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rk of your ignorance is
the depth of your beliefs in injustice and tragedy.
What the caterpillar calls the end of the world,
the master calls a butterfly.
당신이 무지(無智)하다는 표시는
불의(不義)와 비극에 대한 당신 믿음의 깊이이다.
애벌레가 세상의 종말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혜로운 자는 나비라고 부른다.
[리차드 바크 / 환상]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은
'나'와 '우리'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서 나온다.
그것이 본연의 모습을 가려버린다.
내면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결국 자신을 고통 속에 가두고 만다. 간단한 이치이다.
내가 진정 누구인지 모를 때
나의 아름답고 성스러운 존재를 대체하기 위해 생각이 만들어낸 자아상에 매달리는 것이다.
두려움과 욕망에 지배당하는 자아에.
이제 그런 잘못된 자아상을
보호하고 치장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된다.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의 구조 속에는
이미 자신의 참모습을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는 말, '나의 삶'이라는 말 속에는
마치 삶이나 생명이 소유하거나 잃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나는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생명이다.
우주 전체에 충만한 '한 생명' 또는 '한 의식'이 잠시 한 형태를 취하여
돌맹이로, 풀잎으로, 동물로, 인간으로, 별로, 은하계로 체험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껴보라.
당신은 이미 그것임을 느낄 수 있는가?
과거나 미래에서는 나를 찾을 수 없다.
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구도자들은 깨달음과 자기실현을 미래에서 찾는다.
구도자가 된다는 것은 미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진실이 된다.
다시 말해서
본연의 당신이 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그 순간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은 말한다.
'나는 자신을 알고 싶어.'
하지만 당신이 바로 '나'이다.
당신이 바로 앎이다.
당신이 바로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알려지는 순수의식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스스로를 알 수는 없다.
그것은 다만 그 자체일 뿐.
그 이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앎은 다 그것에서 나온다.
'나'는 그것 자체를 지식이나 순수의식의 대상으로 만들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어떠한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에고적 정체성이라는 착각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미 당신은 마음에서 당신 자신을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당신은 말한다.
"그게 나야."
그리고는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남들과 당신 자신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인간의 체험이란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가.
인간의 삶은 얼마나 잠깐인가.
이 세상에 탄생과 죽음을 벗어난 것, 영원한 것이 있는가?
다음을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 만약 한 가지 색, 예를 들어 파랑만 있다 하자.
전 세계가 파랑이고 그 안의 모든 것이 다 파랑이라면 그때 파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랑을 파랑으로 인식하려면 파랑이 아닌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파랑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의 무상함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무상하지 않은 것,
잠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나를 비롯해 모든 것이 다 무상하다면 나는 무상을 알 수나 있겠는가?
나를 포함한 모든 형상이 짧은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내가 알고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내 안에 해체되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20세에는
내 몸이 튼튼하고 활력 있음을 안다.
60세에는 내 몸이 약해지고 늙었음을 안다.
나의 생각 역시 20대 때와는 달라졌을 수 있다.
하지만 내 몸이 젊거나 늙었다고 아는 마음,
내 생각이 변했다고 아는 맑은 마음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 맑은 마음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원이다.
순수의식이다.
형상을 벗어난 '한 생명'이다.
나는 그 것을 잃을 수 있는가?
아니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법칙이란 무엇인가?
어둠이 어둠을 물리칠 수 없듯이, 증오는 증오를 없앨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증오를 물리친다.
이것이 법칙이다.
오직 빛으로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
사랑은 그대 존재의 빛이요, 증오는 그대 존재의 어둠이다.
그대 안에 어둠이 가득하면 그대 주변을 증오로 덮을 것이고,
그대 안에 빛이 가득하면 그대 주변을 그 빛으로 환히 비출 것이다.
영원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사랑만이 증오를 쫓아내며 빛만이 어둠을 이긴다는 것이다.
왜냐고?
어둠이란 본질적으로 부정적 상태라서 자체의 긍정적 실존이 없다.
어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어둠을 상대로 직접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어둠을 상대하려면 빛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물러나면 어둠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대가 직접 어둠을 끌어들이거나 물러가게 할 수는 없다.
증오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과 종교적 신비를 가르치는 스승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은
"어둠과 싸워라. 미움과 분노와 성욕과도 싸워라.
이것과 싸워라. 저것과 싸워라"고 말하면서
잘못된 법칙을 계속 주장한다.
그들의 가르침은 온통 '부정적인 것과 싸우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스승은 그대에게
긍정적 법칙, 즉 영원의 법칙(Eternal Law)을 가르친다.
그들은
'어둠과 싸우지 말라'고 가르친다.
증오도 어둠이고, 성욕도 어둠이고, 시기심도 어둠이고,
탐욕과 분노도 어둠이다.
빛을 끌어들여라.
어떻게 해야 빛이 들어오는가?
고요하게 사념을 비우고,
의식적이 되고, 경계하고, 자각하고, 깨어 있어라.
이것이 빛을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그대가
자각하고 깨어 있는 그 순간에는
어떠한 미움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각성 상태에서 남을 미워해보라.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해보라.
지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실존적인 체험을 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그대는 의식적으로 남을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의식이 사라지면 그대는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지만,
그대가 의식적이 되면 증오는 사라진다.
그 둘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
빛과 어둠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
어둠이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둠이란 빛의 부재일 뿐이다!
[오쇼 라즈니쉬]
그대 자신이
무한하고 순수한 참자아임을 알라!
그대는 항상 참자아이며, 그외의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대 자신이 참자아이기 때문에, 그대가 참자아를 모른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대가 참자아를 모르는 것은 진짜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고 착각하는 무지일 뿐이다.
진정한 지혜는 그대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대의 무지만을 제거한다.
깨달음을 얻으면 그대의 본성에 지복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본성이 이미 지복이며,
깨달음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그대의 슬픔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참자아를 알고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도달해야 할 목표라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새로 얻을 게 없다.
그대가 곧 참자아이다.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
참자아는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라고 하든지 참자아라고 하든지,
그것은 모두 그대의 참자아, 혹은 진정한 그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참자아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마치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이 이곳으로 가는 데에는 어떤 길이 있으며
그 중에 어느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그릇된 생각과
외적인 대상을 실재로 착각하는 무지만 버리면 된다.
즉 '참자아가 아닌 것'들만 제거하면 된다.
에고 의식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무상한 것이다. 반면에 참자아는 영원하다.
그대는 실제로는 참자아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에고를 참자아인 것으로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에고ego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느끼는 그 괴로움이라는 것도 그대의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모두 에고 의식 속에만 존재한다.
무지는 에고에게만 있다. 에고를 없애면 무지는 저절로 사라진다.
먼저 에고를 없애는 데 주력하라.
에고가 없어지면 참자아만 남는다.
무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전들도 무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에고라는 게 있다면 그대가 둘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에고는 없다. 그러니 무지 또한 없는 것이다.
무지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지는 에고의 부속물이다.
에고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지도 않는 무지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은 실재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지라는 전제 위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무지는 에고의 무지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참자아에 대한 망각이 곧 무지이다.
그러나 햇빛이 비치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빛을 발하는 참자아 앞에는 무지가 없다.
그러므로 참자아를 깨달으면 모든 어둠과 무지와 슬픔은 저절로 사라진다.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다.
어둠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태양이 빛나는 곳에는 어둠이 없다.
참자아의 빛 속에는 무지가 없다.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
너희는
너희 몸 속으로 불어넣어진 생명의 정수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이것이 중심적 진실이다.
이 진실 주위에 인간이 체험하는 다른 진실이 있으며,
만일 너희가 수천 년 동안 너희 행성을 괴롭혔던 폭력, 파괴, 살인의 순환을
영원히 겪지 않고자 소망한다면, 이러한 진실들이 지금 회전되어야 한다.
너희는 몸이 아니다.
너희는 한계가 없고 끝이 없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너희 세계의 더 새로운 건축은 여기서 시작한다.
새로운 영성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너희는 몸이 아니다. 너희는 한계가 없고 끝이 없다.
너의 몸은 네 것이지, 네가 아니다.
몸은 너희가 사용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몸은 도구다. 고안물이다.
특정한 영향을 받았을 때, 특정한 자극을 받았을 때,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메커니즘은
다치거나 상하거나 파괴될 수 있으나 "너희"는 그럴 수 없다.
이 도구는 완전히 작동 불가능한 상태로 될 수 있지만, 너희는 그럴 수 없다.
이 고안물은 작동을 멈출 수는 있으나,
너희는 그럴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몸이 너희를 쥐고 있으며
너희의 정수를 담고 있는 집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생각일 뿐이다.
─
영혼이라고 불리는 생명의 정수를 담고 있는
집으로써의 몸이라는 생각, 그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몸을 집처럼 담고 있는 것은 영혼이다.
너희 영혼은 너희 몸 안에 살지 않는다. 그 반대다.
너희 몸이 영혼이라고 불리는 힘의 장(force field) 내에 살고 있다.
몸이 에너지 장(場) 내에, 우주적 영의 공간화 된 표현 내에,
즉, 바로 너희의 정수 내에 살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시공간적으로 결코 끝나지 않는 에너지다.
너희는 다른 사람의몸이
소위 "죽는" 걸 보았기 때문에 너희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희는 죽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
왜냐하면 너희는
죽음이 자신의 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몸이 "죽는다"는 너희의 관찰(즉,몸의 기능이 정지하는 것)은 정확하다.
그러나 '너희가 몸이다'라는 생각은 정확하지 않다.
바로여기가
너희가 혼란스러워 하는 대목이다.
바로 여기가 너희의 두려움이 시작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너희가 지구상의 삶에서
집단적으로 창조하고 경험한 모든 공포의 원천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혼돈이 끝날 때이다.
지금은 너희가 지구에서 지옥 만들기를 그만둘 때이다.
너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할 것이다.
지옥 만들기를 그만두기, 혹은 최대의 공포를 만들기다.
후자는 지구에서 삶의 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권한다.
너희의 삶을 끝내지 말고, 너희의 혼돈을 끝내라!
[신과 나눈 이야기 - 새로운 계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