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스크랩] 무엇이 바른 명상법인가

자유지향 2009. 10. 17. 04:07

 2000년 10월 21일, 경남 진주 선우선방 법회

 

무엇이 바른 명상법인가


명상법 간택揀擇의 중요성


개개원성箇箇圓成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낱낱의 모든 (하나 하나의) 존재가 본래로 성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바야흐로 어떠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수승殊勝한 명상법이라고 할 것인가. 어떤 방식을 취해야 가장 능률적이고 부처님 제자로서 바른 명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명상법 간택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유교儒敎식 명상법이 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명상법입니다. 유교식은 존심存心이라 하여 우리 마음을 그 중심에다 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주는 이理와 기氣의 합심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기의 근원자리가 태극太極이라서 이 태극이라는 진리의 중심에다가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 유교식의 명상법입니다. 그 외에 기독교 명상법이 있고, 불교 명상법으로서 위빠사나 명상법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명상법은 근본불교의 명상법입니다. 이른바 고苦ㆍ공空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라는 우리 존재의 본바탕을 여실하게 밝히는 명상법입니다. 이것도 굉장히 좋은 명상법이고, 특히 미얀마라든가 태국, 스리랑카 같은 남방불교 쪽에서는 주로 위빠사나를 합니다.


위빠사나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근본불교에서 행하는 훌륭한 명상법의 하나인 것을 말씀 드립니다. 이것은 제법諸法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하다, 제법이 모두 공空하다는 이런 도리까지는 이를 수 있는 명상법입니다. 하지만 일체존재가 개개원성이라는, 모든 존재가 본래로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도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학명상법 즉 단전주, 단전호흡 명상법도 있고 또 아봐타명상법도 있습니다.


아봐타명상법은 위대한 미국인 헤리팔머가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조직 확대를 위해 세계 각국을 돌면서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은 별로 좋은 명상법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마음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연구해서 만든 것인데, 그 사람들은 마음 자체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헤리팔머는 얼굴이 아주 호의적으로 생겼는데, 그 사람이 쓴 글을 보니까 우리 마음이 어떤 것인가, 마음을 개발해서 어느 방향으로 우리 마음을 인도할 것인가, 또 나아가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핵심적인 알짬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성인의 경계로 이끄는 높은 이상적인 가르침이 없어요. 그런 명상법들은 상대적인 하나의 마음을 개발하는 법이지, 부처님 가르침같이 절대적인 궁극적인 가르침이 되지 못합니다.


불교의 명상법, 참선


우리 불교의 명상법은 한 말로 하면 참선법 아니겠습니까? 참선법도 따지고 보면 명상법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원의 문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마는, 참선법은 이른바 삼매법三昧法입니다. 명상이나 삼매나 참선이나 다 그 개념 내용은 비슷비슷합니다. 그래서 참선법을 이야기할 때는, 먼저 이른바 외도선外道禪이라고 하는 정도正道가 아니라 외도로 하는 선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외도명상법입니다.


외도명상법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을 명상하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지고 운수도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세간의 유위법有爲法, 세간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하는 법이 외도명상법입니다.


범부명상법凡夫瞑想法이 있습니다. 이것은 외도보다는 한 차원 더 높습니다. 어떤 것이 범부명상법인가? 그것은 적어도 인과는 믿습니다. 인과법을 믿는다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선을 행하면 당연히 행복이 그 과보로 올 것이고, 악은 악의 업보로 해서 틀림없이 불행이 옵니다. 이런 정도의 인과응보의 범주 내에서 믿는 명상법이 즉 범부명상법입니다.


그보다 더 높은 명상법이 이른바 소승명상법小乘瞑想法입니다. 소승명상법은 어떠한 것인가? 소승명상법은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이 몸이, 자기 존재가 본래로 허망한 존재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적으로도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과거 고전물리학이나 현대 물리학이나, 어떤 면으로 보나 부처님 가르침은 다 상통相通하는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물리학이 여태까지 애써 발견한 결과가, 모든 존재는 본래本來로 비어 있다는 소식입니다.


반야심경은 눈에 보이는 존재든 관념적인 존재든 모든 존재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개공이라는 말에 그렇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적인 존재 뿐 아니라, 자기의 육신 또는 관념, 모두가 본래 존재성이 없단 말입니다.


애써 명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금쪽같은, 이 몸이 소중하고, 보이는 환경도 지금 내가 보는 대로 실존적인 대상이다”고 생각한다면, 참다운 명상이 못 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 법에 따르는 명상법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상대적인 유위법有爲法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한계적인 것이지, 영원한 해탈의 법이 절대로 못되는 것입니다.


일체 존재의 모습은 불확실한 것


부처님의 해탈법이란 영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소승적인 명상법은, 우선 자기 존재가 본래로 존재성이 없다는 것을 믿고, 해탈을 위해 닦는 선입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임시간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입니다. 현대물리학도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각 원소가 그때 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 모였습니다. 우리 마음도 불교에서 말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 감수하고 상상하고 미워하고 분별시비하고, 이런 우리 마음의 부스러기가 잠시 인연 따라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학적으로 심오한 것입니다.


인연 떠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을 다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한순간도 머무름이 없습니다. 몇 억분의 1초간도, 찰라도 머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상입니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에 의하면, 미세한 부분은 측정을 못합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이러한 것은 측정을 못합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가?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고, 정확한 운동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아 이것이다, 저것이다, 의학적으로 어떻게 된다, 인과적으로 어떻게 된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거시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한계에서 그런 것이지, 눈에 안보이는 소립자 단계에서는 측정을 못합니다. 위치와 운동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는 측정을 못합니다. 따라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불확실한 것이 이른바 우주의 일체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입니다.


확실한 우주의 도리는 무엇인가?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성자聖者의 법, 부처님의 법은 확실합니다. 부처 불자(佛), 성품 성자(性) 이것이 불성입니다. 우주의 도리이기 때문에 진여眞如입니다, 그 자리는 다만 하나의 도리에 그치지 않고, 바로 우주의 생명, 우주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불성이란 뜻입니다.


현대 물리학이라는 과학적인 학문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의 모양이 있고, 모습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비었다, 이런 소식까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이 비어 있는 저쪽은 무엇인가? 이것은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자의 투철한 깨달음의 안목에서만이 불성 자리는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명상법大乘瞑想法은 무엇인가? 소승명상법에서 비록 자기 존재의 허무성이나 자기 존재가 한 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 일체 만유는 무엇인가, 자기 존재는 그렇다 하더라도 달이나 해나 이런 일체 만유는 있지 않는가? 산천초목은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단계는 아직은 소승적인 단계인 것입니다. 


대승명상법은 비단 자기 존재만이 아니라, 대상적으로 느끼는 산하대지ㆍ삼라만상ㆍ해ㆍ달, 그 어떤 것도 존재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는 법입니다. 존재성이 없습니다. 오온개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온개공이 되어야, 내 몸뚱아리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 모두가 본래 비어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대승의 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만으로 아는 것은 철학적으로 아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가 증명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증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하는 명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명상이 있어야 실지로 체험합니다. 명상이라는 말이나 삼매라는 말이나 참선이라는 말이나, 개념적인 내용은 우리 마음을 맑혀서 본래 마음 자리로 돌아가는 공부방법입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차원 높은 명상법을 해야 불자로서의 자긍심으로 보나 책임으로 보나 되지 않겠습니까?


차원 높은 명상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보통 명상법도 어려운데 그렇게 최상승最上乘 명상법을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최상승 명상법이 제일 쉽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느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상의 명상법이, 사실은 제일 쉽고 우리에게 행복을 보장하고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에도 이익이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이익이 있고 재미도 한량없는, 또는 하기 제일 쉬운 법을 우리가 마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자의 법은 따지고 보면 간단명료합니다. 조금도 찌꺼기가 없습니다. 우주가 생긴 대로 우리 믿음이 생긴 대로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존재는 본래가 개개원성이라, 본래로 원만히 성취되어 있습니다.


우리 존재란 것은 우리가 애쓰고 닦은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이대로 본래로 모두 다 부처입니다. 잘나나 못나나 지체부자유자나, 또 사람뿐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나 식물이나 모두 개개원성이라. 그 존재 자체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원만히 성취돼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우리가 종교를 공부할 때는 실천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철학적인 것이 따릅니다. 화엄경이나 능엄경이나 법화경이나 모두가 최고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 가르침을 꼭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이 갖고 있는 본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몇 만생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서 윤회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은 본래 모습으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본래 모습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한결 같이 부처가 됩니다. 그러기에 열반경에서도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체중생 개당작불一切衆生 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이 필연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상할 때, 우리의 마음 자리는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 같이 업장 많은 사람한테도 진여불성이, 우주 불성이 가득 충만해 있다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하고 겁을 내지 마십시오. 우리 생각 가운데서 무슨 생각이 가장 고귀한가 하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방편이 없는 진실한 말씀을 하신 그 자리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입니다. 그것이 생각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생각입니다.


그 무슨 명상법, 무슨 명상법 해서 별별 명상법이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 스님네들도 거기에 빠져 가지고, 승복 입고서 거기에 다닌다고 하는 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참 비참한 일입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도 소중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찮은 자갈쪽 같은 것과 바꿀 것인가 말입니다.


대승명상법은, 내 존재뿐만 아니라 우주의 일체 존재가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상함을 가르쳐 줍니다. 무상이란 말에 들어있는 의미가 굉장히 소중합니다. 무상이란 말속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다는 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부처님의 안목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성이 없습니다. 존재성이 없는 것은 일정한 시간 내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따라서 일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어느 위치도 점유하지 않으니,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다 그렇습니다. 내 몸이고 내 관념이고 다 그렇습니다.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어디에서도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 위치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인식이 되어야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간성 공간성이 없다는 것은, 결국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그러한 혜안慧眼, 곧 부처님의 투철한 안목은 2천5백 여 년의 사이에도 만유萬有의 진상을, 참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부처님 명상법 같이 수승하고 위대한 명상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유위법적인 상대적인 명상법에다가 우리 마음을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2천5백 년 동안에 무수한 성자가 나와서 다 증명하고, 달마를 거쳐 육조 혜능스님까지 그대로 고스란히 전수한 법이 아닙니까? 삽삼조사卅三祖師(33조사)가 계계승승繼繼承承 가감이 없이 이어온 대승명상법입니다. 이런 법은 기간이 없습니다. 영원히 갑니다.


최상승 명상법은 우주가 다 하나의 생명임을 증명합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 중생이 중생심으로 보니까 나는 나 다르고 너는 너 다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가정을 구성할 때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어떠한 마음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가정을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다 부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가정화합의 묘결妙訣은 없습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집니다. 자기 친구를 부처님 같이 대접하는 것, 그 보다 더 깊은 우정은 없습니다. 또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 같이 생각하고, 서로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는 단계는, 아직 이론적인 깨달음이지요. 그러나 참말로 어느 때 어느 순간에서나 부처님 같이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른바 명상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근원 자리를 증명해야


명상을 체험할 때, 우리 마음이 맑게 닦아지고 생리가 바꿔집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분명히 우리 생리를 고치어 달라지게 합니다.  욕심이나 진심瞋心으로 찌든 우리 지수화풍 사대가 청정한 사대 광명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사대로 바꾸어지니 말입니다. 바꾸어지니 우리 마음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몸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뚱아리도 거기에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건강한 법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명상법, 불교적으로 말하면 최상승선이지요.


우리 불자님들 뜻을 굳세게 해서 육조단경이나 달마스님 어록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을 근원적인 데다 두십시오. 화두를 왜 듭니까? 가령 ‘이뭐꼬’ 화두를 든다고 합시다. 끝끝내 ‘이뭐꼬’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두를 빨리 타파하라는 것입니다. 타파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화두를 타파해서 진여불성 자리, 생명의 근원 자리를 우리보고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달마대사 어록을 보면, 우주의 순수 에너지와 내 마음이 본래로 둘이 아닙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그럽니다. 안심법문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마음이 편안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이 가장 편안하겠습니까? 그것은 내 마음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동시에 내 마음의 근원되는 우주의 생명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서, 그것이 둘이 아니고 원래 우주 자체가 모두 다 하나의 생명 뿐이다, 하나의 부처님 뿐이다, 이렇게 알고 느낄 때입니다. 이것이 다시 말해 안심법문입니다.


우리가 기왕이면 가장 고도한 차원의 명상을 해야 할 것인데 가장 고도한 차원의 명상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존재의 실상을 보고서 실상을 그대로 느끼고서 실상을 여의지 않는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하나의 불성입니다. 진여불성에다 우리 마음을 두어야 비로소 우리 주체성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자기 소외다, 스트레스다, 요즘 별스러운 말로 불안스러운 우리 마음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마음의 의지처가 확실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어디다 붙일 것인가?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데다 우리 마음을 붙인다고 생각할 때는 항시 불안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은 결국 다 변하고 마는 것이니까, 그 무상한 허망상대에다 우리 마음을 붙이면 절대로 우리 마음이 안정이 안되고 참다운 명상이 못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주는 한량없는 기쁨


참다운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불멸의 우주에 존재하는,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주체성이 확립되는 것이고, 동시에 그런 공부를 해야 최상의 명상법이 되는 것입니다.


명상을 바로 한다고 할 때는 경안輕安이라, 불교말로 하면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을 닦아 나가면 거기에 따르는 기쁨이 나옵니다. 또 명상을 하다 보면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이 무한공덕장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 그 기쁨이 한량 없습니다.


명상을 할 때는 기본적인 자세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우리 욕계 중생은 음식 때문에 굉장히 오염되어 있습니다. 저 색계만 올라가도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생사윤회하는 중생만이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색계나 무색계는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래는 다 부처인데, 음식을 무던히 좋아하니까 색계도 못가고 무색계도 못가고 욕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그야말로 절묘합니다. 예컨대 모든 계율을 지키는 것은 우리 명상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절대로 많이 드시지 마십시오.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몸만 무겁고 찌꺼기만 많이 생깁니다. 오래 사는 비결은 책마다 소식하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법은 어느 면으로 보나, 즉 계율로 보나 선정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모두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성불의 3대 강령이 계ㆍ정ㆍ혜 삼학이지 않습니까? 계율 지키고 명상을 깊이하여 참선 염불하고 지혜로써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써 앞으로 깨달아서 증명한다 하더라도, 깨치기 전에 먼저 이치로 알아야 합니다. 이치로 아는 것은 천지 우주와 모든 것이 모두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이치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명상해서 우리가 그 자리를 체험해야 합니다.


인간 생활을 더욱 정화시켜야


부처님 당시에는 육재일六齋日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누가 육재일 말도 안해요. 육재일이란 것이 원래 8, 14, 15, 23, 29, 30일이라 해서 한 달에 여섯 번 하는 것인데, 육재일 날은 하루에 한 끼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육재일에는 일종식하고 고기도 안먹고 술도 안 먹어야 됩니다. 부부 생활도 그때만큼은 청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인간생활을 보다 정화시켜야 합니다. 우리 인간생활을 영원으로 차근차근 이끌어 가야지요.


부처님 법은 우리한테 최상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르침이고, 사회적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최선의 가르침입니다. 그러한데서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지금 모든 철학이 부처님 지혜를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바 제법이 공이라는 그 자리까지는 현대과학도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공의 알맹이는 무엇인가? 생명자체는 무엇인가? 이것을 모른단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 아니면 알 턱이 없습니다.


기독교 역시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하늘이라는 것이 당시 하늘 어디엔가 계시는 사람 같은 모양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의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성자의 가르침만이 눈에 안보이는 세계, 눈에 안보이는 생명 자체를 그대로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둬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는 것이 참다운 명상이고 참다운 종교인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외도가 하는 명상이라든가 범부가 하는 명상이나 소승의 명상을 떠나 최상승 명상법으로 닦으셔서, 다시없는, 위없는 경계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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