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연(우연)적인 것일 확률이 불과 일 조 분의 일이었다.

방사성원소의 붕괴는 지극히 안정되어 있으며,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을 뿐인 현상이다. 오래된 원자가 먼저 붕괴하는 것도 아니다. 인공적으로 붕괴시키려면 외부에서 적당한 에너지를 가진 중성자를 원자핵 내부에 쏘아 넣어야 한다. 더구나 기를 힘으로 가정한다면 붕괴의 촉진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억제는 불가능한 것이다. `상대의 힘(에너지)을 빼앗아 올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러니 이 현상은 원자핵이 기를 통해서 전달받은 정보에 따라서 자신의 에너지를 증가시키기도 하고 감소시키기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웨덴의 공학자인 하콘 포월드 Haakon Forwald는 염력의 세기를 측정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경사면의 상부 중심에서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주사위를 굴려 떨어지게 하면서 주사위에 염력을 가하여, 주사위가 경사면의 중심선에서 벗어나는 거리를 측정하여 염력의 세기를 계산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주사위는 분명히 염력이 가해진 방향으로 움직여 중심선을 벗어났다. 그런데 그 벗어난 거리가 재료--즉 주사위의 무게에 전혀 비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염력(기)이 물리적인 힘 또는 그와 같은 성질의 작용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염력이 물리적 힘이라면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보다 더 멀리 밀려갈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사위 각각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음이 틀림없으며, 주사위들 자체가 바로 힘을 작용시키는 에너지원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ꡒ염력은 원자 내부에 에너지 작용을 일으킬 수 있지만 거기에 에너지를 전달하지는 못하는 일종의 계전기(relay; 일종의 스위치. 전기의 계전기는 적은 전류로서 큰 전류를 제어하는 데 사용한다)에 속한다ꡓ라고 말했다.  이것은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위의 스푼 부러뜨리기 실험보고서(한국정신과학학회)에서도;

ꡒ영국의 헤이스텟 박사는 염력에 의한 금속의 변형을 연구한 결과 ....... `재료 내부에서 국부적으로 용해가 일어나 질량 결손이 있는데, 이는 물리적으로 일어 날 수 없는 현상이다`라고 말했다ꡓ. 라는 인용이 있다. 그러나 ꡒ질량 결손ꡓ이 바로 질량 에너지의 방출인데, 그것이 측정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왜냐 하면 부러뜨리는 정도에 필요한 에너지라면 질량으로 환산할 경우 너무 작아서 도저히 측정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1g의 질량은 3천만 KWh의 에너지에 해당한다. 이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다.) 다만 스푼을 부러뜨리는 에너지의 근원이 스푼 그 자체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점은 내 생각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원자 또는 소립자가 자체에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대하여 가능성이 있는 이론적 또는 원리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

에너지에는 운동(열)에너지와 중력 및 자기장에 의한 포텐셜 에너지, 그리고 상대성원리의 <질량-에너지 등가;E=MC^2>에 의한 질량에너지가  있다. 이 중에서 포텐셜 에너지 또는 질량에너지가 진동을 위한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어야 할 것이다. 포텐셜 에너지는 그 주위의 중력이나 전자기장이 변하지 않는 한 변하지 않으므로 제외시킬 수 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질량 에너지뿐이다. 코난 도일의 소설 주인공 명탐정 ꡒ샬록 홈즈ꡓ의 원칙 -- ꡒ불가능한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서 남은 것은 그것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그것이 해답이다ꡓ라는 -- 에 의하면 질량 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변환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일반적으로 질량 에너지가 방출되는 경우는 원자핵의 융합과 분열 때뿐이다(엄밀하게는 이것도 원자핵 결합의 포텐셜 에너지 차이가 방출되어 나오는 것이지만, 결국 질량의 차이로서 나타나므로 여기서는 ꡒ질량 에너지ꡓ라 표현하고 있다).

소립자의 질량은 일반적으로 그 정지질량을 말하는 것이다. 입자가 외부로부터 열이나 운동 에너지를 받으면 그에 해당하는 만큼의 질량이 증가한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입자는 그 진동 즉 운동에너지가 영이 될 수 없다. 절대영도인 마이너스 273。K까지 온도를 낮추어도 입자는 진동한다. 이 진동을 ꡒ영점진동ꡓ이라 하며, 이런 성질 때문에 절대온도는 가상적인 한계점일 뿐, 실제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온도이다. 즉 `정지질량'은 가상적인 양으로서, 질량은 자체의 에너지에 따라서 변화하는 물리량인 것이다. 상대성원리에서 물체의 속도가 빨라지면 질량이 커지고, 속도가 광속에 달하면 질량은 무한대가 된다. 이처럼 운동 에너지 등의 부가적인 외부 에너지가 질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면 질량 에너지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원자력 발전이나 핵 폭탄의 핵에너지인데, 문제는 운동에너지는 바로 질량 에너지가 되지만, 질량 에너지는 그리 쉽게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립자의 질량(정지질량)은 소립자의 근본적 성질 중의 하나로서 상당히 안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안정 또는 확정되어 있는 양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소립자의 본성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소립자의 <식>에게 그 질량을 에너지로 변환시키도록 <기>를 통하여 `지시'를 보낸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가장 쉬운 보기로서, 소립자의 위치, 또는 운동량을 나타내는 파동함수는 한 점(량)에 결정되어 있지 아니하고 퍼져 있다. 이것이 관측 시에 수축하여 한 점(량)이 되며, 이 과정에 소립자의 식과 관측자의 식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양자역학과 나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소립자, 즉 물질의 질량 역시 일정 범위에 퍼져 있는 양이며, 이것이 필요(관측) 시에 일정량으로 수축(결정)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소립자의 질량 - 예를 들어서 전자 한 개의 질량이 9.1의 마이너스 31승 Kg이라는 것은 측정치의 평균값일 뿐, 이론적으로 그만한 양이 되어야 한다는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퍼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훨씬 더 타당한 것이다.

또한 불확정성 원리가 이 생각에 대한 다른 이론적 근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이라면 에너지의 불확정 폭이 커진다'는 원리 말이다. 원자의 열 진동 주파수와 공명하는 주파수의 기로서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질량을 운동에너지로 변환시키도록 지시를 보낸다면 원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다. 강철 스푼을 휘거나 부러뜨리는 정도의 에너지라면 그것을 질량으로 환산한다면 너무나 작은 양이라서 숫자로 표시할 수도 없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불확정성 원리에 의한 불확정량이나 비국소장 이론 등에서의 소립자의 시공간적 퍼짐량보다 더 작은 것이다. 아울러, 이 가정은 소립자가 어떤 자유도로서의 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식이 소립자 자신에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가정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ꡐ식ꡑ에 대한 나의 가정의 현상적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소립자가 자신의 질량을 스스로 운동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입자-반입자의 쌍소멸 현상이 그 근거이다.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면 둘 다 소멸되면서 그 질량을 모두 에너지로 방출한다. 이 과정에서 외부의 작용은 없다. 소립자 자신의 성질이 그러할 뿐인 것이다. 소립자는 자신의 질량을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성질도 소립자의 식의 일부임은 물론이다. 물질의 질량은 결코 고정된 일정한 값이 아니다. 사실 질량이 에너지로 변하는 과정은 원자력 말고도 우리 주위에 흔히 있는 것이다.  탄소가 산소와 결합(연소)할 때에 생기는 이산화탄소의 질량은 산소와 탄소의 질량의 합보다 극히 미소하게나마 작다. 그 질량의 차이가 열로서 나오는 것이다.  이산화탄소에 다시 에너지를 주면 산소와 탄소로 분리되는데, 이때 물론 산소와 탄소의 질량의 합은 이산화탄소의 질량보다 크다.  실인즉 모든 에너지 변환은 질량의 변화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서 질량의 에너지 변환이 기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위에서 예로 들은 연소과정 등에서의 질량-에너지 변환은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물리법칙에 의한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질량>이란 것에 대해서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씀 드렸지만, 전자는 크기가 없는 점입자로서 취급된다. 그런데 전자는 분명히 전하와 질량을 가지고 있다. 어떤 크기의 전하와 질량이 시공간의 한 점(전자)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이유로 생기는 문제점은 이미 앞에서 설명 드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일본의 유가와 등이 제창한 비국소장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4차원 시공간이 제 5차원 방향으로 약간 ꡐ퍼져ꡑ있는 상태라 가정한다. 즉 시공간을 ꡐ확장ꡑ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4차원에서 전자의 크기를 줄 수 없으므로 5차원 방향으로 그 크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때 제5차원 좌표를 샤프하게 정하면 질량이 ꡐ애매모호ꡑ하게 퍼진 상태가 된다. 즉 질량이 딱 부러지게 정확한 값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서 질량은 운동량의 제5차원 성분(질량x광속도;mc)으로 표시할 수 있다. 수식적으로는 공간 3차원에 시간을 더하여 4차원, 여기에 다시 질량을 더하여 5차원이 아닌가 하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질량 역시 엄격하게 고정되어 있는 양이 아니라, 미소하게나마 오차(흔들림)가 있는 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소립자는 여건(다른 입자와의 결합, 기)에 따라 질량이 변화하고 그 변화는 에너지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서 기를 `제 5의 물리적 힘'이라는 현상과 일치하지 않는 무리한 가정을 배제하고서 염력의 작용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생각이 `상상' 수준의 가정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못된 것일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염력으로 강철 스푼을 휘어지게 하고 부러뜨리기도 하는 현상, 기가 힘으로서 측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정은 내 생각으로는 이것뿐이다.

소립자의 식에 기를 보내어서 소립자의 식이 자신의 질량을 에너지로 바꾸게 할 수 있다는 가정이 만약 틀리지 않다면, 여기서 미래의 에너지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석유와 석탄의 화석 에너지가 거의 고갈 상태에 와 있다는 사실은 인류의 미래에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새로운 유전의 발견과 채유기술의 발달로 가채 매장량이 1972년의 <로마 클럽 보고서>의 예상보다 대폭 증가하긴 했지만, 지구상의 석유가 고갈될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우라늄을 연료로 하는 핵분열 에너지는 그 위험성뿐만 아니라 우라늄 역시 매장량이 그리 풍부하지 못한 것이다. 우라늄, 플로토늄 등의 핵연료 확보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일본은 일찍부터 플로토늄을 사재기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이 유럽으로부터 도입하는 플로토늄을 동해안 쪽으로 수송하려는 계획에 환경단체들이 일제히 반대 운동에 나섰던 일이 불과 얼마 전이다. 태양, 풍력, 조력(潮力), 지열(地熱) 등의 대체 에너지는 지구상에 소수의 인간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양밖에 안 된다. 현재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은 핵융합 에너지인데, 이 방법은 초고온에서의 플라즈마 제어가 너무 어렵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많은 국가에서 엄청난 예산을 소비하며 연구 실험을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실현 가능성조차 의문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자들은 ꡒ50년쯤 후에ꡓ 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과학자들이 ꡒ50년쯤 후에ꡓ라고 말하는 것은 ꡒ불가능해 보이지만 혹시나.......ꡓ라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인 것이다.

약 10년 전에 ꡒ저온 핵융합ꡓ의 가능성이 발표되어 세계를 흥분에 휩싸이게 했었지만, 현재로서는 `잘 못된 실험'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 때 저온 핵융합 연구에 달려들었던 많은 과학자 연구소들은 현재 거의 다 손을 들었다. 소위 `신과학'이라는 의사(疑似)과학에서 거론하는 `공간에너지'는 그저 공상과학(SF) 수준일 뿐이다. 현재 상태대로라면 불과 수십 년 이내에 인류에게는 대 파국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에너지 문제이며, 그 예측은 현재로서는 심히 비관적이다.

나의 `상상'이지만 기로서 소립자의 질량 에너지를 방출시킬 수 있다면 에너지 문제는 일거에 해결된다. 에너지의 해결은 자원, 환경 등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자원의 부족은 순환 재사용으로, 환경은 엄격한 처리로서 현재의 기술로 충분히 가능한데 오직 그에 소모되는 에너지 비용만이 문제인 것이다.


<텔레파시>


텔레파시는 의식이 기를 통하여 상호 정보를 교환하는 현상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를 감지할 수 있는 극히 예민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서로의 식 또는 기의 주파수가 공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무전기가 서로 주파수를 맞추어야 교신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귀신 등 사후식과의 교신도 텔레파시 현상에 속할 것이다.

식이 기를 통해서 물질 그리고 다른 식들과 상호 작용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다. 그렇다면 비교적 쉬운 일일 것으로 보이는 텔레파시 현상이 왜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아마도 생명체의 의식은 자신의 육체(의 생체현상)와 너무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다른 의식과의 상호작용이 어렵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의식이 고도로 순화되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전달되는 정보의 분량이 그리 만만치 않은 양이다. 우리 의식 속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짧은 생각도 그 배경이 되는 부분--영상, history 등--까지 모두를 bit 수로 환산하면 적지 않은 양이다. 대개 간단한 도형의 전송을 텔레파시의 실험 대상으로 하는 이유가 그래서 이다.

<생체의 기 보호막> 설도 텔레파시가 일반적이지 못한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생체가 기 보호막이 없이 외부의 기에 노출되어 있다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 때문에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말라식에 의한 자기 보호 본능과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텔레파시를 수신하려면 기 보호막을 걷어야 하는데, 물론 그것이 그리 쉬울 리가 없다. 오랜 수련, 수도로서 정신이 지극히 맑고, 말라식의 자기 금제(禁制)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특이하게 기의 감응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가능할 것인 바, 보고된 사례는 대부분 그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한 실험 결과들이다.


현재까지 보고된(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텔레파시의 실험 사례 중 가장 유명하고 신뢰할 만한 것은 1966년 4월 19일, 러시아에서 행해진 것이다. 과학자들의 감시 아래서 3000 Km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실험을 했는데, 금속 용수철을 ꡒ둥글고 금속으로 되었으며 빛이 나고 들쭉날쭉하며 코일같다ꡒ, 그리고 검은 플라스틱 손잡이를 가진 스크루 드라이버를 ꡓ길고 가늘며, 금속 플라스틱, 검은 플라스틱ꡒ이라고 전송되었다.(라이얼 왓슨의 “초자연).

기적(氣的) 능력이 고도로 발달된 사람에게 있어서도 텔레파시는 이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의식은 생명유지를 위한 생리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의식과 기를 통한 교감능력이 미약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텔레파시 현상을 현실에서 응용해보려는 많은 연구와 실험들이 아직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이다.


<기타 초능력과 기>


우리의 의식이 뇌 세포와 가장 밀접하게 작용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뇌 세포는 자체적으로 전기 화학적인 작용으로 의식을 유지시키며 의식에 에너지를 공급할 것이다. 우리 뇌 세포는 물질은 물론 인체 내에서도 가장 기를 느끼기 쉬운 기관일 것이다.

대중 앞에 나서면 `기가 죽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에 대한 감각이 예민한 탓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들의 기를 집중적으로 받으면 심리적, 신체적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초능력이 공개적 과학적 실험으로 입증되기 어려운 이유는 실험 당사자뿐만 아니라, 실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기가 실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실험이 진행되는 긴장된 시간 동안에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기가 강해질 것이며, 그 기들은 비록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지만 당연히 실험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기들이 실험 대상에 집중된다면 더 강한 효과가 나오겠지만, 아무래도 실험 당사자, 즉 기를 발휘하려는 사람에게 집중될 것이므로 실험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이 될 것이다. 더구나 실험 당사자는 기감(氣感)이 지극히 예민한 사람이므로, 주위의 기들이 자신의 기 집중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기감이 예민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는 점장이, 무당일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 들은 바로서 무속인들은 상대방의 기를 느낌으로서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전공보다는 무당에 대한 연구로서 더 유명한 서정범 교수는 ꡒ용한 무당들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동전의 숫자를 쉽게 알아맞힌다. 그러나 내 손안의 동전이 몇 개인지 나 자신도 모르고 있을 때에는 맞추지 못한다ꡓ라고 말한다.

사후식과 교감할 수 있을 정도로 기감이 발달한 사람들이 소위 ꡒ신들린 사람ꡓ이다. 그런 사람들의 능력을 보면 사후식은 살아 있는 의식의 무의식까지 교감하여 읽어 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후식도 미래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식과 기도 물리법칙을 벗어나지 못할 것인 바,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양자역학이 밝혀 낸 바 있다. 또한 인간의 의식이 자유의지를 가짐으로서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데, 어찌 사후식인들 앞일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실재로 아무리 용한 복술인 무당들도 미래에 대한 예측의 정확도는 아주 낮다. 다만 수준이 높은 훌륭한 사후식이라면 사후식들의 `네트워크'에 축적되어 있는 데이터 베이스를 이용하여 어떤 사람의 `미래에 있어서의 경향'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어떤 사람의 업보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귀신>


불교에서는 사후에 영혼이 저승으로 가는 데 49일이 걸린다 한다. 말라식이 소멸되어서 생시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 것이 49일인지 얼마인지 나는 모르지만, 그 기간은 우주식과 완전히 연결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이 아닐까? `저승으로 간다'라는 것은 `우주식과 연결된다`라고 생각한다. 우주식과 연결된 사후식이 괴롭고 어지러운 생시를 다시 돌아보거나 연연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을 몇 알고 있다. 물론 그 사람들이 헛것을 본 것인지도 또는 거짓말일런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내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뿐만 아니라 귀신의 목격담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무수하게 많다. 귀신은 무엇일까?

불교, 그리고 일반적인 생각은 `저승으로 가지 못한 영(식)'이다. 즉 우주식에 연결되지 못하고서 외톨이로 떠돌거나, 연결이 미흡해서 우주식에 완전히 융합하지 못한 사후식일 것이다. 이런 식들은 생시--생명계 부근을 배회하리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후식들을 위해서 <천도제>를 지내는데, 천도제는 떠도는 사후식을 우주식과 연결시켜 주는 의식일 것이다. 그 원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를 모아서 사후식에 전해줌으로서 사후식의 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천도제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우주식에 접속되었다가 다시 떨어져 나오는 사후식도 있다. 그래서 얼마 후에 다시 천도제를 올리는 일도 있다.

ꡒ귀신들리는 현상ꡓ은 아마도 사후식이 살아 있는 의식을 어느 만큼 지배할 수 있는 경우일 것이다. 이렇게 되는 사람들은 의식의 힘 즉 기가 약해서 사후식의 `침범'을 받는 것이다. 무당들은 기가 강해서 사후식과 공존하거나 심지어 부릴 수도 있지만, 사후식보다 기가 약한 사람에게 사후식이 들어오면 그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사후식에게 있어서 살아 있는 인간(또는 동물의 사후식이면 같은 동물)의 뇌는 무척 그립고 부러운 곳이다. 특히 생시에 말라식이 -- 생에 대한 집착이 -- 강했던 사후식일 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귀신이 들리면 의식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제사>


조상들의 사후식을 대상으로 하는 제사는 천도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물론 조상의 사후식이 우주식에 접속되지 못했다면 그 식을 달래어서 우주식으로 보내는 의미도 가지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우주식에 접속되어 있는 조상의 사후식에게 `인사'를 전하고 대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후손들이 조상들의 식을 통하여 우주식과 간접적인 연결 통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주식은 `좋은' 식이니까 후손들에게 복이 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서양인들은 조상 제사를 모시지 않지만, 우리보다 더 잘살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물질적인 풍요함이 반드시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사후식의 네트워크에 접근하는 데는 우리의 의식과 가장 밀접하여 <동기 감응>이 쉬운 조상의 사후식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임은 당연하다. 필자는 제사가 인간이 사후식의 세계로부터 좋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조상의 사후식에 살아 있는 인간의 기 에너지(물론 ‘정보’)를 공급해 드릴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의식(儀式)이라 생각한다.


<물질의 기>


기를 느끼지 못하는 주제에 내가 물질에 대한 기까지를 말하는 것은 좀 무엇하지만, 지금까지 말씀 드린 바, 기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아마도 물질의 기현상은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의 생각이 물질에 있어서의 기 현상과 일관성 있게 합치되는가 하는 검증의 의미로서도 필요할 것이다.

물질의 기는 의식의 기보다 훨씬 미약할 것이다. 그러나 기감(氣感)이 발달한 사람들은 모든 물질의 기를 느낄 수 있으며, 물질에 따라서 그 기의 느낌도 각각 다르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생물 특히 사람의 기는 비교적 느끼기가 쉽다. 그러나 물질의 기는 미약해서 느끼기 어렵다. 이런 현상은 생물과 무생물의 기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무생물의 기는 단순하다. 무생물과 생물의 차이는 그 조직구성의 복잡도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큰 바위나 산, 바다는 구성 입자들의 단순 모임일 뿐이지만, 생물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정교하게 조직화되어 있다. 즉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효과에 의해서 그 <식과 기>가 무생물 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단백질은 그 분자량에 대략 수십만에 이른다. 그래서 `고분자'라 부르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바위나 흙의 단위 분자인 산화규소, 산화철 등은 분자량이 불과 수십 내지 수백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기본 분자량에서 벌써 만 배 정도의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흙의 분자들은 그저 `가까이' 있을 뿐인 데 비해서 생체의 분자인 단백질은 서로 복잡하고도 정교하게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식(기)적인 면에서 생체는 전체가 하나의 통합체이며 단위인 것이다. 이렇게 비교하면 그 분자량의 차이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된다.

산악인들은 산의 기를 느낄 수 있으며, 그 기는 산마다 제각기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기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비교할 수가 없지만, 아마도 사람의 기는 웬만한 산의 기보다 더 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처럼 생물과 무생물의 기는 차이가 있다.

산이나 바다의 기가 작은 바위나 시냇물의 기보다 강력할 것은 당연하다. 전체적인 기의 강도는 규모와 조직도에 비례할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무생물이며 크기가 작지만 기의 강도는 높은 것도 있다. 피라밋, 히란야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피라밋 형태가 그 내부 공간 특히 바닥 면으로부터 1/3 높이에서 특이한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이 현상들은 잘 알려wu 있는 사실이지만, 라이얼 왓슨의 <초자연 Supernature>에서 몇 가지 사례를 인용하겠다.

1968년 미국과 카이로의 에인 샴스 대학의 과학자들이 백만 달러의 예산으로 ꡒ키프렌의 피라밋ꡓ의 내부구조를 공동 조사한 일이 있다. 그들은 피라밋을 투과하는 우주선을 측정하여 피라밋 내부에 공간이 있는가를 조사하려 했는데, 1969년 당시 최신의 기종인 IBM 1130 컴퓨터로 데이터를 처리한 결과, 피라밋을 통과하는 우주선의 양이 도무지 일정하지 않고 알  수 없는 패턴만을 나타내었을 뿐이었다. 이 조사단의 단장이었던 아므르 고헤드는 후일 인터뷰에서 ꡒ이 같은 현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피라밋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어떤 힘--비의(秘儀), 파라오의 저주, 마법, 마술 등 당신이 무어라고 불러도 좋은 어떤 힘이 거기에는 존재한다.ꡓ고 말했다.


모양이나 형태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기능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한 회사는 요구르트 균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용기의 형태로 특허를 받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맥주회사는 맥주 통을 사각형으로 바꾸었다가 맥주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서 다시 원통을 사용한다.(이상 발췌 인용)


피라밋의 효과가 처음 알려지게 된 동기가 이집트의 쿠푸 왕의 피라밋 내부에서 죽은 고양이가 썩지 않고 미이라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일이며, 그 사실에 흥미를 느낀 체코의 카렐 드르발이 모형 피라밋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물체를 대상으로 그 효과를 실험하다가, 무디어진 면도칼이 다시 날카롭게 재생된다는 사실을 알고서 특허를 얻었던 일이었다. 피라밋의 효과가 면도칼에만 나타나는 것이라면 다른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면도날의 강철은 결정을 이루고 있으며, 이 결정은 형태가 일그러지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형태를 어느 정도 저절로 복원할 수 있다. 면도칼은 피라밋 내부가 아니라 아무 곳에라도 한 동안 버려두면 원래의 날카로움이 다소는 저절로 회복된다. 그러나 피라밋 내부에서 여러 가지 미생물의 배양 시험 결과 ‘어떤 효과’가 유의한 수준으로 인정된다는 실험 결과 보고는 많이 있다. KAIST, 한국정신과학학회 등의 실험 결과 보고에 의하면 피라밋 효과는 <목적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인간에게 좋은 미생물은 성장이 촉진되고 유해한 미생물의 성장은 억제된다. 만약 피라밋의 효과가 물리적인 힘의 작용의 결과라면 이처럼 `목적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 어떻게 해서 피라밋은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복잡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단순한 힘은 세균의 증식이나 억제라든지 면도칼의 재생 등 복잡한 작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지능을 가진 존재가 발휘하는 의도적인 작업이 아니라면 달리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물론 피라밋의 효과가 사실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근거로 나는 피라밋이 발휘하는 효과는 우주식의 기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피라밋의 형태는 기에 민감하게 감응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형태일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어떤 구조, 형태'가 기의 작용에 관계된다는 사실을 통하여, 소립자들이 원자-분자--그리고 생명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의 강도가 지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히란야나 십자가의 효과에 대해서는 확인할 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만약 효과가 있다면 피라밋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피라밋 효과는 기의 본질이 ꡒ(의)식, 즉 정보의 전달 매체ꡓ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기와 식에도 어떤 작용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리적인 힘이 `지능적'일 수 없듯이 기 역시 그 자체로서 `지능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피라밋의 효과는 분명히 아주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작용한다. 그것도 대체로 인간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말이다. 이 현상은 <우주식이나 사후식, 또는 의식이 피라밋의 형태를 통하여 그 내부의 물체에 기를 통하여 `지시'를 전달하고, 물체는 그 `지시'에 따라서 자체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식이 원하는 데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밖에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와 비슷한 예를 우리는 생체 내의 단백질 분자의 뭉침에서 보았다.

그리고 피라밋의 효과, 기공사의 기가 미생물의 증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는 기가 물질보다 의식(미생물의)에 더 잘 전달될 수 있고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큰 절이나 성당, 교회 그리고 서낭당 등에서 우리는 경건한 기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선입감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한 장소, 건물에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기의 형태로 서려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곳에 서려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기'가 아니라, 신도들의 의식(염원) 그 자체가 서려 있는 것이다. 물론 의식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서 그러한 장소에 서려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의 의식은 신도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러한 장소나 불상 등의 대상에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기는 단독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과 기의 작용은 거리에 관계없다는 점을 한 번 더 환기시켜 드린다. 신도들의 의식이 그후에 어떤 이유로 그 장소, 대상에서 멀어진다면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경건한 기도 사라질 것이다. 물체에 기를 실어 보낼 수 있다는 기공사들의 이야기도 이와 동일한 이치일 것이다.

내 생각은 이와 같지만, `서려 있는 것'이 기일 가능성도 있다. 거듭 말씀 드렸지만, 나는 아직까지 기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물리학에서의 `에너지와 힘'처럼 일단 식과 기를 구분하여 정의하고 있지만, 그 둘을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으며,

식과 기를 합쳐서 `의식을 가진 꼴림'이라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주식의 경지를 `기의 집합체' 또는 네트워크라 하기에는 단어에 대한 선입감상 좀 무엇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풍수 지리>


산이나 대지의 기는 비록 의식의 기처럼 조직적이지 못해서 약하겠지만, 그 크기의 규모가 거대한 만큼 무시할 수는 없을 정도일 것이다. 거듭 기를 느끼지 못하는 나의 신세가 부끄럽지만, 풍수지리의 기의 강도(强度) 자체는 사람의 의식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어쨌건, 인체에 기의 통로인  경락이 있듯이 산과 대지에도 기가 통하는 경락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땅과 물의 형태가 형태창조장과 유사한 작용(능력)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산과 대지의 기, 그리고 땅의 경락 등이 종합적으로 그곳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기적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 효과가 풍수지리설로 설명되는 작용일 것이다. 풍수지리학의 과학화에 노력하고 있는 최창조교수의 주장처럼 풍수지리는 기후와 물과 땅의 형태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상호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 사주(四柱), 점성술(占星術) >


나는 사주나 점성술 등을 믿지 않는다. 사실 사주 한 번 보러 간 적이 없으니 나는 대한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까지의 나의 생각이므로, 사주나 점성술의 효과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 그 이치를 생각해보자.


지구의 생물에게 가장 영향을 미치는 천체는 달이다. 그 다음은 해. 해의 중력의 영향은 달보다 훨씬 더 크지만, 그 변화의 차이가 달보다 매우 작아서 중력의 영향은 달이 훨씬 더 큰 것이다. 물론 태양은 햇빛을 보내주니까 전체적인 영향은 압도적으로 크다. 달과 해가 생물에게 미치는 영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사주 四柱 즉 연월일시는 모두 해와 달과 지구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그 영향력은 인정할 수 있다. 다만 그 사주풀이의 정확성은 별 개의 문제로 하고서 말이다.

이처럼 동양의 점술은 해와 달을 기준으로 하는데, 서양의 점성술은 이름 그대로 별자리를 기준으로 한다. 그런데 천궁도란 것이 일년에 열 두 개니까 결국 달과 같다. 점성술은 사주의 1/4 에 불과한 것이다. 참고로 점성술의 신뢰성에 대한 실험으로서 믿을만한 것은 1959년 미국의 심리학자 버논 클라크 Vernon Clark의 실험인데, 세부사항은 생략하고, 결과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나왔는데, 우연히 그런 결과가 나올 확률은 1/100이었다. (Lyall Watson, ꡒSupernatureꡓ에서 발췌)


내가 사주에 대하여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어느 해, 어느 월, 어느 일, 어느 시가 어째서 10간, 12지, 5 행에 각각 대응하는가, 즉 어째서 금년이 경진(庚辰)년이며, 오늘이 신축(辛丑)일인가, 누가 정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처음 정할 때에 한 해, 한 달, 하루만 틀려도 `모든 운명의 역사'가 바뀌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어떤 해는 어째서 오행의 금(金)이 되며, 다른 해는 또 어째서 목이 되고 토가 되는가? 누가 언제 무엇을 기준하여 정했는가 이거다.

만약 사주가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면--실제로 사주만으로 매우 정확하게 점을 보아주는 사람을 나도 알고 있다--옛날부터 해와 달, 그리고 태양계 행성들의 운행에 따른 기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정한 덕분일 것이다. 옛날의 도사님들은 손가락으로 갑자을축을 세지 않고서 천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앞을 내다 볼 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풍수지리나 사주(천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결국 그런 것들의 기에 민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이 더 클 것이다. 기는 상호 작용이니까.


16.  생체(生體) 내의 기


생명체는 의식과 기가 가장 활발하게 작용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옛 성인들이 ꡒ생명은 기의 모임ꡓ이라 생각했듯이 생명현상은 소립자들 - 원자, 분자들의 기가 자기조직화한 결과이며, 생명은 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생명현상에 직접 작용하는 기를 보통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 나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우리가 간이나 신장의 기능을 느끼지 못하는 - 실은 느낄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체 내에서 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기의 흐름을 우리의 의식이 일일이 알거나 간섭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리하다가는 우리의 머리(의식)가 복잡해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체의 모든 작용을 기가 맡아서 처리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서 간의 복잡한 기능은 생화학작용을 하는 단백질 효소와 간세포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신체의 모든 생리작용의 기반은 신경과 호르몬 등의 화학물질을 그 기반으로 한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상당히 해명되어 있는 부분이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물질계의 것이다. 물리적인 힘과 원자, 분자들의 물리적인 특성을 그 기본으로 하여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만약에 기의 흐름만으로 신체의 생리작용을 제어한다면 기가 약해질 때라든지 의식을 잃는다든지 술이나 마약에 취해 있을 경우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며, 의식(기)을 발휘하는 뇌 세포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또한 기가 강한 사람이 기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거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의식 역시도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기능은 소뇌(작은 골) 등 해당 전문 부분에 맡겨야 한다.  만약 의식이나 기가 생체의 모든 작용을 직접 관장한다면 의식은 잠 잘 시간도 없을 것이며, 혹시 잠들어서 기의 흐름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마취되었을 때라든지 정신을 잃었을 때에 우리의 의식이 `꺼지는' 현상을 증거로 의식이 육체와 독립적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그만큼 육체의 생리작용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할 때에는 의식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마취된 사람도 헛소리를 하는 등 의식이 `꺼진' 상태는 아닌 것이다.

평소에 의식이 담당해야 하는 부분은 의지라든지 예술적인 감각 등 그리 많지 아니할 것이다. 필요 시에는 의식이 인체의 경락에 직접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체의 경락은 다른 부분과 달리 의식의 기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한다. 기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의식으로 체 내의 기를 경맥을 통하여 움직일 수 있다 한다. ꡒ소주천ꡓ, ꡒ대주천ꡓ 등의 소위 행공行功이 그것이다. 이 때 기공사들이 느끼는 체내의 감각이 기 그 자체인지 아니면 경락이 기의 작용을 받아서 그 반응으로 나타나는 생체의 전기-화학적 현상인지는 나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만약에 그것이 기 그 자체라면 측정기구로서 충분히 관측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의학용 인체 측정기계는 그 보다 훨씬 더 미소한 에너지도 측정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기는 힘 그 자체가 아니며, 힘을 전달하지도 않고, 식에서 나오는 정보만을 전달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따라서 기 그 자체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행공 시에 체내에서 느끼는 감각은 기에 의한 신체의 생리적 반응일 것이다. 즉 기의 부차(副次)적 현상인 것을 기 그 자체로 오인함으로서 지금까지 기에 대한 바른 인식의 정립이 늦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과 서적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체내에서 순환되는 것이 `기'이며, `기'는 에너지 또는 `힘'이라 한다. 그러나 힘은 그렇게 복잡한 작용을 할 수가 없다. 물리학에서의 힘은 벡터로서 크기와 방향을 가지고 있어서 크기나 방향을 바꾸려면 다른 힘이 가해져야 한다. 체내의 경락을 따라서 `구불구불'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는 더욱 아니다. 에너지와 힘은 다른 것이다. 에너지는 힘을 낼 수 있는 가능성,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힘으로 발휘되고 있지 않은 동안은 에너지는 potentia(잠재력)일 뿐이다. '경락을 따라서 기 에너지가 순환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석탄을 안고 자면 매우 따뜻할 것이다.

명상, 선을 하는 사람들처럼 의식에서 잡념을 없애고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기를 예민하게 느끼고 또 더러는 기를 방사할 수도 있다. 기를 수련하는 사람들(기공사)도 이와 비슷하게 기를 느끼고 움직이며 방사하기도 한다. 명상, 선을 통해서 얻는 기적 능력은 의식의 정화와 집중으로 자연히 기적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며, 동공이나 행공, 기 체조 등의 기 수련은 의식의 집중과 아울러 기공이란 일종의 기 체조로서 신체의 기에 대한 반응 능력을 높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상적인 건강체라면 당연히 체내의 기는 정상적으로 순환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행여 무리하게 강제로 움직이려 하다가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도 있는 것을 것이다. 실제로 기 수련 시에 `주화입마'를 조심하라는 주의는 어디서나 듣는 이야기이다. 내가 해석하는 ꡒ주화입마ꡓ는 이렇다.

<몸 속에 있는 경맥과 혈은 의식(무의식과 소뇌의 기능까지를 포함하여)이 주요 장기(臟器)와 내분비기관에 기를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의식은 기를 통로 없이도 전달할 수는 있지만, 경맥이라는 통로가 있으면 전달이 용이하고 확실할 것이다. 전기는 전자기파의 형태로 공간을 통해서도 전달이 가능하지만 전선이 있으면 더욱 잘 통하는 것과 같다. 경혈은 경맥과 장기, 내분비기관의 연결점 terminal이다. 침술로서 경혈을 자극하는 것은 의식의 기가 약하거나 잘못되었을 때 이를 보충해주는 수단이다. 장기와 내분비기관은 시간이나 신체의 상태에 따라서 그 기능의 활동이 지나치게 완성해질 경우도 있고 억제되어 있어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물론 두 가지 다 정상이 아니다.  한방에는 ꡒ보사(補瀉)ꡓ라는 개념이 있다. 몸의 한 부분이 지나치게 활동하면 이를 ꡒ사ꡓ 즉 억제해주고, 어떤 부분이 저조하면 이를 ꡒ보ꡓ 즉 촉진시켜 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몸은 그 전체적인 상태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각 기관들이 서로 협조하여 때로 활발히 움직이고 때로는 활동을 억제 함으로서 제 기능을 하는 것이다. 어떤 시점에 ꡒ사ꡓ 즉 억제해 주어야 할 기관이 행공으로서 다른 기관과 함께 ꡒ보ꡓ 즉 촉진된다면(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신체의 균형이 깨어질 것이다.ꡒ


기공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체 내에서의 기를 보통 사람들보다 잘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정신적인 기가 강한 것은 아니다. 의식과 자신의 육체는 항상 교감을 하고 있으니까 공부(연마, 단련)로서 기에 대한 육체의 반응이 예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기 - 사후식과의 교감, 타인의 식과의 교감 - 는 또 약간은 다른 것이다. 육체적인 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정신적인 기가 강한 사람들--무당, 점술사--들은 기에 매우 예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공으로서 기를 연마하는 사람은 물론 육체적인 기(건강)가 보통 사람들보다는 강하겠지만, 정신적인 기에 있어서는 반드시 강하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기공(동공)은 의식의 기작용 강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 육체의 기작용을 체조로써 강화시켜 주는 효과 위주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말은 기 체조 등의 동공의 특징을 강조하는 의미이며, 실제로 기 수련을 가르치는 곳에서는 항상 정신적인 수련을 함께 가르치고 있다.



<최면 hypnosis 상태>


의식의 내면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인 최면형상을 검토해 보자.

"스테픈 블랙 Stepen Blackꡒ은 최면술을 ꡓ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방법일 뿐 아니라,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실험상태에서 무의식의 메카니즘을 몇 번이고 반복 조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ꡒ이라고 말했다. ꡓ최면술은 누구나 30 분 정도만 투자하면 금방 익숙해질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다. “최면 상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또한 “최면술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어 왔지만, 1778년 파리에서 처음 최면술을 공개한 프란츠 메스메르 Franz Mesmer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ꡓ라고 라이얼 왓슨은 말한다(ꡒ생명조류 Lifetideꡓ에서).


수면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는 뇌파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나 최면상태에 있는 사람의 뇌파는 깨어 있는 상태와 변함이 없다. 그 외에 맥박, 피부의 전기전도 등의 생리상태도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최면상태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최면에 걸렸던 사람이 깨어난 후에 말하는 증언뿐인 것이다. 그래서 ꡒ최면ꡓ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ꡒ최면ꡓ이라는 정신적인 특이상태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증거가 있는 것이다. 최면현상을 통해서 우리는 의식이 육체의 생리현상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최면상태의 사람이게 시술자가 ꡒ당신의 손에 뜨거운 쇠막대를 갖다 댑니다ꡓ하고 실제로는 차가운 쇠막대를 갖다 대면 그 부분에 화상을 입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최면술로 유전자 질환을 치유한 사례도 있음은 이미 말씀 드렸다. 우리의 의식은 `나와 외부 세계의 관계'를 담당하고 있으며, 무의식은 `의식과 신체의 관계'를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면은 특수하게 `한 의식이 다른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ꡒ이다. 최면에 관한 많은 특이한 사례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고, 흥미 있는 특성 하나만 말씀 드리겠다.

최면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ꡒ당신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ꡓ라는 암시를 주면 피시술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느끼는 고통을 의식이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험에 의해서 증명되어 있다. 환자를 마취제를 사용하지 않고 최면마취만으로 수술하는 경우에는 심한 고통을 느낄 때와 동일하게 혈압의 상승 등의 신체적 반응이 일어 나는 것이다. 이것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의식은 다른 의식은 쉽게 지배할 수 있으나, 다른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의식의 힘 즉 기는 자신의 육체와 다른 의식 사이에 가장 잘 작용하며, 물질에 대한 작용은 약하다>. 의식의 기는 물리적인 힘과 마찬가지로 <상호작용>이므로, 한 쪽의 작용이 강하더라도 상대 쪽의 작용이 약하다면 강하게 나타날 수 없을 것은 당연하다. 즉 다른 의식은 의식끼리이므로 그 작용이 강하지만 육체는 벌써 작용력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의식과 의식 사이의 기를 통한 교감--정보전달은 가장 강력한 상호작용이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것은 사후식이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고, 그 결과로 우주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에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는 기보다는 식에 중점을 두고 있다. 기는 식의 작용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느끼는 기는 기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지 기 그 자체는 느낄 수 있는 것--즉 물리적인 힘이 아닌 것이다. 건전하고 밝은 의식에는 저절로 건강한 기가 수반될 것이다. 큰스님들이 기를 선이나 수행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수도는 의식의 고양이 목적이며, 의식의 고양은 자동적으로 기의 강화 효과를 주지만, 그 역으로 육체적인 기 수련이 반드시 의식을 고양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필자는 생체 내의 기 현상에 대하여 더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시중에 출판되어 있는 <기>에 대한 많은 서적들이 공통적으로 기의 현상을 다루고 있으므로, 그 책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물론 그런 책들은 과학(이론)적, 체계적인 면에서는 전체적인 이해가 곤란하다는 문제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각으로 느끼고 있는 <기적(氣的) 현상>을 통하여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는 개요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7. 우주식의 세계


사물이 <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식들이 모여서 의식을 형성한다는 사실에서 그치는 것이라면 나의 연구는 <식>을 인정하지 않던 이전의 상태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게된다. 왜냐하면 그 결과에 있어서 동일하므로 굳이 실체로서의 <식>이라는 불필요한 가정을 도입하는 일밖에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성된 의식은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다’라는 지금까지의 추론 결과는 우리들의 사후 문제에 대한 해결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누구나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종교의 교리들 - 기독교의 심판과 지옥과 천국, 그리고 불교의 윤회설과 업보 등 - 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를 실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믿는다”라는 말의 의미는 “사실로 인정한다”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소립자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은 이해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알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믿음이라는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노력이 필요 없다.

나는 지금까지의 추론 결과로서 감히 사후문제, 즉 <영혼>의 문제를 추리하고자 한다.


먼저 <사후식>, 즉 우리의 의식(영혼)이 사후에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를 그 생각해 보자.

살아 있을 동안의 의식은 생명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불교의 유식설에서 말하는 바, 전오식(前五識, 五感)과 의식, 생명현상과 의식을 연결시키는 말라식이 있다. 말라식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잠재의식>이라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식설에서는 그 외에 <아뢰야식(주; 아뢰야식은 아라야식, 아알라야식, 장식藏識 등으로 불린다)>이라 불리는 의식의 부분이 있다고 가르친다. 어떤 심리학 이론이나 학설에도 나오지 않는 이 <아뢰야식>은 무엇일까?

앞서 인간의 의식은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우리 의식은 내부 및 외부의 모든 정보를 처리한 결과를 다시 의식에 되 먹임(feedback)하여 의식의 정보 내용을 변경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학습>이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시간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 즉 정보는 “형태장”으로서 우리의 의식에 작용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의식은 매 순간마다 항상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최종적, 현재의’ 의식의 장(場)이 바로 아뢰야 식일 것이다. 불교의 유식설에서는 내가 정의(생각)하는 아뢰야식에서 말라식을 제외한 것을 아뢰야식이라 하고 있지만, 말라식과 의식, 그리고 아뢰야식은 전체로서 하나인 의식(意識)의 다른 면모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으므로 굳이 분리하든 통합적으로 파악하든 그 차이는 없을 것이다. 유식설에서 말라식을 분리하는 이유는 사후에 말라식 부분이 희미하게 지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후에 말라식의 작용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라 생각하므로 필자의 생각과 유식설의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결론적으로 사후에 남게 되는 사후식은 한 인간의 평생의 의식의 작용과 형성의 결과요 결정체일 것이다. 이것이 가장 타당한 추론이다. 유식설에 의하면 윤회(輪廻)하는 것은 이 아뢰야식이다. 또한 아뢰야식은 의식과 말라식의 작용(활동)의 결과이면서 한편으로는 다시 의식과 말라식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식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에게 영향을 미쳐서(feedback)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지능)의 학습능력이 이것이며,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이론의 기본 원리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종자(種子;씨앗)식이라 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우리의 현재의 의식도, 그리고 사후식도 곧 아뢰야식인 것이다.

불교에서 의식과 아뢰야식을 구분하는 것은 성리학(性理學)에서 이(理)와 정(情)을 구분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 생각되며, 또한 윤회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윤회하는 것이 의식이 이루어 낸 ‘종자식(아뢰야식)’이 아니라 의식 그 자체라면 우리는 전생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므로 의식 전(자)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막상 윤회설의 근거로서 숱하게 제시되고 있는 전생의 기억 사례는 - 예를 들어 최면상태에서의 - 오히려 우리의 의식 속에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의식과 아뢰야식을 구분하는 것은 그 자체에 약간의 문제점(모순)이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현생의 ‘나’, 즉 ‘나의 의식’은 전생의 ‘나’의 사후식이 형태창조장으로서 작용하여 형성된 ‘의식’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전생의 나’를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영향을 부분적인 기억의 형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전생의 나’, 즉 나의 전생의 사후식은 하나의 형태창조장으로서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나’의 ‘전생의 사후식’이 ‘나’와는 별개로 사후식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나는 무엇인가’ 하는 identity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진아>, 즉 ‘진정한 자신’은 없다. 변화(발전)하고 윤회하는 긴 과정에서 모든 존재(諸法)는 무상(無常)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이미 물리학과 정보의 개념을 통하여 알았다. 더구나 사후식의 세계에서 ‘나’라는 것은 전체 네트워크에 포함되어 있는 ‘나’이지, 독립된 존재로서의 ‘나’를 주장하거나 인정할 존재론적 근거는 그리 뚜렷하지가 않다. 아니, 실은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를 구분함으로서 우리는 ‘나’의 존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후식은 인간의 아뢰야식만이 아니라, 소립자들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여 `소산되고 형성된' 모든 식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다른 생물은 물론 사물의 식과 인간의 의식을 차별할 근거는 전혀 없다. 식의 세계에는 태양과 지구, 모든 미생물의 식도 함께 있을 것이며, 수정란에서의 개체발생과 일본 원숭이의 학습 예와 글리세린의 결정화 현상, 체내 단백질의 특이한 뭉침 등이 보여주는 ꡒ형태창조식ꡓ도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의식들을 통 털어서 나는 <의식계>라 부르겠다.

이 생각은 물활론anmism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식의 수준에서 다소의 차이가 있다. 미생물 등의 저급한 식은 인간의 의식과 교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언어를 통하여 서로 교감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인간의 의식은 그 자체 내부에 언어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며, 아마도 의식들 사이의 정보전달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원활할 것이다. 사후식들이 의식계에서  사후식들끼리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 생각의 근거이다.


< 홀로그램 우주 가설 >


근래 신과학 분야에서 초자연 현상의 해석을 위하여 홀로그래피 이론을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후식의 네트워크>라는 나의 가설과 상당히 유사하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홀로그래피holography는 레이저 광선을 이용하여 입체 영상을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하나의 광원에서 나온 레이저 광선을 반투명 거울을 통과시켜 2등분 한 다음, 절반을 피사체로 보내어 그 반사광을 필름으로 보내고, 다른 절반은 사진 필름으로 직접 보내면, 필름에서는 두 광선이 간섭한 결과로 생기는 복잡한 얼룩 같은 형태의 간섭 무늬가 찍히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누어진 두 광선을 각각 피사체 및 필름에 도달하기 전에 확산 렌즈를 사용하여 광선을 펼쳐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피사체의 어떤 한 부분에서 반사된 광선이 필름 전체에 인화되는 것이다. 물론 인화될 때에 다른 절반의 광선(이것 역시 펼쳐져 있는 상태이다)과 간섭한 결과로 생기는 무늬가 인화 되게 된다.

이 필름에 다시 레이저 광선을 비추면 허공 중에 피사체의 입체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사진을 홀로그램hologram이라 한다. 그런데 필름의 한 부분만을 잘라서 거기에 광선을 비추어도 역시 전체 피사체의 모습이 나타난다. 물론 잘라낸 크기에 비례하여 상이 흐릿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쨋든, <부분에 전체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소립자의 식과 기> 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주는 하나의 통합체라는 가설과 유사해 보인다.

홀로그램 현상이 신과학에서 각광을 받게된 것은 스탠포드 대학의 신경 생리학자인 칼 프리브램 Karl Pribram이 두뇌의 기억 저장 방식이 이 현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이다. 즉 어떤 특정한 기억은 두뇌의 특정한 부분에만 기록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두뇌 전체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두뇌의 한 부분에 전체의 기억이 다 기록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홀로그래피처럼 말이다.

프리브람의 생각은 물리학자 데이비드 보옴Bohm 의 초기 연구였던 플라스마 입자의 행태와 결부되어 더욱 굳어지게 된다. 플라즈마는 원자가 고에너지(온도) 상태에서 전자와 핵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 지구상에 있는 물질은 거의가 원자 상태이지만, 우주의 물질들은 실제로 거의가 플라즈마 상태에 있다. 봄은 플라즈마 입자들이 ꡐ서로의 위치와 운동상태를 알고 있는 것처럼ꡑ, ꡐ통합적으로ꡑ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화학 반응에서 벨루소프-자보틴스키 반응, 그리고 이와 유사한 ꡐ화학 시계ꡑ 현상 등에서 널리 찾아 볼 수가 있으며, 카오스 이론과 함께 전체(통합)주의자들의 논리에 사실적 근거가 되고 있다. (주; ꡐ화학 시계ꡑ 현상: 어떤 화학물질은 특정 조건하에서 매우 빠른 주기로 A라는 상태에서 B라는 상태로 변화한다. 이때 각 입자들은 제각기 다른 시간에 제멋대로 A에서 B로, B에서 A로 변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실제로 실험장치 내의 모든 입자들은 함께 A에서 B로, B에서 A로 변한다. 예를 들어 A의 빛깔이  빨강색이고 B는 파랑색이라면 순간적으로 전체의 색깔이 빨강색이 되었다가 다음 순간 파랑색으로, 다시 다음에는 빨강색으로 변한다. 마치 전 입자들이 마스게임이나 합창을 하는 것과 같다.)

마이클 탤보트Michael Talbot는 “홀로그램 우주, Holographic Universe, 정신세계사,(1999)”라는 책에서 우주 전체가 하나의 홀로그램이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이 가설은 봄의 ꡒ전 우주는 하나의 통합체ꡓ라는 가설과 그 이론적 근거가 매우 비슷하다. 여기에 의하면 우리의 개개의 의식은 전체 우주(또는 전 인류)의 의식의 홀로그램적 부분으로서,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크기에 비례하는 만큼 ꡐ흐릿ꡑ하지만. 따라서 우리는 전생에서 죽던 때의 기억도, 현생에 태어나던 시점의 기억도 흐릿하게나마 가지고 있으며, 이런 현상들에 대한 많은 초심리학적 사례들을 홀로그램 가설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소위 ꡒ동시성ꡓ-- 서로 상관이 있어 보이지만 물리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현상들이 우연히 동시에 일어 나는 것 ; 예를 들어 뉴턴이 미적분을 발견했을 때 거의 동시에 라이프니츠도 발견했던 일. 과학사에는 이런 사례들이 다수 있다 -- 이나 텔레파시 등의 현상도 우주가 ꡐ홀로그램적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한다.

아쉽게도 <홀로그램 가설>은 여러 현상들이 홀로그램과 유사한 것으로 관찰된다는 사례들의 보고서일 뿐, 그 과학적인 근거는 아직 없다. 사실 이 생각은 <사후식의 네트워크>와 그 내용에서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 홀로그램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논리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먼저, 홀로그래피는 이론적으로 잘 규명되어 있다. 홀로그래피는 헝가리 태생의 영국의 물리학자인 데니스 가보 Dennis Gabor(1900~1979)가 1948년에 개발한 기술이며, 가보는 이 발명으로 1971년에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이 기술은 파동에 대한 푸리에 J. Fourier의 해석 기법을 이용한 것으로서, 그 내용상 달리 확대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조금도 없다. 피사체의 어떤 한 부분에서 반사된 광선이 필름(필름) 전체에 도달하여 인화되므로, 필름의 모든 부분에 피사체 전체의 정보(영상)가 고루 조금씩 담겨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홀로그래피 현상을 신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두뇌의 기억 방식은 홀로그램 필름처럼 전체적인 정보가 고르게 나누어져서 각 부분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는 기억 정보가 각 요소별로 나누어져서 두뇌의 여러 부분에 저장되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뇌는 미소한 크기의 모듈 module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모듈 별로 담당 임무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이 그 얼굴 생김새를 기억하는 모듈, 목소리를 기억하는 모듈, 대화 내용을 기억하는 모듈 등에 나누어져서 기록 저장되며, 이 모듈들은 인터넷처럼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된다.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때에는 해당 모듈들의 네트워크가 서로 연결하여 전체적인 기억을 살려 내는 것이다. 두뇌의 기억 방식은 홀로그램적이 아니다.

<소립자의 식과 기> 편에서 말씀드렸던 데이비드 봄의 <하나의 통합체로서의 우주>도 홀로그램과 그 겉보기는 비슷하지만, 기본 이론면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의 우주>에서는 각 소립자들이 전체 우주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소립자 A가 B와 작용하고, 다음에 B가 C와 작용했다면 A는 C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A 또는 C가 관측에 의해서 확정될 때(확실한 정보를 가지게 될 때)에 B를 통해서 그 정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분에 전체의 정보가 있다>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식(의식, 사후식)들은 홀로그래피 방식이 아니라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어떤 것일까?


그런 네트워크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터넷과 우리의 뇌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인터넷은 전세계적으로 떨어져 있는 수백 만대의 컴퓨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뇌는 백 억 단위의 세포들이 서로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세포의 연결점을 시냅스라 하는데, 하나의 뇌 세포가 다른 세포와 연결되는 시냅스의 숫자는 수천 개나 된다. 즉 각각의 뇌 세포는 수천 개의 다른 세포와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의 단위이다. 그리고 하나의 세포는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수천 개의 세포들을 통하여 다시 다른 세포들이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다른 세포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네트워크 체제를 갖춤으로서 우리의 뇌는 그처럼 놀라운 지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후식의 네트워크도 뇌 세포들의 그것과 같은 체계일 것이다. 보다 더 효율적인 체계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정도의 추측이 온당하리라. 사후식의 숫자가 몇백 억 개라 한들 기로서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동물의 사후식은 설사 인간의 사후식과 연결되더라도 교감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터넷을 통하더라도 우리의 정보 수용(인식)능력의 제한에 의한 접촉 범위의 한계가 있듯이, 사후식도 네트워크에서 교감(정보 교환)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언어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으로 살아 있는 우리는 언어를 달리하는 다른 의식체와의 정보교환이 불가능하다. 의식의 정보는 언어라는 매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 생명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의식, 즉 사후식의 정보 교환 방식은 좀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우리 의식의 작용 기전mechanism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 그러므로 언어라는 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후식들의 정보교환은 보다 원활하고 넓은 범위에서 작용 가능할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에는 약간의 보완이 필요하다. 많은 언어학자, 철학자,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사고, 즉 의식의 작용은 상당 부분 언어에 의존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언어는 단순한 정보 교환의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라고까지 말한다. 우리의 사고가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후식들의 정보 교환 -- 그 접촉 범위에 있어서 아무래도 언어가 다소의 장애가 될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기적(氣的)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동기 감응(同氣 感應)>의 현상이 있다. 기는 동일한 종류, 성향의 기들끼리 상호 교감이 더 쉽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후식의 세계에서도 우리 한반도에서 살다 간 식들, 즉 우리 조상의 식들끼리 더 밀접한 네트워킹이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후식이 모여서 구축한 네트워크의 능력은 나로서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냥 인간 정도의 수준일 수도 있을 것이고, 더하기 혹은 상승작용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능력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수준을 추측해 보기 위해서 인간의식의 형성과 비교해 보면,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다시 진화시켜서 인간의 의식을 만들어 내기까지는 수십 억 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시간에 있어서는 사후식에 있어서도 같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사후식의 네트워크가 자기조직화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식과 식 사이의 교감이 가장 쉽고 예민하다는 사실도 네트워크의 가능성과 수준(효율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생물체의 조직은 말씀드린 것처럼 복잡하고 정교하다. 사후식의 네트워크와 생물의 조직을 비교하면 어떨까? 사후식의 네트워크도 그만큼 조직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을까?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서 사후식의 네트워크와 가장 비슷한 인간의 뇌 조직을 보면 개별 뇌 신경세포(뉴런)들이 축색과 시냅스를 통하여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 네트워크 전체 즉 두뇌는 개별 뉴런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후식들이 네트워킹의 통로 또는 회로로서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기>다. 그러므로 <기>와 시냅스의 성능을 비교해보면 사후식의 네트워크 수준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냅스는 하나의 뉴런에서 수천 개가 나올 수 있다. 즉 하나의 뇌 세포는 수천 개의 다른 세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백 수십 억 개의 뇌 세포가 각각 수천개씩의 다른 세포들과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를 상상해 보라! 그래서 인터넷처럼 일부의 연결회로가 끊기더라도 다른 회로를 통해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인터넷이 생긴 동기가 전쟁시에 컴퓨터의 네트워크 일부가 파괴당하더라도 전체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대비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사후식에서 기가 나오는 것이 어떠한지--시냅스나 인터넷 연결망처럼 병렬(竝列)인지 아니면 단선(單線)적인지--를 추측할 수 있는 방법은 생시에 의식에서 기가 나오는 것을 검토해 봄으로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컴퓨터의 성능은 APPLE의 8bit로부터 XT의 16bit, 386, 486AT의 32bit를 거쳐 펜티엄의 64bit로 향상되어 왔는데, 여기서 <bit>는 CPU에서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입출력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다. CPU에는 해당 bit 숫자만큼씩의 입출력 단자가 있어서, 펜티엄의 경우에는 64개의 입력이 동시에 처리되고 출력된다. 이에 비해서 모뎀은 사용할 수 있는 회로가 전화선 한 가닥뿐이므로 1 bit 장치이다. PC 통신의 속도가 컴퓨터 자체에 비해서 매우 느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MODEM(modulator-demodulator)은 이름처럼 16 내지 64 bit의 출력 데이터를 1 bit로 변환시키고, 1 bit의 입력 데이터를 다시 16 내지 64 bit의 CPU용 데이터로 변환시키는 장치이다. 우리의 의식을 컴퓨터의 CPU에 비교한다면 몇 bit나 될까? 이에 대한 대답은 뇌 신경생리학자도 심리학자도 아닌 나로서는 어렵지만, 의식은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을 병렬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살아 있는 동안의 의식이 동시에(병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 숫자는 5 bit가 정도가 아닐까 추측한다. 이것은 우리의 감각 기관이 다섯 가지라는 점에서 유추한 것이다. 물론 상당한 오차가 있을 것이지만, 전체 네트워크의 성능을 짐작하기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사후식은 한 번에 하나의 다른 식과 교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후식의 네트워크의 성능이 최대로 발휘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진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점과, 그리고 업보의 작용이 느린 것 등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 해준다.

이런 추측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후식의 네트워크가 보다 훌륭한 성능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근거도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점과, 자기조직화에 의해서 창발(創發)되는 전체적인 성능은 그 구성단위에 비해서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뇌 세포의 자기조직의 결과인 의식은 뇌 세포 하나 하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카오스 이론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복잡한 것에서 생겨난 조직'은 그 구성단위의 성질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다른 고차적인 성질과 기능을 가진다. 네트워크는 물론 가장 잘 짜여진 `조직'인 것이다. 그리고 뇌 세포 하나 하나는 각각 수천 개의 다른 세포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으며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도 한 근거이다.

그러므로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개별식보다 훨씬 우수하며, 개별식이 가지지 못하는 더 높은 <무엇>-상상하기도 어렵지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신>의 수준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진화와 업보의 속도 문제는 다른 것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인데,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물론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DNA 수술에 사용되는 <기>는 외과용 메스처럼 날카롭지 않아서 정밀한 조작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 업보는 사후식의 발전을 위한 보조수단일 것이라는 점(뒤에 다시 검토하겠다)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를 통해서 나는 나름대로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신>의 수준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울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신,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의 `전지전능한 조물주'와는 다를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이라는 표현은 논리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신이 시공간 내적 존재인가 외적 존재인가 하는 문제, 결정론, 악의 존재 등은 `인간이 신에게 전지전능할 것을 요구'한 때문이며, 나는 유아기부터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지만 <전지전능한 창조신>의 논리적 모순을 납득할 수 없어서 그 신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개별 사후식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일 것이라는 판단은 매우 타당해 보이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사후식의 네트워크를 <우주식>이라 부르겠다. <이차크 벤토프>는 그의 저서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정신세계사, 류시화, 이상무 역)>에서 <우주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우주심은 모든 의식이 하나로 합쳐진 것을 말하므로, 개별의 의식들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우주식과는 다른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후식들끼리의 교감은 <정보의 교환>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거시계(巨視界)에 있어서 정보의 교환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적용되므로 에너지소모를 수반한다.  예를 들어서 모뎀을 통하여 데이터를 주고받을 때에는 컴퓨터의 전원이 없이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시계가 아닌 소립자 단위의 미시계(微視界에서) 서로 교감(交感)하는 과정에는 에너지가 필요치 않다. 하나의 전자가 다른 전자를 만날 때에 서로 밀쳐내지만, 즉 상호작용(교감)하지만 에너지의 소모는 없는 것이다. 프레드킨의 <우주컴퓨터>, IBM의 베네트와 랜다우어 등이 증명한 에너지 소모 없는 컴퓨터 등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물리학자 작크 사르패티는 <벨의 정리>와 그 실험결과가 보여주는 정보의 초광속 전달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제시하였다.

“입자들은 공간유사(空間類似; space-like)로 분리되어 있고 아울러 연관되어 있지만, 그 입자들이 신호로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입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밀접하고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르패티는 이 이론을 <신호가 없이 이루어지는 부(負)의 엔트로피(negentropy, 정보)의 초광속 전달(이동)>이라 정의하였으며, 이 가설을 바탕으로 여러 이론들을 유도, 주장하였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러한 형태로 전달되는 정보과정은 마이너스(부) 엔트로피 과정이므로, 에너지의 소모를 수반하지 않는다. 서로 떨어진 두 지점(물체) 사이에는 에너지의 전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전달될 때와 동일한 결과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후식의 세계에서의 정보 교환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비록 미소하지만 약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보는 ‘관계’라는 개념을 통하여 정의할 수 있으며,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해서 모든 상호작용에는 엔트로피의 증가, 즉 ‘관계’의 변화가 따르게 되며, ‘관계'의 변화는 열역학적으로 ’에너지의 유용함의 감소‘를 수반하는 것이라 말씀드렸다. 정보 처리 과정(information process)은 분명히 엔트로피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이것은 섀넌이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현대의 정보(통신) 이론의 기본 개념이 되어 있다. 우리는 <엔트로피와 정보, 그리고 식> 편에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대입하여 확장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의 공식을 얻었다.


<유효 에너지, 질서, 정보의 감소> = <식의 형성>


그런데, 만약 위의 공식이 참이라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법칙’으로서의 그 지위를 잃게 된다. 부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에딩턴의 말처럼 “우주적인 법칙”이다. 그것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록 거시계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우주의 모든 현상에 그 법칙이 적용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해석하는 다른 관점은 우주의 모든 변화에는 방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엔트로피의 증가 방향을 시간의 방향으로 삼고 있는 과학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법칙을 식의 상호작용 -- 정보 교환, 즉 <기>의 작용에 적용할 수 있는 법칙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기’를 통한 사후식의 정보교환은 엔트로피 법칙의 적용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식의 정보 교환, 즉 ‘기’도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정보는 ‘영향력을 가할 수 있는 것’이라 정의했었다. ‘영향력’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작용을 말한다. ‘변화’는 ‘관계의 변화’로서, 이것을 대상으로 하는 법칙이 바로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후식일지라도 ‘기’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어떤 결과적인 변화, 즉 ‘유효한’ 정보를 얻으려면 역시 그 변화를 만드는 데에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폐기처분하지 않는 한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필자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정보의 교환>과 <정보에 의한 변화>를 별도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정보의 ‘교환’에는 에너지의 소모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양자역학적 사실에 의하여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한 엔트로피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사후식의 네트워크에서의 정보교환과 변화(작용)가 에너지의 소모를 필요로 한다 하더라도 그 소모량은 매우 작을 것이다. 앞에서 길게 말씀드린 것처럼 정보과정information process은 에너지 의존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리만 다이슨은 저서 “무한한 다양성을 위하여 Infinite in All Directions"에서 지구 사회 전체의 정보교환을 ‘영구히’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양은 태양이 지구를 8 시간 동안 비추는 양에 불과하다는 계산을 제시한다.

그러나 ‘변화’를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사후식이 기적(氣的)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사후식과 그 네트워크는 그 자체로서 진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하다면 사후식의 세계는 단독적으로 자가 발전(發展)하는, 생명계와는 별개의 존재(세계)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도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말이다.

이처럼 식의 정보교환, 즉 ‘기’의 작용에 필요한 에너지는 제로이거나 제로에 가까운 미소한 양이라서 그 실재 여부를 판단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필자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필자는 물리법칙에 벗어 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법칙), 어긋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후식의 세계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세계라면 그 에너지를 무엇에서 공급받는가? 하는 문제가 따른다. 그 세계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세계’와 조금도 다름없다. 변화가 없는 세계는 죽은 세계이다. 그렇다면 사후식의 세계는 어디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을까? 아니, 먼저 사후식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는 어떤 종류의 에너지일까? 당연히 그것은 <정보>, 즉 <기>이다. (인테 내에서 느낄 수 있는 소위 “기 에너지”와는 다른 것이다. 그 차이점에 유의하시라).

기공사(氣功師)들이 기를 방사(放射)하는 일을 생각해 보자. 기를 방사하는 사람은 생체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기를 보낸다. 이 사람에게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기를 받는 사람은 에너지의 소모 없이 기, 즉 정보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을 생명계의 의식이 방사하는 기가 사후식에 전달되는 일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후식의 세계는 생명계로부터 기를 받아서 유지되고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서 나는 살아 있는 우리의 의식은 사후식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당의 신내림, 귀신의 빙의(憑依) 등의 현상을 통해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후식의 세계와 쉽게 접속할 수 없는 것일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생명체는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 불교의 유식설에서 말하는 말라식이라는 단단한 보호막으로 감싸여져 있다. 선, 수도, 명상 등은 말라식의 벽을 깨기 위한 것이라 한다. 고승(高僧), 훌륭한 선사(禪師), 명상 수도자들은 이러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 사후식의 세계와 접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후식의 네트워크가 에너지를 받는 길은 살아 있는 의식으로부터 기를 통하여 받는 방법뿐일 것이다. 살아 있는 의식은 육체(두뇌)라는 동력원을 가지고 있다. 여러 종교에서 예배(예불)를 올리고 조상(신)에게 제사를 모시며 굿을 하고 치성을 드리는 일들이 아마도 살아 있는 의식이 사후식(개별식 또는 네트워크)에게 기로서 정보(에너지)를 전달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하면 사후식(네트워크)도 의식(인간)에게 영향(보답)을 줄 수 있는 에너지를 받는 것이리라. 이처럼 여러 종교의 교리를 두고 생각해 보면 우주식이 종교에서 말하는 ꡒ신ꡓ일 가능성이 많다.

자기조직화한 우주식은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지는 소립자의 단순한 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이다. 따라서 그 `의지'는 스스로 자신과 네트워크 전체의 수준을 향상시키려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립자가 생명을 만들 듯이 말이다. 말씀드린 대로 나는 우주식의 이 의지야말로 우주의 근본 성질이요 법칙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추측이나 `믿음'이 아니라 <진화와 기>에서 그 근거를 말씀드렸던 것이다.

<생물의 진화>에서 `왜 생물은 진화하려는 것일까?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라면 인간보다는 박테리아 정도가 더 유리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던 바, 그 대답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주식이 생물의 진화에 개입하고 기여하는 이유도 설명된다.

<진화와 기>에서 `진화의 결과는 발전된 의식의 형성'이며, 그 이외의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우주는 전체 우주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물리적, 생명적, 의식적 현상들이 그 과정에 일치하고 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이 주장한 ꡒ숨겨진 질서(법칙) implicated odrerꡓ, 라이얼 왓슨이 말하는 ꡒ생명 조류 Lifetide"가 이것이며 폴 데이비스가 찾으려는 ꡓ우주의 청사진 The Cosmic Blueprintꡒ이 바로 이것이다. 폴 데이비스는 카오스 계의 자기조직화 이론으로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비롯한 모든 우주적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신비적인 것'의 가정에 엄격히 반대하는 물리학자로서, 그의 생각이 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ꡓ우주의 청사진ꡒ을 다음 글로써 끝맺음하고 있다.;


ꡒ나는 물리학 법칙들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조직하는 원리들이 자연 속에서 복잡성을 보는 새로운 방법들과 연구를 위한 새로운 접근 방법의 결과로서 장차 나타날 것 같다고 열심히 주장해 왔다. 나는 과학이, 원리적으로 인간의 의식을 포함하는 모든 수준에서 그러나 단지 `더 높은 수준'의 법칙들을 포용함으로서 복잡성과 조직화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멋진 창조적 우주 속에서 신, 즉 목적을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다. 우주가 창조적이며, 법칙들이 복잡한 구조를 나타내고 의식의 시점까지 발달하도록 허용했다는--바꿔 말해 우주가 자신의 자체 인식을 조직했다는--바로 그 사실이 내게는 그 모든 것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 보인다. 설계의 느낌은 압도적이다. 과학이 우주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모든 과정들을 설명할지도 모르겠으나, 존재 뒤에 숨겨진 의미가 있을 여지를 여전히 남길 것이다ꡒ.


반복하지만, 생명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그에 따른 의식의 발전은 <식>의 자기조직에 의한 발전이 그 원인이며 결과이며 목적인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자신의 자체 인식을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칼 융 Carl Jung이 주장한 <집단 무의식>은 우주식이 우리 의식에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식은 사후(전생의)에 우주식과 접속되어 있으면서, 생시에는 우주식의 기를 통하여 그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 <영향>이 바로 집단무의식이다.


ꡒ인간의 마음은 진화에 의해서 이미 모두 틀 지어져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각기 그 자신의 과거사에 깊이 연계되어 있다. 단순히 유아기의 그것만이 아닌 그 자신의 종과 관련된 보다 중요한 과거사에, 그것은 이전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유기적 진화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ꡓ.

ꡒ우리 개개인의 심리는, 말하자면 집단적 심리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바다 위의 보잘것없는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인생을, 세계를, 나아가 역사를 근본적으로 틀 지어 가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집단적 심리이다. 그것은 의식과 달리 나름대로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ꡓ


나는 융의 이 말에 굳이 설명을 추가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후식은 에너지원이 없으므로 그냥은 자신을 향상시킬 수 없다. 에너지를 공급받는 길은 생명을 통하는 방법뿐이다. 따라서 사후식은 `인연이 될 때' 물질계로 윤회하게 되고,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를 향상시킨(비유하자면 에너지를 공급받은) 다음 우주식으로 돌아가서 전체 네트워크에 자신이 향상된 만큼을 기여할 것이다(여기서 의식의 에너지는 소립자들로부터 나오는 식을 말한다. 물리적인 에너지가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외부의 입력과 스스로의 판단, 그리고 의지에 의한 행동으로 자신을 키워 나간다. 이 과정에서는 물리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며, 그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육체 즉 생명이다.

물질계 즉 생명계는 우주식의 유지와 향상을 위해서 이처럼 소중한 곳이다. 아니, 물질계와 우주식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서 전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생명계가 이처럼 소중한 곳인 바, 생명계를 어지럽히는 행동은 우주식을 해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의식이 사후에 사후식이 되어서 그 네트워크에 접속될 때에 그 사후식이 저질의 것 -- 예를 들어서 김일성 같은 악인의 것 -- 이라면 네트워크 전체의 수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네트워크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을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지옥이 바로 그것이리라. 인간이 마음 본 바탕에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이것으로 설명된다. 그렇지 않다면 즉 사후세계가 문제되지 않는다면 사랑이나 자비 `따위'는 자신에게 손해가 될 뿐이다. 그러함에도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의 마음속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적으로 선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우주식의 작용 이외에 다른 어떤 가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잠시 제 1편 <기가 뭐길래?>에서 언급했던 띠야르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가설, 즉 <식>의 본성이 선한 것이며 그것은 우주 전체의 지고(至高) 지선(至善)을 목표로 우주를 진화시키고 통합시키려 한다는 가설을 검토해 보자.

<식>의 근원은 소립자에 있다. 소립자의 식은 소립자의 크기만큼이나 미소할 것이다. 거기에 ꡐ우주의 청사진ꡑ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우주의 모든 움직임과 변화는 항상 선을 향하고 있을 것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선善>이란 개념 자체가 자연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자연은 소립자는 물론, 소립자가 고도로 조직화된 결과인 생물계에 있어서도 약육강식을 그 기본으로 하는 생존 경쟁의 마당이다. 자연계에서는 생존경쟁과 도태, 그리고 도태에 의한 진화가 있을 뿐이다. ꡐ진화ꡑ라는 관점에서 ꡐ선ꡑ은 오히려 ꡐ악ꡑ인 것이다.

<선>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선>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ꡐ사랑ꡑ은 왜 생겼을까? 자식에 대한 사랑은 종족번식 --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DNA)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자연이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만 ꡐ사회적ꡑ으로 필요한 것이다. 서로 아끼고 보호하고 협동하는 사회는 분명히 그렇지 아니한 사회보다 번창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과 번식에도 유리한 것이다. 사랑은 이런 이유로 생겨났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물론 근본적으로는 생물적) 이유 이외에도 나는 사랑이 <식>에 의해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다른 의식과의 교감(정보 교환)을 원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러한 교감은 자신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혼자 존재하는 의식을 상상해 보시라.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우리가 친구를 사귀고 좋은 책, 영화, 음악을 즐기는 것이 그래서 이다. 식은 곧 정보요 정보는 사물의 관계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언어가 생긴 이후에, 즉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이후에 생겼을 것이다. 서로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믿을 수 있게 된 이후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여행>에서 저가 이경숙이 정보를 “(외부의 존재에) 알리려는 힘”이라 정의하는 견해와 동일하다. 자연계에서 <선>의 근본(素子)을 찾는다면 “관계의 욕구”라는 형태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악한 인간(의식)도 많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 악한 의식은 그 사후식도 당연히 악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악마, 마귀, 잡귀, 악령 등의 사후식이 존재할 것이다. <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설명에 의하면 기는 동일한 유(類)의 기끼리 쉽게 잘 감응할 수 있다고 한다. 동기감응(同氣感應) 현상이다. 그렇다면 사후식의 세계에서도 악한 식들은 악한 식들끼리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충분히 가능하다. 아마도 이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지옥일 것이다. 악한 식들끼리 서로 잘 지내지는 못할 것이니까 말이다.


<선>, <사랑>의 필요 내지는 그러한 개념의 발생을 약간 다른 측면에서 유추할 수도 있다. 물리학, 과학철학자인 서울대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 Global life>론의 창시자이다(저서“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그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전체로서 하나의 <온생명체>이라 하며, <온생명>에 대비하여 각각의 개별 생명체는 <개체생명>이라 한다. <온생명>은 단순히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생명체’를 말하는 것이다.

장교수의 이론은 모든 생명체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 개별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한 명확한 ‘생명의 정의’는 가능하지 않다.

-.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단독으로는 살 수 없고 상호 유기적인 의존-보완 관계 하에 있다.


생명의 정의는 다양하다. 물리학자 슈뢰딩거의 유명한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에서처럼 대체로 자기 복제와, 신진대사의 능력을 갖춘 것을 생명이라 하는데, 자기복제 능력은 결정, 프라이온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신진대사는 자동차의 엔진도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식으로도 생명체에 대한 명확한 단독적 정의는 불가능한 것이다. 생명에 대한 정의가 다양한 것이 그래서이다.

장교수는 지구상의 전체 생명체를 <하나의 통합적 생명체>로 간주할 때에만 완벽한 생명의 정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개미 집단에 소속된 한 마리의 일개미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라고는 도저히 말하기 어렵다. 한 마리의 일개미는 혼자서 번식도 생존도 불가능한 것은 물론 그 기능도 단위 생명체가 아니다. 개미는 <개미떼>로서 하나의 단위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넓게 그리고 엄밀하게 적용하면 우리는 지구 전체의 생명계를 <하나의 통합적 생명체> 간주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간주해야만 한다고 장교수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 ‘지구적 생명체’를 <온생명 global-life>라 명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개체생명으로서 온생명의 일부분인 것이며, 온생명을 우리의 생명의 모태이며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사실’이라기에는 아직 논의의 여지가 많으므로)에 의하면 우리는 각자 개체생명만의 목적을 이기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되며, 온생명 전체에 참여 협동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은 다른 생물종과 달리 온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種)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온생명의 일원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개인, 또는 인간만의 욕심을 추구할 때 온생명의 진화를 저해하거나 심지어 온생명의 죽음까지도 불러 올 수 있는 것이다. 장교수의 <온생명> 이론의 목표는 이처럼 지구 생태계 전체에 대한 총합적 가치관의 새로운 정립에 있다. 이 이론은 <가이아 Gaia>이론과 비슷하지만, 가이아 이론에서는 지구의 생명계를 단순히 하나의 ‘계 界’로 간주하고 취급할 뿐이지만 온생명 이론은 보다 구체적, 실질적으로 <온생명>이 하나의 단위 생명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이아 이론과 다르다.

온생명 이론은 급속한 과학 문명 -- 인간 능력의 확대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훌륭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생각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선>, <사랑> 등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온생명 이론은 약간의 보완 여지가 남아 있다.

먼저 온생명이 하나의 독립적 의식체인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명의 단위는 의식의 단위체이다. 의식은 그것이 ‘외부’라고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온생명이 독립적 의식의 단위체가 아니라면 개체생명들이 제각기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일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장 교수는 온생명이 독립적 의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을 인정할만한 이론적 현상적 증거는 찾기 어렵다. 따라서 온생명 이론은 개체생명의 이기심을 자제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는 일지만 충분한 당위성을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는 생명의 범위를 온생명까지 확장하는 일에는 개체와 전체의 이익의 모순적 충돌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체생명의 범위를 최대로 우리 자손까지 확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개체생명과 온생명 사이의 충돌이 완화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개체생명의 범위를 자손에게까지 확대한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도 쉬운 일이 아니며, 자손의 범위도 온생명에 비하면 지극히 좁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 온생명 이론의 한계가 있다.

그러함에도 온생명 이론은 물질문명 시대에 인간이 채택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가치관이며, 지극히 훌륭한 사상이라는 점은 누구나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온생명 이론의 범위를 사후식을 포함한 의식계에까지 넓혀 적용할 때에 완전한 이론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완전한 가치관으로서 정립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살아 있을 때에만 ‘나’가 아니라 사후에도 의식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나’인 것이며, 사후의 의식체(사후식)는 기의 형태로 생명계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계와 의식계 -- 사후식의 네트워크 전체가 하나의 통합체인 것이다. 이처럼 전체 우주와 하나의 생명적, 정신적 통합체라는 인식 하에서 우리는 장 교수가 주창한 온생명적 가치관을 완전하게 정립할 수 있으며,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업보(業報)에 대하여>


사후식의 네크워크는 전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훌륭한 사후식의 영입을 필요로 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방향으로 생명계의 의식에 작용할 것이다. 악한 의식에게는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이처럼 우주식이 생명계에 해를 끼치는 의식--인간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업보>라 말한다. 이 <업보>를 조금 검토해 보자.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소립자의 식이 모여서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통해서 의식을 형성하고, 의식들이 모여서 우주식을 만든다. 이 모든 과정과 결과들이 `우연'이 아니라 <식>의 본질적 성질인 <의지--기>가 작용하여 생기는 목적적 결과임은 <진화와 기>에서 말씀드렸다. 따라서 ꡒ우주의 목적ꡓ은 곧 ꡒ우주식의 형성과 발전ꡓ이며, 이것은 생명계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ꡒ죄악ꡓ의 내용을 ꡒ생명계에 해를 끼치는 행위ꡓ와 ꡒ우주식의 고양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생각ꡓ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업보의 작용도 이에 따라 살아 있는 동안의 업보와 사후의 업보로 나눌 수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의 업보는 ꡒ악인은 벌을 받는다ꡓ라는 법칙이다. 그러나 이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사회학 이론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형법을 어기는 행위는 국가의 사법권에 의해서 처벌되는 것이지만, 법망을 피해가면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선량한 사람들 보다 생존경쟁에 있어서 더 유리할 것이다. 그러니, ꡒ악인은 복을 받는다ꡓ라는 법칙이 생겼어야 당연할 텐데 어째서 ꡒ악인은 벌을 받는다ꡓ, ꡒ사필귀정ꡓ이라는 법칙이 생겨난 것일까?

이 법칙은 인간사회가 생긴 이래 줄 곳 있어온 법칙이며, 수많은 인간들의 삶을 통하여 얻어진 경험법칙이다. ꡒ악인이 결국 벌을 받는 현상ꡓ이 수 없이 목격되었다는 말이다. 사회를 관리하는 인간의 법이 허점 투성이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ꡒ하늘의 법--천라지망(天羅之網)은 성글지만 빠져나갈 틈이 없다ꡒ라는 오랜 경험의 지혜가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ꡓ악인은 벌을 받는다ꡒ라는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 때문이다.

그렇다. 악인이 더 잘 살 것처럼 보이지만 악인은 벌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심리적 사회적 법률적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ꡒ천벌ꡓ이 바로 그것이며, 그래서 ꡒ천라지망ꡓ이라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ꡒ천라지망ꡓ이라는 말은 사후식의 네트워크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무척 흥미롭다.

ꡒ천벌ꡓ--즉 업보는 형법처럼 즉각적으로 엄격하게, 또 가시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업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그래서 이다. 그러함에도 오랜 관찰과 경험이 업보를 증명하고 있다. 인간사회는 매우 복잡하다. 인간관계가 유기적으로 얽혀져 있으므로 악인에게 내리는 업보가 자칫 그 주위의 선량한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업보는 우주식의 목적이 아니며 또한 물리적인 법칙처럼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업보는 우주식이 자체의 고양을 위한 노력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므로, 우주식이 업보를 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과 주의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우주식이 그 기를 통해서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인 기의 작용은 물질의 법칙(물리법칙)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작용의 강도는 상당히 제한적일 것이다.

업보의 작용이 그 사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이유가 이런 여러 가지 원인들 때문이다. 물론 여러 가지 사유로 살아 있는 동안에 업보의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사후에 그 사후식이 업보를 받을 것임은 당연하다.


사후의 업보는 위에서 잠간 언급한 바처럼 사후식이 전체 네트워크로부터 받는 처벌일 것이다. 그것은 ꡒ왕따ꡓ 정도의 것일 수도 있고 ꡒ지옥ꡓ처럼 괴로운 상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그리고 선인들이 ꡒ지옥ꡓ을 말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나는 사후에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지옥이 있다면 물론 천국도 있을 것이다. 천국이란 사후식이 우주식이란 네트워크에 접속되어서 우주식의 높은 경지를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후식이 지옥 같은 상태에 처해 있든, 천국 같은 상태에 있든 우주식의 고양을 위해서는 윤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고양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른 식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인간 세계가 더 높은 수준으로 향상될 때  까지는 말이다. 이것이 불교의 교리인 <해탈>일 것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ꡒ생명계에 해를 끼치는 행위ꡓ 이외에 ꡒ우주식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치는 나쁜 생각ꡓ은 옛 가르침 그대로 ꡒ탐진치ꡓ이다. 인간사회의 법률에는 `생각에 대한 처벌' 법칙이 없지만 종교에서는 `나쁜 생각' 그 자체를 죄악시한다. 물론 나쁜 생각이 죄를 저지르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한 가르침이 나왔을 수도 있겠지만, 우주식의 관점에서 보면 나쁜 생각은 바로 죄악이다. 나쁜 생각을 가진 의식이 우주식에 접속되면 우주식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ꡒ올바른 마음가짐ꡓ이라는 종교와 선인들의 가르침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 아니면 벌을 받는다'라는 사실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사실,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 없는 일이라면 우리의 삶은 현재의 삶과 전혀 다른 -- 상반되는 것이라야 한다. 논리적으로 말이다. 죽어서 몸도 마음도 없어지는 것이라면 윤리와 도덕과 사랑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한 모든 `인간적 가치'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망상인가? 쾌락 이외에 가치를 둘만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 자식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행동하도록 우연히 만들어진 DNA의 요구'일 뿐, 우리가 한갓 미소한, 그리고 `우연히' 만들어진 몇몇 분자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DNA의 지시를 따를 필요가 무엇인가? 아니, DNA 어디에 사랑과 자비가 수록되어 있는가?

내가 지금까지 종교를 가지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종교(신)의 근거와 그리고 사랑과 자비를 왜 필요로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DNA적`이었다. 생존본능에 따라서 살고 행동하였다. 서로 죽이고 잡아먹었으며(식인의 증거는 원시인의 유적에서 널리 발견된다), 약탈하였다. 이런 방식은 고대뿐 아니라 근세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까지 뚜렷이 연결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국가, 인종, 종교간의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의 오랜 본능은 순수한 자기중심적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랑과 자비가 개입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석가가 자비를 가르친 것은 2천 5백 년 전이고, 예수가 사랑을 가르친 것은 2천 년 전이다. 이에 비해서 원시인류부터 시작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2 백만 년을 넘는다. 2천 ~2천 5백 년은 인류사에 있어서 극히 최근의 일인 것이며, 그 기간은 사랑과 자비를 정착시키기에는 아직 너무 짧은 것이다. 이런 역사를 근거로 나는 우주식의 수준이 근세에 와서 빠른 속도로 발전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 문화의 발달이 인간 의식의 향상을, 그리고 인간의식의 향상이 <우주식>의 향상을, 우주식의 향상이 인간의식의 향상을 촉진하는 식으로 ꡒ바른 되먹임(정 궤환; positive feedback)" 과정에 의하여 가속시켰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인류문화 발전의 가장 큰 동력은 <언어>였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의 <의식>들이 서로 생각을 교환할 수 있었으며 서로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언어가 생기기 이전에 인간들은 상대(예를 들어서 언어가 다른 부족)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으며, `알 수 없는' 것은 곧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화석자료에 의해서 인간의 목 구조가 발음이 가능하도록 진화한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언어는 그저 같은 무리 내에서만 의사소통이 가능하였지 다른 부족간에는 공통 언어가 없었을 것이다. 인류 문화와 문명의 역사가 길지 않은 이유이다. 인간이 최초로 사회다운 사회를 이루고서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일만 년이 채 되지 않는다. 고고학의 발굴 자료에 의하면 인간이 씨족사회를 벗어나 <도시>를 만든 것은 7천 년 내지 9천 년 전이다. 그 이전의 인류는 기껏해야 한 무리 내의 친족밖에는 서로 관계를 맞을 일이 없었으므로 따라서 사후식이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생시에 의식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사후식이라고 해서 가능할 수 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물론 씨족, 부족 단위의 소규모적인 사후식의 네트워크는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고서도 한참이나 후에 불교, 그리고 기독교가 생길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곧 우주식의 가르침이요 요구사항인 것이다.


우주식의 `연령'이 아직 `어리다'면 앞으로의 성장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식은 옛날보다 더 강해졌으며 앞으로 가속적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다.  현재 모든 과학의 기본인 물리학이 그 ꡐ완성ꡑ을 자신할 정도로 발달한 지금, 과학적으로 인정 받고 있지도 못하는 <기>를 믿으며 수련하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는 사실을 보면 현재 우주, 또는 사후식의 기는 아주 강한 것 같다.

우주식과 인류문명의 발전이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면, 20세기에 이룩한 인류 문명의 눈부신 발전에 가속을 더한 21세기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우주식이 살아 있는 인간에게 확연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정도의 기를 미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는 우주식이 인간세계와 직접 연결되어서 우주식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수도 있다. 그것이 ꡒ개벽ꡓ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살아 있는 인간도 우주식과 교감이 가능할 것이며, 그 효과는 나로서도 상상하기 어렵다. 생명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며, 그래서 물질계인 `이 세상'이 끝나고 사후식들의 세계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심판의 날이요 그 때에 모든 <의식(인간)>들이 우주식과 직접 접속되는 일이 `휴거'일 수도 있다. 그때까지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의식은 더 이상 고양될 수 없을 지도 모르며, 고양되더라도 상대적으로 다른 식들 보다 열등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의 ꡐ윤회할 기회ꡑ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며, 따라서 ꡒ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은 이루기 어렵네 少年易老 學難成ꡓ 라는 교훈의 의미를 절박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업식 業識 관리에 노력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 생에 하지 뭐~~'하고 게으름을 피울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후의 심판'이 가까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이처럼 <식과 기>를 도입하면 소립자들로부터 우리의 삶과 사후세계까지도 일관성 있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내가 무척 놀랐고 또 관심을 가지고서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공부를 하고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더 이상의 언급은 이 글의 목적과 나의 수준을 벗어나므로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시기 바란다. 모든 종교는 그 궁극적인 원리와 목적이 동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큰 진리에 비해서 약간의 오차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 <식과 기>를 모르던, 그래서 종교의 가르침들을 무시하던 내가 이제 그 가르침들의 가능성을 깨닫고서 전율하고 기뻐하는 이유를 이해하시리라.


나의 삶이 이제 의미와 목적과 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출처] 기와 과학 (14-17 )|작성자 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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