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존 이론

[스크랩] ‘하나’, ‘1’ 그리고 ‘단위’

자유지향 2011. 3. 3. 17:57

 

천재만이 천재를 알아봅니까?

 

'하나', '1' 그리고 '단위'가 도대체 무엇인가? 

 

 


 

프레게

(Frege, Gottlob 1848~1925)

 

독일의 수학자, 논리학자. 수학은 논리학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라는 이론주의에 기초하여 자연수론의 엄밀한 도출을 시도하고 그것을 위한 필요로부터 명제 논리학 과 술어 논리학의 엄밀한 정식화를 수행하였다.

 

러셀은 기수를 '집합의 집합'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 정의 방법은 프레게에서 유래한다.

 

그는 의미론의 분야에서도 수학에 관련하여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하고 현대 의미론의 기초를 이루지만 그의 저작은 독특한 기호를 사용한 난해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인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후설, 러셀,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 + 1 = 2 , 맞나?

 

 

 

잘 모르면 입을 닫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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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1’ 그리고 ‘단위’


옛날이나 지금이나 간에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고 생활을 하면서 의식주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는 계산 행위를 부지불식간에 행하고 있습니다.


계산 행위에는 숫자가 무의식적으로 따라 붙는 이유로 오늘 이 순간 이 세상에서 숫자를 없애버린다면 현실적으로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는지 모릅니다.


계산 행위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에 바로 ‘하나’와 ‘1’이라는 심오한 철학, 종교, 심리, 수학, 물리학, 공학, 사회, 문화, 예술, 미학 등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하나’와 ‘1’ 그리고 무엇인가의 무더기로서 ‘단위’가 이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보면 아마 쉽사리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말이 ‘하나’, ‘1‘ 그리고 ’단위‘이지 이러한 용어에 내포된 넓고 심오한 진리가 배어 있다는 것을 학문을 탐구하는 동서고금의 학자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혹, 제기될 수 있는 이러한 질문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학습이나 경험에서 알고 있는 논리를 펴 나가면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제로존 이론이 2007년 신동아 8월호에 소개되면서 ‘하나’, ‘1’ 그리고 ‘단위’에 대해서 자신이 잘 아는 것처럼 잠자다가 무슨 홍두깨냐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자주 나왔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까요?


“물리학에서 나오는 기본 ‘단위’말이지? 그거 말이야 한 십 분이면 알 수 있을거야! ”


“제로존이란 그 친구, 이런 ‘단위’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지 당췌, 시간이 남아 도나?”


“아마 중학생도 금방 알거야!”


그러나 이러한 논쟁들은 이미 선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논쟁해왔던 주제들로서 우리가 벌이고 있는 논쟁들은 차라리 경박하다 못해 천박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시간을 내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러한 논쟁들이 단순한 관념적 논쟁의 유희이거나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간주하고 맙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한순간도 컴퓨터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정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랄 만큼 도움을 주고 있는 물질문명의 한 주역으로서 컴퓨터의 탄생에 컴퓨터 언어가 있고 그 컴퓨터 언어가 ‘하나’, ‘1’ 그리고 ‘단위’라는 치열한 개념 논리에서 구축되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컴퓨터 언어 논리와 표기법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학자가 바로 독일의 수학과 논리학자로서 너무나 잘 알려진 <고트롭 프레게, Gottlob Frege, 1848 ~ 1925>입니다.


<프레게>는 그 유명한 ‘산수의 기초’라는 책을 펴낸바 있습니다.


제로존은 오래 전부터 이 저서가 얼마나 위대한 논리저서인지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책상가까이 두고 열 번 이상 정독했지만 아직도 <프레게>가 의도하고자 했던 생각을 깨닫는데 완벽하게 다가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로존 이론이 <프레게>의 ‘산수의 기초’라는 저서를 읽고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 제로존 이론을 스스로 이해하고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대할 순 없지만 혹, <프레게>의 ‘산수의 기초’를 정독하고 나면 지금 세상에 나온 단위계들(Non-SI units) - 플랑크 단위계, 자연 단위계 등 - 과 얼핏 보아서 겉 형식은 비슷할는지 모르지만 출발 개념 자체에서부터 전혀 근원적 개념의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제로존 이론의 출발 공준이 얼마나 깊은 학문적 깊이를 가지면서 명쾌하면서 미학적 단순함과 균형을 가진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봅니다.


제로존 이론의 출발 공준이 바로 ‘하나’, ‘1’ 그리고 ‘단위’와 관련하여 오랜 세월 동안 자연과 우주를 우리 인류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선언적 규정, 그것입니다.


저서의 페이지 수가 300여 페이지로서 다른 저서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분량으로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한 장, 한 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을 경우, 엄청난 지력을 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로존 이론 공식 카페 가족 여러분, 제로존 이론의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서 제로존은 <프레게>의 저서 ‘산수의 기초’ 중에서 꼭 읽어 볼만한 대목을 추려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대단한 스크롤 압박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읽으려 하지 마시고(아마 이런 분이 있다면 제로존이 정녕코 존경할 것입니다.), 시간 나는 대로 관심 있는 부분만 추려서 읽고 또 읽으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 ‘1’ 그리고 ‘단위’에 관한 관을 정립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부로 공지로 올립니다.


특히 집합이나, 컴퓨터 언어, 새로운 프로그램에 관심 있는 분들은 서점에서 구입하여 정식으로 일독하기를 바랍니다.


제로존이 <프레게>의 ‘산수의 기초’를 강추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철학자, 논리학자이며 수학자인 <러셀>은 <프레게>의 ‘산수의 기초’를 읽고 대단히 칭찬한 바 있습니다.


그가 쓴 ‘수학원리[數學原理, Principia Mathematica]’를 아십니까? 


1910~1913년 B.러셀과 A.N.화이트헤드가 공저(共著)한 수학서로 수학의 전체를 공리론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 책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1+1’이 왜 ‘2’인가에 대해서 엄청난 두께의 분량으로 설명한 책입니다.


‘하나’, ‘1’ 그리고 ‘단위’에 대한 개념을 더욱 깊이 있게 심층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컴퓨터 과학자나 소수의 수리물리학자들은 수학의 원리에 대해서 더욱 파고듭니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오랜 시간 전에 기술한 내용이라 현대적 정보와 걸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지향하는 바, 중심개념은 오늘날 이 시간까지도 흔들림 없이 대단히 심오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서히 몸을 풀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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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는 ‘수’가 무엇인가, 또는 기호 ‘1’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물론, 하나의 사물이지”라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27p)



수 개념이 산수에서 가장 단순한 개념 가운데 하나지만, 다른 과학의 대부분의 개념보다 구조가 더 정교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31p)



수 개념을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일은 언제나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제는 수학과 철학에 공통된다.


수학과 철학이라는 두 학문의 협력이 양편에서 여러 차례 시도 되었지만 바라는 만큼 그리고 아마도 가능한 만큼 성공하지 못했다면,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철학, 심지어는 논리학에까지 심리학적 탐구 방법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은 이런 경향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이것은 철학적 탐구에 대한 여러 수학자의 혐오를 잘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슈트리커>처럼 수의 표상은 자동적이며 근육 감각에 의존한다고 말한다면, 수학자는 거기에서 수를 재인식할 수 없으며 그런 문장으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게 된다.


근육 감각에 기초를 둔 산수는 확실히 감각적이겠지만, 그 기초만큼이나 모호할 것이다.


그러나 감각은 산수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전의 감각 인상의 흔적들이 결합된 내부 영상들도 똑같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런 온갖 형상이 지니는 동요나 미결정성은 수학의 개념과 대상이 지니는 결정성이나 고정성과는 뚜렷이 대립된다.


물론 수학적 사고 과정에서 나오는 표상이나 그런 표상의 변화를 탐구하는 일은 쓸모가 있다.


그러나 심리학이 산수의 기초를 제시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33p)



<뉴턴>은 수를 단위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각각의 양(量)이 단위로 간주된 종류의 다른 양에 대해 지니는 추상적 비율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이해할 때 분수와 무리수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수를 알맞게 기술할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이라는 개념 및 양의 비율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게 된다. (80p)



<슈뢰더>에 따르면 수는 현실에 모형을 두고 있으며, 단위들을 하나들로 본뜨는 과정을 통해 수가 이끌어진다.


그는 이것을 수의 추상화라 부른다.


이렇게 단위들을 본뜨는 과정에서 색, 형태 같은 사물의 다른 성질들은 모두 무시되고 단위들은 빈도에 따라서만 묘사될 것이다.


여기서 빈도는 기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슈뢰더>는 빈도나 기수를 색이나 형태와 같은 차원에 두고, 그것들을 사물의 어떤 성질로 여긴다.(84p)



<바우만>은 수가 외부 사물에서 추상화해 낸 개념이라는 견해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외부 사물들은 우리에게 엄밀한 단위들을 제시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 사물은 우리에게 분리된 집단이나 감각 가능한 점들을 제시하지만, 우리는 마음대로 이런 것들 자체를 또다시 많은 것(多)으로 간주할 수 있다.”(84p)


이와 더불어 수를 색이나 강도(强度)와 나란히 분류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 수는 훨씬 더 넓은 범위에 적용될 수 있다.


<밀>은 자연 현상은 모두 셀 수 있기 때문에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이 부분의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진리가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셀 수 있지 않은가?


<로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는 사람, 천사, 행동, 사상 등 존재하거나 표상 가능한 모든 것에 적용된다.”


<라이프니츠>는 비물질적 사물에는 수가 적용될 수 없다는 스콜라 학자들의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수를 어느 종류의 사물이든지 서로 결합하여 생겨나는 일종의 비물질적 특징이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어 신, 천사 하나, 사람 한 명, 운동은 서로 결합될 때 넷이 된다.


따라서 그는 수가 아주 일반적인 것이며, 형이상학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힘과 능력이 없는 것은 무게를 잴 수 없고, 부분이 없는 것은 따라서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셀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수는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특징이다. “(89p)



2와 3의 물리적 차이에 대한 <밀>의 견해. <버클리>에 따르면 수는 사물 내에 실재하지 않고 정신을 통해 창조된다.


<밀>에게는 수가 물리적인 것이지만 <로크>와 <라이프니츠>에게는 관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사실 <밀>이 말한 것처럼 두 개의 사과는 세 개의 사과와 물리적으로 다르며, 두 마리 말은 한 마리 말과 물리적으로 다르다.


그것들은 눈으로 보고 만져 보아 서로 다른 현상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둘임과 셋임이 물리적인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는가?


켤레의 구두는 개의 구두와 눈으로 보고 만져 보아 똑같은 현상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물리적 차이에도 대응하지 않는 수의 차이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한 켤레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밀>은 이상하게도 같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두 개의 개념이 세 개의 개념과 물리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가?


그래서 <버클리>는 이렇게 말한다.


“수는 .... 고정되고 확정된 것이 아니며 사물 자체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수란 관념 자체이거나 관념들의 조합에 정신이 하나의 이름을 부여해 단위가 되도록 만든 것임을 생각해 보건대, 전적으로 정신의 산물이다. 정신이 관념들을 여러 가지로 조합함에 따라 단위들도 다양하게 되고, 단위들의 모임에 불과한 수도 다양하게 된다. 하나의 창문 =1, 그 안에 여러 개의 창문이 있는 하나의 집 =1, 그리고 여러 집이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92p)



<토마에>의 이름 부여


몇몇 사람들은 기수를 집합, 여럿 또는 다수라고 설명한다.


이런 견해들은 모두 그런 개념이 수 0과 1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난점이 있다.


더구나 그 표현들은 아주 애매해서, 어떤 때는 ‘무더기’ ‘무리’ ‘모임’의 의미에 가깝고 - 이것들은 공간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 어떤 때는 좀 더 애매해서 그렇지 ‘기수’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런 식의 설명으로는 기수 개념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토마에>는 수를 형성하려 할 때 대상 집합이 다르면 이름도 다르게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분명히 대상 집합을 더 명확히 규정하려는 데 있는 것이며, 집합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은 단지 그런 의도의 외적 징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규정이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점이다.


우리가 ‘3개의 별’ ‘3개의 손가락’ ‘7개의 별’ 대신 아무런 공통 요소도 인식될 수 없는 이름을 도입한다면 수 관념이 생겨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일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가 그 이름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수의 독특성을 인식해야 한다.


나아가 다음 두 견해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몇몇 사람들은 수를 사물이나 대상의 집합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은 오래 전의 <유클리드>처럼 -  단위란 존재하는 사물 각각을 하나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수란 단위들로 이루어진 여럿이다. - 수를 단위들의 집합으로 설명한다.


이 후자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101p)



단위와 하나에 관한 여러 견해

(103p)


수 낱말 ‘하나’는 대상의 성질을 표현하는가?


‘μοναζ’와 ‘단위’란 표현의 다의성, 단위가 셀 대상이라는 <슈뢰더>의 정의는 쓸모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라는 형용사는 더 자세한 규정을 포함하지도 않으며, 술어로 사용될 수도 없다.


『원론』7권 앞부분에 나오는 정의에서, <유클리드>는 ‘μοναζ’라는 낱말을 통해 때로는 셀 대상을, 때로는 그런 대상의 성질을, 때로는 수 하나를 나타내는 것 같다.


우리는 이 말을 ‘단위’라고 옮길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낱말 자체도 그런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슈뢰더>는 이렇게 말한다.


“셀 사물들 각각은 [하나의] 단위라 불린다.”


우리는 왜 사람들이 우선 사물들을 단위 개념과 결부시키고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명하지 않는지 의문이 생긴다 : 수는 대상들의 집합이다.


이 경우 우리는 첫 번째 견해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물들을 단위라고 부름으로써 더 자세한 규정을 얻으려 하는 것일 테고, 그래서 언어 형식에 따라 ‘하나’를 성질 낱말로 보고 ‘하나의 도시’를 ‘현명한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려 할 것이다.


그 경우 단위는 ‘하나’라는 성질이 귀속되는 대상일 것이며, 단위와 ‘하나’의 관계는 ‘현자’와 형용사 ‘현명한’의 관계와 비슷할 것이다.


앞에서 수가 사물의 성질이라는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올바른 이유들 외에도, 여기서는 특별한 비판이 몇 가지 더 있다.


만약 모든 사물이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굉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하나의 사물에 이 성질을 분명히 부여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솔론은 현명하다는 주장이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무엇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의 외연이 감소하면 개념의 내용은 증가한다.


개념의 외연이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되면, 개념의 내용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언어가 어떤 대상을 더 자세히 규정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성질 표현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만약 ‘한 사람’(Ein Mensch)이 ‘현명한 사람’(weiser Mensch)과 비슷하게 간주된다면, 우리는 ‘하나’(Ein)가 술어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 테고, 그 때문에 우리는 “솔론은 현명했다”(Solon war weise)처럼 “솔론은 하나였다”(Solon war Ein) 또는 “솔론은 하나인 것이었다”(Solon War Einer)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후자와 같은 표현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 표현은 그 자체로 따로 떼어 이해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맥락에 따라 ‘현자’(Weiser)를 보충할 수 있다면, 그 표현은 솔론은 현자였다(Solon war ein Weiser)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만으로는 술어가 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이런 용법과 모순되어 보이는 용법들도 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개념어가 보충되어야 하거나 또는 ‘하나’가 수 낱말로 사용되지 않음을, 즉 유일성이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성이 주장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복수의 경우 이 사실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솔론은 현명했다”(Solon war Weise)와 “탈레스는 현명했다”(Thales war weise)를 결합해 “솔론과 탈레스는 현명했다”(Solon und Thales waren weise)라고 할 수는 있지만, “솔론과 탈레스는 하나였다”(Solon und Thales waren Ein)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만약 ‘현명한’(weise)이 솔론과 탈레스 모두의 성질이듯이 ‘하나’(Ein)도 솔론과 탈레스 모두의 성질이라고 한다면, 왜 이것이 불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


<라이프니츠>와 <바우만>이 시도한 정의는 단위 개념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 같다.


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라는 성질의 정의를 제시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라이프니츠>가 “하나란 우리가 한 번의 이해 작용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하나’를 그 자체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많은 것(多)도 한 번의 이해 작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라이프니츠>도 똑같은 단락에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비슷한 식으로 <바우만>도 “하나란 우리가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또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점으로 제시하거나 또는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경험적 지관이든 순수 직관이든, 외적 직관 하나하나를 우리는 다시 많은 것(多)으로 간주할 수 있다. 각각의 표상은 다른 표상과 분리된다면 하나이다. 그러나 각 표상 자체는 다시 많은 것(多)이라고 분류될 수 있다.”


따라서 개념들의 사실적인 경계가 허물어지며, 모든 것이 우리의 이해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 모든 대상이 우리 이해에 따라 하나일 수 있고 또한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면, 어느 대상에든지 ‘하나’라는 성질을 부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을 지닐 수 있겠는가?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다는 점에서 명성이 나 있는 학문이 어떻게 그토록 불분명한 개념에 근거를 둘 수 있겠는가? (107p)



나눌 수 없음(쾨프)도 단위의 특징으로 성립할 수 없다. (111p)


어떤 사람들은 나누어져 있지 않음을 나눌 수 없음으로까지 끌어올린다.


<괴프>는 나눌 수 없고 스스로 존립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물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든 그렇지 않든, 모두 개체라고 부르며, 셀 개체들을 하나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하나’는 분명히 ‘단위’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바우만>이 외부 사물은 우리가 마음대로 많은 것(多)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엄밀한 뜻의 단위를 제시해 주지 못한다고 주장할 때, 그도 분석할 수 없음을 그런 단위의 특징으로 제시한 셈이다.


사람들은 내적인 연관성을 무한히 증가시켜서 자의적인 이해를 벗어난 단위의 특징을 얻고자 한다.


이런 시도는 실패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단위라고 불리면서 셀 수 있는 것이 거의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물러서서 분석 불가능성 자체가 아니라 분석 불가능 하다고 여겨진다는 점을 단위의 특징으로 삼게 된다.


결국 우리는 다시 변덕스런 이해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사실을 실제로 그런 것과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도대체 얻는 것이 있는가? 전혀 없다!


거짓 가정으로부터는 거짓 결론이 이끌어 질 수 있다.


그러나 분석 불가능성으로부터 아무것도 이끌어낼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개념을 덜 엄격하게 해도 문제가 없다면, 그리고 정말 그래야 하는데, 그런 엄격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아마도 우리가 다만 분석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예를 들어 하루가 24시간이면, 3일은 몇 시간인가 하는 문제의 경우처럼, 단위의 구성 방식에 어떤 결론이 근거한다면 분석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111p)



단위들은 서로 같은가? (113p)


‘단위’를 [사물의] 이름으로 사용해야 할 근거로서 동일성. <슈뢰더> <홉스> <흄> <토마에> 사물들이 차이를 추상화함으로써 기수 개념을 얻지는 못하며, 그런 추상화를 통해 사물들이 같게 되지도 않는다.


이처럼 ‘하나’를 성질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으므로, 결국 우리는 사물을 단위라고 나타냄으로써 더 자세한 규정을 하게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다음 물음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 ‘단위’가 사물의 또 다른 이름이라면, 모든 사물이 단위이거나 단위로 이해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사물을 단위라 부르는가?


<슈뢰더>는 셈의 대상들에 부여된 동일성을 이유로 든다.


우선 왜 ‘사물’이나 ‘대상’이란 낱말도 똑같이 이점을 암시할 수는 없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물음이 생긴다 : 왜 셈의 대상들에 동일성을 부여하는가?


셈의 대상들에 동일성이 부여될 뿐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실제로 같은가?


어느 경우든 어떠한 두 대상도 완전히 같지 않다.


다른 한편 우리는 두 대상이 일치하는 측면을 거의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사실과 달리, 실제로 지니는 것 이상의 동일성을 사물들에 부여하려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다시 자의적인 이해에 다다르게 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아무 제한 없이, 단위들이 같다고 말한다.


<홉스>는 이렇게 말한다.


“절대적으로 말해, 수학의 수는 동일한 단위들을 전제하며, 그런 단위들로부터 수가 유래한다.”


<흄>은 양과 수의 구성 부분들이 아주 똑같다고 간주한다.


<토마에>는 집합에 속하는 개체를 단위라 부르고, “단위들은 서로 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똑같이 정당하게 또는 더 낫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집합의 개체들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이른바 이런 동일성이 수에 대해 무슨 의미를 갖는가?


사물을 구별해 주는 성질들은 사물의 기수와는 무과하고 낯선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런 성질들과는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


만일 <토마에>가 요구하듯이 ‘대상 집합에 속하는 개체들이 지닌 고유한 성질들을 추상화’하거나 또는 ‘개개의 사물들을 고찰 할 때 사물들을 구별시켜 주는 특징들을 제거’한다면, <립쉬츠>가 주장했듯이, ‘고려된 사물들의 기수 개념’이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반 개념을 얻게 되고, 그 개념 아래 사물들이 속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도 사물들은 자신의 특성을 전혀 잃지 않는다.


예를 들어 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를 구별해주는 성질들을 제외하고 그것들을 고찰한다면, 아마 나는 ‘고양이’라는 개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두 고양이를 그 개념 아래 가져와서 그것들을 단위라고 부른다고 해도, 언제나 흰 고양이는 여전히 희고 검은 고양이는 여전히 검다.


또한 내가 색깔을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고양이들의 색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들은 처음부터 그랬듯이 서로 다르다.


추상화를 통해 얻게 되는 ‘고양이’란 개념은 더 이상 그 특성들을 지니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113p)



게다가 다수에 관해 말하려면 차이가 필수적이다. <데카르트> <슈뢰더> <지본스> (115p)


단순히 개념적 절차를 통해 서로 다른 사물들을 같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더 이상 여러 사물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물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사물들의 수는 - 더 낫게는 다수는 - 사물들의 차이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슈뢰더>는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주장하였다.


“대상들이 분명히 서로 구별되도록, 예를 들어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나누어져 있고 서로 경계 지어져 나타나도록 놓여 있는 경우에만 사물들을 세라는 요구를 합당하게 할 수 있다.”


사실 지나친 유사성은 때때로, 예를 들어 울타리의 나무를 셀 경우처럼, 셈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뜻에서 <지본스>는 아주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수는 다양성의 또 다른 이름일 분이다. 정확한 동일성이 단위이며, 차이 때문에 다수가 생겨난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위들은 서로 완전히 같다는 점에서 단위들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떤 측면에서 완전히 같을 수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는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에 다수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세 개의 동전이 아주 같아서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세 개의 동전이 아니라 하나의 동전일 것이다.” (115p)



단위들이 다르다는 견해도 다시 난점에 빠진다. <지본스>의 서로 다른 하나들.


그러나 단위들이 달라야 한다는 견해도 새로운 난점에 부딪힌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지본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단위는 같은 문제에서 단위로 간주되는 어떤 다른 대상과도 구분될 수 있는 사고의 대상이다.”


여기서 단위는 그 자체에 의해 설명되고 있으며, “어떤 다른 대상과도 구분될 수 있다.”는 종속절은 뻔하기 때문에 더 자세한 규정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이 대상을 다른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우리가 그 대상을 원래의 대상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본스>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기호 5를 사용할 경우 그것은 언제나 실제로


1+1+1+1+1


을 의미하며, 이들 각각의 단위가 서로 구분된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만약 필요하다면, 나는 그 단위들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도 있다.


1′+1′′+1′′′+1′′′′+1′′′′′.“


만약 그것들이 다르다면, 그 점을 확실히 명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커다란 혼동이 생길 것이다.


만약 1이 나오는 자리가 다르다는 것이 이미 어떤 차이를 의미한다면, 그 점이 예외 없는 규칙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1+1이 2를 의미하는지 1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등식 1=1을 버려야 할 것이고, 같은 사물을 두 번 나타낼 수도 없는 황당한 처지에 놓일 것이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물에는 서로 다른 기호를 부여하게 된다면, 왜 이 기호들에서는 공통의 구성 요소를 유지하려 하고


1′+1′′+1′′′+1′′′′+1′′′′′


라고 쓰기보다는 왜 그냥


a+b+c+d+e


라고 쓰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동일성은 다시 사라지고,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들은 우리 손 안에서 빠져나가 버리게 되고, 자신의 온갖 특성들을 가지는 대상들이 남게 된다.


다음 기호들


1′, 1′′, 1′′′


은 명백히 당황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 우리는 동일성을 반드시 가져야 하며, 따라서 1이 있어야 한다.


반면 우리는 차이를 반드시 가져야 하며, 따라서 프라임 부호[′]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프라임 기호[′]들 때문에 다시 동일성은 무효가 되고 만다. (117p)



‘단위’가 다의적이어서 단위의 동일성과 구별 가능성이 조화되기 어렵다는 점이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난점에 직면한다 :


만약 우리가 서로 다른 대상들을 결합해서 수가 생긴다고 간주한다면, 우리는 어떤 덩어리를 얻게 되고, 그 덩어리 안의 대상들은 여전히 서로 구별되는 성질들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덩어리가 바로 수는 아니다.


반면 만약 우리가 수를 같은 것들을 결합해서 얻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들은 곧바로 하나로 합쳐지고, 우리는 결코 다수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셀 대상들 각각을 1로 표시하면, 서로 다른 것들이 같은 기호를 가지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1을 서로 다른 프라임 부호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려 하면, 그것은 산수에 쓸모없게 된다.


‘단위’라는 낱말은 이런 어려움을 감추기에 아주 적절하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 비록 무의식적이라고 하더라도 - ‘대상’이나 ‘사물’이란 말을 선호한다.


우리가 우선 셀 사물들을 단위라고 부를 때 셀 사물들의 차이는 적절하게 유지된다.


그 다음에 결합, 모음, 하나로 합침, 덧붙임 또는 그밖에 우리가 무엇이라 부르든 이런 것들이 산수의 덧셈 개념 대신에 등장하며, ‘단위’라는 개념어는 눈치채지 못한 채 고유 이름 ‘하나’로 변경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동일성을 얻는다.


내가 문자 u에 하나의 n과 하나의 d를 덧붙인다면, 누구나 그것은 수 3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안다.


그러나 내가 u, n 그리고 d를 ‘단위’라는 개념 아래 가지고 와서, 이제 ‘u 그리고 n 그리고 d'(u und n und d) 대신 ’하나의 단위와 하나의 단위와 또 하나의 단위‘(eine Einheit und eine Einheit und noch eine Einheit)나 ’1 그리고 1 그리고 1‘(1 und 1 und 1)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로 인해 수 3을 얻은 것처럼 믿게 된다.


그 난점이 ‘단위’란 낱말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아서, 확실히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그런 난점을 예상하게 된다.


이 경우에 <밀>은 정당하게 언어의 능숙한 조작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 그것은 어떤 사고 과정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런 사고 과정이 있는 것처럼 속인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것이 단지 우리가 그것을 단위라고 부른다고 같아진다면, 사실 여기서 우리는 마치 사고에 의해 빈 낱말에 어떤 신비로운 힘이 부여되는 것 같은 인상을 갖게 된다. (124p)



기수 개념


개별 수는 모두 자립적 대상이다.


개별 수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정의를 보완해 보려는 시도


수 진술은 개념에 관한 서술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우리는 이제 0과 1을 정의함으로써 개별 수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정의를 보완해 볼 수 있다.


어떤 개념 아래 아무 대상도 속하지 않는다면, 수 0이 그 개념에 귀속된다고 설명하기 쉽다.


그러나 이 경우 0 자리에 같은 의미의 ‘아무...도... 하지 않는다’가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더 좋다 : a가 무엇이든 a는 그 개념 아래 속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일반적으로 성립한다면, 수 0이 그 개념에 귀속된다.


비슷한 식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만약 a가 무엇이든 a가 개념 F 아래 속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일반적으로 성립하지는 않으며, 그리고


a는 개념 F 아래 속한다와 b는 개념 F 아래 속한다.


는 문장으로부터 a와 b가 같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따라 나온다면 수 1이 개념 F에 귀속된다.


어떤 수에서 바로 다음에 나오는 수로 나아가는 것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다음과 같이 한번 말해 보자 : 개념 F 아래 속하는 대상 a가 있고, ‘F 아래 속하지만 a는 아닌’이란 개념에 귀속되는 수가 n이라면, 수 (n+1)이 개념 F에 귀속된다. (150p)



앞에 시도된 정의는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 정의는 수를 부분으로 포함하는 진술을 설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결과에 따를 때 이런 설명들이 아주 자연스러우므로, 왜 우리가 이에 만족할 수 없는지 해명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정의가 가장 문제가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수 (n+1)이 개념 F에 귀속된다”는 표현의 뜻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듯이 “수 n이 개념 G에 귀속된다”는 표현의 뜻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 설명과 그 앞의 설명을 써서


수 1+1이 개념 F에 귀속된다.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고, 그런 다음 이것을 이용해


수 1+1+1이 개념 F에 귀속된다.


는 표현의 뜻을 제시할 수 있고,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정의를 가지고는 - 예가 좀 거칠긴 하지만 - 수 <줄리어스 시저>가 어떤 개념에 귀속되는지, 이 유명한 갈리아의 정복자가 수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시도한 설명으로는 수 a가 개념 F에 귀속되고 수 b가 같은 개념에 귀속될 경우, a=b여야 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개념 F에 귀속되는 그 수’(die Zahl, welche dem Begriff F zukommt)라는 표현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특정수를 파악할 수도 없을 테고, 그래서 수 동일성을 일반적으로 증명하기도 불가능할 것이다.


0과 1을 설명했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사실 우리는


‘수 0이 ... 에 귀속된다.’


‘수 1이 ... 에 귀속된다.’


는 어구의 뜻을 고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는 우리가 0과 1을 자립적인, 재인식이 가능한 대상으로 구별해 낼 수 없다. (152p)



수 진술은 수들에 대한 등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제 수 진술은 개념에 관한 서술을 포함한다는 우리의 말을 좀 더 정확히 파악할 때가 되었다.


“수 0이 개념 F에 귀속된다”는 문장에서 우리가 개념 F를 실제 주어로 삼는다면, 0은 술어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 때문에 나는 0, 1, 2와 같은 수를 개념의 성질이라 부르기를 꺼렸다.


개별 수는 바로 서술어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을 분이므로 자립적 대상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 1’(die 1)이라고 말하며, 정관사를 통해 1을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등식 1+1=2의 경우처럼 산수에서는 그런 자립성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학문에 사용할 수 있는 수 개념을 이해하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일상 언어에서 수가 수식어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에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런 용례는 항상 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목성은 네 개의 달을 가지고 있다”는 문장을 “목성의 달의 수는 넷이다”(die Zahl der Jupitersmonde ist vier)로 바꿀 수 있다.


여기서 ‘이다’(ist)는 “하늘은 푸르다”(der Himmel ist blau)는 문장에서와 같은 단순한 계사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점은 우리가 “목성의 달의 수는 넷(die vier)이다” 또는 “[목성의 달의 수]는 수 4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여기 ‘이다’는 ‘같다’ ‘똑같은 것이다’의 뜻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목성의 달의 수’라는 표현이 ‘넷’이라는 낱말과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주장하는 하나의 등식을 갖게 된다.


등식은 수학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넷’이라는 말에는 목성이나 달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은 이런 설명에 대한 반박이 아니다.


‘콜럼버스’라는 이름에도 발견이나 아메리카에 관한 얘기는 전혀 들어 있지 않지만, 그런데도 콜럼버스와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은 같은 사람으로 불린다. (153p)

 

더보기

제로존;
‘밀린다 왕과의 대화’를 함 읽어 보십시오.

‘하나’, ‘1’ 그리고 ‘단위’ 개념에 대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밀린다 왕과의 대화

희랍 철학의 소양이 높은 <밀린다 Milinda, B.C 2세기> 왕과 인도의 불교 승려 <나가세나, Nagasena, B.C 2세기>의 대화는 희랍 철학과 인도 철학의 정면 대결이기도 하다

처음 밀린다 왕은 ‘당신의 이름은?’하고 묻는다.

- 대왕이시여, 나는 나가세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이시여, 나가세나라는 것은 이름에 불과하며 인격적인 개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

그러자 밀린다 왕은 - 인격적인 개체가 없다는 당신을 나가세나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냐? 머리카락인가? 아니면 손톱인가? 비부? 심장? 눈물? 오줌? .... 또는 이것들을 합한 것인가? -

이 질문에 대해서 나가세나는 모두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자 왕은 - 당신에게 몇 번 물어도 나가세나를 찾아내지 못했는데 나가세나란 말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은 도대체 무엇이오? -

부분도 전체도 나가세나가 아니라면서 나가세나는 존재하는 것인지 다시 물어도 답은 여전히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세나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두고 없다고 하니 불교는 허무주의인가?

철저하게 희랍적인 형식 논리에 훈련된 말린다 왕은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가세나는 - 왕께서는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셨습니까? - 하고 묻는다.

왕은 마차를 타고 왔다고 답한다.

- 마차로 오셨다니 ‘마차’란 무엇이오? 차를 말에 매기 위한 막대기인가요? 마차의 바퀴인가요? 바퀴의 살인가요? 차체인가요? 아니면 그것들을 합한 것인가요? -

왕은 이 물음에 모두 아니라고 답한다.

- 그렇다면 마차는 이름만 있는 것일까요? -

여기서 왕은 - 공(空)의 의미를 터득한다.

- 마차에 의해, 바퀴에 의해, 살에 의해, 차체에 의해 ‘마차’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

모든 것은 연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연기론과 희랍의 실제론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답 내용이다.

불교는 실체론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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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로존 이론의 공준을 떠올려 보십시오.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 '1' 그리고 '단위'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에 관련지어서 심플하게 설명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는 c또는 '하나'는 h또는 .... 이 아닙니다.

'하나'는 c이면서 h이면서 s이면서 .... 입니다!

그래서 제로존 이론의 공준을 설명할 때 따로 국밥처럼 s=1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물에 풀칠하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피리;

본 게시글을 보면서 제로존 무차원수(Dimensionless Number)와 단위(unit)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무엇이 자연을 이루는 근본(Fundamental) 요소인가에 대해서도....

간단히 측정 가능한 물리량(Q)을 단위(U)와 계수(n)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Q = n*U

일례로, 우리가 잘 아는 광속(Speed of Light), c, 를 위와 같이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c = 299792458 m/s

광속은 단위를 가지는 물리량(Dimensionful Physical Quantity)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애초에 단위가 없는 무차원수 물리량 (Dimensionless Physical Quantity)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세구조상수(The Fine Structure Constant) 이며 기호 '알파'로 표현되며 그 값은 다음과 같지요

-> 알파 = 1/137.035999679

역사적으로 무차원 물리량과 단위를 갖는 물리량 중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가에 관한 산만한 논쟁들이 있어 왔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듯하고, 이 부분에 단위라는 것이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따라 가는 과정에서 개념적으로 단어의 해석과 관련하여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두 가지 용어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 물리량 계수(Constant of Physical Quantity): 물리량 중에 단위를 배제한 순수한 수

아래 물리량 Q = n* U 에서 단위(U)를 배제한 n이 계수애 해당

-> 물리량(Physical Quantity): '계수* 단위' (Q = n * U) 로 표시되는 량

광속 c = 299792458 m/s 를 예로 들면 n = 299792458 은 순수한 숫자로 위의 물리량 계수에 해당하게 되고, 물리량(c)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미세구조상수, 알파 = 1/137.035999679 는 애초부터 단위(U)가 없기 때문에
계수(n) 과 물리량(알파)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물리량을 나타내기 위해 적용되는 '단위(U)'의 종류는 여러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SI단위계도 있지만, 그 외에도 국가별로 다양한 단위들이 사용되고 있지요.

또한 SI 단위계 하나만 보더라도 7가지 '기본단위'가 있는가 하면 기본단위로 부터 유도되는 유도단위가 함께 사용됩니다.

길이를 나타내는 기본단위는 미터(m)이지만, 킬로미터 km = 10^3 m 또한 널리 사용되고 있고
시간을 나타내는 기본단위는 초(s)이지만, 시(h), 분(m) 외에도 ms = 10^(-3)s 등이 있지요.

수많은 단위들 중에서 어떤 단위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동일한 물리량의 표현이 바뀌지만 본질적인 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없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보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선택된 단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위의 덧글의 마지막 관점을 다시 풀어 쓰면 아래와 같습니다

단위를 배제한 물리량 계수(Dimensionless Constant) 와 단위를 갖는 물리상수(Dimensionful Constant) 중 어떤 것이 선택된 단위에 종속적으로 변하며, 어떤 것이 선택된 단위에 독립적으로 변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아래와 같이 서로 다른 단위로 동일한 광속을 나타내 보겠습니다

-> c = 299792458 m/s --- (1) (선택된 단위: m/s)

-> c = 299792.458 km/s --- (2) (선택된 단위: km/s)

위의 두 식은 모두 Q = n * U 의 형식으로 나타낸 것이고, 이를 계수에 대해 정리해 보면
n = Q/U 와 같이 나타낼 수 있습니다. 즉, 물리량(Q = c)을 단위(U)로 나누어 무차원수 계수 n 이 구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위식 (1) 과 (2) 에 대해 무차원 계수를 정리하면

식(1) -> n1 = c/(m/s) = 299792458

식(2) -> n2 = c/(km/s) = 299792.458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떤 단위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무차원 계수(n)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어떤 경우이든지 단위를 갖는 물리량, 즉 광속(c)의 본질적인 값은 변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무차원 계수는 우리가 선택한 단위에 의해 종속적으로 변할 수 있다
(Dimensionless constant can depend on our choice of units)

-> 단위를 갖는 물리상수는 종종 우리가 선택한 단위에 의해 종속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Dimensionful constant often don't depend on our choice of units)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단위(unit)'라는 것은 자연현상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임의로 정의한 것(artifact)라는 것과 동일한 물리량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단위도 선택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보면 어떤 단위도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고 상호 비례관계를 갖는 다양한 단위들 중에서 단지 선택의 문제라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길이 뿐 아니라 시간단위 시(h), 분(m), 초(s)...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로존;
물리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찾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이 목표가 너무 심오하면 현실적으로 찾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찾은 목표는 사실 허무해지기 쉽상입니다.

뭐 “無다, 空이다, 神이다” 이런 비스무리한 용어 말입니다.

중간 과정의 치열함에 대한 절절한 체험 없이 바로 이거다 하니까 맥이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관찰적인 것이라면 궁극적으로 찾는 목표에서 얻을 수 있는 나침반을 구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되어서 전체적인 그림 윤곽을 상상하는 것이 지 멋대로가 됩니다.

그런데 제로존이 많은 책을 읽으면서 궁극적으로 찾는 목표는 아니지만... 그런 궁극적 목표에 도달해서 과학자들이 궁극적 목표에 대한 그 무엇에 대해서 머리에 그림을 그리고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설득할 수 있는 중간 지대를 콕 집어서 이야기한 물리학자를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물리학자 <데이비드 린들리>입니다.

이 분에 대해서 약력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이처], [사이언스], [사이언스 뉴스]의 편집자로 일했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과 국립 페르미 가속기 연구소에서 이론 물리학자로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 저서로 『물리학의 끝은 어디인가』, 『Where Does the Weirdness Go?』가 있습니다.

여러 번 제로존이 이 저서에서 이 분이 이야기한 내용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서 약간 간격을 가지지만 참으로 핵심과 관련된 최종 그림을 상상하는데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자들이 시도하는 본질적인 목표는 어쨌든 ‘물리량’에 ‘숫자’를 붙이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 숫자들 사이에서 상호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본질적 목표가 숫자들 사이에서 상호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요?

이 분이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여 정식 체계를 밟는 이론 공부도 하고, 또 실험실에서 이론과 또다른 세계에 발을 딛고 보니까 이론과 실험에 대해서 무엇인가 접합할 수 있는 수단을 생각해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물리학자들이 하고 있는 인위적이고 도식적인 짓거리들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결국에는 그가 말하는 바대로 나가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핵심을 콕 찔러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제로존은 <데이비드 린들리>이라는 물리학자가 참 영민한 학자이면서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가 저술한 과학 저서들은 학원가의 강사처럼 분야별 학문이 처해 있는 문제점을 제대로 잘 집어내고 있다고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독서량도 깊이가 있고 그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여하튼, 그가 말하는 숫자들 사이에서 상호관계를 발견하는 것은 결국 수학자들 세계에서 가장 심오하다고 생각하는 ‘수론(Number Theory)’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유가 되기도 합니다.

양자역학에서 악명 높은 행렬역학도 실험데이터에서 계수만 별도로 뽑아내서 이 계수들 간에 상관관계를 수학적 기초와 응용하는 것은 전혀 제로존 이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양자역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행렬역학은 실험데이터에서 발견된 계수는 이른 바, 아는 수로 취급하고, 미지수 x는 구해야할 수로서 잘 구축된 수학적 수단을 강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초기에 행렬역학을 대단히 혐오했지만 나중에는 행렬역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일급 물리학자들이 논문에서 표현해 낸 표기법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늦게서나마 수학의 행렬식이나 행렬에 대해서 별도로 공부해야하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당면 과제가 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물리학에 처음 입문 하는 학생들은 선형 수학을 위시한 별도의 기초 수학을 배우기 위한 커리큘럼을 제공 받는데 여기서 약 90%는 떨어져 나갑니다.

두 손을 드는 것이지요.

여기서 살아남은 10% 중, 약 소숫점 자리의 인원이 외국에 유학을 가서 별의 별 수학과정을 이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수학 기초 위에서 이제 본격적인 물리학 전공 분야로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로 봐서 40대 전후가 됩니다.

여기서 나름대로 고유한 자기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하기는 정말 힘듭니다.

순수한 연구만 하도록 현실 여건이 그들을 결코 그대로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설사 이런 현실적 여건을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에게 가르침을 준 선배 물리학자들이 이미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공을 들여놓은 분야에 구조적으로 접근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맨날 이들 선배가 해 놓은 일들을 뒤치다꺼리 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노벨상을 위시해서 관련된 상은 다들 그런 선배 대학자들이나 선배 대학자들 가까운 제자들에 의해서 독차지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런 세상의 구조적 계층을 한 번에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전혀 지금까지 다른 패러다임을 극적으로 얻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구조적 계층에 발을 담그는 순간, 애초의 원대한 목표는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다는 것을 처음부터 눈치 채기가 쉽지 않을 성 싶습니다.

제로존 이론은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를 어느 날 눈치 채면서 소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한 셈이지요.

문제는 제로존이 왜 이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해야만 하는 당면 목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참 희한하게도 최초 물리학 공부를 하다가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한 이후로 지금까지 물리학자들이 반드시 이수해야하는 골치 아픈 기초수학 과정을 생략해도 좋다는 결론을 뒤 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느냐고요?

제로존은 오래 전에 물리학 공부를 제대로 할 밖에는 선대의 물리학자들이 밟아 왔던 과정 그대로 수학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고 본격적으로 수학의 기초이론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별도의 과외 수업을 받기도 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목표를 쟁취할 수 있는 수단에 대해서 어렴풋이 그림의 윤곽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굳이 BMW나 벤츠, 에쿠스를 타지 않아도 티코를 타더라도 서울만 가면 될 거 아닙니까? 라는 생각, 그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수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했던 경험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논문에 써 놓은 여러 표기법에 대해서 당황하지 않고 무엇을 최종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목표는 <린들리>가 하는 이야기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린들리>의 말을 다시 한 번 들려드립니다.

「물리학자들이 시도하는 본질적인 목표는 어쨌든 ‘물리량’에 ‘숫자’를 붙이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 숫자들 사이에서 상호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하튼 닥삼눈, <린들리>란 분, 직감이 대단하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제로존 이론 또한 계수만을 별도로 뽑아내는 것은 행렬역학과 공통적이지만 이 계수에 단위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물리학이 수학에서 의존하는 수학적 이론으로서 행렬식이나 행렬과 전혀 다른 점입니다.

이제 그야말로 ‘제로존학’이 이 세상에 소개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제로존 가족 여러분에게 외쳐봅니다.

결국 제로존 이론도 물리학에서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으로서 수론의 분야에 나란히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 만큼 제로존은 시간을 아껴 썼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최종 목표에 대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을 얻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수학을 제대로 배운 수학자라 하더라도 단언하건데, 제로존 이론의 개념에 접근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리 물리학을 전공한 전문 수학자들이라도 물리학의 최종 관문에 이르기까지 물리학 그림에 대한 경험이 거의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이 ‘수론(Number Theory)’이군요.

크기와 방향을 가진 벡터라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크기와 방향을 가졌는데도 벡터가 아닌 성질이 있기 때문에 텐서라는 개념이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벡터는 텐서의 특별한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렬식(determinant)이고, 행렬(matrix)이고, 벡터(Vector)고, 텐서(tensor)고, 군(Group Theory)이고 간에 잔말 말고 이 들은 결국 최종적으로는 수론으로 넘어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집니다.

전문 수학자들이 뭐라고 하던 간에 여하튼 잔말 말고 그런 줄 알고 있으면 됩니다.

수론 중에서는 특별히 자연수론이나 정수론이 가장 어려운 분야로 남아 있습니다.

복소수나 실수 같은 세계에서는 수학자들이 융통성을 상당히 발휘할 수 있지만, 자연수론이나, 정수론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는 그야말로 그 세계가 좁고도 좁은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세계에 해당하는 수가 인류가 수의 세계를 상징화 하는데 출발이 된 자연수나 정수일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드디어 제로존은 물리학의 지독한 학습을 머릿속에 간직한 채 수론 속에 몰래 잠입하여 수론의 핵심 정수가 되고 있는 수학 상수가 왜 그러한 상수로 드러나는 가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물리상수와 교묘한 배치를 연구해보게 되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제로존은 어떤 지상의 학자들보다도 이곳에 전념 하는 것에 대해서 한마디로 신이 났습니다.

어느 날, 제로존 이론에 대해서 결정적인 공헌을 할 사람을 모시고 오면 제로존이 제로존의 연구실에서 보여줄 내용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발표를 하지 않느냐고요?

다음 게시할 내용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또 게시할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게시물은 먼저 번 게시글과 관통하여 읽게 되면 제로존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됩니다.

순전히 이런 이야기들은 제로존 이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될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 사는 데에 있어 쌀독에 쌀이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제로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라는 것은 너무나 웃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