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스크랩] 가슴이 노래 부르게 하라

자유지향 2008. 12. 14. 15:14

 [도서] ‘가슴이 노래부르게 하라’에서

저자 자니 킹 | 역자 김선미 | 출판사 히어나우시스템

 

 

가슴이 노래 부르게 하라

 

1. 가슴이 노래 부르는 소리

 

안녕하세요. 여러분. 인류는 원래 별에서부터 왔습니다. 당신들의 시간 훨씬 이전에, 당신들의 역사가 시작되기도 이전의 먼, 먼 옛날, 별에서 온 사람들이 당신들 행성에 씨를 뿌렸지요. 그 이후로 씨를 뿌린 사람들은 인류를 멀리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수 백만 년에 걸쳐 수많은 왕래가 있어왔지요. 여러분들의 옛날 책들을 보아도 인간과 그 별 사람들의 멋진 만남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습니다. 소위 신화가 되어버린 그 이야기들을 보면, 그 별나라 사람들이 신으로 떠받들어지곤 했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여러분이 신이 아닌 것처럼, 그 별나라 사람들도 신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 별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이 신성의 표현이란 걸 알고 있는 반면에 인간들은 잊어버렸다는 것뿐이죠. 이 행성의 인간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국면이 실은 신성의 표현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의 대부분은 몸을 받아 태어난 이번 생이 오직 한 번뿐인 삶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믿든 믿지 않든 윤회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요즘 들어 일부 종교에서는 윤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소위 우주적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 교리가 적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동양의 종교들은 윤회를 언급하면서 이번 생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다음 생에 그 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벌이라고 하면 으레 심판을 떠올리지만, 사실 여러분의 마음 밖에서 여러분의 됨됨이나 행위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이는 결코 없습니다. 우주적 심판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걸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걸 이해해야만 더 깊이 있는 이야기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여러분 자신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고대 종교들이 소위 삶의 수레바퀴라고 이름 붙였던 윤회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되풀이되는 삶이란 어쩌면 수레바퀴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영혼에너지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자신의 신성에 대해 알고 있는 그 영혼에너지는 개인으로써의 삶을 살다가 때가 되면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식으로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의 실타래를 이어가는 것이지요.

전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참 재미있습니다. 자신이 전생에 누구였는지, 그 됨됨이는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흥미로워 합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여러분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하던 말던 여러분은 모든 인간의 모든 국면이었습니다. 당신은 전생에 클레오파트라였다든가, 나폴레옹이었다고 말해주면 사람들은 매우 행복해 합니다. 안 그런가요? 하지만 누군가 의의를 달고 나옵니다. 그건 불가능해 사실은 내가 클레오파트라였거든.

진실을 말하자면 클레오파트라가 아마도 수천 명은 존재할 겁니다. 그들 모두 클레오파트라라고 알려진 존재의 영혼에너지 중 일부인 거죠. 개체로서는 클레오파트라를 경험한 사람은 한명 뿐이지만 전체로서의 영혼에너지는 클레오파트라를 경험한 셈이 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각 분신들이 근원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면서 각각 흩어지게 되고, 그렇게 윤회의 수레바퀴는 계속되는 겁니다. 그러니 클레오파트라가 점점 더 많아지게 되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모든 사람은 하나의 일부분입니다. 분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존재해왔던 모든 것이고, 그것이 곧 여러분인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한 인격체로 성장하여 사회에 편입할 때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개성과 자신이 선택한 가족의 상황에 적응해갑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미 자신의 내면에 인류의 모든 것, 인류의 모든 국면을 통합해 나아가는 겁니다. 당신들의 겉사람은 사실 당신들의 속사람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일 때 당신들은 인류의 집단 의식에 첫발을 내딛게 되고, 그리하여 점차 당신들의 문화와 국가와 인종에 공통되는 신념체계 속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여러분도 발 아시다시피, 신념체계는 국가마다, 지방마다 서로 다릅니다. 공통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들이 별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판단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속사람마저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성인이 될 무렵에는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버립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참모습을 바라보기가 그렇게 고통스럽고, 그래서 당신 자신의 겉가죽에다 그러한 판단을 투사 시켜 버립니다.

진실로 알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수백만, 수천만, 수억, 수십억의 인간 얼굴이 있지만 당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의 얼굴은 없습니다. 희생자였던 적도 있고 가해자였던 적도 있습니다. 당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당신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본래 위대하고 강력한 에너지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또 자신이 얼마나 경이롭고 창조적이며 다차원의 존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제 당신들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위대한 변화의 시기입니다. 당신네 지구에 주기적 변화가 있듯이, 인류의 의식 또한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에 가득 찬 시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은 당신들이니, 당신들 자신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변화를 창조할 수도 있고, 사랑으로 변화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변화를 창조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행성의 황폐와 파멸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현실을 창조하는 건 바로 당신이고, 멋진 낙원을 창조하는 것도 자신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용기와 사랑을 지닌 채 나아간다면 그땐 진정으로 파멸을 맞지 않게 될 것이고,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음을 진정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다차원적 존재라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은 아마도 다른 시간대 따위로 이해하려 드실지 모르지만, 당신들이 의식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여러분의 지구 차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지구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삶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정 불변의 상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은 존재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차원이 있고,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 우주의 중심 태양입니다.

당신들 각자가 당신들 자신의 우주를 창조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 드리자면, 당신들이 당신들의 삶에 끌어들인 모든 사람들과 공동 창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행성은 풍요롭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당신들이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어떻게 이런 마술 같은 일이 가능 하느냐고 의아해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이런 마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 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당신들은 매일 그 마술을 실현시키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풍요로움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은 그 모든 걸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또 한 가지 여러분이 이해해야 할 사실은, 당신들 행성에는 두 가지 표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표현과 두려움의 표현. 사랑의 표현과 거기 따르는 온갖 경이로움 표현이 아닌 모든 것은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당신들은 언제나 이 두 갈래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합니다. 무슨 일이 닥치든 사랑의 길을 선택할 수도, 두려움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질문)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말은, 당신과 삼라만상이 동일한 근원의 일부분이라는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한계를 느끼고 살고 있고,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 근원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죠.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고 있는데 여러분의 겉사람은 그걸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든 지식, 모든 앎은 여러분 각자의 내면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저마다 무척 바쁩니다.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허둥대고, 깨달음을 찾아 헤매느라 바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주어진 모든 말, 모든 지식의 파편은 지나칠 정도로 충분합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모든 스승들이 말한 문서의 내용은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모든 것은 내면에 갖추어져 있다고..

이제 여러분의 의식이 확장됨에 따라 여러분은 마치 내면에 라디오 안테나가 세워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깨우침이 깊어질수록 안테나는 더욱 더 폭넓게, 더욱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 속 컴퓨터는 더욱 더 정교해질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 밖으로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은 여러분의 본성 안에 있습니다. 당신들 행성의 자연적 유산에 마음을 쏟으면 쏟을수록, 당신의 정원, 당신의 창조물들, 당신의 바다, 당신의 하늘, 당신의 계절, 이런 것들에 마음을 쏟으면 쏟을수록 당신은 더욱 더 이 세상의 리듬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것이 곧 당신들의 참세상이지요.

자신의 육체와 사이 좋게 지내면 지낼수록, 육체와 마음 사이의 분리감이 줄어듭니다. 자신의 물리적 신체, 당신의 몸의 구조가 실은 우주의 축소판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몸에 병이 생겼다면, 그것은 당신이 감정적으로 불편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물리적 현실은 다 마음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조화를 이루면 이룰수록 당신은 당신의 육체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깨우침에 발을 들여 놓음으로써 당신은 당신 자신의 본래 모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되찾기 시작하는 겁니다. 전체로서의 진정한 로 통합되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러한 깨달음에 파장을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깨달음을 빨리 여는 방법은 없나요?

 

깨달음은 느린 걸음으로 다가옵니다. 정말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의식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당신이 찾으면 찾을수록, 허둥대면 허둥댈수록, 더욱 더 늦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 행성에서는 만사가 그러하듯, 깨달음에 대한 생각도 매우 이분법적입니다. 여기서부터 깨달음의 영역이라는 그런 구분은 애당초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삶이라는 강물의 흐름과 더불어 진행됩니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큰 협조자는 웃음입니다.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웃으십시오. 자기 자신에 더 진실해지세요. 깨달음이란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습니다.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잘못된 결정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배우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여기 온 까닭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찾아 헤매면 헤맬수록 더욱 더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의 여인(자니 킹-저자)이 멋진 말을 하더군요.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갖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지,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삶이란 즐거운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웃으십시오. 달빛아래 벌거벗고 춤추십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더 좋아합니다. 당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십시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교감을 즐기십시오. 깨달음에 대한 걱정일랑 집어 던져 버리십시오. 깨달음에 대해 걱정할수록,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더욱 더 거기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당신은 신성의 표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이미 깨달은 존재입니다. 당신이 잊고 있을 뿐입니다.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판단하지 마십시오. 벗들이여, 판단하지 마십시오. 저 위에서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지켜보는 신 따위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노인이 되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신의 개념과 더불어 성장한다고. 이러한 신화를 내팽개칠 만큼 지적으로는 성숙했을지 몰라도, 당신들 모두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저 구름 위에서 자신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신의 이미지가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내가 하늘을 다 헤집고 다니며 살펴보고 또 살펴보았는데, 그런 신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 자신이야말로 위대한 신이요, 여신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진정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린 기억상실증에 걸려 고통 받고 있이잖아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얇은 베일에 불과합니다. 이제 당신들이 할 일이라곤 (장난치는 고양이를 가리키며) 저기 저 고양이처럼 되는 일입니다. 신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완벽하고 멋진 저녁을 보내고 있는 저 사랑스런 창조물처럼 되는 겁니다.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은 그럼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시죠?

 

아무런 판단 없이 그렇게 합니다.

 

두 갈래 길이 있다면 어떻게 하죠? 아무런 판단 없이 어떻게 선택할 수 있지요?

 

가슴이 노래 부르는 대로 따르십시오. 당신은 이미 사랑이 가득한 고향에 있는데, 어떻게 잘못된 결정을 내리겠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가슴이 노래 부르는 대로 따르십시오. 물론 빗나간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은 가슴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고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가서 달리 결정하면 됩니다. 한번 내린 결정을 영원히 따를 필요는 없는 거지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은 항상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거구요.

가슴이 노래 부르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사회적인 의무나 책임을 회피하게 될 거라고 걱정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쁨과 행복의 길을 따를 것인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길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사람들 마음 안에만 있습니다. 분별력을 없애버리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당신은 분별할 수도 있고, 나는 이 편으로 이끌린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판단이란 사실, 당신이 어떤 것을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이여, 가슴을 따라가십시오. 잘못된 결정이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당신이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은, 당신들의 두려움이 빚어낸 결과물일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 그 사람의 행동을 놓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될 때, 진실로 이것만은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당신 됨됨이의 반영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자질을 본다는 것은 실제로는 자신의 일부를 보는 것이라는 그런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자, 이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삶에서 삶을 건너뛰며 살아온 모든 생애, 수천 년, 수십만 년 동안 여러분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살해 당한 자이기도 했고, 살인자이기도 했습니다. 정복당한 자이기도 했고, 정복자이기도 했습니다. 노예이기도 했고 노예를 부리는 자이기도 했습니다. 강간자이기도 했고, 강간의 피해자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이 되어 보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점을 잊지 마시고, 사랑이나 연민이 아닌 행동 뒤에는 고통과 번뇌, 그리고 깊디 깊은 두려움의 수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번 생애 동안에도,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여러분 자신은 알고 있는, 특별히 마음에 끌리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벌할 심판자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스스로 존재하는 신/여신의 생각으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여러분 존재의 모든 국면은 신의 표현입니다.

 

뜻을 품고 어떤 것을 실현시키고자 해도 이루어질 때가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씌어진 글도 많고 말도 많더군요. 여러분은 확신을 가지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실로 원하는 바를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감정이 배어들어간 그 생각 자체를 껴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마음 깊은 곳의 신념체계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현실을 지어내는 것은 당신의 신념입니다. 무엇인가를 갈망하는데 그것이 실현되고 있지 않다면, 종이 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적어보십시오. 당신이 무얼 믿고 있는지도 적어보세요. 매우 놀랄 것입니다. 원하는 바를 마음속에 그리고 그 생각을 껴안으면, 생각은 현실이 되어 나타납니다. 현실은 믿음이 지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들, 그것이 당신의 현실을 짓고 있는 벽돌들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바닥이 견고하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벽 또한 견고해서 벽을 통과해서 걷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지만 사랑하는 이여, 벽은 견고하지 않습니다. 당신과 인류의 대부분이 그렇게 믿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구가 견고하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딛고 서 있는 땅 밑에서는 위대한 문명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당신네 과학자들은 지하 수 킬로 미터를 탐사해 보고는 지각이 견고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네 지구 속에서 살고 있는 문명은 또 다른 시공 연속체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거기 존재합니다. 지구는 진실로 딱딱한 게 아닙니다. 지구의 속도 아닙니다. 당신들의 모든 현실은 유동적입니다.

인류가 지닌 신념, 인류가 짜낸 구조물 역시 진화를 합니다. 우리는 사실상 당신들 수준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종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인식하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나 힘을 갖습니다. 힘을 갖지 않은 생각이란 결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힘을 갖고 있으며, 만물은 신성의 표현입니다. 당신이 옳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일수록, 당신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 힘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건 두려움과 마찬가지 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입니다.

인류는, 생각이 머리 속에만 있고 머리 밖에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은 에너지 파장입니다. 생각은 소위 전자기적인 파장을 갖고 있어서, 무엇이든 자기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우주는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우주 속으로 발사하면서, 당신은 자신의 현실을 공동창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러이러한 것을 원한다는 생각을 감정과 함께 내보내면, 전우주가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 재배열합니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비슷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이 세상에 우연한 사건은 없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창조된 것입니다. 함께 공동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사람이 있겠지요.

한 아이가 차에 치어 죽었다면 그건 사고가 아니고 무엇인가?

굶주림으로 죽게 될 아이들은 스스로 그걸 원했단 말인가?

물론 그렇습니다. 경험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란 엄청난 망상입니다.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한 생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천, 수백만 생애가 있고, 이 시공 연속체 밖에서는 그것들 모두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한 장의 종이 위에 선을 그리듯, 생애도 그렇게 그려진 것이라고. 소위 영혼에너지라 불리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삶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그 모든 것을 언제나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오직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수많은 생애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당신들의 입장으로선 몹시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신들의 의식 상태로는, 당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간 개념을 상상하기조차 벅찰 것입니다. 사실 다른 행성계나 은하계에도 시간 개념은 존재하지만, 여러분이 느끼고 아는 것과는 성질이 다릅니다. 다른 별 사람들은 당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마음대로 오가며 여행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당신들의 미래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 묻지는 마세요. 우리는 점성술사가 아니니까요. 진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당신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여자)내가 하는 모든 생각이 나의 미래를 창조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 미래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면 나의 미래도 바뀔 수 있겠네요?

 

바로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매우 다양한 현실을 갖게 되겠네요. 모든 현실은 저마다 존재가치가 있으므로, 내가 다른 사람의 현실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나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 신의 자녀로서의 내 역할인가요?

 

진실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이 미래라고 부르는 것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의 어느 시점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이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 길을 선택할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한 젊은이가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다고 합시다. 그는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합니다. 젊은이는 청혼하기 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결혼하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녀를 몹시 사랑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세계 여행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는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 자유롭게 노래 부르고 춤도 추고 싶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그게 불가능할 것임을 압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가슴 속 바람들을 이리저리 저울질해 봅니다. 그리하여 갈등 끝에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삶을 작동시켜 놓은 셈입니다. 다른 삶에 대한 바람도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표면의식이 이 모든 현실을 위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초점이 정교하게 잘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의 삶과 현실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과 현실은 딱딱하게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그러하듯, 당신 또한 수천, 수백만의 존재 가능한 현실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요술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어떻게 변하든 각각의 마음은 저마다 유효하지요.

장차 다가올 소위 3차원에서 4차원으로의 변화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어떠한 변화가 닥칠지 두려워하고, 그 변화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 변할지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영적인 진보가 자기보다 더뎌서 3차원에 남아 있는데 자기만 4차원의 세계로 옮겨가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고정불변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의 지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4차원의 지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미 모든 차원이 존재합니다. 지구가 멸망하여 모든 것이 종말이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종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변화의 시간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안개의 베일 속을 부드럽게 통과하는 것 같은 변화일 것입니다. 대학살이 있을 필요도 없고, 대재난이 있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분명 점진적인 변화가 일을 것이고, 당신들도 이런 변화를 일부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건 일종의 경이로운 느낌임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 안에 내재하는 위대한 신성으로의 변화 말입니다. 경이로움은 기쁨을 불러 일으키지요. 그리하여 당신은 죽은 자를 위해 조사를 읽을 때에도, 죽음이란 선택이었음을, 죽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란 경험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종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앞선 어느 생에선가 저 고양이, 저 나무, 저 꽃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혼 에너지, 총체적 영혼 에너지가 저 고양이, 저 나무, 저 꽃이란 뜻은 아닙니다. 영혼의 차원에서, 자신의 일부로써 경험하기로 한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크리스탈이 될 수도 있고,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현실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3차원적인 인간으로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경험을 한 다음, 당신이 원래의 의식을 회복하였을 때 당신이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소위 동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래류는 가능하지요. 왜냐하면 고래나 돌고래는 인간과 같은 영혼에너지를 지녔기 때문이지요. 식물이나 동물은 당신들이 2차원이라고 부르는 에너지를 지녔지요. 한 영혼 에너지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영혼은 어디에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당신은 매우 강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고 싶은 영혼의 차원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까? 원하는 차원을 생각하면 그러한 생각이 영혼의 차원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2차원으로의 환생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왕이면 4차원으로요.

 

당신들 3차원의 밀도를 가진 존재들은 영혼의 차원에 그렇게 많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3차원의 밀도를 가진 존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영혼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요. 하지만 4차원을 경험하고 싶다고 당신 가슴속 신에게 요청하여 보세요.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실 진정한 자아는 당신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내면의 신과 화합함으로써 어떠한 경우이든 최선의 길을 창조할 수 있겠군요.

 

벗이여, 당신은 배움이란 견지에선 언제나 최선의 길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물론 당신이 신성이라는 탯줄과 더 화합하면 할수록, 당신은 가장 조화로운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었는데도 의식이 남아 있어서 다시 살아 돌아오는 일이 가능합니까?

 

자주 있는 일이지요. 임상적으로 사망 신고를 받았지만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에너지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해 초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죽고 싶어하지 않으셨죠.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누군가가 죽었다가 다시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준다면 두려움이 상당히 덜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이가 들어 우울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거구요.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 기꺼이 자원하고 싶은데요.

 

벗이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 해도 죽음에 대해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경험을 무수히 하지 않았던가요? 당신들의 예수는 어떤가요? 하지만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했습니다. 진실로 죽음 같은 것은 없고, 죽음이란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사람들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벗이여, 설령 당신이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다 해도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합니다. 각자가 스스로 깨우쳐야 하기 때문이며, 자기 자신의 현실은 자신이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육체적인 변화(죽음)에 절 적응합니다. 그들은 천국은 어떠하고 지옥은 어떠하다는 그림을 마음에 품고 있는데, 죽을 때 정확하게 그런 그림을 보게 됩니다.

 

죽고 난 뒤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천국과 지옥이 꼭 이럴 필요는 없다는 이해에 도달하게 됩니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은 매우 놀라게 됩니다.

 

죽음 이후에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죽는다고 해서 의식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식과 함께 육체를 떠납니다. 의식이란 당신의 에너지이지요. 죽고 나서도 사람들이 더 이상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육체를 떠난 의식은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난 아직도 내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의식은 당신과 함께 갑니다. 그렇게 변화를 맞이하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건 마치 자궁 속의 아이에게 태어나면 어찌 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게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당신들의 신념체계라는 제한된 상자를 향해, 당신들의 표면의식을 향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당신들의 의식을 조금씩 확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들을 드넓은 깨달음의 세계로 데려가려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는 깨달음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벗이여, 이것 또한 알아두십시오. 어떠한 것을 물어도 괜찮습니다. 어떠한 것도 시시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하는 당신은, 사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질문 할 게 많다는 걸 압니다만, 오늘은 이 걸로 충분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회로를 무리하게 가동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컴퓨터에 과부하가 걸리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은 항상 즐겁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인류를 진정 사랑하고 있으며, 다시 만날 걸 기대하고 있습니다.

(프타아가 조용히 흐느끼는 여인에게로 몸을 돌린다.)

괜찮습니다. 벗이여,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사람이라 불리우는 이 놀라운 경험을 선택한 것이 바로 당신 자신임을 안다면, 이별이라는 것이 이러한 영적 교섭을 더 정겨운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벗들이여, 사랑과 웃음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더 많이 즐기시고, 더 많이 바보가 되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2. 사랑의 길, 기쁨의 길

 

벗들이여, 좋은 저녁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어 기쁩니다. 여러분 현실의 토대는 신념 체계입니다. 그것은 벽돌과 같아서, 여러분은 그 벽돌로 나날의 현실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우주를 지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소위 근본적 진리라는 것에 대해 많은 말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의 많은 부분들이 붙박이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적으로 아무리 훌륭하게 이해한다 해도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의 현실을 짓는 것은 신념입니다. 당신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신념이 당신들 존재의 건물을 짓는 재료들이고, 이런 작업은 태어나자마자 시작됩니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를 배웁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가르침들은 그다지 긍정적인 것들이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당신들 문화가 내세우는 과거의 역할들은 곧잘 당신들 자신과 거리감을 느끼곤 합니다. 당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를 보십시오. 이제 와서는 당신들 문화에서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성 종교를 다르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으로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위 여러분들의 집단 의식 속에도 그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구세주라는 예수 벤 요셉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 때부터 당신들은 배우기 시작합니다. 예수는 악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셨노라고.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본래 자신을 위한 경험으로서, 일종의 본보기로서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인류에게 죽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왜곡된 가르침 때문에, 당신들 모두가 죄책감을 느끼면서 자라게 되었고, 그리하여 심판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신이 이러한 신념들, 즉 어린 아이 때부터 지녀온 이런 신념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념이 겉으론 드러나지 않더라도, 당신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런 신념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당신들은 자신이 가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을 가치도 없고, 우주가 자신에게 마련해 주는 온갖 경이로움을 누릴 가치도 없고, 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도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숨쉴 가치조차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숨쉬기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개는 자신들이 살 가치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육체가 끝나는 곳에서 당신들도 끝난다고 믿고 있지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지구가 둥글다고 믿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이란 머리 속에서만 머무는 어떤 것이고,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는 상관없다고 믿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이 무얼 믿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무얼 믿고 있는지, 다른 사람에 대해 무얼 믿고 있는지, 당신의 행성에 대해 무얼 믿고 있는지, 식물과 동물에 대해서는 무얼 믿고 있는지, 우주에 대해서는 무얼 믿고 있는지..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신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성적으로는 터무니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정작 믿음의 체계는 그와 다르기 때문이죠. 당신은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신/여신의 일부임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가슴 속 열망은 전체가 되고자 합니다. 그 열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곧 전체입니다. 가짜의 자아와 본래의 자아가 따로 있다는 것은 당신을 위해, 아니 인류를 위해 비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분리의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 자신이 전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전체가 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가치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현명하지도 않고 충분히 아름답지도 않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계속해서 분리 속에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당신 밖에 있는 모든 것은 거울이고 당신의 반영입니다. 당신이 다른 누군가를 혹독하게 비난할 때도, 당신은 당신 자신의 반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벗이여,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정원으로 가서 하늘을 보십시오. 나무를 보고 달을 보십시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순간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것 또한 자신의 반영임을 아십시오. 당신은 놀랄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자신의 아름다움에 눈뜰 수 있게 해주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과 경이로운 사랑을 나누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얼마 만큼 사랑하고 있나요? (긴 침묵) 진실로, 진실로,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나요?

 

거울을 들여다 보십시오.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임을, 인류라는 보석의 한 면임을 깨달으십시오. 그럼에도 당신은 스스로를 고통과 절망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진실로 변화의 시간입니다. 인류와 우주는 소위 남성 에너지로 작동합니다. 남성 에너지란 행동하는 에너지입니다. 인간은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존재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남성 에너지는 투쟁하고 조직하고 추진하는 에너지입니다. 여성 에너지는 양육하고 수용하고 자신을 내어주는 에너지입니다. 당신의 성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혼에는 성별이 없습니다. 인류와 남성 에너지는 남성 에너지로부터 왔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는 에너지로부터 왔습니다. 당신 행성의 여성들은 소위 여성 운동이라는 것을 흡족하게 여겨 왔습니다. 이젠 우리가 남성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지. 이번엔 우리가 너희를 이겼어. 나쁜 자식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겠죠. 하지만 그 여성들도 실은 남성 에너지를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네 문화에서는 여성 에너지가 경시되어 왔기에, 살아 남으려면 여성도 남성 에너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역사에서 남자가 울거나 수용적이면 용서 받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남자가 아이를 양육하는 것도 금기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몰려오고 있고, 그 바람은 더욱 더 거세어질 것입니다.

남성 에너지를 비방하자는 게 아닙니다.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비둘기의 양쪽 날개와 같습니다. 비둘기는 한쪽 날개로는 날 수 없지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받아들이는 것,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되면 자녀 교육에도 대단한 변화가 올 것입니다. 머지 않아 그런 변화가 올 것입니다.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 자녀들이 많아질 것이고, 그건 전혀 다른 학습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런 균형이 생기면, 그 바람이 지구 전체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끔찍한 불협화음으로 지구가 시끄러워질 것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듯이, 변화의 물결이 닥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전율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하지만 벗들이여, 당신들이 여기 있기로 선택한 것이고, 그 변화를 목격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 변화가 조화롭게 이루어지도록 촉진 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겁니다. 진실로, 진실로 죽음 같은 것은 없음을 이해하기 위해 여기에서의 이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죽음 같은 것은 없다고 믿게 되면, 당신들의 물리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되면, 모든 실체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당신이 사물을 바꿀 수 있음을,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알게 될 때 당신은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주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변화는 올바른 질서라 불릴 것입니다. 대변혁은 기회로 불릴 것이고, 긴박한 사태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기쁨과 축하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로써 새로운 질서를 위한 변화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믿음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됩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부의 모든 것이 실은 자신의 반영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더욱 더 화합하게 되고, 더욱 더 확장된 의식에 이르게 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비추는 거대한 반사경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현실을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창조합니다. 우연한 사고는 없습니다. 우연의 일치도 없습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벗이여, 오직 당신 뿐입니다. 당신은 경이로운 낙원을 창조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당신의 삶에 대해서, 당신 자신 안에서 어떻게 변화를 창조할 것인지에 대해서, 하나씩 하나씩 풀어 나갈 것입니다. 번뇌와 고통을 어떻게 껴안을 것인지, 육체의 불편함을 어떻게 고칠 것이며, 어떻게 화합하여 전체가 될 것인지, 그리하여 어떻게 더욱 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풀어 나갈 것입니다. 자, 이제 질문 하십시오.

 

새로운 질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정치인들이 말하는 신세계 질서와 같은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만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인류의 새로운 질서, 사실상 우리는 새로운 종(種)의 사람들을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고 되어온 3차원에서 4차원으로의 변화를 뜻합니다. 우리도 사실은 이런 용어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러한 변화가 현재 당신들의 의식 수준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 중 상당수가 그러한 변화를 홀깃 넘어서 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에도 말했듯이 벗이여,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묘사하는 것은, 자궁 속의 태아에게 삶이 어떠한지를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이미 그것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의 표면의식적 앎을 넘어서서 당신은 이미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게 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의식적 이해 안에서도 자신이 빛의 존재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당신은 위대한 테크놀로지의 세계로 들어가 모든 것이, 진실로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 안에서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든, 분리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당신들 모두가 근원에서, 분리가 없는 신성한 근원에서 왔음을 알게 됩니다. 당신 자신이 물리적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게 될 것이고, 자신이 신의 생각임을 알게 될 것이며, 그러한 이해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은하계를 누비며 여행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어떤 모습, 어느 장소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타날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 저기에 있는 당신 영혼 에너지의 분실들과 텔레파시로 대화하는 법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원자나 분자의 빛 에너지를 해독할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것이 바로 새로운 질서입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벗이여, 또 다른 질문 있습니까?

 

(남자0 그러니까 그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는 지켜보면서 그것이 펼쳐지도록 허용하는 일만 남았군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거예요. 벗이여,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일이란 없다는 걸 아세요?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마다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순간의 충만함 속에서 사는 겁니다. 설령 기쁨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벗이여, 어떤 형태든 존재의 충만함 속에서 살도록 하십시오. 슬픔이나 고통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슬픔과 고통을 온몸으로 껴 안으세요.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 내일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시간 개념은, 정말이지, 한정적입니다. 이러한 시공 연속체 밖에는 다른 시간이 존재하며, 그 시간은 오로지 지금뿐이고, 그것은 또 어떠한 시간도 될 수 있습니다. 내일이란 없음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과거 속에 살면서 미래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를 살 수가 없습니다. 내일들이 그 자체의 아름다움 속에서 충만케 하려면, 지금 현재를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수용은 위대한 여성 에너지요, 극도로 확장 시키는 에너지입니다. 받아들임으로써 다음 순간을, 그 다음 순간을 창조하는 겁니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까 걱정하면서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원하고,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일어나기를 원하며, 이러저러한 때까지 일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라고 말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수백만의 가능성들을 즉각 차단하고 있는 셈입니다. 위대한 창조기술을 발휘하려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나는 내 존재의 신성으로부터 이러저러한 것을 원한다. 그러한 생각을 우주에 띄워 보내고, 그것이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아십시오. 현실이 되어 나타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건 당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정으로 품은 소망을 띄워 보내면 그 즉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독단적으로 이러저러할 것이라고 결정해버리면, 당신은 즉시 가능성들을 바꿔버리는 셈이 됩니다. 수백만의 변수를 차단한 셈이 되어 버립니다.

 

(여자)의식을 고양 시키는 데 있어서 육체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요? 그리고 그 육체는 어디로 들어오나요?

 

육체는 진실로 경이로운 탈 것입니다. 영혼이 거주하는 사원입니다. 당신의 육체는 수백 년,수만 년을 견디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당신은 믿지 않겠지요. 당신의 육체는 이러한 차원의 현실을 경험하기 위한 탈 것입니다. 육체는 그 자체로 완전하며, 스스로 세포 차원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의 육체는 당신의 행성과 더불어 놀라운 공명을 일으킵니다. 당신의 육체가 없이는 이 행성이라는 옷감도 짜여질 수가 없습니다.

당신들은 육체를 경멸하곤 합니다. 매우 영적인 사람들 중에도 육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육체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가 낙원에 도달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육체를 선택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육체 또한 신성의 표현입니다. 육체가 없다면 많고 많은 기쁨들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육체는 정말로 놀라운 도구이고, 경이로운 실체입니다. 탄력 있고, 창조적이고, 야성적인 창조성을 가진 실체.

 

세포적인 차원에서도 육체는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육체는 겉으로 표현된 영혼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만약 당신이 육체를 지니지 못했다면 이 3차원 세상은 매우 따분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육체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나요? 당신 자신을 반추해 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육체와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당신의 육체는 항상 당신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바로미터 같은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은 자아의 불편함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육체가 불편을 호소한다면 그 부분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못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해 알면 알수록 당신의 육체는 당신의 상태에 대해 더 많은 말을 들려줄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더욱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몸에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가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몸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그리 쉽사리 쓰러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기쁨 속에 있다면, 당신의 몸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설령 독을 먹었을지라도 당신의 몸은 자동적으로 해독 작용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들은 당신들 삶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들은, 사실 인류의 집단 의식과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부신 도약을 기해야 할 때입니다.

 

꿈에 관해서인데요, 때로는 꿈이 다음날 일어날 일을 예시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나요?

 

벗이여, 잠을 자면서 당신은 다차원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가르침을 위해서 일뿐 아니라, 위대한 모험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자고 있는 동안, 당신은 여행을 하기도 하고, 육체적 접촉이 없었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기도 합니다. 이 행성뿐만 아니라, 다른 행성으로 가기도 합니다. 꿈꾸는 동안 당신은 매우 바쁩니다. 꿈이 없다면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꿈은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진정한 현실입니다. 꿈은 실재하며 유효합니다. 다른 의식 상태에 있을 때를 당신은 꿈이라고 하는 겁니다.

 

깨어있을 때도 그런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벗이여,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의식의 다차원성을 이해하려고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리감을 없애기 위해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이 있기는 합니다. 잠자는 시간을 활용하는 것도 그런 일 중의 하나입니다. 당신이 만약 6시간을 잔다면, 그 시간을 3시간씩 쪼개어 자십시오. 새벽 시간을 잘 이용한다면 현실의 분리감이 더 줄어들게 될 겁니다.

새벽마다 의식의 다른 상태로 들어가 모험도 하고, 의식적으로 몸을 떠나는 여행을 해보세요. 당신들은 그것을 유체이탈의 경험이라고 부르죠. 이런 경험은 특히 새벽에 이루어집니다. 몸을 충분히 이완 시킨 다음 잠들기 전에 나는 3시간만 자고 놀고 싶다고 요청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놀라운 의식 상태를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꿈을 기록하는 습관도 도움이 되지요. 3시간씩 쪼개어 자는 것이 습관이 되면, 꿈을 더욱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놓치지 말고 기록해 보세요.

적어도 21일간 그렇게 해보세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꿈의 노트를 지닌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습관이 되면, 꿈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잠재의식이 의식에게 말을 거는 꿈의 언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건 굉장한 모험이고,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유체이탈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는 것이 육체적 감각으로도 느껴집니다. 어제 밤에는 대기권 밖까지 올라갔습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현실의 지구 안을 여행할 때는 멀리까지 올라갔다는 느낌이 올 리 없지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의식할 수 있는 깨어있는 상태라면, 자신의 의식을 지구의 어느 부분에라도 투사할 수 있습니다. 불시에 친구들을 방문할 수도 있지요. 물론 현실의 지평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신의 표현대로라면, 지구를 떠나는 거지요. 유체이탈이 시작된다고 느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요청해 보십시오. 꿈 속에서 유체이탈을 경험하든 깨어있는 상태에서 경험하든, 기억에 지워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염원을 하십시오. 자신의 육체를 돌아보고 여행을 떠나는 유체이탈의 경험을 할 때는, 특히 현실 차원을 벗어나 여행할 때는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경험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표면의식에서만 모를 뿐입니다. 하지만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이를 지시할 수도 있고, 꿈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 모험들에 대해 알고 싶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꿈 상태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꿈 속에서 꿈을 의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 나면 마치 치유를 받은 듯 마음이 매우 편안해집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여행을 하면서 다른 차원의 현실에서 온 형제 자매와 사귈 때, 위대한 지혜와 기쁨의 문을 두드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합니까? 벗이여, 그로 인한 혜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겁니다. 요청하십시오. 그러면 당신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애쓰지는 마세요. 요청하고 나서는 아무 기대 없이 받아들이세요. 이미 말씀 드렸듯이, 기대는 가능성들을 차단해버립니다. 실현의 마당을 축소 시켜 버립니다.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육체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나요? 그런 위험은 없나요?

 

위험 같은 것은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당신들은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다고, 어느 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으며, 당신은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당신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의 어느 곳을 여행하든 당신은 안전합니다. 당신 자신의 신성 안에서 당신은 안전합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아프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요? 어찌하여 정상 궤도를 이탈하게 되나요? 아마도 우리의 생각이겠죠?

 

사랑하는 이여, 생각 때문이 아닙니다. 감정의 불편함 때문입니다. 신념체계의 반영이기도 하지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 자기 주변 환경에 대한 신념 말입니다. 당신이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지 않다고 믿으면, 그땐 우주의 모든 것이 당신의 그런 믿음에 맞춰 재배열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자신을 희생자라고 믿으면 당신은 희생자가 될 것입니다. 인류는, 자신들의 몸이 아픈 것은 자신들이 고통을 반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삶을 부조리한 것으로 믿으면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워 하고,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믿으면 삶은 그러한 믿음을 당신에게 반영합니다. 삶은 그러한 상황을 창조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뭔가 결여된 인간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합니다. 삶 자체를 모순으로 가득 찬 것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삶 속에서 고통이란 이겨낼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넘어설 수 없는 벽 하나를 만들어 낸 것이죠. 누구나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겁니다.

 

불가항력을 느끼게 되면 당신은 스스로를 격리시킵니다. 슬픔에 대한 두려움은 언젠가 당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을 멀리하게 만드는 겁니다. 불가항력의 벽을 만들어 그런 느낌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벽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스스로가 만든 분리의 장벽 때문에 두려움과 감각을 꼭꼭 가두어두려 하고, 감정 따위는 병에 담아 코르크 마개로 막아두려 하지만, 그렇게 담겨 있을 리 없습니다. 당신이란 존재는 감정을 품고 있는 생각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표출되지 않으면 몸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하라고 촉구하고자 불편함을 초래합니다. 그리하여 불운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당신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인 AIDS를 예로 들겠습니다. 자기 스스로 이 병을 창조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무도 질병에 걸릴 수는 없습니다. 병이 그런 식으로 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몸이 약해지면 지구를 떠돌던 아주 작은 물질이 사람들의 몸에 들어오는데, 이 더럽고 작은 바이러스에게 공격 당한다는 것이 당신들의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희생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창조한 겁니다. 그런 상황을 창조한 것도 당신이고, 거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당신입니다.

당신네 사회에서는 동성 연애자를 굉장한 흠집을 가진 사람들처럼 받아들이는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안에는 여성적인 면과 남성적인 면이 나란히 짝하여 들어있고 그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만 그것이 당신들의 감정적 진실입니다. 자신들의 몸에 화학물질을 주사하는 사람들 또한 이 끔찍한 바이러스에 의해 쉽게 공격 받는다고들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죄의식에 대해여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과 기쁨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질병이 오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지요. 에이즈는 이 행성의 정부들 중 하나가 영혼을 말살 시킬 목적으로 창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정부의 대리인으로 하여금 배포하게 한 것이지요. 그것이 가져다 준 결과를 보세요.

유년기의 질병으로 분류해 놓은 것도 있지요. 이 질병을 박는답시고 모두가 예방접속을 하려고 분주히 뛰어 다닙니다. 의학계라는 것도 있고요. 임신한 여자들에게 한 달에 한번씩 신체검사를 하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현명한 처사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병을 찾기 위해 검사한다고요?

자신의 현실은 자신이 창조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감정을 품은 당신의 생각이 물질을 창조하고 물리적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 말입니다. 그때는 여자들이 매달 병을 알아보려고 신체검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현명치 못한 일인지 깨달을 수 있겠죠. 세상에 만연한 질병에 대항하기 위한 예방접속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격려하고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일뿐입니다.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지만 당신들도 아시다시피, 집단의 현실, 집단 의식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약을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압니다. 그건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인류의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더욱 더 조화를 이루고, 현실과 더욱 더 편안한 관계를 이루고,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창조하는지 보다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점점 더 약이 필요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약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약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벗이여, 이 점에 대해서는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현실과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지적했을 뿐입니다. 약 또한 유효한 것이며, 신성의 표현입니다. 신성의 표현이 아니라면 여기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당신의 몸이 불편하다면 스스로에게 이유를 물으십시오. 몸의 질병 뒤에 도사리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가를. 그런 다음 그 감정을 껴안으십시오. 실제로는 육체적 질병이 되겠지요. 병이란 단지 가르침을 위해 거기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껴안음으로써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다른 행성 사람들은 어떤가요? 우리 지구인들처럼 분리를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나요?

 

그렇습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말씀 드리죠. 물론 다른 행성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기술적으로는 진보했습니다만, 영적으로는 그다지 진보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이 없으면 분리가 있기 마련이지요.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도 말씀 드릴까 합니다. 이 행성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들이니까요. 오늘날엔 기술적인 진보에 대해 관심이 높은데, 기술이 발달하면 많은 변화가 몰려오게 됩니다.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걸 크리스탈 테크놀로지라고 부르는데, 그 힘, 그 연료는 바로 생각입니다. 크리스탈 테크놀로지는 엄청난 증폭 능력을 자랑합니다.

창조의 힘엔 두 가지가 있는데, 이 행성의 현실들뿐 아니라 모든 행성의 현실에 두루 적용됩니다. 하나는 두려움이고요, 또 하나는 사랑이지요. 영성의 눈뜸이 없이 기술적으로만 눈뜨게 되면 두려움이 뒤따르게 됩니다. 기술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그 두려움은 수백만 배로 확대되어 결국은 황폐와 파멸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품은 생각으로 기술을 발휘하면 증폭되는 것은 바로 사랑이지요.

 

인류가 생각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는, 자신이 신성의 표현임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는, 그리하여 우주가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이해하게 될 때까지는 기술은 오히려 여러분의 행성을 황폐하게 만드는데 쓰여질 것입니다. 하지만 벗이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선택했으니까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진실로 이 멋진 꿈이 결실을 맺도록 여러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이 위대한 기술을 이루도록, 이해와 조화와 깨달음에 이르도록, 그리하여 인류가 소위 영혼들의 위대한 모임에 합류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당신네 행성이 올곧은 자리를 찾아 바로 서야 할 때가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노예처럼 지배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자연 속에 묻혀 살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런 일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아픕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런 증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류가 이해의 차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저항 또한 자라나는 겁니다. 여기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저항하고 또 저항하면서 공포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옳습니다. 벗이여, 변화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껴안는 것입니다. 사랑의 표현이 아닌 것은 모두 두려움의 표현임을 진정으로 아는 것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은, 실은 그들에게 힘이 없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세상의 부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재산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살면서 영적인 풍요로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을 노예로 부리려는 자들은 자신들이 노예가 될까 봐 두려운 겁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껴안읍시다. 변화가 창조되는 것은 그러한 껴안음 속에서입니다.

 

그들이 나를 노예로 만들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내가 그들을 노예로 부리려 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노예가 될까 봐 두렵다면, 벗이여,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상태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우주에는 심판관이 없습니다. 당신이 두려움으로 품은 생각을 내든, 사랑으로 품은 생각을 내든, 우주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우주는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그것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슨 일을 하던 다 괜찮고,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슬퍼할 것도 없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당신이 무엇이 어떻게 창조되는가를 이해하게 되면 소위 관조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상황을 살피는 거지요. 그러면 행성의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분투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일 겁니다. 욕망 충족을 위해서라면 그들에게는 노예화이든 아니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이 생각을 내면, 당신은 정확히 그 생각 그 감정이 품고 있는 바를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기게 됩니다. 당신은 바로 진동 주파수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것이 당신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것입니다. 당신은 진동 주파수이고, 감정을 품은 생각도 진동 주파수입니다. 당신이 안전한 우주 안에 살고 있고, 당신이 곧 군주이며,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당신은 자신의 존재를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서로를 통해 배우는 방식입니다.

당신은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다는 것,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당신 자신이라는 것, 다양한 우주의 가장 큰 힘은 사랑이라는 것, 당신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알려진 것이든 아니든 모든 현실은 전체성의 표현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을 참되게 이해하게 될 때,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되어 당신들 모두가 바라는 변화를 창조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기쁨을 바라는 만큼, 평화와 고요를 바라는 만큼, 당신의 아름다운 행성 위에 낙원을 창조하기를 바라는 만큼, 당신의 현실도 그만큼 달라집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파괴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가슴 깊이 이해하여야 합니다. 당신은 신성하며, 당신의 행성도 신성하며,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진실로 제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사랑하는 이여,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십시오. 자기 자신의 모든 면을 신성의 표현으로 알고 받아들이십시오. 모든 것이 당신에게로 되돌아옵니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잘못된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 신성의 표현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런 깨달음 가운데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됨에 따라, 당신은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주인정신이요, 참다운 자유의 정신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빛으로 가는 길이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의 귀향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시간은 충분합니다. 사랑과 기쁨 가운데로 나아가십시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존재하십시오. 그리고 아침에 거울을 바라볼 때면, 두 눈을 들여다 보며 말하십시오. 사랑하는 이여, 진실로 당신은 신성의 표현입니다. 라고. 진실로 그러합니다. 좋은 저녁 되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3. 그대의 느낌을 끌어 안아라.

 

좋은 저녁입니다. 오늘 저녁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할까 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의 관계, 무슨 이유에서든 당신들이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들과의 관계.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당신 자신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한 사건이나 우연의 일치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현실이든, 집단적인 현실이든 모두 믿음의 체계에 근거한다는 것도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믿고 있는 바를 정확히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들입니다.

잠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당신들 모두가 그토록 사무치게 바라는데도 사랑은 왜 그렇게 달아나기를 잘하는 걸까요? 당신들 자신이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믿게 되면, 당신들은 자신들의 삶에 그것을 창조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 본래의 자신과 진실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신성한 표현이란 걸 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모든 관계는 정말로 사랑의 관계가 될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당신 자신의 본래의 자아에 덧칠한 자아를 그대로 되 비추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모든 것은 당신의 관점을 고스란히 되 비출 뿐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제한된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는 처음에는 굉장한 사랑과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천진난만한 모습이 놀랍도록 애정과 자비를 불러일으키지요. 아이가 자라 자신의 뜻을 지닌 어른이 되면, 사회적 요구가 그 아이를 짓누르게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어주기를 바라죠. 아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상관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아이에게는 사랑의 결핍으로 느껴집니다. 부모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되고, 부모와 진정한 대화가 없이 자람에 따라, 오해가 싹트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라기 때문에 나중에도 자신의 사랑을 마음껏 펴지 못하고 스스로 제한을 두게 됩니다. 이성간의 사랑이든,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든 다 마찬가지 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그 생각은 우주를 통해 멀리 퍼져 나갑니다. 생각은 당신의 가장 강력한 도구 이상이고, 그 자체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내보낸 것을 자기에게로 다시 끌어들이는 이 에너지를 우리는 전자기적인 에너지라고 부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만약 당신이 사랑을 고통이라고 믿으면, 사랑의 관계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으면, 자신이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진심으로 믿으면, 그때는 반드시 이런 것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인가가 나타나서 당신이 믿는 바를 반영해주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거리가 있습니다. 조건 없이 샘솟는 순수한 사랑은 당신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건 일종의 가르침이지요. 일종의 반영입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는, 자기 자신의 모든 면을 다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모든 현실의 지평에 반영되고, 전 우주로 널리 퍼져나갑니다. 본래의 자기와 더불어 경이로운 사랑 안에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겉사람과 속사람 사이의, 당신이 지금껏 자신이라고 생각해 온 가짜의 자기와 진정한 자아 사이의 분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는 가운데, 자아 안에 깃들어 있는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가 균형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한 균형은 당신의 우주 전체로 반영되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무슨 책을 읽던, 무엇을 추구하든, 누구의 말을 듣든, 어떤 대단한 선생이나 구루를 추종하든, 항상, 항상, 항상,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항상 저쪽 세계에 대한 대단한 호기심을 보입니다. 그렇죠? 관심의 대상은 다른 세계의 존재일 수도 있고, 다른 별에 사는 존재일 수도 있고, 지구 내부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말씀 드렸듯이, 당신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게 될 때까지는 지금 이 시점의 인간 의식을 초월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벗들이여,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들 어깨 위에 놓인 책임이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각자가 위대한 이해의 경지에 도달하는 넓이와 깊이만큼, 전 인류의 앎에 이바지할 수 있는 넓이와 깊이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지식은 이른바 집단 공명이라 불리우는 것 안에 존재하며, 집단 의식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공통된 울림은 일정한 에너지 수준에 이르면, 다시 말해 앎의 진동수가 일정한 수준이 되면, 엄청난 도약이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인류의 의식 전체가 그러한 앎을 향해 뛰어오르게 됩니다. 깨달은 사람의 숫자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러한 현상이 일어날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단순한 숫자를 넘어서서 더 많은 진동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약은 지적 이해에 의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는 지성을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 이해는 여러분 각자의 가슴속에서 영적인 이해가 앞서지 않는 한 결코 생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지금껏 여러분이 알아온 모든 것은 모두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지금 당신네 문화 속에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은, 감정과 느낌이 될수록 배제된 지성입니다. 하지만 당신이란 존재는 느낌에 의해 힘을 얻는 진동 주파수라는 걸 아십시오. 당신이라는 존재는 느낌에 의해 힘을 얻는, 신의 생각 자체입니다.

오늘날 당신네의 문화에선 느낌, 감정, 상상력 같은 것을 경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당신의 상상력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가장 위대한 도구입니다. 가장 위대한 창조의 힘입니다. 당신이란 존재가 본래 창조적이지요. 당신의 물리적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자, 모든 분자가 창조적이고 무한한 힘을 지녔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여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상상력은 당신을 시간과 공간 너머로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느낌 또한 당신을 시간과 공간 너머로 데려갑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성적 에너지를 느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해줍니다. 받아들이고, 느끼고 직관적이게 합니다.

직관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난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싶어. 그냥 느낌이 그래. 여자들이 그렇게 말하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비웃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논리적이지 않으며, 지성적이지도 못하고, 말도 안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여자들의 특징이기도 하구요. 그렇죠? 인류는 직감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점차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직감을 따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직감은 아주 순식간에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일상사를 쫓느라 바쁘기만 한데, 여러 가지 결정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은데, 어느 짧은 순간에 어떤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안 돼 라는 말일 수도 있고, 맞아, 이걸 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바쁘고 조화된 상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목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소위 직감이라는 것은 여성 에너지입니다. 당신들 모두는 내면의 속삭임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직감과 만나기 위해서는, 전에도 말하였지만 자신의 몸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몸에 어떠한 불편이 오는 것은 당신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류는 느낌을 두려워합니다. 인류는 고통이라 불리는 것에, 절망이라 불리는 것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탄생의 순간부터, 최초로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고뇌를 경험한 순간부터, 당신들은 각자 자기 주변에 불가항력이라는 장벽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당신들 모두는 또 다시 상처 받을까 봐 두려운 겁니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실망과 슬픔과 고통을 당신들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거기에 단련된 당신들은 그 때문에 고통과 느낌을 혼동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이여,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이걸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고통은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삶에 즐거운 상황이 일어나면 뱃속에 있는 느낌의 중심부가 열립니다. 크게 웃을 때는 복부가 흔들리지 않습니까? 상황이 아주 즐겁다고 느끼거나 크게 웃을 때면, 몸 안의 에너지 센터가 열립니다. 그리하여 복부에서 시작된 기쁨은 아무런 저항 없이 당신의 열린 에너지 센터를 통해 전신을 여행하고, 당신의 가슴은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즐거운 사람은 몸에 병이 없습니다.

당신이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상황이 나타나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게 되면 그때 복부의 에너지 센터가 닫힙니다. 여러분 각자가 모두 알고 있듯이, 그런 상황이 일어나서 충격과 고통 속에 있게 되면 그건 바로 복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따금씩은 마치 걷어 차인 듯 배가 아픈 느낌을 경험하게 되나요? 판단이란 복부에 꽂힌 날카로운 쇠발톱과 같아서 에너지는 더 이상 갈 곳을 잃고 맙니다. 그것이 소위 고통이 되는 겁니다.

무엇이 고통을 창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판단입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다른 원인은 없습니다. 고통이라는 저항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판단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고통은 누적됩니다. 수억 겁을 통해, 수많은 생애를 통해, 당신은 그것을 습득해 왔습니다. 당신들 모두 그것에 매우 익숙해 있습니다. 당신들의 삶을 거슬려 올라가보십시오. 어린 시절의 언제인가 당신은 자신을 무가치하고 여기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대단한 어떤 일일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일에선가 당신은 돼 먹지 못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슴속에선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 작습니다. 너는 아름답지 않다, 너는 어리석다.는 소리가 가슴속의 속삭임보다 압도적으로 큽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충분치 않은 존재로 판단하게 되고, 자신을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게 되면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장함에 따라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되지만, 다룰 줄 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 주변에 불가항력적인 벽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더 높고 더 두터운 벽을 쌓게 됩니다. 당신이 성인이 될 무렵에는 그 벽이 매우 높고 두터워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음을 보여주었다가는 상처 받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고통 받을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지만, 고통은 다시 반복하여 나타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더, 더 당신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게 되고,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더, 더, 더 판단하게 됩니다. 나는 정부의 희생양, 타인들에게 이용만 당한다 등의 관념에 갇히게 되고 그것은 두려움이 커질수록 더 심해집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정확히 되 비추어 줄 상황과 사람들을 더, 더, 더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 당기게 되는 겁니다. 자 이제 그것이 어째서 돌고 도는 원이 되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당신들 모두가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나는 두렵다, 나는 상처 받고 있다고 말하길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당신들은 입밖에 낼 수 없는 가슴속의 상처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절망을 바라보길 두려워하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길 두려워합니다.

당신들은 자신이 충분치 못함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감히 그렇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답을 알고 있는데 자기만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의 마음 은밀한 한켠에서는 자기만 못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자기만의 은밀한 생각들과,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행동들, 자신의 삶 구석 구석을 돌아보고는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규정해 버리고, 자신은 결코 이곳 저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살아가는 형태가 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당신들은 모두 완전함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자기 자신이 본래 신성의 표현임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옵니다. 당신의 본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신들은 만유의 생각 자체, 근원의 생각 자체라고 말해주면, 당신들은 즉시 만유라는 것을 인격화 시켜 생각해 버립니다. 우리가 신/여신이라고 말하면 당신들은 즉시 인격화된 신이 존재한다고 상상해버립니다. 그것은 제 1원인의 본질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겁니다.

1원인은 진실로 인격화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만유라고 하는 것이 결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님을 진실로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당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 속에서 만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성의 은줄은 모든 원자와 분자 속에, 모든 우주 속에 깃들여 있습니다. 그 힘이 만물 가운데 깃들여 있으니 만물을 바라보면 진정으로 알게 될 겁니다. 모든 풀잎, 모든 새와 꽃, 나무와 생물, 모든 바위, 심지어 인간이 만든 것이라 여겨졌던 것까지, 그 모든 것이 진실로는 만유 자체임을.

당신 바깥의 이러한 반영물을 이해하게 되면, 그땐 그것, 아니 진실로는 이것 역시 바로 당신 자신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당신 바깥에 보이는 그림에 사로잡히기가 훨씬 쉽지요. 당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에 대한 그림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당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여자) 감사합니다. 프타아,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하신 말씀은 완전한 모델이라는 것은 없다고 해석될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완전한 모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자, 우리는 당신들의 시대 이전에 있었던 당신들의 문화 사회에서의 역할 모델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그것들이 바로 당신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상 구조물이 당신들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법칙의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문화권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모든 경이로움을 한 몸에 구현한 존재, 완벽한 존재가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당신들 모두는 진정으로, 감성적으로 이러한 역할 모델을 열망합니다.

구세주라는 예수의 예를 들어야겠군요. 우리는 이러한 일이 당신네 문화에서는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지성적으로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당신들은 이러한 모델을 감성적으로 열망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문화의 집단적 공명, 집단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그 점을 이해하든 않든, 당신은 그 속으로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당신들 모두가 되고 싶어하는, 그토록 갈망하는 완벽한 존재라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분열을 만들어 냅니다. 당신이 완벽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소위 완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당신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끝날 수 없으며, 지금 이러한 현실 차원에서도 이 점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 일단 끝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은 창조의 동기를 지니고 있고, 성장과 확장의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합니다. 당신 몸 안의 모든 세포도 창조성으로 꽃 피어나고 있으며, 가만히 멈춰있지 않습니다. 가만히 멈춰있는 분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극미의 세계를 보든, 우주를 보든 가만히 멈춰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완성품이 있으리라고 믿고,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이 깨달은 스승이 되면 어떨까요?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끝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말씀 드리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의 차원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제 1원인의 에너지는 가만히 멈춰있는 법이 없습니다. 계속적으로 확장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여기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 바로 보고,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역할 모델로서 당신들에게 진열되어온 것들은, 실은 노예화를 위한 놀랍도록 효과적인 도구였던 셈입니다. 당신들의 현실에서 당신들이 소위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들을 얽어 매기 위한 도구였고, 지금도 그 점은 마찬가지 입니다. 당신들로 하여금 주권과 자유의 권리를 알지 못하도록 조정허기 위한 도구 말입니다.

 

(남자)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었는가를 알게 된다면 실망이 크겠네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예수라 부르는 존재는 사실 생각의 구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은, 그 사람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생각의 구조물이 되었지만, 생각의 구조물 역시 현실성과 타당성을 갖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 현실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기 아닌 저 멀리에 심판관이 있는 건 아닙니다.

우주에는 심판관이 없습니다. 저 구름 속에 예수가 있는 게 아닙니다. 구름 속에서 당신을 계속 주시하는 신이 있는 게 아닙니다. 매일매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단 배우고 나면 또 다시 이 가르침들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판단이란 것이 더 조화로운 길을 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 같군요. 어떻게 하면 판단을 떠날 수 있습니까? 늘 판단하게 되는 데요.

 

벗이여, 판단을 사리분별과 혼동하지 맙시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판단은 다음과 같이 말하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 사실은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존재할 뿐이죠.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근래에는 의식 확장을 열망하는 뉴 에이지 사상가들과 추종자들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뉴 에이지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낡고 위선적인 종교로부터 성스럽게 보이는 요소들만 취한 다음, 그것을 뉴 에이지 사상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성스러운 척 하는 것으로는 의식 확장을 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이건 그르고, 이게 옳아. 이 길을 따르면 당신은 뉴 에이지가 아냐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이게 기본적인 판단들이지요. 오랜 세월 동안 당신네 문화에 자리잡아 온 것들을 극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애에서 생애로 건너 뛰며 당신들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것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판단이 아닌 분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방식이고, 저것도 또 다른 방식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길을 택하겠다.

나의 여인(자니 킹)은 종종 나쁜 자식!이라는 욕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경이로운 일에 관련된 사람이 어떻게 그 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거죠. 하지만 그녀가 하는 욕설이 이것만인 줄 아십니까? 훨씬 더 원색적인 경우도 없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말 따위엔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소위 취향에 불과하니까요. 뉴 에이지입네 자처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작 가슴속에서는 분노가 들끓는 판단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그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깨어 있어야 하고, 깨어 있으면 있을수록 판단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벗들이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증상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들은 판단이 쓸데없는 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탈입니다. 판단이란 나쁜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판단해선 안 돼. 판단은 나쁜 것이니까. 판단을 하면 그건 깨달음이 아니야. 하고 말합니다. 어리석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이여, 판단을 나쁜 거로 만들면, 또 다시 원래의 굴레 속으로 곧장 되돌아 오게 됩니다.

 

그러니 어리석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판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판단 또한 유효합니다. 판단은 당신 자신의 신성한 한 국면이고, 판단을 하지 않는 변화를 창출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껴안는 것입니다. 당신이 판단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당신이 그 같은 변화를 바라고, 판단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게 되면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치 없다고 믿게 되면 판단은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진실로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에 당신은 오히려 힘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당신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그것을 정확히 끌어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심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벗들이여, 내가 비밀을 말해 줄 거니까요. 모든 것을 가장 훌륭하게 화합 시키는 것은 바로 웃음입니다. 뱃속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웃음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고 많은 일이 벌어지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 가운데서도 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웃으면서 그 안에 있는 기쁨을 발견하면 할수록, 심지어 패러독스에서조차 기쁨을 찾아 낼 수 있다면, 당신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바로 그 순간을 사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기쁨을 창조하게 되는 겁니다.

 

웃음과 그 웃음이 만들어 내는 화합에 관한 건데요. 당신의 의식 차원에선 진심으로 어린 애처럼 어리석을 수가 있나요?

 

실제가 그렇습니다. 어린애 같다는 건, 함축적인 의미에서 보면 어린애 같지 않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경이로운 의미에서의 어린애 같다는 뜻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같이 경이로운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답니다. 그런 경이로움 속에서는 뭔가 알아차림이 있고, 놀라운 외경심이 있고, 경건한 마음으로 우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만물의 신성함을 깨닫게 되는 거죠.

 

즐거운 냉소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사실 벗이여, 그것도 괜찮습니다. 냉소적인 것, 인류의 결점에 대해 아는 것, 하지만 다른 사람의 결점에 대해 비웃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비웃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거기에 잘못된 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차원을 보고 웃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내가 이 차원을 보고는 웃지 않는 줄 아십니까? 우리를 매우 심각한 존재들로, 웃거나 농담을 즐길 줄도 모르는 존재들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러분을 미워할 거예요. 하지만 그런 것들도 다 기쁨의 일부분들입니다. 당신에게는 웃음이 절망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마지 못해 웃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지요. 웃지 않으면 그땐 울어버릴 테니까요. 웃음이란 눈물의 방향을 돌려놓는 놀라운 전향 장치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세요? 어떤 감정이든, 온 몸으로 그런 감정을 체험할 때는 당신이 그 순간을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걸. 모든 것은 유효합니다. 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역시 기쁨의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당신은 우리가 내면에 쌓아둔 고통스런 감정의 기억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런 감정을 해방 시키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지 알고 싶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인류는 느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느낌의 에너지가 체내에 축적되면 표출되기도 하고, 억압되기도 합니다. 느낌의 발산이 억제되면 몸은 불편을 호소합니다. 최근 들어 등장한 새로운 치료법들은 사람들이 표현하도록 장려하고, 과거의 삶 속으로 돌아가 몹시 고통스러웠던 것을 재경험하면서, 거기에 대한 표현을 맘껏 하도록 합니다.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끓는 주전자에서 김이 나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해답은 표현과 억압이라는 양극의 중간에 놓여있습니다. 인정과 포용으로 중용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는 변화가 오게 되는 겁니다.

 

꿈에 대하여 묻고 싶습니다. 에너지가 차크라를 통해 자유롭게 흐르게 하려면, 웃음과 더불어 상상력과 느낌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상력 말인데요. 꿈을 꿀 때, 저는 때로 잡다한 일상사를 다시 경험하곤 합니다. 제가 했던 일들, 하려고 생각했던 일들, 아직 하지 못한 일들, 이 모든 것들을 꿈에서 경험합니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 나타나는 이 모든 것이 다 상상력인가요?

 

그건 그 모든 것 이상입니다. 당신의 꿈꾸는 상태는 다차원의 현실입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질서 정연하게 재배치 하는 것 이상입니다. 상상력을 경험하는 것 이상입니다. 꿈은 매우 많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꿈을 꿀 때는 여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잠의 상태에 있을 때는 하나의 현실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러 차원의 현실에 있게 됩니다. 영혼에너지라고 불러도 좋을 전체로서의 자기 자신이 영혼에너지의 다른 부분들과 자주 결합하게 됩니다. 이 행성 내에서 같은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거주하는 영혼 에너지의 다른 부분들과 만나는 거지요.

초의식 세계에서는 다른 영역을 여행하기도 합니다. 다른 영역이란 다른 행성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차원의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는 다른 차원의 현실 말입니다. 그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고 유효한 것임을 아십니까? 당신이 이처럼 꿈의 상태에 있을 때는 무언가 다른 교훈을 배우는 것이고, 그런 경험들은 지금의 이 현실 가운데에 있는 당신의 삶에 유익한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의 현재 의식적 이해를 넘어선 진정한 가르침이요, 배움이요, 이해인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적 마음이 당신으로 하여금 의식적 이해 안에 있을 수 있도록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이 차원에 있으면서 의식은 당신이 원한다면 이런 그림들을 포착하기도 합니다. 그건 유익한 일입니다. 이미 말씀 드렸듯이, 잠자리 옆에 노트를 두었다가 깨어나자 마자 꿈을 기록하는 겁니다. 아주 상세할 필요는 없습니다. 떠오르는 한 두 마디도 좋습니다. 계속 그렇게 해나가는 거죠. 이런 식으로 매일 해나가다 보면 하나의 패턴이 보일 것이고, 그러면 무의식 상태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바를 의식적 수준에서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꿈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의식을 넘어선 꿈 속에서 체험하는 것들도 가짜가 아닙니다. 현실의 다른 영역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벗이여, 다른 차원의 현실에서는 꿈 속의 상태가 꿈이 아닌 현실인 것입니다. 그건 당신을 위한 멋진 놀이터이지요. 이런 꿈이나 상상이 당신이 보기에는 무척 떨어진 것으로 보이겠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현실만큼이나 실제적이며 타당한 것이며, 의식으로 알 수도 있는 것입니다. 됐습니까? 벗이여?

 

저는 제가 신성한 존재임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열쇠가 있지 않을까요?

 

매순간이 열쇠입니다. 벗이여, 그건 정말이지 너무도 간단합니다. 너무 간단한데도 인류에게는 그토록 어렵게 느껴질 뿐입니다. 무엇이 열쇠일까요? 진리에 이르는 열쇠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겁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보세요. 당신의 신념체계가 바로 열쇱니다. 당신이 믿는 것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들을 믿어왔는지 깨닫게 될 때, 심지어는 자신이 그런 것들을 믿어 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래서 당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가리고 있는 켜켜이 쌓인 껍질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자신의 모든 면을 진실로 껴안게 될 때, 그 때에 비로소 당신은 자신의 신성을 인지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당신 자신이 바로 신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처럼 간단합니다. 간단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당신들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한 계단씩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면에서 증폭작용이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는 앎에 이르게 되는 거지요. 벗이여, 그것이 우리가 하려는 일입니다. 깨달음이란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존재에 대한 겁니다. (부드럽게 반복한다) 그건 존재에 관한 겁니다.

 

잠과 꿈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가끔 저는 갑자기,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잠을 깨곤 하는데, 이점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모든 사람이 그러합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육체가 이완상태가 되면 몇몇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키는 경우로, 이런 현상은 흔히 일어납니다. 이건 비교적 현세적 이유들 중 하나지요. 다른 경우는 의식이 육체를 떠나는 전조로서 육체의 진동이 증가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진동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깨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의식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몸을 떠날 때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식이 몸으로 돌아 오는데 그건 마치 쇼크와 같기 대문에 깨어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 중에도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몸 안에서 여러 가지 다른 차원의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의식과 육체의 관계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의식과 육체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몸 밖으로의 여행은 늘상 여러분이 하는 일입니다. 몸 밖으로의 여행과 모험에 관하여는 의식적인 확장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중 몇몇은 의식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몸 밖으로 여행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의식이 잠자는 상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거의 반수면 상태로, 마치 잠들기 직전에 온 몸이 이완되어 있을 때와 같습니다. 명상 수행을 할 때 이런 상태가 되기도 하는데, 뇌파가 알파 상태라고 언급되며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가끔 몸 밖으로의 여행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생활의 여유가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래도 낫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불행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 질병, 재난과 마주치게 되면, 이들은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나만 즐거울 수는 없지 않느냐는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죄책감은 책임감과 연결되어 있지요. 죄책감은 아직 배우지 못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책임감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이여? 책임감이란 당신의 가슴이 노래 부르고 싶어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가슴의 노래에 반응하는 겁니다. 책임감은 의무가 아닙니다. 당신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노래 부를 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누구의 행복도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만 책임지면 됩니다. 사람이란 모든 존재의 공동 창조물이니까요. 하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사람이 있겠죠?

하지만 프타아, 우리의 소망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누구인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땐 그들을 기쁘게 해주길 바라지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위한 기쁨을 바라게 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가운데 결정이 이루어지면, 그건 조화와 안녕과 기쁨을 창조합니다. 사랑이 아닌 의무감에서 무엇인가를 하면, 그땐 원망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걸 모르리라 생각합니까? 당신이 아무리 얼마나 많이 미소를 짓든, 무슨 근사한 말을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가슴에 의무로 인한 원망감이 있다면, 모두가 그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보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무얼 원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실 내 가슴 속에선 이러저러한 걸 바란다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오. 실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기쁨 속에서 살아야겠소.

누군가가 그걸 언짢게 여긴다 해도, 당신 책임이 아닙니다. 그건 그들의 창조니까요.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반응하게 마련이니까요. 누군가가, 특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슬프겠지요. 하지만 벗이여, 당신은 이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마지막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몹시 애닯아 하는 것은 관습적인 행동입니다. 고대 문화권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또 다른 현실로 옮겨가는 것은 축하할 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랑에는 끝이 없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진실로 분리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보다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그들의 죽음과 질병을 바라보면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건 저의 판단인가요?

 

영혼의 차원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선택합니다. 현실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들 스스로 그 현실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지구와 같은 차원의 현실을 이해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지구와 같은 차원의 현실에 사로잡혀 있는 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태어나자마자 굶어 죽는 삶을 선택하는 거죠? 불구로 태어나거나, 전쟁과 파괴와 절망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이죠? 폭력과 증오가 가득 찬 가정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또 어째서 그런 상황을 선택하는 거죠?

하지만 아십니까? 그 모든 것이 환상임을! 당신 스스로 경험을 위해 창조한 한 편의 영화라는 것을. 인생은 단 한번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당신이 조화와 풍요로움과 기쁨의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고 확신하고 있다면, 이 모든 걸 누리지 못했던 당신의 다른 인생도 많았음을 말씀 드리고 싶군요.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당신은 그 모든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행성 위를 걷는 모든 존재, 모든 국면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렇게 경험을 위해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 환상입니다.

 

프타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존재의 충만함 속에서 살 수 있는지 설명해주시겠어요?

 

벗이여, 그 이야기를 하게 되어 기쁩니다. 존재 자체로서 충만해 지는 것, 하는 사람이 아닌 존재하는 사람이 되는 것, 지금이라는 매수간을 충만함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과거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건 지금 여기를 사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판단 속에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기대를 덜하게 될까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돌고래처럼, 어린애처럼 될 수 있을까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당신은 곧잘 과거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거나 미래의 일로 걱정하곤 하지요. 그럴 땐 그저 이렇게 말해보세요. 또 그러는 군 그리곤 이렇게 말하세요. 지금 난 무엇을 하려는 거지? 조금씩, 조금씩 쉬워질 것입니다. 걱정하지도 말고 자신을 판단하지도 마십시오. 때때로 다시 사로잡힐지 모르지만, 그땐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미래를 생각하느라 바쁘구나 바빠, 이제부턴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당신들은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는 법을 교육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미래를 생각하느라 가르치죠.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과거 때문에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죠.

당신들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억누르려고 하지만 그건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책감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껴안아 버리면 그땐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과거를 바꿔버리면 당신은 강해집니다. 원리는 모두 같습니다.

 

생각이란 도구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더 많은 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 좀더 상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은 진정 생각 자체입니다. 생각이란 실현의 도구지요. 당신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생각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3차원의 현실에선 어떤 것이 물리적 실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각이 앞서야 합니다. 당신은 생각의 산물입니다. 물리적 실체는 곧 의식이고, 의식은 바로 생각 자체입니다.

그러나 생각은 힘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앞선 기술의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여기에 대해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건 이 시점에선 적절치 않습니다. 위대한 기술의 세계에서는 생각이 동력으로써, 달리 표현하면, 연료로써 사용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에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들의 위대한 컴퓨터는 전기에 의해 동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기술의 세계에서는 생각으로 동력을 얻을 것입니다.

 

생각에 대해 뭔가 더 깊은 내용이 있을 거라는 제 느낌이 맞군요.

 

그렇습니다 .벗이여, 당신네 물리학자들은 이제야 비로소 물질을 창조한 것이 생각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소위 위대한 근원의 한 생각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이란 빛보다 더 빠른 진동을 지닌 스펙트럼입니다. 과거 물리학자들은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빛보다 빨리 여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이 빛보다 더 빠른 진동을 지녔다면, 단 한번의 집중된 생각으로 사물을 보낼 수도 있겠네요.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이동시키는 것도 가능하고요?

 

실제로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애써도 할 수 없는 건 무엇 때문이죠? 

 

순수한 생각이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당신이 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벗이여, 당신의 신념 체계가 당신이 서 있는 현실의 반석이라는 걸 아시나요? 전에도 여러 차례 이 말을 했고, 앞으로도 더 말하겠지만, 당신이 딱딱한 벽을 통해 걸어가길 원하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할 수 없다고 믿으면 그땐 정말 할 수 없는 겁니다.

 

프타아, 과거의 모든 영적 지도자들, 붓다나 예수 같은 분들이나, 또 당신 같은 존재들이 어째서 모두 남성인지를 설명해주시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네 역사는 소위 남성 위주로 쓰여졌기 때문에 여성이 간과 되거나 감추어져 왔을 뿐입니다. 남성이란 존재는 여성을 몹시 무서워하는 데, 남성들에게는 역사상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 여성들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창조자인 여성은 당신들의 지구 여신에 더 가까웠습니다.

당신네 역사에서 남성들은 항상 여성의 권능을 두려워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여성들에게 종속되는 것이 그토록 무서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실체는, 진실을 말하자면, 남성에너지가 아닙니다. 사람들과 관계 맺는데 있어 여성 에너지를 지닌 것보다 더 쉽기 때문에 남성 에너지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인류의 의식 속에서 줄곧 권위와 지식을 지닌 것은 남성 에너지였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래서 남성 에너지가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신념 체계 때문에 남성 에너지에 더 잘 반응하므로 남성에너지를 불러들이게 되었다구요?

 

벗이여, 여성들은 줄곧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힘없는 걸 두려워하는 남성들이 힘을 내세우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문화에서는 남성들이 모든 앎과 지혜가 여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에너지의 본질은 아시다시피 그다지 남성적이지 않습니다.

 

자웅동체 에너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벗이여, 영혼에는 성별이 없습니다.

 

성을 초월했나요?

 

사실은 영혼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당신의 영혼은 성별이 없지만 수많은 생애를 거듭하면서 남자가 되기도 했고 여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혼은 모든 걸 초월해 있다기보다는 모든 걸 하나로 통합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매 생애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어째서 호모나 레즈비언이 있는 겁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인류는 실제로는 양성입니다. 성별에 상관없이 육체적으로 사랑을 확장 시키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여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동성 연애를 이상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약간은 혼란이 있을 수도 있겠구요. 우린 지금 이곳의 물리적 신체, 소위 염색체에 대해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성 연애는 대부분 정신적 충격으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영혼 에너지에 성별이 없다는 것은 성적 표현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동성 연애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려선 안 됩니다. 동성 연애든 이성 연애든, 상대방을 가둬 놓으려고 하는 성향은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사랑과 기쁨을 육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성이란 단순히 생식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성은 인류에게 있어 노예화를 위한 또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성이 단지 생식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을 겁니다.

벗이여,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사랑과 더불어 감사와 존경을 여러분 모두에게 드립니다. 늘 그랬듯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저에겐 큰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좋은 저녁시간 되시기를 바라며, 사랑과 기쁨 속에, 빛과 웃음 속에 나아가길 바랍니다. 제가 진실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4. 그대 스스로 문을 닫았다.

 

옛 친구들도 있고, 새로 온 사람들도 있군요. 모두 환영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모임으로써 지구인의 진동 주파수를 높이게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그런 의도를 품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소망을 품고 있으며 그것을 의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의식 밑 바닥이나 위쪽, 혹은 의식의 뒤안에서는, 그 차원에서는, 모든 인류가 근원이라 불릴 수 있는 신/여신과 더불어 조화로운 떨림에 이르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신/여신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그렇게 말하면 그것을 당장 인격화 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근원을 인격화함에 따라 여러분은 근원을 제한하게 됩니다. 근원을 인격화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성이나 다차원의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일종의 반영이라는 것, 근원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본래 진동 주파수입니다. 생각도 진동 주파수입니다. 여러분의 본질은 생각 자체입니다. 원하신다면 근원의 생각이라 해도 좋습니다. 당신들의 진동 주파수는 우주의 진동 주파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당신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조화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신성의 조화에 공명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신성 자체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러 차례 이 점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신념 체계의 일부가 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자주 말씀 드려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현실을 창조하는 건 절대적으로 당신 자신입니다. 물리적 현실과 다른 모든 현실을 창조하는 건 바로 당신의 신념 체계이고 당신의 의식입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선 물리적 현실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죠.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당신 주변의 모든 것에 반영됩니다. 자기 바깥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실은 신성의 반영, 신성의 거울입니다.

당신의 겉사람이 당신의 속사람과 조화를 이루게 되면 모든 것이 베일을 벗고 드러나게 됩니다. 모든 앎이, 당신이 꿈꾸어 왔던 것들-은하계 여행 같은-이, 전 우주에 대한 앎이 당신에게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퍼즐 조각을 맞추려는 인류의 간절한 소망을 우리는 잘 압니다. 벗이여, 우리가 해답을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은 당신 안에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당신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든, 학위를 얼마나 많이 갖고 있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결코 해답을 얻지 못할 테니까요. 해답은 오직 신성의 공명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행성에는 여러 문명이 있어 왔습니다. 역사 시대에도, 역사 이전의 선사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위대한 문명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곳을 떠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는 몇 주일에 걸쳐 당신들의 신념 체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무얼 믿고, 이것이 삶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념 체계라는 것이 어린 아이 때부터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최초로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여길 때부터 태어나서 인류의 집단의식, 집단 공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눈엔 렌즈가 끼워지게 되고, 거기에 따라 삶을 지어 나갑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말씀 드렸는지 모릅니다. 인류는 상처 받은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각자 모두가 말입니다.

벗이여, 그건 사실입니다. 당신들은 상처 받은 가슴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내내, 절망과 고뇌가 당신들 곁을 따라다니며 당신들 삶의 동반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내게 말했습니다.

다 좋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밤 다시 거기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당신들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당신들 스스로 고통스럽다고 판단한 그것을 껴안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당신들의 에너지 센터는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이고, 당신들은 내면에 있는 모든 앎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벗이여, 오늘 밤 우리는 변형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라면 몇 번이고 반복할 것입니다.

변형이란 연금술이라고도 불립니다. 여러분은 연금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분자 구조에 변화를 창조하는 겁니다. 감정적 변화란, 고뇌를 엑스터시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엑스터시란 진정 무엇일까요? 신성한 하나됨이요, 분리가 없는 것이요, 자아가 다른 모든 것과 완전히 화합할 때 나타나는 겁니다. 신성한 엑스터시란 경이로운 겁니다. 그건 일종의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고뇌를 희열로 변형 시키는 연금술사의 기술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 몸의 세포 구조 안에서 분자의 변형을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엑스터시에 잠기게 되면, 두뇌 안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엑스터시는 여러분이 과거라고 부르는 것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의 미래도 바꾸고, 당신네 행성의 얼굴도 바뀌게 합니다. 정말 기적이지요. 벗이여,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아주 단순한 겁니다. 그건 여러분이 도달하고 싶지만 난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야. 라고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렇게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림의 떡이 아닙니다. 높은 경지에 있는 스승의 말을 들으면서 음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고 쳐다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은 이 행성에서 살아가는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진실로 여러분의 능력을 넘어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기에 도달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도달할 것이고, 수행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당신들은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상처를 받습니다. 무언가를 판단하는 일에 길들여집니다. 당신들은 자기라는 그림을 그리고 현실이란 이런 것이라고 판단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성인이 될 무렵에는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 체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신들은 자신이 가치가 없고 무언가 충분치 못하다고 믿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의 전쟁에서 얼마나 고투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들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무한한 보물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인류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당신들이 자신을 판단하는 방식이 그토록 고통스럽기 때문에 당신들은 심지어는 자신을 바라볼 수조차 없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겉 가죽으로만 당신을 판단합니다.

자신을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게 되면,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면, 자신의 모든 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되면, 바로 그것이 당신들의 삶 전체에 반영됩니다. 그리하여 당신들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무가치하다는 판단에 둘러 쌓여 상처 받고 고통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리 판단을 내려 보았자, 당신들 자신에 대한 당신들 자신의 판단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리하여 당신들은 에너지 센터가 자유롭지 못하고 늘 고통 가운데 살게 됩니다. 고통이란 전에도 말했듯이,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고통은 판단에 의해 야기됩니다. 무언가 판단할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기쁨의 느낌이 존재 전체로 스며들게 허용해 보세요. 그러면 저항이 없게 되고, 에너지 채널이 열리면서 그 느낌이 배꼽 바로 위쪽에 자리잡은 태양신경총에서 심장으로, 그리고 머리 가운데에 있는 백회에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 느낌은 이 같은 방식으로 우주 전체에 울려 퍼지고, 모든 존재, 모든 의식과 만나게 됩니다. 당신들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게 되면, 상황이 자신에게 해로울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게 되면, 저항은 즉시 태양신경총을 발톱처럼 파고들어 에너지 센터를 닫아버립니다. 에너지가 갈 곳을 잃고 흐르지 못하게 되면, 당신은 고통 속에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감정적인 고통은 흔히 신체적인 고통으로까지 발전되곤 합니다.

고통스럽다고 판단한 상황이 나타나면, 당신들은 주로 벽을 쌓고 그 뒤로 숨는 것으로 반응을 나타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 벽은 점점 높아지고, 점점 두터워져서 당신들은 상처를 입지 않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면 깊숙한 곳에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니 변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매우 간단한 절차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책임을 지는 겁니다. 당신들의 현실을 창조한 건 절대적으로 당신들이니까요. 당신들의 삶 가운데 함께 창조되지 않은 상황이나 사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그랬다고 책임을 지십시오.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게 할 수 있다면 기쁨의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쉽지 않다고 느끼게 되면 그땐 가슴에 통증을 느낄 겁니다.

두 번째 단계는 판단의 단계입니다. 당신에게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누군가를 판단할 때, 당신은 뭐라고 말합니까? 개자식 그러죠? 누군가를 비난하는 순간, 당신은 책임을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당신의 삶에서 그다지 좋지 못한 일이 생겼다면, 그건 경험을 위해 공동으로 창조한 겁니다. 당신이 선택한 모든 것은 다 경험을 위해 선택한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경험을 위해..

어떠한 상황이든 그 속에는 진주가 있습니다. 벗이여, 당신이 보석인 것처럼, 어떤 상황이든 그 속에는 보석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어려운가요? 자신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어떻게 축복하냐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난 이 사람과 더불어 이 상황을 창조한 것이다. 그런 다음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죠.

, 하나님 맙소사, 내가 또 판단의 무덤에 갇히고 말았군

하지만 벗이여, 괜찮습니다. 판단은 유효한 것이며, 당신 자신의 신성한 표현입니다. 그 판단을 껴안고, 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그 고통을 축복하세요. 그리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생애를 거듭하면서 고통을 쌓아온 것은 결국 그 안에서 진주를 발견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기 바랍니다.

모든 걸 껴안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모든 걸 당신 존재의 빛 안으로 품어 안으세요. 당신이 그렇게 하면, 에너지를 누르고 있던 고통의 발톱이 제거됩니다. 이런 식으로 변형이 일어나는 거지요. 복부에서 시작하여 가슴으로, 머리 끝으로 가게 되면, 그땐 기쁨의 절정을 알게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두가 하나임을 이해하게 되는 거지요.

사랑하는 이여,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함으로써 변형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남성 에너지를 발휘하여 무엇인가를 행하려고 든다면, 그건 변형이 아니라 투쟁이 되어 버립니다. 변형이란 오직 받아들임으로써만 이루어집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돌보고 양육하는 겁니다. 겉사람의 당신을 속사람의 당신에게 넘겨주는 겁니다.

넘겨주다, 항복하다, 굴복하다 라는 표현을 당신들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네 문화에서 그 단어는 고상하지도 않고, 영웅적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벗이여, 진정한 항복이란 힘과 결합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벗이여, 당신은 진정으로 신성의 표현입니다.

자기 자신이 신성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자신의 모든 면, 자기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생각, 그토록 혹독하게 판단했던 모든 행동이 진실로 신성한 표현임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는 이미 알려진 현실이든, 미지의 현실이든, 거기 있는 모든 것이 다 근원의 생각임을 알게 될 때까지는, 당신 자신이 바로 장미 향기 풍기는 절대적인 신임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3차원의 엑스터시입니다.

 

당신은 특별히 자니 킹(저자)의 의식과 연결된 것인가요? 혹은 그녀 의식 속에 있는 위대한 부분입니까?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존재에 대해 더 확실하게 배우기 위해 우리 자신의 보다 위대한 부분과 접촉하거나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3 차원에 점점 많이 나타나는 외계인이나 다른 존재들은 인간의 또 다른 국면입니까?

 

그게 다 한 문장입니까?^^(청중 모두 유쾌하게 웃는다.) 엄청나군요. 사랑하는 이여,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분리는 없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의식이라고 여기는 것과 초의식이라고 여기는 것 사이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분리도 없습니다. 분리된 건 없습니다. 진동 주파수가 다를 뿐입니다. 결국 당신의 우주, 실은 다원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진동 주파수입니다. 당신과 함께 얘기하고 있는 이 에너지와 우리 여인의 의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진동 주파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우리 여인을 통해서만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은 지금 나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분리는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구요.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분리란 진실로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세상에는 오직 서로 사랑하는 있게 될 겁니다. 세상 전체가 사랑하는 연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몸을 떠날 필요가 없이 몸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겠지요. 알겠어요?

 

질긴 인연을 갖고 태어났는지, 평생토록 관계를 맺으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속시원히 해결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해결책은 없을까요? 그런 배움을 종결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랑하는 이여,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했다는 느낌이 드는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사연이야 저마다 다를지 몰라도,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일이든 여러 사람 사이에서 생긴 일이든, 그 느낌은 다 같습니다. 관계야말로 진실로 가장 큰 배움의 마당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면의 진실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느낌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연이야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삶에서 삶으로 건너 뛰면서 당신은 배움을 위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선택해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느낌으로 껴안은 생각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어떻게 경이로움을 포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지금은 특별히 하나됨의 순간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화창한 날씨,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바닷가에 있었고 꽃들이 만발하였다. 이런 외면적인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경치야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느낌이 생기는 과정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순간을 포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에 대해 살펴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 속에서 똑 같은 느낌을 갖는 경우가 반복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문제가 반복된다면, 반복되는 그 느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외부의 현실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고통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들은 분노에, 공격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아닌 것은 모두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두려움의 불꽃이 일어나면 그것은 곧 분노나 적대감 등으로 이어집니다.

껴안아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뿐입니다. 당신이 느낀 바를 무가치하게 여기면, 바로 거기에 힘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러니 억누르지도 말고, 떨어뜨리지도 말고, 멀리 떨쳐버리려 하지도 마십시오. 오직 껴안으십시오. 벗이여, 껴안는다는 것은 모든 면을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 자신의 일부임을 아는 것입니다. 껴안는다는 것은 분명 유효합니다. 껴안음은 분명 신성의 표현입니다. 오직 껴안을 때에만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당신 자신의 빛으로 당신의 두려움을 껴 안으세요. 그럼으로써 당신은 더 많은 빛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껴안으려 하여도 그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두려움이 생기곤 합니다. 두려움을 억제하기가 힘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자아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의 문화권에서는 항상 자기 통제력을 잃지 말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자기 통제력을 잃게 되면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지배하게 되고 그러면 당신은 죽게 될 거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사실은 죽음조차도 괜찮은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죽음이 없음을 이해한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괜찮습니다. 그 두려움을 허용하세요.

정말 끔찍하게 두려웠어,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어.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해서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넘겨주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당신의 진정한 자아에게만 넘겨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허용하고 껴안는 사람은 빛을 가져다 주고 사랑을 불러 일으킵니다. 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판단하지도 마세요.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모두가 해답을 알고 있는데 자기만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자기만이 배를 놓쳤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사람들은 곧잘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많이 배운 사람들도 있고, 영적인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적인 말.. 그것도 물론 괜찮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꼭 새겨둬야 할 현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모든 영혼은 실은 출발선상에 있다.

돌고 도는 조화의 이치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사실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오래된 영혼이야 자, 여러분도 모두 오래된 영혼입니다. 태고적부터 존재해왔지요. 질문 있습니까?

 

프타아, 저에게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날아가는 것 같아요.

 

매우 간단합니다. 시간을 멈추세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라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시간을 바꿀 수 있습니다. 당신의 힘은 매우 강력합니다. 시간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어요. 저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당신은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시간이란 휘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고 싶군요. 당신이 원한다면 바꿀 수도 있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지탱해주고 지원해줄 재능이나 자질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겁니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삶은 대부분, 각 생애마다 가지고 나오는 드라마와 정신적인 상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완전한 영혼 그 자체입니다. 영혼의 차원에서는 삶이 진정 꽃 피어나기를 소망하고, 그런 의지를 갖습니다. 모든 일을 기꺼이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신성의 차원에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지난 생애를 거듭되는 수많은 생애를 돌이켜볼 때면 언제나 연대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과거의 삶들이나 미래의 삶들이나 사실은 똑 같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니 항상 최대의 잠재적인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다른 생애들을 통해서는 탐구되지 않은 것들이 이번 생애에선 있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다른 생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사람들은 시간 역행 최면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다른 생애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고 싶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미래의 생애도 탐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공 연속체에 해당하는 이 국부적인 시간 밖에서는 미래의 삶이 이미 가동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탐험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떤 영상을 접하고는 그것을 과거의 삶인 것처럼 느끼곤 합니다만, 사실은 과거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의 삶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부분이 바로 미묘한 대목입니다.

당신은 다차원의 에너지이므로 여러 차원의 주파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높은 차원의 스승일 수도 있습니다. 영혼 에너지는 이 행성, 이 시간대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생애의 모든 현실이 가능합니다. 거의 무한대의 삶이 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다른 생애와 관련을 맺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이 생애와 관련을 맺을 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각 생애는 마치 포개진 캡슐과 같기 때문입니다. 양파 껍질처럼 다중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이 생애에 깊이 참여하면, 매 순간을 충만하고 풍요롭게 살아간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다른 생애에 대한 생각으로 도망가고 싶은 욕구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할 가장 위대한 소유물은, 바로 당신의 자아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당신의 위대한 자아 안에 모든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는 것은 그처럼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프타아, 우리는 각자 무한대의 확장으로서 근원의 일부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이고, 각자 내면의 신을 찾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높은 차원의 영적 스승들은 항상 창조주, 하나님께 경의를 표해 왔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높은 차원의 영적 스승들, 당신네 역사의 역할 모델이었던 사람들은 매번 인류의 집단 의식을 향해 얘기해 왔습니다. 현시대 인류의 집단 의식은 이제 절정으로 치닫고 있으며, 놀라운 변화의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인류는 더욱 원대한 사상 체계를 보듬어야 할 때입니다. 근원은 하나의 인격체 이상이라고 말씀 드리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류에게는 엄청난 의식의 도약임을 이해하는 바입니다.

지금까지의 당신네 문화에서는 절대적 권위자를 필요로 했고, 위대한 어머니나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는 편이 인류에게는 훨씬 쉬웠기 때문입니다. 근원 자체를 절대 권위자로서 상상하던 여러분의 옛 관습을 뛰어 넘어. 우리가 말하는 신/여신이나 위대한 지구 여신의 개념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란 버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벗이여, 우리는 높은 차원의 영적 스승들의 말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당신의 의식이 커짐에 따라. 보다 위대한 당신 자신을 향한 라디오 안테나가 열린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뿐입니다.

 

무엇이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무얼 바래야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위대한 자아에 모든 것을 넘겨 주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런 무지가 걸림돌이 됩니다.

 

벗이여, 당신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당신의 논리적 지식으로 알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에고를 위대한 자아에 넘겨 주는 연습을 자주 하다 보면, 소위 직관이라는 것에 도달하게 됩니다. 당신의 논리적 마음은 지금까지는 생존을 위한 경이로운 도구였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당신네 종족의 생존은 직관에 달려있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을 양육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알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느끼십시오. 내면에 활짝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상상하고 허락해 보세요. 그것이 바로 믿음의 도약입니다. 벗이여, 있는 그대로의 당신은 진정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은 신성을 알고 있으며, 영광스럽고 무한한 존재이며, 창조의 기쁨으로 충만한 존재입니다. 당신의 속사람은 당신이 활짝 꽃 피워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꽃이 자신들의 뿌리가 어떻게 놓여 있는지 걱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꽃이 비가 올지 안 올지를 걱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흠 없는 완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는 겁니다. 당신 몸 안의 모든 세포가 알고 있으니, 당신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 잊은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 자신을 믿으세요. 그 앎이 실현되도록 허락하세요.  우리는 계속 더 말해줄 것이고, 당신은 결국 앎에 이르게 됩니다. 어려울 게 없습니다. 투쟁할 것도 없습니다. 투쟁은 육체적 생존에 속한 것입니다. 자신의 에고를 위대한 자아에 귀속 시킨다는 것은 인류의 영성을, 그 모든 경이로움을 살리는 일입니다.

 

당신은 신성과 더불어 공명함으로써 이해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근원에 주파수를 맞추면 알 수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을 짧게 요약해 주신 셈이네요. 그것이 바로 방법입니다. 인류의 주기적 변화에 따라 젊은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란 것도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최근 몇 년가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이미 10년 전에 태어난 아이들과는 앎에 있어서 사뭇 다릅니다. 지금 태어난 아이들은 돌고래의 의식을 갖고 태어났고, 별의 씨앗을 지닌 채 태어났으며, 선천적으로 더 많이 깨어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변화를 창조할 것인데, 당신네 교육 체계 속에는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게 많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변화 시키기 위해서는 창조되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인류의 엄청난 의식의 도약을 도와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선천적인 질병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부모나 조부모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요.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감정이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신념 체계가 질병을 창조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태어날 때부터 질병을 지녔다고 해도, 변화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몸 안에 있는 세포 조직의 집단 공명과 가족의 집단 공명, 한 나라의 문화적 집단 공명에 대해서도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질병이 선천적이라고 믿는 가족이 있다면 정말로 그렇게 됩니다.

물리적 현상만 놓고 따진다면, 유전적인 질병의 비율은 극히 미미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믿는 것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의학이 당신을 고칠 수 있으리라 믿으면 그렇게 됩니다. 당신이 질병의 희생자라고 믿으면 역시 그렇게 됩니다. 가족 중의 어떤 한 사람이 어떤 병을 앓는 다고 해서 그 자녀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요?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공동 창조자로서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의식을 반영하는 육체 또한 우리가 선택한 거죠. 질병이란 우리 의식의 결과입니다. 다라서 우리는 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 공명과 더불어 공명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바뀔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육체적으로 불구인 상태로 태어났다면, 그건 분명 그 사람이 선택한 겁니다. 그리고 그 가족 구성원이 다 같이 육체적 불구라면 분명히 함께 창조한 거죠. 질병은 육체가 제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프타아, 동물들의 질병들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건 그들의 업보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의식을 반영하는 겁니까? 내가 키우는 닭들 중 한 마리는 백내장을 앓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 질병이 생겼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당신과 감정적으로 결속된 동물들, 예를 들면, 고양이나 게, 말 같은 동물들과는 감정적 유대가 아주 강하므로, 그 동물들은 당신의 생각을 신체 증상으로 반영하기도 하고, 당신과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신체 증상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정적 유대감이 없는 경우에는, 동물들도 자신의 경험을 위해 병을 앓는 것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벗이여, 당신이 아끼는 닭에 문제가 생겼다니 당신이 닭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수정은 진동 주파수나 의식의 진동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까?

 

수정은 도구일 뿐입니다. 그 이상은 아닙니다. 당신의 지구도 결정체라는 의미에서는 수정이고, 인류 또한 수정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힘의 대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당신이 지니고 있는 수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요. 수정은 증폭기의 구실을 하고 있는 도구로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정보를 저장하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 자신의 의식을 고양 시키기 위해서라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도 수정을 사용하는 것이 즐겁다면 그땐 그것이 쓸모가 있다고 봐야죠.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선택했다는 건 비교적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동물들은 어떻습니까? 동물들도 우리처럼 경험을 선택합니까? 우리는 동물들이 학대 당하는 걸 봅니다. 동물들은 자신들이 학대 당할 곳으로 가기로 스스로 선택한 겁니까?

 

벗이여, 모든 것은 공동으로 창조한 겁니다. 집에서 길들여지기 쉬운 동물들은, 실은 인류에게 감정을 반영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배움을 위한 좋은 기회를 인간에게 제공해 주지요. 고래나 돌고래는 인류와 마찬가지로 영혼 에너지입니다. 그들은 깨어 있는 인간들을 위해 끔찍한 이야기를 창조하기로 선택한 겁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결정한 겁니다.

2차원의 동물들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인류가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처럼은 못하지요. 인류가 더욱 더 앎에 이르고 의식이 더욱 더 확장되어 가면, 이 행성 뒤에 사는 모든 생물들도 그렇게 됩니다. 그것이 공통된 울림이라는 겁니다. 진동 주파수가 높아지면, 모든 곳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인류가 4차원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동물들도 그렇게 될 것이고, 모든 풀들도 그렇게 될 겁니다.

 

모든 인류가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실은 모두가 다는 아니지요.

 

모두가 동시에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당신 같은 사람들만요. 인류가 변화를 위해 막강한 힘을 모을 때, 그건.. 말로 표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 차원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선택하는 인간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들이 창조한 동물도 그대로 남을 거구요. 하지만 또 다른 의식 차원에선 모두, 모든 동물들도 변화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물들의 영혼은 이동해 가고, 이곳에는 홀로그래프 같은 것만 남게 된다는 것인가요?

 

그처럼 간단한 게 아닙니다. 동물의 영혼 에너지는 말하자면 조각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차원 존재인 인간의 영혼 에너지가 동물하고 싶다고 결정하면, 이건 3차원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만, 영혼 에너지의 일부가 그 경험을 위해 동물로 태어나는 겁니다. 영혼 에너지 전체가 그, 동물 속으로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사람이 동물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 에너지는 수정이나 바위, 혹은 꽃 같은 형태로 자신을 경험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어떤 진동 주파수에서는 영혼이 어떠한 차원이든 다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지구라는 행성의 집단의식은 10년 전보다 더 파괴적인 것 같습니다. 지금이 10년 전보다 더 좋은 속도로 진보하고 있습니까? 우린 지금 그 엄청난 도약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겁니까?

 

주기적 변화의 양상으로 볼 때, 당신들은 분명히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가까워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10년 동안 죽음과 파괴 대신에 사랑과 생명을 위해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면 질문에 대답이 됐나요?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시간이 다됐습니다. 진실로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저에겐 가슴의 기쁨입니다. 당신들 자신이 신성의 표현임을 진실로 알고자 소망하는 가운데 온 은하계에 여러분의 에너지를 널리 확장 시켜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용기에 진정 경의를 표합니다.

 

5. 그대는 우주의 중심 태양

 

오늘 저녁에는 위대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머리로 듣지 않고 가슴으로 듣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위대한 변화에 대해서 영혼의 연금술이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요약해봅시다. 고뇌를 엑스터시로 변화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지요. 사랑하는 이여, 아주 쉽습니다. 당신이 절대적으로 당신의 현실을 창조했음을 알고 책임을 지는 겁니다. 당신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 당신의 개인적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공동 창조물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판단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 어떻게 판단과 하나가 되지요? 당신이 판단에 길들여져 있음을 알고, 판단 또한 유효하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판단 역시 신성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판단 역시 존재하니까요. 그러니 변화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껴안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됨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판단에 길들여져 있어. 나 자신도 판단하고, 상황도 판단하지. 나와 관련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판단하길 너무 잘해.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이라도 그것을 창조한 것은 나 자신이야. 배움을 얻기 위해서 내가 그런 상황을 창조한 거야.

이런 식으로 조화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도, 당신이 그토록 혹독하게 판단했던 고통 속에도, 지혜라는 진주가 감추어져 있음을 아는 겁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판단과 하나가 되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당신이 전정 하고자 하는 바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 때는 말입니다.

실제로 살인이야말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책임을 지십시오. 판단과 하나되어 그 느낌을 받아들이십시오. 다시 한번 상기 시켜 드립니다.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고통은 느낌에 저항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들면 당신 복부에 억압되어 있던 에너지가 방출되면서 태양신경총으로, 가슴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토록 간단한 겁니다.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허용하는 겁니다. 그 허용 속에서 연금술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이제 최고급 과정으로 가겠습니다. 이토록 원리가 간단하지만 수렁에 빠져들기가 아주 쉽습니다. 모두가 고통을 피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저항일 뿐입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 해선 안 됩니다. 감싸 안아야 합니다. 껴안아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느낌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느끼는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죽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워합니다. 소위 불가항력이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느낄 때, 내면에 기쁨을 창출하는 어떤 것을 경험하려고 할 때, 당신은 그것이 유쾌하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그러면 즉시 방어벽을 치게 됩니다. 책임을 지십시오.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느낌을 느껴 보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기대하든 기대하지 않든, 당신네 행성에 오게 될 변화는 오고야 맙니다. 당신이 그렇게 되리라고 믿든 믿지 않든, 벗이여,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당신들이 조화로운 환경을 이루어야 합니다. 당신들 모두가 내면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만물이 조화로운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열림입니다. 그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갈망해 마지 않는 깨달음은 변화를 향해 작동을 시작한 우주 전체에 의해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특정한 우리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실체,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지구 여신의 위대한 변화, 당신네 행성과 관련된 모든 존재의 위대한 변화를 도와줄 모든 존재 말입니다.

지구 인류가 영적인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는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그래야만 인류가 그들의 행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고, 또 앞으로의 새로운 기술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곧 전체라는 걸 이해하기까지는, 영적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벗이여, 당신이 곧 전체라는 건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당신이 곧 전체라는 충만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당신이라는 존재의 조각들을, 당신 존재의 모든 면을 다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그토록 가혹한 심판관 노릇을 즐긴다는 사실마저도 다 받아들여서, 당신의 진정한 자아 안에 포용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다 받아들이십시오. 현재의 고통이든, 해묵은 과거의 지나가버린 고통이든, 다 받아들이세요. 당신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다면, 그것은 결코 처음 당하는 일이 아님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이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런 상황을 끌어들였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 스스로 겪어 보고 끌어 안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의 진정한 자아, 위대한 자아가 그 모든 상황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모든 면을 즐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당신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벗이여, 당신이 전체로서 존재할 때, 그것이 곧 귀향입니다. 당신네 행성은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모두가, 당신들을 환영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삶 속에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내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바로 당신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자신이 어떠한 믿음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믿음 체계 안에 갇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믿음 체계 안에서, 당신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당신들이 갖고 있는 판단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변화하게 되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변화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밑바닥에 두려움이 깔려있는 겁니다. 나는 그 등급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나는 충분치 않으며 뒤에 남겨질 거라는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만 남겨 질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습니다. 매우 해봄직한 생각이지만 일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진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뒤에 남겨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실제로 그건 뒤에 남겨지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이해하시겠어요?

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그 과정에서 길을 잃는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변화의 시기가 도래할 때는 지구 전체가 그 변화에 공명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사람들이 동요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것이고, 두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은 아주 비정상적이 방법으로 그 두려움에 반응하기도 할 겁니다.

전쟁이 아주 좋은 예가 되겠지요. 대파멸에 직면했다고 믿는 사람들, 자연이 미쳐 돌아가서 이젠 끝장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정상적 방식으로 대응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징조가 보이거든 변화가 다가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구의 변화에 대해 말할 때에도, 정치상의 변화, 기술상의 변화,삶의 모든 국면에 대해 말할 때에도, 여러분들은 항상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운명의 전조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여러분이 진실로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격변처럼 보이는 어떤 일을 볼 때마다, 여러분들은 사실 우대한 변화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선 것임을.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대신, 지금 우리 시대의 죽음과 재앙부터 껴안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 시대의 죽음과 재앙을 뚫고 나갈 수 있다면, 나중에 죽음과 재앙이 몰려오더라도 그대엔 우리에게 힘을 쓸 수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 온 이유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기 위하여, 머리의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가슴의 지식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일은 분명 여러분 당대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최근 당신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극과 극을 끌어안는 명상 수행을 하게 되었는데,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고통, 두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전 죽어도 괜찮다고 느꼈어요. 죽음을 환영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런 것도 당신이 말하는 그런 과정의 일부인가요.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말예요. 그런 사고방식은 우리 신념 체계와 상반되는 것인데요. 그렇지 않나요?

 

죽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매일 같은 색깔의 옷에 싫증이 낫을 때, 그 옷을 벗어 던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렇죠? 당신의 몸은 말하자면 옷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이 옷을 벗는다고 해서 경이로운 보석과 같은 존재인 당신이 끝나는 건 아니지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죽음은 단지 의식의 새로운 탐험일 뿐이고, 당신이 진정 죽음을 두려워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여, 그땐 발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적 연습의 수준을 이미 벗어났다는 뜻이고, 내면 깊숙이에서 깨달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위대한 변화입니다. 하지만 의식은 당신이 잊고 있을 때라도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갑니다.

 

사랑하는 프타아, 우리의 참된 실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이용하고, 우리의 존재 속으로 탐험해 들어가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는 글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가능하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혼 에너지든 다른 에너지든 당신에겐 항상 유용하니까요. 인류는 훌륭한 책자를 통해 자신들이 에너지들로 둘러싸여 있음을 지적으로 알게 되더라도, 곧잘 혼자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가슴속 깊이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허용해 보세요. 진정으로 할 일이 있다면 긴장을 푸는 것뿐입니다. 그리고는 구해보세요. 그러면 주어질 것입니다.

벗이여, 무엇이 일어나든 받아들이세요. 무슨 일이든 받아들이라는 말은 엄청난 역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자주 당신은 이렇게 말할 테니까요.

내 머리 속에는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우주여 깨달음을 보내주십시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정보를 주십시오. 그리고는 천상의 목소리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늘이 정보를 보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천상의 목소리 형태를 취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당신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평범한 일이 그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의식이 깨어있다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하 이것이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이구나. 이해하시겠습니까? 깨달음이 어떤 식으로 올 것인지에 대한 기대를 갖는 순간, 당신은 즉시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든 개의치 말고, 모든 것을 허용하는 가운데 깨어 있으십시오.

 

고통은 느낌이 아니며, 고통의 뒤안에 있는 깊은 느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이 와서 무슨 일이든 다 받아들이겠다고 말할 경우, 먼저 고통을 느낀 다음 무슨 느낌이 올지를 기다리는 겁니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몹시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습니다. 죽음은 단지 변화일 과정일 뿐이고,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물리적 실체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슬픔을, 가슴저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 고통은 단순한 분리의 슬픔이 아니라, 영겁의 세월 동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분리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 고통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등급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실로 그 고통을 인정하고, 당신이 그것을 불러들였음을, 키우고 축적했음을 알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도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성의 표현임을 알고 껴안아야 합니다. 그것도 괜찮은 겁니다.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합리적인 생각을 하다 보면, 당신은 고통을 밀쳐버리는 것이 되며, 고통을 피하려 하면 위대한 변화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몹시 더운 날 바닷가에서 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안에 뛰어 들기 전에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얼마나 상쾌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바닷물이 육체의 말초 신경이 어떻게 흥분 시키며,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고통을 판단 없이 껴안는다면, 그 결과는 무더운 여름 날 수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짜릿할 겁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느낌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됩니다. 고통은 느낌에 대한 저항이라고 한 말을 이제 모두 이해하시겠습니까?

 

프타아, 지난 번 강연 때, 헤어질 무렵 우리의 용기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고 하셨습니다. 현존하는 신념 체계를 부수는데, 필요한 용기에 대해 말씀하신 겁니까, 아니면 특별히 뜻하신 바가 있었던 겁니까?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실은 폭넓은 의미로 말한 겁니다. 이 삶을 선택한 것 자체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니까요. 사실 이런 차원 안에 있는 어떠한 생애든 다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각 개인이 믿음의 장 안으로 들어서는 것도 역시 대단한 용기입니다. 사실 벗이여, 믿음의 장, 그것이 곧 실상입니다. 어떠한 보장도 없기 때문에 믿음의 장인 것입니다. 인류는 보장 받는 걸 좋아하고, 투자한 것 이상으로 되돌려 받는 걸 좋아하지요. 모두들 좀더 좀더 바라고 있습니다. 믿음의 장은 또한, 당신네 시대의 배경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기대하게 되면 더욱 가속화되지요.

 

인류는 영적인 교육에 더욱 더 마음을 열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이지요. 벗이여, 그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낙담하여 이렇게 묻곤 합니다.

, 이 모든 경이로운 현상이 조만간 일어날 거라면, 어째서 모든 것이 그토록 혼란스럽죠? 여전히 전쟁이 있고,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고, 여전히 살인이 행해지고, 여전히 도처에 불협화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런 증상이 더욱 심해지다가, 그러다가 문득 변화가 오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의식에 분열이 생겨서 그 분열이 극에 달해 밑바닥까지 이르러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면..

 

벗이여, 의식에 분열이란 건 없습니다.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좋아해서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지구의 변화가 명확해질 때, 특히 더 심해질 겁니다. 왜냐하면 그땐 무력한 느낌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나라가 산산조각이 난다면, 재정을 어떻게 유지하고 관료적 권세를 어떻게 붙들고 있겠습니까? 이 나라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몇몇 나라들에서 일어날 대재난을 당신들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들 모두 극히 선택을 잘했다고 할 수 있겠죠?

지구의 대재난에 대해선 말들도 많고, 두려움도 팽배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어떠한 의미에선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여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을 바짝 정신차리게 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더욱 더 자신의 앎에 이르고, 일어나고 있는 일과 더욱 더 조화를 이루면 이룰수록, 대재난의 조짐이 일어날 때, 당신은 거기 있지 않게 됩니다.

당신이 대재난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니 재난이 닥치더라도, 휴가 여행을 취소하지도 말고, 일상 생활도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고, 당신 행성을 향해서도 사랑을 보여줄 때, 어찌 안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이 무엇을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 들이겠습니까? 바로 재난이지요. 안전함이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이 말씀 하신 것을 저는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안전한 우주에 있다는 것, 죽음이란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 말입니다. 저는 그 공간을 경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게는 두려워하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파멸을 두려워하는 부분, 죽음을 두려워하는 부분, 나 자신은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부분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을 바라봅니다.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저는 잠시 동안 극심한 자기 혐오감을 경험했습니다. 그게 거기 있었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이여, 왜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른 거지요? 당신을 좀 놀려주려고 한 말이에요.

 

. 저도 알아요. 전 그저 그런 것에 대해 당신이 한 말씀 해주시기를 부탁 드리는 겁니다. 우린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면에는 아직도 뭔가 다른 것이..

 

물론 있지요.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씀 드리죠. 대답이 뭘까요, 벗이여? 실은, 자기 자신의 거짓된 자아를 포기하는 겁니다. 자기 혐오감, 파멸에 대한 공포는 인류의 출발선이나 다름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거짓된 자아를 넘겨 주는 것을 더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 말해보세요. 자기 혐오의 순간, 당신은 무엇을 했죠?

 

저는 거기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혐오감은 제 머리 속을 계속 맴돌며 떠나지 않았죠. 결국 저는 그것이 가치가 있으며 나 자신의 신성한 국면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러고 나자 그런 감정이 없어졌어요.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이여, 그냥 그렇게 사라졌다 이거죠. 하지만 이봐요. 그것이 정말로 순간적인 공포였다면, 당신은 그것을 변형 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 순간 당신은 분명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혐오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 드립니다. 엄청난 고통을 느낄 때,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머리를 떼어 내어 겨드랑이 밑에 넣어 버리세요. 거기에 있는 편이 훨씬 더 쓸모가 있을 테니까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들이여, 당신들의 삶이란 진실로 느낌, 정서, 느낌의 창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느낌의 길이 열리도록 채널을 허락한다면, 그땐 머리 같은 것은 거기에 없습니다. 당신들은 머리로 느끼는 게 아닙니다. 여기로 느끼는 겁니다 (태양신경총을 가르킨다) 그러니 책임지세요. 판단과 하나가 되세요. 머리를 집어 던지고 느낌을 느껴 보세요. 무리 모두 이것을 새로운 규칙들 속에 집어 넣는 게 어때요? 

 

우리는 지금껏 영성이라는 틀을 만들고 그 안에 갇혀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고통 속에 있게 되면,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느끼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을 내던지고, 당신 말씀대로 울어도 괜찮고, 슬픔을 느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사랑하는 이여, 세상에는 성스러운 척을 하는 사람들, 성자인 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이제 당신은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그들이 당신 눈 앞에서 승천하는 걸 실제로 보지 않는 이상,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눈치 챌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삶의 기쁨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와 말다툼을 하게 되면 그것 역시 반영이지요. 그래서 우린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죄책감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역시 우리의 반영 아닌가요? 우리가 가치를 반영하지 않은 아름다운 반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더욱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다지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은 것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물론 영성은 진지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기분에 잠겨있을 때, 당신은 순한 양처럼 선하게 되는 거구요. 당신은 나날의 삶 속에서 수많은 반영물들을 만납니다. 어떨 때는 당신을 미치게 만드는 반영물도 적지 않을 겁니다. 우린 지금 사람들이라는 반영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을 당신에게 반영해 줄 자연이 없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우린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들 사람이라는 반영물은 너무 음침하고 재미가 없게 느껴지게 때문이죠. 아주 자주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당신은 자연을 창조하였고, 당신이라는 존재의 장엄함과 아름다움, 경이로운 힘과 권세를 진실로 이해하게 되나 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영성은 선하게 되는 것에 관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거지요.

상황이 어떠하든, 매 순간에 존재하는 것, 모든 기쁨과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그 순간에 존재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절묘한 것인가를 알아 합니다. 격정과 분노 속에서도 당신은 살아 있고, 당신은 그것을 선택한 겁니다. 격정과 분노,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치열한 길입니다. 그것에 감사하십시오. 만약 그런 게 없었다면, 그 길이 당신에겐 몹시 따분했을 겁니다. 그 모든 것에 빠져 드십시오. 격정과 분노에 빠져도 좋습니다. 그것을 사랑하세요. 그것은 경이로운 것이고, 역설적으로 당신을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는 원조자입니다.

 

두려움은 진실된 느낌인가요? 아니면 느낌의 부재인가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두려움은 양극성 중의 하나입니다. 인류는 진정 주권을 갖고 있지요. 자유로운 지배권, 자유. 항상 선택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사랑 중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당신은 스스로를 억압하며 이렇게 말하죠. 

, 난 도대체 뭘 원하고 있지? 많은 시행 착오를 거친 후에야 당신은 발견하게 됩니다. 두려움이란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믿음에, 현실에 대한 당신의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믿음 체계를 바꾸고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꾸면, 그땐 더 이상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벗이여, 잊지 맙시다. 두려움도 유효한 것이며, 여러분 모두의 또 다른 국면이라는 것을. 사랑이 아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움 또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억누름으로써, 멀리 떨쳐버림으로써, 또는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변형 시키려 들진 마십시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면 바로 거기에 힘을 부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든, 사랑이든, 당신이 무엇을 느끼든, 당신은 그것을 우주로 투사하게 됩니다. 따라서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든, 당신은 그것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이지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잘 의식해야만 합니다. 생각은 곧 힘입니다. 당신은 생각의 전자기적인 에너지입니다.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현실을 창조합니다. 당신의 신념 체계는 당신 우주의 사상 구조물입니다.

벗이여, 당신은 당신이라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태양입니다. 항상, 항상, 당신이 믿고 있는 바를 탐색하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누누이 말씀 드리지만 당신의 신념 체계는 감옥의 쇠창살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당신의 의식 안에 자리잡고 있는 그 감옥의 벽을 이제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확장된 의식, 더 확장된 깨달음의 세계로 옮겨가야 합니다. 유념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러한 소망을 싹 틔우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머잖아 당신이 믿고 있는 바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상황을 날이면 날마다 당신 자신에게 불러올 겁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가장 간단하게 말해 이것입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은 무얼 믿고 있습니까? 신념 체계의 어느 부분도 부인하려 들지 말고, 그것이 당신 자신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식으로 성장해 가는 거지요. 벗이여, 지극히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제 친구 중에서 한 명에게 알코올이야말로 가장 나쁜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알코올을 아주 좋아하는데요. 알코올이 제일 나쁘답니까? 그거 정말 멋진 판단인데요. 당신이 그렇다고 믿으면 정말 그렇게 되지요. 전에 말했듯이, 당신이 조화된 상태에 있다면, 쥐약을 마신다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자, 잠시 하라하지 마라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고기를 먹지 말라. 땅에서 자란 것이 아닌, 물속에서 재배한 식물을 먹지 말라. 알코올을 마시지 말라. 담배를 피우지 말라. 그래요, 우리도 우리 여인에게 이 점에 대해 이야기했었지요.

벗이여, 당신을 즐겁게 해준다면 무엇이든 하십시오. 균형이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길을 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잔의 포도주 밑바닥에서 깨달음을 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무엇이든 지나치게 빠져들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신 몸을 빛의 몸, 즉 당신 영혼의 확장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몸은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몸을 정중함과 존경으로 대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어떻게 정중과 존경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몸에 정말로 나쁜 어떤 것이 있다고 당신이 믿는다면, 우린 자주 이런 나쁜 말을 듣는데, 그건 당신에게 정말 나쁜 겁니다. 나쁘다고 생각하면 더 나빠집니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알코올의 영향으로 죽지 않는다고. 아무도 담배의 영향으로 죽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상처 입은 가슴 때문에 죽는 겁니다. 몸에게 먼저 물어보십시오. 몸이 먼저 불편함을 호소할 것이니, 뭐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몸이 달가워하지 않는 화학물질을 섭취할 때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할 겁니다.

우린 알코올이 가장 나쁜 것이라고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딱딱한 도그마에 빠져들면, 당신은 정보의 흐름을 막아버리는 셈입니다. 항상, 항상 당신의 몸은 당신에게 몸의 상태를 말해줄 겁니다. 몸은 거울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술 마시는 걸 즐겨도 좋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진실로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당신은 어디에도 영향 받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질문 있습니까?

 

프타아, 저는 직장에서 순간적으로 엄청난 분노를 느끼곤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분노, 타인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를 한 동안 살펴보면 그건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하지만 분노란 무엇입니까? 때때로 그냥 사라져 버리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아주 오랫동안 속을 끓이게도 합니다.

 

분노의 저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판단? 부정적 판단?

 

두려움은 어떨까요? 상처, 고통은 어떨까요?

 

거기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분노, 그것은 사뭇 장엄한 표현이며 전적으로 유효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분노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당신이 분노에 빠져 있다면 그냥 그것을 즐기세요. 멋진 분노를 표현하세요. 당신이 진정으로 분노하게 되면, 몹시 격정적이 되면 당신은 분명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겁니다. 특히 당신이 물건을 집어 던질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웃음)

전에 이런 말을 했었죠.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라고 물어보라. 당신이 이유를 알게 될 때, 고통과 접하게 될 때 그땐 그것을 변형 시킬 수 있습니다. 책임을 지세요.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느낌을 느끼세요. 아참 잊었네. 머리를 집어 던지세요. 이해하시겠어요?

당신이 자신의 진동 주파수의 파장을 높임에 따라 이 차원에 존재하는 당신 주변에, 인류 전체의 경이로운 에너지를 당신에게 끌어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여, 주파수가 높아지면 당신은 저항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프타아, 아침에 일어나면 멋진 하루가 되자고 단단히 각오를 다지곤 합니다. 하지만 장애물 경주처럼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생리를 하기 직전이면 특히 어려움이 느껴집니다. 그 상황은 아주 극복하기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자 여기엔 두 가지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기적으로 균형점이 이동하는 현상이라는 관점입니다. 또 하나는 고정관념으로서 많은 여자들이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그건 엄청난 선전포고가 되어 버렸습니다. 소위 월경 전의 긴장현상이라는 거지요. 월경의 양이 지나치게 많다면 누군가 당신 앞에 벽돌 몇 장을 갖다 놓아 걸려 넘어지게 했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이런 이 벽돌 때문에 걸려 넘어졌네. 오늘은 재수없는 날이야. 그런 다음 긴장을 풀고 그 상태를 즐기세요. 재수없는 날도 상당히 유효한 겁니다. 아시겠어요? 우리가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유모 감각을 잃지 않는 일입니다. 당신이 걸려 넘어진 벽돌을 보고 웃으면서 이런 재수 없는 날이군 하고 말할 때 당신은 그 모든 것이 변하게 됨을 발견할 겁니다. 왜냐하면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웃음을 웃을 때, 당신은 진정 조화로운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큰 소리로 웃을 때, 그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간의 기쁨이요, 충만감이요, 우주와의 공명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린 너무 거창한 것이나 너무 무거운 주제에는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 모두가 그런 거창하고 심각한 문제들을 도맡아 고민하느라 항상 바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대신해 주니 우리는 심각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안 그래요?

자신을 판단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여인이여, 전에도 말했듯이 인류는 모든 경험으로부터 배워 나가는 생명체입니다. 당신이 높은 차원의 여신이 되어갈 때, 재수 없는 날은 없을 겁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고를 복종 시킨다는 거지요.

 

저는 꿈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저는 대체로 환상적인 꿈을 꾸는데, 최근엔 거대한 산사태가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중국에서 벌어졌다는 겁니다. 이 생생한 꿈이 실제 상황인지 궁금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당신은 분명 실제 상황에 들어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 그렇게 합니다. 꿈에서 자주 이 행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게 되는데, 단지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모를 뿐입니다. 물론 당신의 꿈 가운데는 소위 계시적인 내용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신 행성의 입장에선 모든 인류간에 분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발을 들여 놓는 모든 현실 차원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진실로 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연스럽지 못한 건 당신의 분리 개념입니다. 다시 한 번 꿈의 상태에 대해 상기 시켜 드려야겠군요. 당신의 꿈 상태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다차원적입니다. 흔히 흘러 들어온 정보가 당신의 의식적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경우 당신은 자신의 의식이 이해할 수 있는 영상을 창조합니다.

꿈 속에서 당신은 하늘을 날기도 하고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기도 하는데, 그건 당신의 여행을 상징하는 겁니다.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자주 있지요. 때로는 그들이 이번의 삶, 즉 이 의식적 현실에서 알지 못한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그건 다차원적입니다. 인류는 아무리 자주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들이 각각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분리가 없음을 진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의 옷감을 짜는 데 쓰여졌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혼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당신 자신의 어떤 국면으로부터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은 진실로 경이로운 존재이며, 당신이 자신의 경이로움을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자아의 다차원적인 국면을 전부 다 당신의 의식 속에서 더욱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항상 분리의 고통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에게 위대한 변화를 허용할 때, 우주 전체와 하나됨의 절정을 경험할 때, 조금씩 조금씩 그 분리는 줄어들 겁니다. 그것은 오직 자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사랑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본래 모습은 장엄하고 경이롭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당신의 우주라는 보석의 한 단면입니다. 당신의 모든 면이 그 단면을 형성한 겁니다.

신성한 근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당신 모습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존재함 속에서, 당신의 모든 면을 인정하고 껴안는 가운데, 당신이 그토록 열렬히 바라던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당신이 무엇을 함으로써 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존재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는 피어나는 꽃 봉오리의 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신성한 빛을 향해 돌리고, 진실로 자신이 신성의 한 표현임을 이해하도록 하세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장미 향기 풍기는 신입니다.

오늘 저녁 이 장소를 떠나서 하늘을 바라보고 달의 영광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당신 또한 그런 장엄한 아름다움 속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달은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압니다. 그것이 그녀에게 위대한 기쁨을 주듯, 당신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명상하다 보면 당신에게도 위대한 기쁨이 찾아들 겁니다. 여러분 모두를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벗들이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좋은 저녁 되십시오.

 

6. 기쁨으로 나아가 즐겨라.

 

오늘 저녁엔 여러분의 믿음 체계를 살펴보는 걸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여러분과 가볍게 얘기를 나누면서 여러분이 가슴뿐 아니라 두뇌를 활성화하여 질문을 하게 하고, 이런 식으로 좀더 명확한 이해에 도달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에 얘기하려는 것은 아주 예민한 주제로, 인간의 성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우린 전에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사뭇 많은 말을 했습니다. 먼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특히 당신들의 어린 시절을 다루려고 하는데, 인간은 유아기와 아동기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믿음 체계를 형성하고, 그것이 결국 당신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성적 존재이고, 당신들도 도한 그러합니다. 당신네 종교에서, 성은 매우 그릇된 것으로 여겨져 왔고, 사악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음, 사악한 것, 그게 정확한 표현이겠군요. 어릴 때부터 체득해온 문화적 유산 때문에, 당신이 종교적 양육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당신들의 공명 속에는 죄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당신네 문화에서 인류는 성적 본능을 지닌 것이 원초적이고, 추한 것이라고 이해하도록 양육되었습니다.

성이란 결코 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면 갑자기 섹스를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리고 출산을 위한 섹스는 멋지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성적 존재입니다. 당신의 몸은 빛 에너지가 머무는 성전입니다. 어째서 신성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성적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신들이 아무리 지적으로 각성되었다고 해도, 당신들 안에는 여전히 섹스에 대한 정서적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그 때문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면, 성에 대한 사회적 관습이 넌센스임을 지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뒤쳐나가 실험도 해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불만족스럽기만 합니다. 자신들의 능력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여자든 남자든, 자신들의 인체를 보고 불만족스러워하고, 사회적인 표준에 미달된다고 여깁니다. 자신들의 완성도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지요.

어느 누구도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지만 당신들은 그 방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당신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사랑 받을 가치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여기 저기 기웃거려 보고 뉴에이지라는 훌륭한 영성을 발견하고 발을 들여 놓기도 합니다. 뉴에이지의 어떤 파들은 성적으로 관대한 자세를 표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 그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초월했고, 그걸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섹스보다 더 고차원적으로 되면 섹스는 싱거워져 버립니다. 허리 부분에 속하는 어떤 것에 너무 깊이 빠져 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줄 아느냐고 경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 역시 아무래도 이상하기만 합니다. 그리하여 당신들은 그 부위를 문제시하게 되고 불편하게 여겨 버립니다. 불편함, 그것이 곧 병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성적인 것이 변질되어 끝내는 병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곤 손을 털면 그만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결혼을 하면 되니까요. 신은 길 잃은 양을 도와주리라. 벗이여,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꿰려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린 지금 가슴의 표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생기 있게 기쁨을 표현하는 것, 서로 통하려는 욕망,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다는 깨달음, 심판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당신의 몸은 참으로 빛의 존재의 표현이라는 것, 당신이 몸으로 기쁨을 창출할 때 그것은 진실로 전 우주에 메아리 친다는 것.. 진실로 당신은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믿음대로 창조하고 구현합니다. 그러니 기쁨으로 나아가 즐기십시오. 가슴으로 즐기십시오.

수많은 세월 동안 인류는 성을 권력의 도구로 이용해 왔습니다. 요즈음 들어 당신네 문화권의 사람들은 물질 위주의 사고 방식이 팽배하여 성을 물질에 종속 시키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역사 속에서도 여자들이 동 때문에 노예로 팔려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여자들은 팔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팔고 있습니다. 남자는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존경 받고 있다는 심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소위 사회적 평판을 높이려고 여자를 취하여 자신이 매우 성공한 사람임을 과시하곤 합니다. 이건 기쁨으로 나아가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반영하는 것뿐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반영하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진실로 주권적 존재임을 알게 될 때, 진실로 신성의 표현임을 알게 될 때, 자유함 속으로 나아가 놀라운 공명을 지닌 누군가를 만나 웃음과 기쁨 속에 있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당신의 몸은 당신의 가슴속에서 진실한 공명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에너지 공명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당신은 진정 기쁨에 빠질 것입니다. 그 빛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당신이 성적 표현을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고, 당신의 가슴은 개입되지 않는다면 그땐 그 이유를 찾아보십시오. 벗이여,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성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판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동성 연애나 이성 연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의 마음이 끌리는 곳에서 육체적으로 자연스런 표현을 하는 것 그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균형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판단입니다.

 

그러면 판단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죠?

 

판단이 어떻게 작용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판단을 함과 더불어 당신은 무얼 하죠?

 

모르겠어요. 판단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 보아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먼저 이유를 알아차려야 하겠죠? 그리고 판단 뒤에는 어떤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여, 그 모든 것을 껴안으면 됩니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르겠어요.

 

예를 하나 들어 달라는 건가요? 좋습니다. 당신이 다른 누군가의 행실을 보고 어건 옳지 않아 하는 상황이 일어날 때, 당신이 정말로 하게 되는 것은, 당신 역시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걸 하고 싶어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그런 생각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그런 생각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유를 보아야만 합니다. 그런 판단의 밑바닥에 깔린 근본 신념은 무엇인가? 두려움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탐색해 본다면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남자들의 내면에는 동성연애자로 판단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성연애자로 판단 당한다고 해서 두려워할 건 없습니다. 실제로 동성연애자들은 발각 당하는 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동성연애의 경험이 익고 그것을 즐겼지만 이젠 동성연애를 하지 않는 남자들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발각 당할까봐 정말 두려워하죠. 이건 무슨 뜻인가요? 정상이 아니라는 두려움, 죄를 지었다는 두려움, 비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여자들의 경우엔 이런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동성애의 경험을 보다 잘 다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죄의식이 있다면 그건 아직 배우지 못한 가르침입니다. 두려움? 간단합니다. 두려움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책임을 지고..

 

머리를 집어 던져라?

 

그건 나중에 할 일이죠. 먼저 판단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머리를 집어 던지고 느낌을 느끼는 겁니다. 사랑이 아닌 건 모두 두려움입니다. 벗이여, 우리는 당신들에게 누누이 말합니다. 사랑의 표현이 아닌 건 모두 두려움이라고요. 두려움을 어떻게 변형 시키냐고요? 어떤 상황을 창조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 안에 담긴 지혜의 진주를 발견하십시오. 당신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한 당신의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당신의 모든 면이, 심지어는 판단조차도, 다 신성의 표현임을 진실로 깨닫고, 그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의 빛으로 껴안을 때, 참으로 위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느낌을 느끼세요. 그 정도면 충분한 답변이 됐나요. 사랑하는 이여?

 

네 그런데 질문이 더 있습니다. 판단과 하나가 되는 것, 그건 내 판단이 무엇이건 그저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허용하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그렇습니다. 인정, 허용, 이것이 모든 것을 조화로 이끕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가 되는 거지요.

 

그저 그것을 허용하라고요?

 

. 그것이 바로 하나가 되는 방법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어떠한 모습이건,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방비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이여. 본래의 위대한 자아에게 가짜의 에고를 넘겨주는 거지요. 당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넘겨주는 일 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자신의 겉사람을 속사람에게 넘겨주는 것, 그것은 당신의 우주에서 가장 장엄한 일입니다. 그런 품성을 지닌 자야말로 가장 강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고 있다면, 상황을 거부하는 대신 모든 것과 의식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겠네요. 자신을 추스리려고 애쓰기 전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벗이여, 당신이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당신은 그것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저항하는 것은 더욱 끈질기게 달라붙습니다. 당신은 실제로 경험해 보기 위해 드라마나 혼란, 분열, 부조화의 상태로 사물을 불러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혼은 고집이 매우 세며, 어떤 면에서는 나와 같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고향으로 데려 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 길에는 탈출구가 없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할 테니까요.

 

프타아, 신념 체계에 관한 건데요. 전생으로부터 현생으로 두려움을 가져오는 건가요? 아니면 현생의 어떤 상황이 두려움을 가져오는 건가요?

 

양쪽 모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씀 드려야겠군요. 전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나치게 연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두려움이 일백 생애 전에서 온 것이건, 바로 전 생애에서 온 것이든, 아니면 모든 전쟁에서 온 것이든, 현생에서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다루어야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이 생애로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시점에서 존재 가능한 현실들로부터 두려움을 가지고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 생은 어떨까요? 그것도 동시에 존재하는 겁니다. 이 시공 연속체 밖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당신이 다른 생애에 그토록 마음을 빼앗기면 당신은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다른 생애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두려움의 속알맹이가 무엇이든 그것은 당신이 끌어들인 거라고. 우리는 또 말합니다. 당신이 껴안고, 변형 시키고,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면, 다른 모든 삶들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그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섹스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섹스의 비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말입니다. 섹스는 사실 매우 큰 슬픔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프타아, 당신이 상호 작용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는 성적인 교제를 굳이 성교와 연관시키고 있진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적 표현은 굳이 말하자면 관능을 포함하지만 반드시 성행위를 포함할 이유는 없습니다.

 

성행위를 해도 괜찮은 것과 마찬가지로 성행위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인가요?

 

네 물론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교류가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고, 접촉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가운데 실제로는 성적 교환을 한다는 뜻인가요? 우리 자신과 총체적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 즉 우리 자신과 성적 관계를 갖는 것 역시 중요하고요?

 

그렇고말고요. 당신의 성적 본능은 당신 자신의 다른 국면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자기 자신과 충만하고 멋진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성관계나 다른 멋진 관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더 진보된 문명, 가령 플레이아데스 같은 곳은 성본능을 어떻게 다룹니까?

 

다른 국면과 마찬가지로 성적 표현을 하는 휴먼노이드형 인간들(인간에 가까운 우주인)은, 나날의 삶이 충만한 것처럼, 충만함 속에서 성 표현을 합니다. 지구인들 모두가 존재의 충만함 속에 있게 된다면 그것이 모든 면에 반영되어 당신들의 성본능은 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들 속에 성이라는 전체성 속에 존재하는 걸 막고 있는 두려움과 판단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서 성이 사람을 조종하기 위한, 권력을 잡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게 되었을까요? 어찌하여 당신들은 불안 속에서, 질투 속에서 소유욕 속에서, 죄책감 속에서, 부끄러움 속에서, 두려움 속에서 성적 교제를 하는 것일까요? 왜 진정한 즐거움이 될 수 없을까요? 다른 국면과 마찬가지로 섹스 또한 생기발랄한 것,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자신들을 특별한 관계로 약속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성적으로 충실할 것을 맹세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조명해 주시겠습니까?

 

결혼을 할 때는 서로에게 변치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런 약속은 죄책감과 의무감인 때문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의무감이 어떻게 짐이 되는지, 어떻게 원망으로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러나온 관계에서는 기쁨을 선사해 줍니다. 관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결박이 되고 마음이 더 이상 그곳에 없을 때는 모든 면에 반영됩니다. 단지 성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들이 성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지켜보도록 하십시오.

성을 따분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건 아닌가요? 당신의 인생이 더 이상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재미로 이용하는 건 아닌가요? 당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혹은 다른 누군가의 관심이나 사랑, 사랑, 욕구를 불러일으킬 만큼 가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걸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성은 더 이상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이 아니라 두려움의 발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건 이유를 보라는 것입니다. 항상 이유를 보십시오.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 제한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많지만 우린 지금 성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진실한 유대 관계가 있다면, 의무로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의 자아와 조화를 이루면 그땐 질투도 없고,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를 소유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어할 때는 잃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류가 모든 것을 떨치고 달려나가 누구하고든, 어떻게든 성을 경험해보라고 권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이 당신에게 기쁨을 주지 않고 충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충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하는 것은, 조금쯤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자기 자신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사실 당신들은 죽는 날까지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을 통해서 당신 존재의 전체성을 느껴보세요. 남성에너지와 여성 에너지의 균형을 경험해보십시오. 우린 당신에게 당신이 하고 있는 게임을 지켜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서로에게 성적으로 성실한 것도 물론 괜찮습니다. 그것 또한 유효하며 실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당신을 최상의 기쁨으로 데려다 주는 건 아닙니다.

 

맹세가 오갈 때, 뭔가 자신을 제한하는 느낌이 있다면, 그래서 바람직스럽지 않게 느낀다면, 그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표시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제한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관계의 밖을 볼 것이 아니라, 안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당신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고, 그건 바로 당신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관계에서 압박감을 느낀다면 당신 안에 있는 그 압박감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그런 압박감의 공동창조자이니까요. 그런 다음 압박감의 정체가 너무도 분명하고, 관계가 만족스럽지 못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야, 혹은 당신이 누구인지 보아야 할 시간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당신은 더 명료해질 수 있고, 책임을 질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당신이 그런 상황을 만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당신 삶에 뭔가 제한을 가져오는 누군가를 창조했다면, 벗이여, 그땐 바로 당신이 얼마나 제한적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을 당신 삶에 끌어당긴 것임을 알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이 명료해져서 조화를 이루게 되었을 때, 당신은 그러한 제한을 반영하는 어느 누구도 끌어들이지 않게 됩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으며,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현재 파트너가 없는 걸까요? 아니면 앞으로 나타날 적당한 사람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걸까요?

 

벗이여, 앞으로 나타날 적당한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요즘엔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당신들 모두 자신을 발견하느라 몹시 바쁘기 때문이며, 정말로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괜찮습니다. 파트너기 없다는 건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관계를 맺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두 번 쓴 맛을 본 사람들은 자아 탐구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다시는 남녀 관계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다시는 상처 받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파트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느라 바쁘지만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열심히 찾아 헤매면 헤맬수록 더 발견할 수 없게 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파트너가 없다는 자체가 그 사람의 내면 상태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임은 소위 여성 에너지입니다. 당신이 깨닫기만 한다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당신 앞에 펼쳐질 것이며, 아무 일을 하지 않고도 삶의 경이로움을 창조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단순히 알기만 하면 당신의 성장, 당신의 기쁨, 당신의 만족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한 때는 원치 않았던 배움들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것들이 때가 무르익으면 당신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주에는 여기 이 행성에서 사는 우리들처럼 성본능을 지닌 존재나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럼요. 아주 많은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섹스를 생식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에너지 교환이라는 좀더 우아한 수단을 씁니다. 그리고 벗이여, 두 사람의 섹스라는 것은 섹스가 무엇이든, 에너지 교환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당신이 창조한 에너지의 빛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어떠할 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반드시 섹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당신이 엄청난 분노에 처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감정이 움직이는 곳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꽃놀이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오라 말입니까?

 

. 하지만 벗이여, 당신이 오라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당신 주변의 부드러운 빛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로켓이 발사될 때 나오는 것 같은 장엄한 스파크를 말하는 겁니다. 다중 우주의 다른 부분들에는 다른 종족의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당신네 행성 안에도 다른 종의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소위 지구 내부에 살고 있는 위대한 인간 종족 말입니다. 그건 다른 시공 연속체이며 다른 차원의 현실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요. 에테르체로 살고 있나요?

 

우린 그저 지구 내부의 사람들이 당신네 현실과 같은 이런 차원에 속해 있지 않다고만 말한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 차원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에테르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에테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좀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하고 경이로운 문명입니다. 인류 역사보다 오래된, 훨씬 오래된 문명이죠. 당신네 행성의 선사시대와 비교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네 시간의 역사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위대한 문명은 기술이 매우 진보되었으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항상 별나라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다른 세계의 인간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은하계에서 은하계로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차원들 안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차원에 대해 생각을 할 때면 여러분은 수직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자신들을 3차원의 형편없고 낮은 인류, 밑바닥쯤으로 생각하죠. 그렇지 않나요?

(청중들 동의한다)

사실, 이것은 자신을 가치 없게 여기는 문제와 통합니다. 다른 조화로운 주파수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유효한 현실, 물리적 현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높은 진동이라고 말할 때는 그들이 더 높은 단계라는 뜻이 압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기술적으로 더 많이 알고 있는 존재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류, 우주, 빛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더 많이 아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당신들보다 더 위대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여, 진실로 분리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신성의 표현입니다. 양상이 다를 뿐입니다.

난초, 데이지, 장미 중에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더 좋아하는 꽃이 있을 수가 있겠지요. 난초가 잡초처럼 많이 자라는 곳에서는 아마도 장미를 더 좋아하겠죠. 그리고 유럽대륙처럼 난초가 귀한 곳에서는 장미보다는 난초가 특별한 꽃이 되겠지요. 하지만 모두 다 신성의 표현입니다. 근원, 즉 만유의 에너지 안에서는 판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프타아, 이렇게 다른 시공 연속체를 방문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벗이여, 진정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당신도 자주 그 길을 오갑니다. 의식으로는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의식을 지닌 채 그들을 방문하는 것은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벗이여, 우리가 당신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류의 의식이 확장됨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 대해 좀더 많이 알게 될수록,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을 더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껴안을수록 당신들은 이 시대 당신네 행성 전체의 공명을 진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중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변화들, 우리가 전에 얘기했던 은하계적 변화, 주기적 변화들과 조화를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 당신들은 당신들의 의식 속으로 여행하게 될 겁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당신네 개념과는 다른 방식의 체험을 하게 될 겁니다. 우주를 여행하고 은하계를 여행할 겁니다.

 

가능할 거라고 여겨집니다. 내면에서. 그러나 아주 아득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그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아직 의식적으로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건 마치 난생처음으로 서커스에 가기로 한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는 날짜를 손꼽으며 기다립니다. 서커스가 흥미진진하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보진 못했지만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요. 아이는 솔직이 서커스가 어떤 느낌을 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흥분과 기대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루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한편으로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 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날이 멀게만 느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커스가 과연 올 것인지 의구심을 품은 채 서커스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는 징조입니다.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갈망을 품는 것이 그런 일을 앞당기게 될까요?

 

벗이여,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당신이 재촉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건 그 자체의 타이밍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허용하기만 하라?

 

진실로 그렇습니다.

 

프타아, 우리가 기쁨 속에 있고, 가슴에서 우러나와 행동한다면 혹시 걸릴지도 모르는 성병에 대한 두려움은 갖지 않아도 되나요?

 

우리는 특히 에이즈에 대해 애기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 시대의 가장 큰 두려움 증 하나이니까요. 거기에는 아주 다양한 측면이 있습니다. 당신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나아가 경이로운 공명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믿음, 그 믿음의 핵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죄책감이 없다면,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없다면, 진실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라면, 벗이여, 도대체 어떻게 병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또 다른 견지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네 행성의 어린이들, 태아 단계에서든, 유아기 때든, 피를 경로로 하여 이런 질병에 감염된 경우를 보면 당신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저 아이들은 죄가 없다 라고.. 벗이여, 당신들은 그 경험을 위해 수많은 생애를 거쳐 이 행성에 왔음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돌에 새겨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믿음에 따라 모든 걸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구본을 가리키며) 저것이 진짜 형상이 아니라는 걸 아세요? 저건 잘못된 모양입니다. 당신네 지구는 오렌지처럼 둥글지 않아요.

 

프타아, 당신과의 이 시간을 통해, 저는 진실로 우리 모두의 하나됨을 느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피라미드 에너지와 같은 역할을 해주셔서 우리가 배워야만 할 주제에 대해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를 매우 도와주시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감사합니다.

 

벗이여, 그렇다니 기쁘군요. 당신이 마음으로 그렇게 느꼈다면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이 에너지를 연결 통로로 사용한 겁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 자신의 확신을 위해, 무슨 질문이든 하십시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니까요. 당신이 이 코스에 참가한 모두에게 그런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면. 진실로 이 에너지를 사용하여 그렇게 된다면, 사뭇 놀라운 일을 창조하게 될 겁니다.

 

며칠 전 시골길을 산책하다가 당신이 육체의 눈을 통해 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볼지 궁금했습니다. 전혀 짐작할 수 없더군요. 나는 그 정원의 아름다움을 당신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당신과 뭔가를 함께 나눈 건가요?

 

그럼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벗이여, 당신이 그 에너지를 부르면 거기에 그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정말 잘 알고 있군요.

 

프타아, 성과 관능에 대해서 말인데요. 우리의 자녀들에게 느낌의 자유를 누리라고 어떻게 교육할 수 있을까요? 우리 자신은 여전히 한계에 갇혀 싸우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부모를 가르치는 사람은 어쩌면 아이들일지도 모릅니다. 받아들이세요. 그게 전부입니다. 사랑하고 허용하세요. 자녀들에게 자연스런 표현을 허용하면 그들은 당신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줄지도 모릅니다. 단지 성에 대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매우 성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놀라운 것들을 많이 가르쳐줄 겁니다. 앞으로 몇 년 내에는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즈음 태어나는 아이들은 상당수가 인류의 변화를 도와주기 위해 왔기 때문입니다.

 

프타아, 앞으로 일어날 변화의 시기에도 성 본능은 여전히 같은가요? 아니면 그런 변화와 더불어 진보하나요?

 

변할 겁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표현이 변하게 됩니다.

 

그래요? 그 변화란 4차원으로의 변화가 맞는가요?

 

벗이여, 무어라 불리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4차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죠. 어떤 이들은 5차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이 차원 외의 것을 알지 못하는 한, 거기에 어떤 이름이 주어지든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이름에 집착하지 말아요.

 

프타아, 신념체계에 관해서인데, 어떤 신념은 우리 인간 사회에 아주 깊이 뿌리 내린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제 우리가 진실로 어떤 신념을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벗이여, 무엇보다 신념의 정체부터 밝혀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신념은 당신이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런 신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부관리들이 전부 바보라고 믿어! 나는 하늘이 파랗다고 믿어. 라고 말할 때는 신념을 규명하기가 매우 간단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상황들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그때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이런 반응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 거지? 밑바닥에 있는 두려움이 무엇이지? 이런 식으로 당신은 자신의 신념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신념을 붙들고 있었는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발전할 것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지적으로 그런 신념들을 안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나 사회를 토양으로 자란 신념들은 당신을 힘겹게 하는 짐과 같아서, 당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일단 신념이 밝혀지고 나면 간단합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내가 들고 다니던 이 신념은 이제 쓸모가 없어 그 신념을 껴안음으로써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지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념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첫걸음은 내딛은 셈입니다. 신념을 알아차렸을 때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런, 그런 미친 짓이야! 그렇게 되면 당신은 앎에 이르고, 모든 걸 인정하며 껴안게 됩니다. 이걸 믿는 것도 괜찮아, 하지만 이젠 껴안을 시간이야. 그러면 매우 부드럽게 변화가 일어나도록 허용하게 됩니다. 사회구조 때문에 생겨난 잘못된 신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면 당신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신념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신념 체계는 매우 간단한 겁니다. 당신의 밑바닥에 있는 두려움과 딱 들어맞는 신념이 있으면 신념은 거기에 고리를 걸어 그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의식적 마음으로 신념을 정당화시키게 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재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군요.

 

매우 좋습니다. 이 점에 대해 좀더 얘기하기를 원하는 분 있으세요? 모두 이해하셨습니까? 좋습니다. 어떤 감정적 상황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경우를 살펴봅시다. 섹스 애기를 하던 중이니 거기에 대해 말해봅시다. 당신이 막 집에 돌아와 보니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몹시 화가 나서 파이를 집어 던지고 밖을 나와서 차를 타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갑니다. 자, 어머니가 말하겠죠.

뭐 그런 자식이 다 있어? 그러면 당신이 말합니다.

그래요. 하지만 전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파이 접시를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질렀거든요.

하지만 그건 너무 정당한 일이었어. 만일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파이접시로 그 녀석 머리를 후려쳤을거야! 그러면 당신도 위안이 될 것이고, 당신 친구들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오 맙소사! 야비한 자식 같으니라고

하지만 벗들이여, 우리가 말하고 싶은 건 그 밑바닥에 있는 절망과 배신감입니다. 두려움, 충분치 않다는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섰다는 절망과 배신감 말입니다. 그건 질투요. 충분치 않다는 두려움입니다. 그건 소유욕이고 소유하지 못했다는 두려움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자신의 반응이 사회구조와 들어맞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그 신념 속으로 들어가볼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약 그 두려움을 당장에 변형시킨다면 그런 상황을 다시는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 벗이여, 항상 기억하십시오. 사랑이 아닌 것은 모두 두려움의 표현인 것을! 그리고 두려움은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지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세요.

이것이 내가 느끼는 방식이야,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어. 하지만 내가 책임을 지겠어. 내가 판단한 것이라는 걸 인정하겠어. 이젠 머리 따위는 겨드랑이 아래에 집어 넣어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느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지적 존재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우주 가운데 질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의식으로 알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말하는 이 모든 얘기가 아주 간단하게 압축될 수 있음을 진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얘기 중에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진실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고픈 말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이 다 신성의 표현이니, 고통에 빠졌을 때는 그 느낌을 느끼라는 겁니다.

 

느낌을 느끼라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좀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인류는 느낌이 무엇인지, 실은 잘 모릅니다.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당신이 기쁨 속에 있을 때, 그것이 느낌입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판단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게 항복하는 거죠. 그러면 저절로 하나됨을, 균형을 창조하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잘 못하시는군요. 고통은 판단에 의해 생기는데 당신은 그 판단을 판단합니다.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구요. 당신이 판단 속에 있는 한, 고통이 있을 겁니다. 우린 당신 삶의 특정한 상황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고통이라는 저항을 해방시키려면 판단을 물리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바는 예스하며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들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도 괜찮다구요? 그러면 어디쯤에서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것을 그쳐야 하는 거죠?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말하는 바는, 판단이란 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면 결코 그것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저항하는 것이 무엇이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떨쳐버리려는 것이 무엇이든, 우주는 아무 판단 없이 당신이 힘을 부여하고 있는 그것을 되안겨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겁니다.

나는 변화를 원해. 나 자신에 대한, 상황에 대한,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나름대로 유효해. 그건 내 존재의 일부분이고, 내 존재는 신성의 표현이니까. 하지만 난 이제 변화를 원해. 그러고는 사랑으로, 자비심으로, 판단을 자기 자신에게로 모으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판단은 하나가 되고, 고통이라는 저항의 발톱이 떨어져 나가며, 에너지 차크라가 열리고, 그 느낌은 가슴을 지나 기쁨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다소 분명해졌습니까? 당신의 삶 속에서, 당신이 무엇과 하나가 되고 싶건, 그것은 곧 균형을 이루는 길에 다름 아닙니다. 중도를 지키는 거죠. 당신은 심한 고통을 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고통을 분노나 눈물이나 화로 표현할지 모릅니다. 어떤 식으로도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 모두 억눌러 버릴지 모르죠. 균형이란 그러한 당신을 판단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면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어떤 길을 가든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거죠? 네 좀더 분명해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여행 길은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도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죠. 당신이 상관할 일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이 사랑과 자비에 이르고, 자기 자신의 신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면, 어떻게 모든 사람들과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방금 전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선데요, 전 이 하나됨을 이루려고 시도를 해왔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것에 부합되는지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저는 이곳(여인이 가슴 중앙부위를 가리킨다)을 이용하여 그 당시 불일치를 가져오는 어떤 감정에 대해서든, 그 느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느낌 속으로 들어갔더니, 마음 속의 영상이 내가 느끼기를 원하는 긍정적인 영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벗이여, 그건 매우 유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변형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걸 수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건 시간낭비라는 건가요?

 

벗이여, 시간낭비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긍정적인 영상이 그려졌다면 놀라운 일이지요. 당신은 분명 안도감을 느꼈을 겁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건, 변화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껴안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신은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에 힘을 부여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하죠. 우주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습니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니 변화를 창조하고 싶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이 원하는 바를 마음속에 그리십시오.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언제나 생각이니까요.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얘기하고 있고, 변형이란 근본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니까요. 자, 당신은 변형에 대한 토의를 하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린 지금 토의할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임을 끝낼 시간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변형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논의들은 원고 작성을 위해 순서가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린 제한을 받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얘기를 들을 수도 있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당신이 거기에 대해 알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 실제로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변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 모두 거기에 대해 알게 될 겁니다. 여러분 모두 각자의 가슴 속에서 깨닫게 되는 거죠. 꽃을 피우고 그 연꽃 안에서 보석을 창조하는 겁니다. 그 보석이란 자신의 신성을 진정으로 아는 것이요, 자기가 곧 신임을 아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존재해야 할 방식이죠.

모두 가슴에 단단히 새기셨나요? 여러분 모두가 지금 당장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 수 있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벗들이여, 우리의 사랑과 감사를 여러분께 드립니다.

 

7. 양파 껍질 벗기기

 

당신들이 이곳, 치유의 에너지가 넘치고 넉넉한 온화함이 넘쳐나는 이곳에 오신 걸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제 당신들은 발견하게 될 겁니다.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짐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것.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당신들이 자신들의 몸에 너그러워진다면 우리는 기쁠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인류의 성본능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요 며칠 동안, 잠시 멈춰 서서 성 본능에 관한 자신들의 신념체계를 생각해보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들 내면에는 죄책감이란 것이 프로그램되어 왔습니다.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로 수많은 세월동안 그래왔고, 당신들의 이 생애까지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자유의 문이 활짝 열린 위대한 이 시대에도, 인간성이 자존을 외치고 문화가 꽃피는 이 시점까지도 당신들은 여전히 죄책감을 안고 다닙니다. 죄책감의 상당 부분은 성본능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본능에 대해 애기를 꺼낸 김에 당신들의 죄책감에 대해서도 얘기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죄책감이란 아직 배우지 못한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후회 역시 아직 배우지 못한 가르침이지요. 이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당신의 생애를 전망해볼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본다면, 지금까지의 머나먼 여정을 돌아본다면, 영혼의 차원에서는 나날의 삶이 배움의 연속이었음을 지성적으로 알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면이 실은 신성의 반영이며 신성의 표현이므로 잘못된 결정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나요? 어떻게 후회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나요? 이처럼 아주 간단한 겁니다.

당신의 삶에 일어난 모든 상황은, 당신이 잘못된 것이라 판단했던 모든 상황은, 당신에게 불행을 안겨주었단 모든 상황은, 당신의 배움을 위해 거기 있던 겁니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당신이 바로 신임을 알도록 하십시오. 벗들이여, 당신들은 낮은 차원의 인류가 아닙니다. 영적 존재가 되기 위해 투쟁하는 3차원의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모두 영적 존재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건 용기 있는 선택입니다. 이러한 차원을 경험하기로 선택한 이유즁 하나는 사실, 그 경험, 그 색채, 그 진동의 강렬함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모든 경험, 모든 사람을 선택해 왔던 겁니다.

많은 것들을 알고 깨우친 이제 와서, 당신들은 지난 생애를 되돌아보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맙소사! 내가 왜 그랬지? 어떻게 그처럼 어리석을 수 있었지? 어떻게 그렇게 두려워하고 아악하며, 비정할 수가 있었지? 우리는 오늘 저녁 내내 당신들이 당신들이 스스로를 매질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속성의 리스트를 함께 작성해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 이유는 바로 당신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배움을 위해 당신들이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간단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합니까? 다른 누군가를 해쳤다는 죄책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다른 누군가도 모든 상황을 함께 창조하면서 당신과 거기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벗들이여? (한 신사를 바라보며) 당신은 죄책감의 여행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크게 웃으며) 잘 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수많은 판단으로 그렇게 합니다.

 

, 벗이여, 그처럼 위대한 영적 존재가 판단 안에 갇혀 있다니.. 정말 슬픈 일이군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모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배움을 위해 당신과 함께 거기 있는 것이고, 그 경험은 반반씩 공유하는 겁니다. 다른 누군가가 그들 자신의 배움을 어떤 식으로 창조하든, 그건 당신이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아이가 됐든, 연인이든, 보모든, 단순히 가볍게 알고 지내는 사람이든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누군가를 자기가 죽게 했다고 자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이 차를 몰다 일어난 사고든, 육체의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고 같은 것은 없습니다. 매우 정교한 자동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사고를 내어 동물이든 사람이든 생명체의 죽음을 야기시켰다고 했을 때, 당신은 그것이 선택된 것임을 진실로 알아야 합니다. 서로가 선택한 것인데 죄책감이 설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후회 또한 죄책감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 창조한 모든 상황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지금 이순간 당신이 서 있는 곳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 대부분은 현재의 자신에 대해 그다지 행복해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이 길 위에 서 있으니까요. 다음 번에 또 다시 심한 죄책감의 공격을 받는다면, 심한 후회의 공격을 받는다면, 이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선택했고, 잘못된 것은 없다.고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프타아, 예를 들어 사고와 같은 상황을 선택하는 데 있어, 오십 대 오십의 공유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공동 창조라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싶은 당신의 바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이해하기가 사실 좀 어렵지요. 당신이 만약 즐거운 어떤 것을 공동 창조했다면, 그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사랑하는 이여, 비참한 상황이든, 경이로운 상황이든, 그런 차이를 만들어낸 건 당신의 판단입니다. 모든 것은 배움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힘에 대해 얘기할까 합니다. 당신의 물리적 현실, 즉 이러한 밀도를 지닌 현실은, 당신의 신념체계가 창조한 것입니다. 그렇죠? 당신은 신념에 따라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 생각은 감정에 싸여 우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여, 우주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경이로운 것으로 판단한 어떤 것을 원하든, 또는 잘못된 것, 나쁜 것이라고 판단한 어떤 것을 원하든, 우주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주는 그저 자신을 재배열하여 당신의 신념에 응해줄 뿐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자시은 다른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힐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다고 합시다. 의식할 수 있는 마음 상태에서 그렇다는 얘기가 압니다. 아시다시피, 가장 강력한 신념은 의식할 수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과거의 어떤 일에 대해 벌을 받고자 하는 마음일수도 있고, 상처를 입히고 벌을 받고 싶은 마음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변화하기를 원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에 부쳐서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차원에서 저 차원으로 바뀌기를 원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까? 그리하여 가능성이 주어지면, 두 사람은 만나게 되고, 그것이 사고라 불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작용되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예기치 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바로 이와 같은 방식입니다. 그들은 원합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자신은 이러한 일을 기대한 적이 없다고. 그런데 동네 모퉁이에서, 슈퍼마켓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그리곤 놀라운 사랑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유야 어떻든 사람들은 함께 창조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경이로운 일이라고 판단한 것,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한 것을 서로에게 반영하면서 각자 배우게 되는 거죠. 질문에 대한 답이 됐나요, 벗이여?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군요. 감정을 품은 생각이 근본적인 힘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것이 힘을 부여하지요.

 

그럼, 엄청난 감정을 품고 복권에 당첨되는 걸 상상할 수도 있겠네요.

 

물론이지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군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요? 

 

왜냐하면 마음 밑바닥에선 당신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지 않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렇지 않다구요?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더 유익한 방법을 알고 있지 않나요? 그 방법을 알고 있지 않나요?

 

그래요, 그건 일리가 있군요.

 

그럼요. 정말 아주 간단한 겁니다. 자신의 현실은 자기가 창조한 거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곧잘 말합니다.

 그럼 난 대체 왜 이렇게 가난한 거요?

여기에 대해선 이미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당신은 돈에 대해서 진정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당신의 삶 속에 조화롭지 못하다고 믿는 상황은 무엇인지 종이를 준비해서 리스트를 작성해 보십시오. 종이의 한쪽 면에는 당신이 느끼는 경이로운 일들을 적어보세요. 다른 한쪽에는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적어보세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되는 거죠. 당신은 매우 졸랄 겁니다. 당신은 이 방법을 이용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믿고 있는 바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당신이 진정으로 경멸하거나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적어보세요. 당신의 어머니, 연인, 이웃들에 대해 마음 속으로 싫어하는 모든 요소들을 적어보십시오. 리스트 작성을 끝마치면 그걸 자세히 살펴보세요.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다른 사람에 대해 당신이 싫어하는 것들이, 실은 자기 자신에게 대해 진정으로 경멸하는 것들이 아니던가요? 사랑하는 이여, 다시 말씀드립니다. 당신 바깥에는 아무도 없으며, 모든 것은 거울이요, 반영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 주인인지, 진실한 이해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내가 보고 싶지 않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그 일을 내가 지금 하고 있다고는 볼 수는 없겠죠. 그런데도 어떻게 공동창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자, 이 점을 당신에게 제시해야겠군요. 누군가가 아주 잔인하다고 판단될 때, 예를 들어 동물을 학대하고 있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 당신 가슴속에는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럴 테지요! 그러면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건 나의 반영이 아니야! 왜냐하면 나는 한 번도 동물을 때린 적이 없으니까. 더구나 난 동물을 사랑하므로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는 잔인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를 권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요. 동물에게 잔인하게 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데, 어떻게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습니까?

 

벗이여, 그건 사실 잔인성의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아이를 때리든, 혹은 개를 때리든, 그들이 나타내 보이는 건 두려움입니다. 그런 두려움의 파동을 타고 당신이 잔인하다고 판단한 것이 전시되고 있는 겁니다. 자, 기억하시고 있겠죠? 배움을 위한 공동창조를 말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잔인하다고 판단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신은 지금껏 한 번도 잔인한 짓을 한 적이 없다면, 그땐 자기 자신에게 잔인하게 굴었던 적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자기 자신에게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 모두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벗들이여, 현실의 차원뿐 아니라 다른 여러 차원에서 볼 때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십시오.

이번 기회에 당신들이 몰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양파 껍질 벗기기라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껴안고, 진실로 모든 면에서 내가 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껴안음 속에서, 그런 인정 속에서, 당신은 그토록 원하던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자기자신에게서 숨으려고 해서는 변화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그런 국면들을 무가치하게 여기면 변화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반영된 것들을 무가치하게 여기든, 진실로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든 말입니다.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거기에 힘을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소위 소우주로서의 당신이 작동되는 원리입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고통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면 여길수록, 더욱 그것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우주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우주를 향해 쏘는 것은 무엇이든 되돌아옵니다. 생각은 당신 머릿속에 갇혀 있지 않다는 걸 상기시켜 드립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생각은 당신들의 머릿속에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를 겨드랑이 속에 집어 넣어도, 생각을 놓치는 일은 없는 겁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어떻게 가치 있게 만들죠?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라고요?

 

그렇습니다. 두려운 부분도 유효한 것이며, 당신 자신의 신성한 국면임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그것을 자기 자신 안으로 껴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껴안음 속에서 변화가 창조되는 거지요. 사랑하는 이여, 이런 식으로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물리적 현실에서 두려움을 겪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무가치하게 여기면, 두려움을 밀쳐내고, 억누르고, 숨으려고 하면, 그땐 거기에 엄청난 에너지를 주게 되고, 정확히 그것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프타아, 아마도 이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서, 그 상황과 분리된 상태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관찰자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도 한 방법이지요. 분노에 대해서도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분노를 무가치하게 여기지 말라구요. 그리고 분노를 장악하지 못하겠거든 아예 거기에 따르라고요. 분노의 불꽃놀이를 온전한 기쁨 속에서 경험하게 되면, 두려움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버린 거지?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의 실체를 체험하는 겁니다. 두려움이 엄습한다고 해서 오 하나님, 이건 너무 끔찍해요. 우리는 두려움을 억제하고 제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말하십시오. 그래 그게 나야, 난 두려워하고 있어. 인정하고 약간의 연민을 가져보세요. 자기 자신의 모든 면이 유효하고 신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껴안음으로써 당신 자신의 모든 면에서 순종하십시오. 그럴 때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되고, 꽃피우게 되고, 활짝 열리게 됩니다.

 

멋지군요.

 

정말로 근사하지요. 하지만 당신들 모두가 그러합니다.

 

프타아, 공동 창조에 대한 건데요. 현생을 살아가는 동안 창조해 나가는 겁니까? 아니면 이 생에 오기 전에부터 그렇게 해야 하는 건가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당신은 태어나기 전에 소위 광대한 스펙트럼 플랜을 선택한 것입니다. 거기엔 부모나 형제나 형제 자매들도 포함되어 있죠. 그리고 수많은 생애 동안 당신과 친했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창조해 나갈 일들을 선택합니다. 문화적 환경도 당신이 선택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생애 동안 일어날 일들, 배워야 할 가르침, 경험해야 할 기쁨들을 다른 생애 동안 경험했던 것에 비추어 전반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생애마다 똑 같은 것만을 반복한다면 끔찍한 일일 겁니다. 다양함을 즐길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게임 플랜을 정해놓고는 사람이라는 물리적 현실에 들어와 순간순간 게임을 하면서 창조하는 겁니다. 벗이여,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앎에 이르면, 삶의 고통과 번뇌로부터 변형을 이루면, 그땐 현생뿐만 아니라 모든 생애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번 생에 대한 자신의 역사도 다시 쓰게 됩니다. 소위 과거라는 것을 바꾸어 가는 거지요.

 

이번 생에 태어난 목적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아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까요?

 

벗이여, 당신의 삶의 목적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목적은 같습니다. 여러분은 당신네 행성 역사상 오늘날의 이 시간과 공간 속에, 그리고 이 행성의 인류라는 역사 속에 자신들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의 목적은 여러분 안의 신을 일깨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 배워야 할 특별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날이면 날마다 그런 배움들과 더불어 당신은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겁니다.

 

나 자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워야만 할 것들을 미리 볼 수는 없을까요? 아니, 전 이미 그 답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쯤에서 잠시 휴식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승격한 스승들이 여러분 모두의 몸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어 주실 것입니다. 웃는 얼굴을 보니 매우 좋군요. 그게 바로 불을 밝히고 축제를 벌이는 일입니다. 매우 좋습니다.

 

프타아, 우리들의 판단으로 인해 과거에 단절되었던 우리 자신들의 그런 부분들과 어떻게 하면 연결될 수 있을까요?

 

벗이여,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으니까요. 인류의 의식 안에서뿐만 아니라 지구 자체 내에서도 모든 것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판단과 모든 두려움이 눈에 띄게 극성을 부릴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순간순간, 당신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야기시킨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벗들이여, 그건 무엇인가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그냥 존재하는 것이고, 영혼 에너지와 당신의 신념체계가 조화를 창조하기 위해 가르침과 하나됨에 필요한 것들을 나날의 삶에 가져오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더 좋게 만들려고 조급하게 서둘러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당신들이 좀더 좋은 것을 바라게 되면, 현재의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의 당신은 사실 완벽하며, 매순간마다 완벽합니다. 완벽함이란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당신의 승천과 더불어 생기는 어떤 완성품이 아닙니다. 지금 이순간, 자기 자신의 신성 안에 있을 때, 그것이 완벽함입니다. 어떻게 다른 것일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야말로 모든 면에서 신성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보니 생각이 깊어지는군요.

 

당신은 판단 속에 있군요.(웃음)

 

투쟁해서 쟁취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가요?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강력한 프로그램을 갖는다는 것도,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잖아요. 당신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말씀하셔도 말이에요. 우리는 좀더 나아지기 위해 그렇게 강력한 프로그램을 갖는 게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살아라, 좀더 나아지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구요? 그게 맞습니까? 왜냐하면 저는 걱정이..,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좀더 나아질까 이 궁리 저 궁리하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군요.

 

바로 그겁니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그게 쉽지 않아요.

 

사랑하는 이여, 모든 건 아주 간단합니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은 신성의 표현입니다. 그냥 존재하세요. 당신이 순간의 충만함 속에 있게 되면, 투쟁하지 않은 채 더 좋아질 수 있다는 판단도 하지 않은 채 순간을 살게 되면, 그것으로 당신은 당신의 행성 위에 신성의 본질을 충만하게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진정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당신은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어제와 비교하지도 않고, 내일에 대해 걱정하지도 않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당신 전부와 앞으로의 당신 전부는 모두 신성의 표현입니다. 당신은 앞으로 올 변화에 대해 걱정하느라 바쁘고, 퍼즐 조각을 꿰어 맞추면서 지금까지의 현실을 바꾸느라 바쁩니다. 더 많이 누리려고 걱정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걱정합니다. 진실로 하던 짓을 멈추고 존재하기 시작하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당신은 만유의 생각 자체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도 심판할 이는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교할만한 위대한 역할 모델이라는 것도 진실로 없습니다. 두려워할 어떤 것도, 부끄러워할 어떤 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나름대로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도록 하세요.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하나의 보석입니다. 당신들이 경외심을 안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여러분 각자도 경외심으로 바라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저마다 각각 다르면서도 얼마나 숨막히게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변화에 대한 당신들의 갈망을 이해하고 있고 그런 갈망을 품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변화는 껴안고 인정할 때만 실현됩니다. 그러니 조금씩 조금씩 자기가 신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만유의 생각 자체라는 사실을 가슴 속에서 진정으로 깨우쳐가도록 사십시오. 영적인 존재가 되려고 투쟁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이미 영적인 존재입니다. 좀더 나아지려고 투쟁하지도 마십시오. 당신들은 모두 완벽하니까요. 당신들은 진실로 장엄하고 경이로운 존재들입니다.

 

프타아, 삶을 너무 치밀하게 계획하기보다는 모든 일이 그냥 발생하도록 허용하라는 말인가요?

 

그것이 마땅히 어떠해야 된다고 매우 엄격한 계획을 붙들고 있을 때, 그 일이 마땅히 일어나야 할 때를 마음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합니까?

 

그걸 붙든 채 씨름하겠지요.

 

사실, 그때 당신들은 수많은 가능성들을 차단하고 있는 겁니다. 가능한 현실들을 말입니다. 여러 가지 조합 가능성들. 당신들은 자신들의 창조성을 제한하고 있는 겁니다. 자, 이제 간단히 말하세요.

이것이 내 존재의 신이 원하는 바다. 이것이 내가 창조하고 싶은 바다

그것을 우주에 내보내고, 당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지 말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세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언제 일어날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 자신의 창조성을을 차단하게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계획을 세우고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붙들려서는 안 됩니다. 창조성의 흐름을 허용하세요.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겁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제 마음이 같은 주기로 반복되면서 맴도는 걸 발견하곤 합니다.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의 기본적인 원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요지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벗이여, 먼저 기본 원리는 당신이 신이며, 신성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만유의 한 생각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당신은 장미 향내 풍기는 신입니다. 당신은 이런 차원의 현실에서, 이러한 경이로움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전체성입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 상태의 기본 원리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안다면 다른 모든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계속하시죠. 벗이여.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공간과 에너지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안 됩니다. 벗이여, 우리가 에너지에 대해 말해 주어도 당신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말해왔던 모든 내용이 실은 에너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모든 것이 에너지라고 생각하겠지요.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에너지의 근원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만물의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고, 만유 자체이며,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에 대해 정의를 내려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신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거울을 들여보는 일입니다.

공간에 대해서라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과학적인 존재라면, 공간이란 수학적 방정식이라고요. 그러나 당신은 사실 공간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생기는 지를 알고 싶은 겁니다.

 

맞습니다.

 

제가 내려주는 어떤 정의도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보다 더 이해하기 쉬우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은하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도요.

 

하지만 우리는 벌써 말해주엇는데요. 벗이여, 수학적 방정식이란 이미 거기 존재하는 것의 지도일 뿐입니다. 순수의식의 무한성을 설명할만한 수학적 방정식이 아직까지는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순수의식이란 근원 자체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라는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비인격적인 신의 존재란 모두에게 알려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영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죠. 나는 지금 이 차원의 현실을 훨씬, 훨씬 넘어선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당신은 감정이라는 것을 통해 신성한 근원을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것, 분리란 없다는 것, 벗이여, 그것이 신에 대한 앎입니다.

 

물질이 에너지로부터 실제로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서도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물질을 창조하는 건, 의식입니다. 바로 그 부분이 당신네 양자 물리학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물질이란 순간적으로 거기 있기도 하고, 또 순간적으로 없기도 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물질이란 오직 진동 주파수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생각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겁니까? 생각 역시 에너지란 말입니까?

 

그래요. 생각 역시 진동 주파수입니다. 생각이란 빛보다 더 높은 진동 주파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빛의 진동 주파수보다도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의식입니까?

 

모든 것은 빛의 진동 주파수보다 위에 있습니다. 당신네 과학자들이 괘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던 잘못된 생각은,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네 과학자들이 은하계 여행에 대해 알기 시작하면, 초공간 안에서 여행하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여행해야 됨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수초 내에 은하계를 넘나들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생각은 어느 곳에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생각은 시간 속에 있지 않습니다. 생각은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습니다.

 

어떠한 시공 연속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생각은 다 에너지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사실 이 모든 과학적 질문들이 인류에겐 매력적이겠지만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결코 해답을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영혼 에너지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영혼은 생명체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것이 바로 생명체입니다. 당신과 영혼 사이에는 분리가 없습니다. 당신과 다른 존재 사이에도 분리가 없습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영역, 모든 차원에도 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벗이여, 당신과 신성한 근원 사이에도 분리가 없습니다. 인류 전체가 진실로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모든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네 과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기술은 바로 생각의 힘입니다. 다른 행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행성에서도 널리 사용될 기술은 크리스탈 테크놀로지입니다. 지금 이 행성에서는 그 기술이 태동 중입니다. 이 기술의 힘, 이 기술의 연료는 바로 생각입니다. 몇주 동안 여기에 대해 말해왔고, 필요하다면 나중에 좀더 상세히 말하겠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흥미를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기 위한 한 가지 사례일 뿐입니다. 전정한 자기 자신을 알면 변화를 창조할 수 있고, 두려움이 머물던 곳에 사랑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탈 테크놀로지는 진실로 에너지의 엄청난 증폭기이고 저장고입니다. 만약 이런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성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감정이 두려움이라면, 이 두려움은 증폭될 것이고, 엄청난 혼란을 불러올 것입니다. 만약 지배적인 감정이 사랑이라면, 벗이여, 그때는 이 기술을 사용하여 그 사랑이 증폭될 것이고, 은하계 전체를 통해 조화와 빛을 창조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바로 그 때문에 이 시점에서 인류가 진정한 근원적 앎에 이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벗이여, 근본 원리는 내가 신이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분리도 없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근원의 숨결입니다. 근원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근본원리입니다.

 

프타아, 우리 모두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여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때도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벗이여, 하지만 한 가지가 거 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물질적 신체 안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과는 약간 다르고, 밀도가 더 약해지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지구 위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행성에 경이로운 일들을 창조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또 당신의 물리적 신체 안에서 다른 장치를 타고 한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여행할 것입니다. 몸 없이 의식 안에서 여행하고 싶다고 결정할 수도 있고, 그러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당신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뜻대로, 또 어떤 사람은 잠의 형태로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꿈에 관해서 얘기하면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선택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선택할 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프타아, 당신이 언급하셨던 밀도가 낮은 몸은 여전히 이 양극 세계에 속해 있게 되나요? 그리고 당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도 양극성의 세계인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양극을 생각할 때, 당신은 실은 긍정과 부정, 좋고 나쁜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긍정과 부정이 반드시 좋고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건 그저 우주의 물질적 상태일 뿐입니다. 벗이여, 당신이 양극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은 판단 안에 있게 됩니다. 전기 공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포지티브 네거티브를 구분하긴 하지만, 이것은 좋고 나쁘다는 판단은 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저 존재하는 겁니다.

 

프타아, 변화의 시기에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때 당신에게도 역시 영향을 미치나요?

 

은하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벗이여, 이런 변화는 단순히 이 행성에만 국한한 것은 아닙니다. 그 변화는 행성 조직이 달리 정렬되는 것입니다. 단지 이 행성뿐만 아닙니다. 우주가 달리 정렬되어 가는 거지요. 당신과 당신 행성말고도 다른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당신이 아직 익숙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분명히 앞으로 있을 정렬은 은하계 역사상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나와 같은 에너지가 앞으로 있을 변화에 대해 도와주려고 당신네 행성 전체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들의 변화가 위대한 아름다움, 위대한 기쁨, 위대한 사랑이 된다면, 그리하여 두려움이 없게 된다면, 많은 세계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그 자체로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당신들 모두와 함께 하는 일 말입니다. 여러 차원에서 돕는 존재들이 있지요. 시공 연속체 밖에서는 이 모든 것이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전망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관조하게 되지요.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를 미리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당신들의 주권을 빼앗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들 모두는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들은 당신네 행성을 딱딱하게 보는 데 익숙해 있고, 당신 자신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그건 전혀 딱딱한 게 아닙니다. 같은 공간 내에도 수백만, 수천만, 수십 억의 생명체들이 살아갈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지구만이 있는 게 압니다.

 

시간이 우리모두에게 똑같이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각자가 다르다고 느낍니다. 그건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과 관계가 있는데, 신념은 실제로 시간을 변경시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혀 같은 시간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매우 미묘하지요. 당신은 당신 자신만의 틀로 창조를 합니다. 그땐 당신이 당신 우주의 중심 태양이고, 당신의 현실은 누구와도 다릅니다. 인류 전체의 집단 공명 안에는 분명 어떤 가이드 라인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어떠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동의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합의된 폭넓은 스펙트럼 현실 안에서 여러분 각자 모두는 자기만의 변주곡을 창조하는 겁니다. 물론 당신의 지각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수한 경험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 순간에는 과거를 다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이겠습니다. 투사를 통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경험할 수도 있고요. 그런 경험을 할 때는 다른 시간대에 던져진 것이나 다름 없다고 봐야 할까요?

 

생각은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고 말씀 드린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생각 속에서는 어린 시절이 있을 수도 있고, 나이 들어서의 모습을 투사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내게 대가올 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건 내가 그 순간 경험한 어린 시절과 실제로 어떤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벗이여, 머리에서 벗어나십시오. 당신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몇 달 동안 당신은 그 과정을 거쳐왔고, 두려움이 어떠한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두려움이 무엇이었든, 당신이 진실로 그것과 하나가 될 때까지는 , 그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꿀 때까지는, 재창조하고, 재창조하고, 또 재창조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생각이 앞뒤로 가든, 이쪽 저쪽으로 가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창조해야 합니다. 그 느낌이 두려움이라면 그 두려움을 사랑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당신의 현실이 바뀌게 됩니다.

 

프타아, 저는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설명하는 내용이 때로는 우리의 지식을 넘어서기도 하는데, 우리가 그러한 지식을 넘어선 어떤 것을 경험하기 위해 보다 확장된 의식을 갖고 싶다면, 그래서 그것을 의식적으로 구한다면, 우리는 그리 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고말고요. 벗이여,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당신이 그것을 요구하든 요구하지 않든, 당신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충격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되는 건 바라지 않을 겁니다. 사실, 배우기 위해 엄청난 드라마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웃음을 통해 배움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감정은 우리에게 느끼지는 않습니까? 가령 우리가 너무 늦게 변화되는 것에 대한 분노나 짜증 같은 거요..

 

내가 그런 것처럼 보입니까, 벗이여?

 

아니요.

 

내가 여러분 모두에게 짜증을 낸다던지 화를 낸 적이 있었나요? 당신의 가슴은 무어라고 말합니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 질문을 하다니 제가 어리석었군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원하면 언제든지, 어떠한 질문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당신이 한 질문 중에서 너무 시시한 것으로 여겨질 만한 것은 없습니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모든 걸 알지 못한다고 해서 당신을 어리석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을 말썽꾸러기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진실로 이 모든 것은 당신 지성의 갈증을 풀어주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당신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건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자신에 대한 판단을 멈추면,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진실로 이해하게 될 겁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나의 바램입니다.

, 벗들이여, 사랑으로, 빛으로, 웃음으로 나아가도록 하세요. 그리고 매 순간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세요. 행복한 여행이 되기를..

 

8. 충만한 순간에 사는 법

 

여러분은 화급한 마음으로 여기 오셨군요. 컴퓨터 스위치를 켜놓고 말입니다. 벗들이여, 자, 어떠세요. (지구에서의)휴가는 즐겁습니까? 모험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한 신사에게로 돌아서며. 그는 멀리서 왔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잠들었군요.

 

~ 네..

 

음 그것도 괜찮습니다. 잠이 들면 마음은 일상적인 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니까요. 그래서 지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앎을 얻게 되지요. 몸이 개입하지 않을 때는 원하는 누구하고라도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삶 속에서 실현하고 싶을 때, 내면에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지성적으로 알게 되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이제 그것을 시험해봐야지

그래서 소망을 내보내는데,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게 되면 일을 전부 망치게 됩니다. 앎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의심이 있다면 그건 앎이 아닙니다. 그걸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당신들의 육체에 대해서, 건강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당신이 흥분으로 마음을 졸이면서 이 방에 앉아 있는 동안, 당신 몸의 모든 세포는 그 같은 흥분에 공명하게 됩니다. 당신 몸의 모든 세포는 그 자체의 통합성과 그 자체의 유쾌한 창조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질병이나 허약함은 길 잃은 개처럼, 당신이 붙잡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몸의 질병은 가슴 속에 있는 질병의 반영입니다. 자, 이것을 지적으로 알고 있는데 몸은 여전히 조화롭게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몸의 질병이 마음의 질병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당신은 건강에 너무나 신경을 쓰면서 거기에 홀려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대해 너무나 집착하고 있습니다. 항상, 항상, 몸이 더 좋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이여, 몸이 좀더 좋아지기를 바라고, 좀더 잘 기능하기를 바라고, 보기에 좋기를 바라고, 더 젊어 보이기를 바라고, 몸매가 좀더 미끈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판단하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제어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것을 창조하게 됩니다.

우리는 당신의 지성적인 앎과 내면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앎에 대해 누누이 얘기해 왔습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고, 다시 말씀 드리지만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에 더욱 더 힘을 부여하게 됩니다. 당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자신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당신은 조화롭지 못한 몸에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질병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고통에도, 감정적인 고통에도,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질병에 대해 예방 접종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자신이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무엇인가에 전염될지도 모르고 그것으로 한 생애를 마감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모든 생애는 실로 정거장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당신의 물리적 신체로 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몇 백년, 몇 천년, 몇만 년 동안 끌고 다니지 못합니다.

삶이란 모두 정거장 같은 거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삶이란 장엄한 환상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해야 할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신체 부위에 대해 당신이 믿고 있는 신체 부위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집착을 진실로 보아야만 합니다. 당신의 믿음이 어떻게 비롯되었고, 병을 창조한 당신의 감정적 상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병이 계속된다면, 당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유익할 겁니다.

알약이든 물약이든, 약은 사실 유효합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럴 것이라고 당신이 믿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식이 요법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그럴 것이라고 당신이 믿기 때문입니다. 의사라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념을 북돋아 줍니다. 우린 지금 의사를 찾아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의사를 찾아 가는 것은 매우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집단 의식 속에는 의사가 도움이 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원한다면 의사를 만나러 가십시오.

그러나 당신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마땅히 보아야만 합니다. 당신 자신이야말로 그 안에 담긴 내용입니다. 항상, 항상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당신에게 돌아옵니다. 당신의 우주, 그 중심에 있는 태양은 바로 당신입니다. 주권을 가지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도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이 그 길을 선택한다면 말입니다. 벗이여, 육체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집착심을 보십시오. 당신은 과연 생기발랄한 즐거움 속에서 육체를 사용하고 있는가요? 아니면, 생기 있는 기쁨의 표현을 억누르고 있나요? 좀더 나아지기 위한 의무적인 운동, 의무적인 긴장과 억압은 그다지 유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운동 요법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기쁨 속에서 한다면 그땐 정말로 놀라울 겁니다. 당신의 몸 역시 참으로 신성의 표현이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몸이란 진실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당신이 그 몸을 변하게 하고 싶다면, 물론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당신의 다른 모든 면과 마찬가지로, 오직 껴안음을 통해서만 일어날 것입니다.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수치스럽게 여긴다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자, 이제 질문하실까요?

 

당신은 우리가 병든 육체에 투자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나요?

 

사랑하는 이여, 사람들 수만큼이나 그 배경도 갖가지입니다. 가정을 한 번 해보죠. 어떤 사람들은 병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왜냐하면 정상 세계에서 제 기능을 하기가 두렵기 때문이죠. 병으로 인해 사랑 어린 관심을 받기 때문에 병을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랑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죠. 많은 배경들이 있습니다. 벗이여.

 

엄청난 육체적 도전을 해야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장애에 관해 저 나름대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온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잘하고 있고, 그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벗이여, 사람들 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경우에는요. 거기에는 분명히 배워야 할 커다란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선 이 점을 명확히 해둡시다. 질병이란 것 역시 절대적으로 유효한 것이라고요. 우린 온전치 못한 데 대한 당신의 판단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역시 그렇게 되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것 역시 그들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공동으로 배움의 상황을 창조한 겁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이번 생애는 오직 한 단면이라는 사실을. 수천 번 가운데 오직 한 번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3차원의 물리적 형체를 띠고 나올 때마다 매번 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 다른 환경을 선택한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신체 모습이 전적으로 무능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모든 신체 기능을 하기로 할 때마다 보살펴야 하고, 옮겨 주어야 할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이런 육체는 끝장 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육체를 지닌 삶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벗이여, 이런 일에 상처 받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당신 마음이 무겁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남자가 울기 시작한다)

우리가 얘기하려는 것은 그토록 무기력하고 그토록 무능한 이런 육체 안에는, 그런 경험을 하기 위한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과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배움을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모든 생물, 모든 인간, 모든 식물과 꽃, 모든 새 이 아름다운 행성에 살고 있는 만물은 진실로 신성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신성의 표현이니까요. 당신들은, 아니 인류 모두는 바로 자기 자신이 신임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물 안에 깃든 신성을 그렇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을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같은 사랑과 존경을 모두에게, 당신네 행성에 있는 모든 것에게, 그리고 행성 그 자체에 나눠주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자기 자신이 신임을 아는 경지까지 활짝 꽃피우게 되면 당신의 진동 주파수는 널리 널리 퍼져나가 모든 것과 접촉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인류는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길 준비해야 합니다.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세요.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육체를 판단하지 말고, 장애로 인해 마음 뺏기지도 마세요. 오직 지금 이순간의 생기발랄한 기쁨에 마음을 집중하세요. 그것뿐입니다. 당신 자신의 신성 안에 존재하세요.

 

저는 인정하고, 판단과 하나가 되고, 느낌을 느끼는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해방되어 위로 상승하게 되면, 애초에 그것을 느끼지 않음으로 해서 야기되었던 질병에서도 해방될 수 있나요?

 

물론이지요. 사랑하는 이여, 그것이 바로 변형이라는 기적입니다.

 

그러면 병도 나을 수 있겠네요. 그 모두가 작동된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벗이여, 우리는 본래 모든 것이 잘 작동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몰랐습니까? 당신은 제대로 알았군요. 당신의 말 그대로 작동됩니다. 마음이 열려있는 데 어떻게 그런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 몸의 모든 세포가 그 기쁨에 공명하지요.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어째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거죠? 맨 처음에 어째서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겁니까?

 

벗이여, 당신의 질문 속에는, 당신이 인식하는 방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신의 한정된 모습입니다.

 

우리가 전체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만,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분명 무엇인가가 있지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여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당신이 잘못된 건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성에 있어서도 잘못된 게 없지요. 하지만 진실로 이 모든 활동은, 소위 삶과 우주의 만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건 마음의 작용이지요. 그건 느낌에 관한 겁니다. 당신이 아무런 판단 없이 느끼도록 자신에게 허용한다면 당신은 신을 알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분리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해답은 논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가슴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바퀴벌레가 자꾸 들어와서요.. 전에 부탁했었거든요. 그들이 이곳에 있는 게 싫다고요. 그러나 듣지 않아서 약을 뿌려서 죽였지요. 같이 있어달라고 할 정도로 즐겨야 하나요?

 

당신이 선택할 문제이지요. 그러나 바퀴벌레가 당신에게로 오는 것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오게 될 거예요. 당신이 그들에게 약을 뿌리는 건 아주 타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건 궁극적인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 아무런 판단이 없어야 합니다. 벗이여, 뉴 에이지라고 불리는, 이 미친 짓에 대해 모르는 누군가에게 당신의 이런 사정을 말했다고 합시다.

나는 바퀴벌레에게 약을 뿌리지 않고 그저 떠나 달라고 부탁했노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도 당신을 미친 사람들을 가두는 곳에 데리고 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세요. 어떤 생명체가 당신의 정원을 갉아 먹든, 당신의 집에 떼지어 몰려들어 당신의 음식을 먹고, 당신을 끔직하게 만들든, 근절이라는 방법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존경심과 경의를 표하며, 그 원치 않는 방청객에게 떠나가 달라고 부탁하세요. 때로는 당신 집을 찾아온 그 방문객들처럼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있지만, 당신이 판단에 빠져 들지 않는다면, 그들은 진실로 떠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떠나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바람직하다고 이미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벗이여, 판단과 분별을 혼동하지 마세요. 그들이 이 곳에 없는 편이 더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건 선호의 문제이지, 판단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판단 속에서 살아오다 보니, 판단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우리들은 싱겁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어리석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린 분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인류와 당신네 행성을 위해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판단 속에서가 아닌, 경의와 존경 안에서, 분명히 분별하는 가운데,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제가 집에 없는 동안, 누가 집에 침입했어요. 무엇을 도난 당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묻고 싶은 건 교훈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제 당신 마음 가운데는 누군가가 집에 들어올지 모르니 방어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들 겁니다. 그렇죠?

 

그래야 되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드는 건 아녜요. 제 집에 튼튼한 분도 없고, 뒷문을 열어놓은 채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요? 문을 열어놓고 나가면서도 침입되지 않기를 바라나요? 도대체 무얼 하는 거죠?

 

제 집을 놓고 주문을 외웁니다. 그런데 전에 그것을 깜박 잊고 하지 않았었어요.

 

그렇군요. 참 특이하네요. 사랑하는 이여.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방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걸 믿어라.. 그 말씀이신가요?

 

벗이여, 우리는 어떤 것을 하라, 하지 말라고 주문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왜 당신이 그런 일을 하며,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당신의 행동 뒤에 있는 밑바닥 신념이 무엇이냔 말입니다.

벗이여, 당신들의 몸, 당신들 자신의 표현인 이 몸은 순간순간 어린아이처럼 생기 있고 즐겁게 반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당신 자신은 고통 속에 살고 있고, 사랑을 갈망하며, 전체성을 염원하지요. 당신이 진실로 전체성 안에 머무르면, 본래의 당신 자신과 더불어 있으면, 당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진실로 경험하면, 그땐 분리가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다른 모든 것이 따라 오게 되지요. 항상, 항상,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귀결됩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거지요.

당신은 신성한 권리로 여기 존재합니다. 건강과 풍요로움과 기쁨과 사랑은 모두 신성한 권리로서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구요? 당신이 여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당신은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우주 가운데서 당신이 갖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그 놀라운 것들을 갖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야만 하며, 당신의 모든 면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장황한 이야기 속에는 구슬을 꿰매는 실처럼 그 모든 것을 꿰뚫는 공통된 실이 있음을 눈치채셨나요?

약동하는 건강은 당신이 믿기만 하면, 당신의 권리입니다. 건강치 못한 것 또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신성한 국면으로서 유효한 겁니다.

 

프티아, 바퀴벌레 얘기로 돌아가서 바퀴벌레 중에는 독을 퍼뜨리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분별을 해야 하나요? 또 털파리는 어떻고요?

 

우리들의 여인(자니 킹-저자)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털파리를 사랑하는 게 좋겠습니다.

 

편지를 쓰는 게 도움이 될까요? (폭발적 웃음, 이 방법은 자니 킹이 그녀 집에 살고 있던 쥐에게 쓰던 방법인데 그 쥐가 정말 집을 떠났다.)

 

그 방법이 쥐에게 효과가 있었다면 털파리에게 효과가 없으리란 법은 없지요? 자, 이 점을 또한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당신 몸 위에 앉으면, 당신은 물리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전에 쥐에 대해 말씀 드렸던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무엇인가가 당신을 물고, 상처 주고, 할퀴고, 독을 퍼뜨린다고 믿으면, 그땐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의 일치라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독인 줄 모를 때는 어떠한가? 그것들이 물었다는 걸 모를 때는 또 어떠한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건 배워야 할 가르침입니다. 안전한 우주에 대해 배워야 할 가르침이지요. 몸의 반응과 정서적 상태에 관해 배워야 할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건 모두 다차원적인 겁니다. 어느 한 차원에서 보면 대답이 아주 간단하지요. 하지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일은 또, 또, 또 반복됩니다. 어떻게 배워야 할지, 무엇을 창조해야 할지, 판단하지 마세요. 당신이 불러들인 모든 것을 축복하세요.

 

아직도 석연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제가 바퀴벌레들에게 가라고 요청하면 그들이 갈 거라고 믿긴 합니다. 하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뭔가 빠진 것 같아요.  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요?

 

벗이여, 당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바퀴벌레 또한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곳 허공에서 바퀴벌레들에게 요청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갈까요? 물론이지요. 멋진 실험을 한 번 해보세요. 바퀴벌레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당신이 바퀴벌레가 되는 거지요. 당신 정원에 있는 화초나 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동식물의 의식, 그들의 영혼과 하나가 되어 그 생명체에 축복과 격려를 보내면 그들은 번성할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바퀴벌레에게 축복을 보내면서 함께 살고 싶지 않으니 다른 곳에 가서 더 호의적인 거주지를 찾아보라고 말하면 그들은 떠나갈 겁니다.

 

거기에 대해 요령을 좀 가르쳐주시겠어요?

 

벗이여, 우리는 괘 오랫동안 거기에 대해 말해 오고 있습니다. 벗이여, 우리는 항상, 항상, 같은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안 그래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당신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경이로운 수업을 해야 합니다. 당신의 집안에서, 우리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지세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세요. 그 상태가 되었을 땐 당신은 자신이 꽃피어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될 겁니다.

 

. 그래요. 하지만 듣기 보단 어려워요.

 

그렇지 않아요.

 

어려워요!

 

당신은 날 놀라게 하는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즉각 알아들었는데요. (웃음)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발견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렇게 있으면 됩니다.

 

저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병이라는 것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긴장이나 한계 상황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낄 때는 가슴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뭔가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은데, 올바른 태도를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전체성에 마음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내면에 더욱 더 전체성을 반영하게 되고, 자기 바깥의 세계에도 그것이 나타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건강은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문제요, 가슴의 문제입니다. 치유라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괜찮습니다. 치유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치유를 촉진 시키는 것은 분명 큰 기쁨입니다. 우린 그 같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질병을 만들어 내는지, 그런 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스스로 비추어보라는 겁니다.

 

저는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저 자신을 그 같은 상황에 밀어 넣고, 온전히 두려움을 느껴야 하나요? 아니면 제가 두려워하는 상황을 끌어들인 건가요?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것을 껴안으세요.

 

껴안으라고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느껴야지요. 자, 이 점을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당신은 두려워 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 같은 두려운 상황을 창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판단 없이 인정하고 껴안음으로써 두려워하는 상황을 물리적 현실에 불러들이지 않고도 두려움을 변형 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매우 조화로운 길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물리적 현실에 그 모든 드라마를 창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같은 감정을 껴안으면 두려움이 사랑으로 변합니다. 어떤 것을 함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판단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인정하고 껴안음으로써, 그 두려움 안에 보석이 있음을 앎으로써 말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군요. 제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려고 한다면, 저는 그 두려움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떤 것을 두려워할 경우 우선 제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괜찮은 것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두려움을 거부하지 않고 껴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우리 자신에게로 끌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우주에는 두 가지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지요. 둘 다 유효합니다.

 

우리는 둘 다 껴안아야 합니다.

 

그렇구말구요.

 

그럼 뱀에 대한 처방도 내려주시죠.

 

당신은 뱀을 두려워하는군요. 그렇다면 다시 가장적으로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을 심하게 괴롭히지 않는 것에 대해선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자, 극적이고 병적인 두려움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뱀에 대해 병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러한 두려움을 표출할 수 있는 상황을 당신에게로 끌어 당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두려움이든, 그것 역시 유효한 표현임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거기에 힘을 부여하고 당신에게로 끌어 당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 뱀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을 직시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십시오. 밤에 침대에 누워,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는데 그 책 바로 밑에 뱀이 있다면 어떨까요? 이 같은 시나리오를 상상할 때, 당신은 가슴 속의 느낌, 즉 두려움을 창조하게 됩니다. 이제 당신이 할 일은 그 두려움을 엑스터시로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방법이 뭐냐구요? 책임을 지십시오. 그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이런 경우에는 그런 두려움을 가질 만큼 약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뱀이 갖고 있는 판단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머리를 떼어내어 겨드랑이 아래에 넣어두고 그 느낌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비명을 지른다든지 하는 상황이요.

 

벗이여, 그것이 소위 표현이라는 것이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느낌에 대한 문제니까요. 느낌이란 억누르는 것도 아니고,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둘의 중간 지점이지요. 왜냐하면 느낌이란 진실로 중립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해 좋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바로 판단입니다. 당신이 판단 없이 그 느낌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에너지, 그 느낌은 더욱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더 이상 그 드라마를 물리적 현실에 끌어들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것이 빛이 될 때까지 계속 느낌 속에 있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껴안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걸 느끼려고 애써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느껴야 한다. 뭐 이런 뜻인가요?

 

, 언제 그걸 멈춰야 할지는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 점을 말씀 드려야겠군요.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그 경험을 모나지 않게, 아주 부드럽게 하고 싶다고 말해보세요. 그건 무엇인가 하는 게 아니라 수용하는 겁니다. 수용이란 소위 여성 에너지입니다. 그건 무엇인가를 하는 게 아닙니다. 행위는 소위 남성에너지로서 인류가 역사 이래로 운영해 온 에너지입니다. 남성에너지를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성 에너지를 불러들여 균형을 잡고자 하는 겁니다. 지성과 감성, 긍정과 부정의 균형 말입니다. 그건 판단이 아닙니다.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른 게 아닙니다. 둘 다 똑같이 유효하니까요.

불균형을 창조하는 건 바로 판단입니다. 따라서 수용하는 겁니다. 두려움을 변형 시키는 것에 대한 수용, 두려움 그 자체에 대한 수용, 두려움을 억누르지도 말고, 굳이 표현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껴안고 당신 자신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이제 분명해졌습니까?

 

당신이 이것을 직접 요리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케이크를 만드는 일과는 다르니까요. 먼저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그저 따라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기 자신의 지혜와 더불어 터득하게 되어 있는 것이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매우 간단한 요리법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라. 자신이 신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은 저절로 따라 오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니까요. 당신이 곧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 밖에 있는 모든 것이 신성의 반영임을 알게 됩니다.

 

나의 에고가 너는 완전치 않다거나, 너의 이런 나쁜 면을 보라고 다그칠 때는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벗이여, 당신 자신의 모든 면이 당신이라는 신의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의 모든 국면은 신성의 표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니까요.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선입견을 갖고 있고, 거기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발생해요.

 

사랑하는 이여, 당시은 완전합니다.

 

나의 에고가 완전하다고요? 내 모든 면이 완전합니까?

 

벗이여, 그것이 완전함에 대한 인류의 한계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완전함에 대한 당신들의 정의는 완성된 대상을 뜻하고, 원래 완성되어 있는 것을 뜻하지요. 하지만 우주에는 완성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하지도 않을 겁니다. 심지어 신조차도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우주 안에서 경이로운 춤을 추면서, 자신이 모든 것임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남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소위 남성 에너지라 불리는 것이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건 여성 에너지입니다. 당신들은 대부분 주기보다는 받아들이는 것을 더 어려워합니다.

보자 높은 진동 주파수를 지닌 존재가 보다 높은 수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준의 높낮이에 대해 말씀 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기술적, 과학적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들의 세계가 4차원으로 진입해 감에 따라 더 높은 주파수로 들어서게 되면, 물리적 밀도는 더 옅어지게 됩니다. 옅은 밀도를 지니게 되는 거죠. 더 높은 주파수는 점점 빛이 되고, 그리하여 지구의 변형이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원자와 분자가 보다 옅은 밀도를 지니게 될 것이고, 그 안에 빛을 창조하게 될 겁니다. 이런 일은 인간에게만 국한 되지 않고, 식물이나 동물 할 것 없이 지구 전체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공명 현상을 변화 시켜, 더욱 더 빛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나요, 사랑하는 이여?

 

어느 정도는요, 그러나 충분치는 않습니다.

 

그렇겠죠.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빛의 존재라고 할 때, 우리는 당신 자신의 다차원적인 국면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덩시에 모든 것이니까요. 당신들이 사용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단어는 시공 연속체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시공 연속체 밖에서는 그것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니 당신이 진동 주파수라고 부르는 자아의 여러 국면들은 과거, 현재, 미래와 더불어 존재합니다. 당신의 다차원적인 국면들은 시공 밖에 있다고 이해하실지 모르지만, 좀 다른 방향에서 보면 그건 시공 안에도 존재합니다. 당신의 본질은 모든 방향을 다 포함합니다. 당신은 한 순간에 모든 방향으로 다 퍼져있으며, 한 순간에 모든 시간의 범주에 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 충분해졌나요?

 

정말 맘에 드는군요.

 

, 그럴 겁니다. 당신이 과거, 현재, 미래에 참여하는 방식도 그와 같습니다. 당신은 다차원적인 진동 주파수의 여러 국면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더 가볍고, 더 빛나는 진동주파수에 말입니다. 당신은 또한 소위 실현 가능한 현실들에 참여하기도 하고, 다른 모든 시공 연속체의 실현 가능한 자아들에 관여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매우 바쁜 존재인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다른 모든 국면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만 알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인류의 다차원성을 지적으로 이해하면 할수록, 이 세상엔 분리된 게 없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프타아, 아무런 분리가 없는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물리적 현실에선 뿔뿔이 분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모두가 말이에요. 저는 저와 분리된 다른 사람들을 봅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은 변혁에 대비하여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이고, 언젠가는 진정으로 하나됨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겁니다.

 

프타아, 아느 날 눈을 떠 보니 제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기억이 났어요. 이제 막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사랑하는 이여, 사실 당신이 온 그곳의 광대함은 시공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소위 본래의 나, 신이라 할 수 있는 볼텍스의 안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여러분이 돌아가야 할 곳입니다. 물론 여러분 모두는 그곳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패러독스지요.

 

에너지, 그것이 전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은 자신의 특정 주파수로 에너지가 전환된 것이군요.

 

어떤 진동수라도 전환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이 근원으로부터 아이덴티티, 정서,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건 그저 측량할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에너지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세상엔 당신네 물리학자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형태의 에너지가 존재합니다. 신도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에너지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도 에너지입니까?

 

그렇습니다. 벗이여.

 

그렇다면 영혼은 에너지의 운반자이고, 정신은 에너지이겠네요.

 

그렇습니다.

 

다른 진동 주파수입니까?

 

모든 것이 다 에너지입니다.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에너지입니까? 특별한 에너지?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특별한 에너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신, 전체성, 근원으로부터 왔으니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분리된 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그 모든 걸 자기 자신의 작은 상자에 가둬놓고 있는 셈이죠.

 

저는 꿈속에서, 감옥에 갇혀서 그 감옥을 탈출하려고 시도하는 꿈을 꾸곤 합니다. 그런데 항상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을 찾아 보려고 해도 일상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정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몸에 갇혀 있는 죄수이고, 거기서 빠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당신 스스로 빠져 나오기를 바라는 것들이 있으니, 당신은 죄수임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이 어서 빨리 죄수라는 사실을 껴안기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프타아, 이건 다른 여인의 질문엔데 그가 어려워해서 제가 대신 물어보는 겁니다. 만사가 순조롭게만 진행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통 사고가 났습니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하면 그 불행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놀라운 합작품이 아닌가요? 당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감자기 사고가 닥치다니 말입니다. 삶을 창조하는 당신의 방식은 경이로워서, 때로는 당신으로 하여금 도대체 내가 이 일을 무엇 때문에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이 일을 당해야 하지?라고 반문하게 만드는 상황을 곧잘 만들어 냅니다.

당신은 날이면 날마다 진정 무엇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신념 체계와 정서적 반응의 차원들 위에는 켜켜이 또 다른 차원들이 있다는 것, 그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명백하게 깨닫게 하기 위한 상황들을 스스로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도 다차원적인 진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 그 여정을 스스로 창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 부호를 창출하는 일을 겪게 되는 겁니다. 사고를 당하게 되면 내가 왜 이 일을 당해야 하지?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하고 스스로 묻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죠. 그걸 어떻게 느껴야 하죠? 이 사고로 저는 무엇을 느껴야 하나요?

이 세상에 사고란 없습니다. 사고란, 여러분의 이해력의 껍질을 벗겨서 앎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여,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가르침을 배워나가는 데 있어 그렇게 심각해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절박한 상황을 창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벼운 기분으로 대하도록 하세요. 그리 심각하지만 않다면, 사고를 당하는 것이 건강에 적신호를 받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제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삶은 그토록 심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심각하기를 원한다면 저는 별로 상관없습니다. 심각한 것도 절대적으로 유효하니까요.

, 이제 여행을 떠날 시간이군요. 그렇다고 영원한 작별은 아닙니다. 여러분을 만나는 게 매우 즐겁고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고대합니다. 모든 것이 신이고, 여러분 또한 그렇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축복하세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본래 우주 전체에 빛을 발하는 광휘의 반영입니다. 여러분도 곧 본래 자신이 신임을 알게 될 겁니다. 우리는 단지 여러분이 인내심을 좀더 발휘하여 수련해 주기를 청할 뿐입니다.

 

9.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

 

새로운 얼굴이 많이 보이는군요.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인류 의식의 성숙이 그만큼 빨라지고 있다는 증거이군요. 여러분의 사회구조는 매우 계획적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의 정부나 여러분의 사회, 경제 구조 속에는 항상 계급이 있습니다. 이제 그 계급은 여러분의 사회 속에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교육에도 계급이 있고, 경제에도 계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 내에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거대한 파워 게임을 벌입니다.

사실 그들은 법으로 여러분의 일상 생활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위 뉴에이지에 속하는 여러분 같은 사람에게도 계급이 있습니다. 벗이여, 여러분 모두가 마음속에서 자신은 누구만큼 진보되지 못했다고, 혹은 누구만큼 알지 못한다고 상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여러분의 영적 영역에 있어서는 전혀 계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는 모두 영적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몇 분은 나 같은 존재를 구루나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간의 모습을 했던, 혹은 이 같이 인간을 소위 전화기로 사용했건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예배의 대상 비슷하게 숭배하려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여러분과 똑 같은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전체성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계급이나 서열은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나 같은 존재나 여러분의 스승 역할을 하고 있는 다른 어떤 사람들을 높이 받들어야 할 것처럼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죠. 여러분 자신은 나라는 존재에게 있어 위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하고 있는 일은 에너지를 서로 나누는 일입니다. 요즘은 의식의 확장을 도와주기 위해 온 나 같은 존재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러분은 그저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위대한 영적 존재로써 이러한 차원의 현실을 경험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통의 공명 상태 속에서, 다시 말해 인류의 집단 의식 속에서, 바로 인 순간을 선택한 것이며, 이 행성에서 수많은 경험을 해오는 동안에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잊어버린 겁니다. 그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육체와 존재는 여러분 자신의 그 위대함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했으면 좋을지, 혹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누누이 말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자신은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할 일이란, 자기 자신의 힘, 자시의 주인됨을 깨달아 다시는 자신의 정서적 행복을 위해, 자신 외에 다른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배움조차도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각자의 숨결마다에는 우주 전체의 앎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벗이여, 우리 이야기의 귀결점은 언제나 같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잘 알게 되면 될수록, 여러분이 존재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시작할수록, 여러분은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곧 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곧 신성을, 전체성을, 위대한 근원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렇게 하는 가운데 여러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랑의 빛을 내뿜게 되고, 그 신성한 빛은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우주로 우주로 울려 퍼질 겁니다.

인류의 가슴 밑바닥에는 가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가치 없음의 문제에 대해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믿음으로써 그것을 생활 속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신의 숨결이 스며 있는데 어떻게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보다 더 고귀한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가 보다 높은 주파수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린 그저 기술적인 애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다 높은 주파수란 보다 높은 단계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보다 폭 넓은 안테나라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전 은하계로부터, 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식과 에너지를 포착하는 안테나 말입니다. 안테나가 포착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앎도 많아지고, 앎이 많아지게 되면 안테나는 더욱 폭넓어지게 됩니다. 안테나는 나선형 소용돌이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일종의 에너지인데 그 나선형 안에는 에너지가 모이는 볼텍스가 있습니다. 그 볼텍스는 바로 신성한 근원 자체입니다. 정말 매우 간단합니다.

 

호주대륙이 특별한 의식이나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무엇이고,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론 특별한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집단 공명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요약해 드리죠. 모든 원자와 분자는 집단의식이라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집단의식은 모든 유사한 원자와 분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몸 안에서 원자와 분자가 모여 세포를 이루게 되면 그 세포들은 그와 유사한 모든 세포들에 대해 자기들끼리의 울림을 갖게 됩니다. 세포들이 모여서 몸의 기관이 되고, 그 기관은 다른 모든 유사한 기관에 대한 기억과 앎을 갖게 됩니다. 그 세포와 기억들이 한 인간의 몸을 이루게 되면 그 몸은 다른 모든 인간과 더불어 공통된 울림을 갖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보이지 않는 의식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어느 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되면, 그 가정은 공통된 울림, 하나의 집단 공명을 지니게 됩니다. 일종의 주파수지요. 그 가정은 마을이나 도시에서 살아가고, 그 마을이나 도시의 집합체는 그 자체의 공통된 울림을 지닙니다. 일종의 의식을 지니게 되는 겁니다. 특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공통된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호주도 그 자체의 공통된 울림을 가지고 있고, 그건 호주에만 있는 독특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구요. 자, 물론 모든 집단 공명은 인류라 불리는 공통된 울림 속에 함께 어우러듭니다. 여러분의 지구, 여러분의 위대한 여신도 그녀만의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것, 모든 광물질, 모든 바위, 모든 나무와 꽃은 그 여신과 더불어 공생하는 공통된 울림을 갖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정말 위대하고 놀라운 영혼입니다. 고대인들도 물론 그랬구요. 유럽인들이 여기 오기 전에 이 나라에 살았던 사람들은 지구 여신과 놀라운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별나라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공통된 울림이 아직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 당신들에게는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여기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다른 곳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오게 된 사람들은,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가슴속에 이러한 앎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보다 위대한 영혼, 보다 위대한 부분, 내면의 그 앎이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왔고, 그래서 당신들이 의도한 것이든 우연이든, 가슴속의 그 열망을 채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나라는 가까운 장래에 지구를 변혁시키는 위대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네 나라의 바로 그 지역(호주 북부의 퀸스랜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매우 현명합니다. 이곳은 진실로 부드럽고 온화한 에너지가 충만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 중에는 이곳이 아틀란티스 문명보다 더 장구한 시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과연 그럴 만도 합니다. 이곳은 정말이지 매혹적인 곳입니다. 위대한 치유의 장소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느낌과 만나는 게 버겁습니다. 느낌을 느끼는 것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사람 전부가 마찬가지 입니다. 인류가 느끼지 못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자, 당신은 그 비법을 알고 싶은 거죠?

 

 

당신은 어떻게 느낌을 느낍니까? 음.. 비법의 첫 번째 단계는 애쓰는 걸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귀에 익은 말입니까? 우리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 걸 상당히 어려워한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면 오히려 그걸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정상이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에게 평온에 이르는 법을 알려드리죠.

당신은 나무 아래 앉아 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그렇게 해보십시오. 매일요. 꼭 나무일 필요는 없습니다. 바다라도 좋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야외에 나가 명상을 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프타아, 그건 너무 따분해요. 하고 말하는 분도 있지요. 그렇다면 하지 마십시오. 아무쪼록 당신들의 가슴이 노래 부르는 일을 하십시오. 기쁨 속에서, 웃음 속에서 존재하십시오.

적어도 매일 한 시간씩 해보십시오. 가만히 앉아 생각을 멈추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밖에 나가 나뭇잎이든, 작은 동물이든, 바닷조개든, 거기에 집중해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바라보세요. 거기에서 신을 발견할 때까지 말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될 때 그때 무슨 느낌인가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느낌을 껴안을 수 있게 되고, 좋은 느낌을 껴안을 수 있게 되면, 나쁜 느낌도 껴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느낌은 느낌일 뿐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느낌이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좋고 나쁜 것을 지어내는 것은 판단입니다.

 

의심이란 두려움과 같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의심이 두려움과 사뭇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바를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면서 의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바라고자 하는 소망을 감정에 담아 띄워 보내면 그 생각은 이미 실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심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이란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에 가깝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매일매일 표출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삶 가운데 조화롭지 못한 상황을 창조하고 있다면,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무얼 믿고 있는지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생각이라도 그것으로 인해 무엇이 야기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은 그런 말을 혼자 중얼거립니다. 그 생각과 더불어 당신은 이미 그런 상황이 실재하는 감정 속에 빠져든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잊어버리지요. 그런데 맙소사,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말하죠.

얼마 전에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이렇게 실현되다니! 하지만 그건 행운도 우연도 아닙니다. 바로 당신이 창조한 것입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이 이 경이로운 머리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이 일어났는지를 느낌으로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땐 당신 자신의 현실을 뜻대로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를 이해하게 되면,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심이란 자기에게는 자신의 현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믿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니 의심이 곧 두려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많은 신체적, 정서적, 심리적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벗이여, 에너지는 당신이 생각하듯 그렇게 공급량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사실, 에너지는 끝없이 공급될 수 있습니다. 그건 마치 사랑과도 흡사합니다. 에너지의 공급량은, 에너지에 대한 당신의 믿음, 풍요로움에 대한 당신의 믿음에 관련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의 목록표를 작성해 보십시오. 한 페이지에 각각 하나씩 적어 넣습니다. 중간에 줄을 그은 다음, 한쪽에는 긍정적인 신념을 적고 다른 쪽에는 부정적인 신념을 적습니다. 당신 자신이 믿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부정적인 신념들이 뜻밖에도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체계를 돌아보면서 그것들을 무가치하게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한 신념체계가 더 이상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지적으로 진리라고 여겼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을 감정적으로 품게 될 것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들을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우리들의 오라를 보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사랑하는 이여. 오라란 그저 에너지일 뿐입니다. 여러분도 오라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방에 있는 몇몇 분은 실제로 오라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벗이여, 편히 쉬세요. 나는 당신의 물리적 신체를 봅니다. 그것 역시 매우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아름다운 물리적 신체를 갖고 있음을 아십니까? 여러분 모두, 매우 아름답습니다. 물론 나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매우 아름답습니다. 농담입니다. 당신들은 진실로 당신들의 빛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발광체입니다. 질문하세요.

 

오늘 밤은 달이 심상치 않네요. 우리 문화권에서는 대체로 달을 여성적 에너지로 바라보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렇습니다, 벗이여. 어떤 문화권에서는 달이 남성적인 경우도 있음을 아십니까? 하지만 당신네 문화권내에서는 대체로 태양을 남성적인 것으로 보고 있고, 소위 양성적 에너지라고 합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태양은 빛을 내보내어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태양이야말로 당신네 행성에 사는 식물의 발육자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달은 많은 문화권에서 여성적 에너지, 음성적 에너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양성적, 음성적이라고 말할 때, 그건 좋다거나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서로 반대되는 양극일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달은 사실상 태양의 부드러운 측면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달은 밀물과 썰물을 창조합니다. 달에 근거하여 식물을 재배하는 문화권이 많습니다. 음력이 바로 그것이죠. 그러므로 달은 당신네 행성의 심장 고등을 관장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직관적이고 수용적인 에너지라는 것은, 그것이 남성 속에 있든 여성 속에 있든, 인류의 심장 고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이러한 창조적이고 직관적인 에너지가 없었더라면, 당신들은 여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꽃피어 남을 허용하는 건 바로 이러한 측면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행성의 낡은 문화, 낡은 문명권에서는 더 이상 달, 즉 여성적 에너지에 경의를 표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 둘 다로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은빛의 아름다운 달을 바라보고 명상하면서, 그것이 당신 자신의 멋진 반영임을 알도록 하세요. 그리고 여러분들 중 남성의 육체를 지니신 분은 가만히 앉아 달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명상해 보세요. 당신들 내면의 그 고요한 아름다움을 깨달을 때까지.

 

감사합니다. 당신은 혹시.. 저는 당신이 수많은 세월 동안 예술과 기예의 수호신이라고 들었는데요.

 

벗이여, 나라는 존재는 사실 많은 이름으로 불리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걸 아셔야 합니다. 당신이 작은 육체 속에 수많은 인간 경험의 모든 측면들을 담고 있이듯, 이 에너지 역시 당신만큼이나 다차원적인 존재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여러분 각자가 갖고 있는 본질의 서로 다른 측면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며, 언제나 다양하고도 장엄한 신성의 표현입니다. 바로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여러분 자신이기도 합니다.

 

프타아, 저는 당신이 말씀 하신 고통, 저항 에너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유연성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죠. 당신은 거기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였습니다. 과학은 딱딱한 물질이 딱딱한 상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은 유동적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거기에 비추어 마음가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저항을 덜하게 되면 될수록 우리들의 생각이 진동을 하게 되고, 우리들의 몸도 진동하게 될 것이라고요. 우리는 더 우동적으로 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물질을 통과하는 환상적인 일들이 가능한지요..

 

벗이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십니까?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실제로 존재합니다. 여러분의 우주는 바로 그와 같이 유동적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여러분의 우주는 바로 그와 같이 유동적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당신이 소망을 품거나 상상을 하여 감정으로 감싸안은 생각을 내면, 당신의 우주는 스스로 재정렬하여 당신에게 그것을 제공합니다. 상당히 유동적으로 들리지 않나요? 실제로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지구를 딱딱한 물질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앉아 있는 방바닥은 실제로는 딱딱하지 않습니다. 물질이란 생각이나 빛보다 주파수가 낮을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당신들의 세계는 유동적으로 존재합니다. 단 하나의 지구, 단 하나의 현실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당신들의 제한된 이해 상자가 그것을 고정 불변의 딱딱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당신이 제한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굳어버린 당신의 이해 상자의 벽이 허물어질 것이고, 그리하여 광대하고 무한한 전망을 펼쳐 보일 것입니다. 당신은 결국 이런 식으로 은하계를 탐험하게 될 것이구요.

 

프타아, 우리의 제한된 의식이 전환되어 모든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빛을 보기 시작하려면 아직도 오랜 시간이 남아 있나요? 식물을 둘러싸고 있는 빛이나 그 빛 자체를 볼 수 있게 되려면 말에요. 우리는 결국 볼 수 있게 될까요?

 

물론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렇게 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줄 아십니까? 눈 깜짝할 사이죠. 장담합니다. 시간은 시간이 아닙니다. 초의식이란 당신들에겐 아직까진 가 닿을 수 없는 관념의 세계이지요. 당신을 본래의 자기로부터 분리시켜 놓은 것은, 오직 당신의 신념 뿐입니다. 내가 본래의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을 때, 진정한 변혁이 있습니다. 그건 얇은 베일과 같아서 단 한번의 숨결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 몇몇 분은 그것이 무엇인지 슬쩍 훔쳐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세요? 여러분 모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가 이미 그곳에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이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에도 당신들은 이미 그곳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패러독스이지요. 그토록 간단한 겁니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세요. 당신이 신임을 진정 알도록 하세요. 그게 전부입니다. 당신들 모두 위대한 영적 존재로서 이 같은 차원의 현실을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당신은 신의 생각입니다. 당신은 장미 향내 풍기는 신입니다. 물질적 현실 속에서 수많은 삶을 거듭나는 동안, 사람이라 불리는 이 감각적 경험의 강렬함에 빠져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린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잊어버린 건 오직 당신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선 자기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은 수백만 수천만의 존재가 있습니다. 3차원의 인류가 분리가 없는 그 영역으로 들어오기를 진정으로 기다리는 수많은 존재들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신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이 있고 나면 여전히 물질적 현실 속에서 경험하기는 해도 그것은 예전과는 다른 현실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그 현실은 보다 높은 진동주파수로 이루어져 있고, 그곳에선 모든 원자와 분자가 그 자체의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프타아, 제 삶 속에 기회가 다가올 때, 저는 제 안에서 두 가지 면을 봅니다. 하나는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확장하고 성장하려는 욕구입니다. 양쪽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어느 길로 다가가야 할지를 알려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음 저는 그 사실을 믿기가 아주 어려운데요. (웃음) 그러니까 한쪽 손에는 확장에 대한 흥분과 갈망,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고, 다른 쪽 손에는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는데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죠? 제대로 설명했나요?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는데 대한 두려움뿐만이 아닙니다. 그건 마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아요.

 

그렇습니다. 그건 당신들의 표현에 의하면 궁극적 놓아버림이죠.

 

 

, 궁극적 놓아버림이 진정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 3차원의 세계에선 오직 두 가지만이 존재합니다. 두려움과 사랑이 그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사랑의 표현이 아닌 것은 전부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자, 이제 어떤 식으로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이미 말씀 드렸죠? 잘못된 결정 같은 것은 없노라고. 두려움을 선택한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껴안지 않은 것은 다시 끌어들이게 되어 있으니까요. 다시, 또 다시, 또 또 다시, 당신이 껴안을 때까지 계속. 그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는 걸 당신이 알아차리면, 이미 반 이상은 나아간 셈입니다. 그 사실이 당신에게 다소 위안이 되나요?

벌써 여러 차례 말씀 드리지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왜냐하면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지세요. 판단과 하나가 되세요. 머리는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 넣어버리고 느낌을 느끼세요. 그것이 바로 변형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에 대하여 엄청난 판단을 내립니다.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이든 말입니다. 무엇이 두려워할 대상인지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인류는 두려움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데 아주 능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사회가 당신의 두려움을 조장할 때 당신은 두려워하는 걸 괜찮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 괜찮아 그게 당연한 거야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유효한 것이고, 당신 자신의 신성의 일부분입니다. 그것을 껴안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유효한 것임을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두려움을 껴안고 당신 자신의 빛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항상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바람을 내보내세요. 당신 존재의 신성이 바라는 바라고 말하세요. 당신은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상황을 불러 일으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껴안음 속으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벗이여, 껴안음으로써만 변화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두려움을 껴안고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마다, 점점 더 의식 확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제한된 신념 체계로부터 한 걸음 내딛는다는 것이, 굳어버린 이해상자로부터 한 걸음 성큼 내 딛어 허공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이, 당신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해합니다. 그것도 소위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건 당신이 진정으로 안전한 우주에서 살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풍성하고, 자비롭고, 쾌활하고, 창조적인 위대한 완전성 말입니다.

당신 몸 속의 모든 세포는 창조적이고 강력합니다. 진정한 자아는 진실로 흠이 없습니다. 우주는 정말이지 안전하다는 걸, 당신이 바라는 것은 조화 속에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당신 자신에게 상기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항상 안전하답니다. 벗이여, 그 어떤 것도 당신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항상, 항상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뢰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안전하다는 믿음입니까?

 

사랑하는 이여, 진아(眞我)에 대한 믿음은 어떻습니까? 그럴 때가 되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때로 저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이 진실로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렇다면 제가 말씀 드리죠. 당신은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군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무엇입니까? 죽는 것인가요? 전멸되는 것? 죽음은 단지 일시적인 상태라고 지성적으로 생각하기는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머나먼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생애에서 생애로 건너 뛰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뿌리 깊이 박혀 있지요. 하지만 바꿀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되고, 안전한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 속에 들어서면 설수록, 그러한 신뢰감, 그러한 믿음을 회복하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안심이 되지 않나요?

 

정말 멋지군요.

 

그렇습니다 벗이여.

 

우리가 의식 확장의 과정 속으로 계속 나아가게 되면, 미래 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의 몸을 갖게 되나요?

 

벗이여,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군요. 내생의 문제부터 출발해볼까요? 진실을 말하자면, 미래란 없습니다. 오직 지금이 있을 뿐이죠. 당신이 과거, 현재, 미래라고 말하는 이 시공 연속체 밖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당신이 변화되면 모든 것이 변할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순간마다 두려움을 변형시키는 일이 가능함을 이해하게 되면, 당신은 이미 당신이 전생이라고 부르는 것과 내생이라 부르는 것의 변화를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벗이여, 진실로 분리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인류와 동식물과 당신네 행성의 모든 존재가 4차원 밀도에 들어서게 되면, 과거나 미래의 삶이라고 이해했던 모든 것이 당신과 동행하게 됩니다. 정말입니다.

 

4차원의 밀도가 무얼 뜻하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실, 그건 그저 이름일 뿐입니다. 소위 뉴 에이지에 속하는 이들은 차원을 가지고 숫자 놀음을 하느라고 매우 바쁘더군요. 당신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차원이 이것뿐이므로 무엇이라고 부르던 상관없습니다. 464차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4차원 밀도라는 것의 과학적 의미는, 지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류가 주기적 변화에 들어서고 있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뉴 에이지는 이 모든 변화를 다루려고 합니다. 변화에의 간절한 바람과 추진력, 뜨거운 열정이 뉴 에이지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서클과 같아서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뉴 에이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여러분 모두의 본질인 진동주파수가 높은 비율로 진동하게 될 겁니다. 더 높이, 더 높이, 더 높이.

당신네 과학자들은 빛이 가장 높은 밀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질은 가장 무거운 밀도죠. 바위라든가 당신네 지구는 무거운 밀도로 되어있습니다. 순수의식(당신네 용어로는 가장 높은 주파수)과 가장 낮은 주파수의 차이는 의식입니다. 물질을 창조하는 것도 의식이고, 물질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올 이 시대에는 지구가 이동과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 시기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인류의 의식은 확장되고 확장되어, 소위 높은 밀도를 지닌 수준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몸이 가벼워지면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빛의 몸이 되는 겁니다. 지구 자체도 빛 속에서 정화될 것인데, 전에 말씀 드렸듯이, 모든 원자와 분자가 그들 존재의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4차원 밀도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다가 올 그러한 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프타아,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정말로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겠네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너무 아름다우니까요.

 

궁극적으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 이순간도 그렇습니다. 미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래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모든 것이 더 좋아지기를 기다려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언제쯤이면 행복해질까 하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미래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지금뿐입니다. 내일이란, 지금이라는 순간 순간이 모여서 지어가는 겁니다. 닥쳐올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위에 내일을 쌓아간다면 무엇이 나타날까요? 무엇을 가져올까요?

 

고통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절묘하게 아름답다는 걸 앎으로서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당신의 본래 모습은 절묘하게 아름답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은 신성의 표현입니다. 당신 자신의 모든 면, 모든 생각이 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뿐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거라는 굴레를 현재에 끌어안고, 안전한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가운데 기쁨과 웃음으로 내일을 창조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그 어떤 누구도 당신을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당신은 주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판단을 통해 병을 창조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병을 창조한 판단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알아내고 싶어도 그 판단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그 판단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사실 그 병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거기에 대한 지식을 신이 당신에게 쥐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돌에 새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병을 창조하는 데 들어간 모든 감정을 의식적으로 일일이 규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지 하나의 감정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단순화시켜서 고통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사실 고통이란 하나의 상황에서만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곧 고통이지만, 고통을 만들어 내는 상황은 아주 많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러 가지 상황이 얽히고 설켜서 인류는 고통의 늪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흔히 그렇게 되기 마련이고, 그렇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에 당신은 더욱 더 힘을 부여합니다. 매우 교묘한 일이 아닌가요?

엉클어진 실타래의 모든 실마리를 다 물어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육체의 병이란 고통과 번뇌가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질병을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병은 사실 가치 있는 것이고 그것 또한 신성의 표현입니다. 그 안에 지혜라는 진주가 들어 있음을 앎으로써 껴안아야만 합니다. 그것을 껴안을 때까지는, 결코 연꽃 속의 보석을 찾아 내지 못할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치유의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런저런 조잡스런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들쑤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렇다고 인정하고, 그것 역시 가치 있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자기 자신과 더불어 기쁨과 평안과 조화 속에 있게 되면 그땐 모든 것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임이 끝나 헤어질 때면 여러분 모두는 평화도 함께 가져갑니다. 가슴속의 빛도 함께 가져갑니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에너지로 발산하세요. 그다지 조화롭지 못한 내면의 공간 속에 들어서게 되면 약간의 시간 여유를 갖도록 하세요. 그래서 당신이 달빛 나무 아래나 나무 아래에 앉았을 때의 느낌을 떠올리도록 하세요. 그리하여 이러한 기쁨의 느낌, 평정과 조화의 느낌, 가슴속의 빛에 대한 느낌이 되살아나게 되면 가슴속에 있던 불편함을 껴안을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러면 당신 자신의 빛 속으로 녹아 들게 되고 당신은 위대하고 영광스런 존재가 됩니다.

우리들은 늘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세요. 이 모든 건 결코 심각한 게 아니란 걸. 기쁨과 웃음으로 나아가세요. 어린아이처럼 즐기세요. 가슴속에 경쾌함을 지니고,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서, 당신의 아름다운 달과 지구에 감사함을 표하세요. 진실로 그건 당신 자신의 반영임을 알도록 하세요. 

 

10. 용틀임하는 지구 여신

 

안녕하세요. 여러분.

당신네 나라의 이 지역에 관해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정말이지 당신들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당신들은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만큼 지극히 영리합니다. 이 경이로운 지역은 위대한 여성 에너지로 되어 있고, 여신의 지역입니다. 진실로 치유와 양육의 장소이지요. 그러니 당신들은 매우 영리한 겁니다. 자, 본래의 당신 자신, 진실로 위대한 주인인 그대가 이곳, 당신네 대륙의 북쪽 지역에 당신 자신을 창조한 것은 더 높은 에너지의 염원을 실현한 겁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균형에 이르기 위한 열망을 실현한 겁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당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당신 자신입니다. 소망으로 껴안은 생각을 발산하면, 우주는 당신에게 그것을 제공해주기 위해 재배열합니다. 당신은 진실로 가장 강력한 존재입니다.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닙니다. 당신 현실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당신들의 신념들입니다.

수많은 환생을 거듭하며 다시 태어날 때마다 당신은 전반적인 게임 플랜을 가지고 옵니다. 당신이 이룩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경험들이 조화에 이르도록 하는 겁니다. 보다 큰 틀 안에서 보면 당신은 매 생애마다 순간 순간 당신의 현실을 창조합니다. 진실로 미래가 없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직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지금이라는 매 순간의 충만함으로부터 그 다음 순간이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과거라는 족쇄에 얽매여 있이거나 미래의 결과에 집착할 때 당신은 지금, 현재를 완전히 망각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희생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고 삶의 환경에 대해 통제권을 상실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 위대한 변화의 시기에 당신네 행성과 은하계의 주기적 변화, 그리고 인류의 의식에 대변화가 일어나는 이 시기에, 당신은 가장 쉬운 방식으로 그 변화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대해 곱씹고 앉아 있을 필요도 없고, 내일 당신에게 닥칠 긴박한 상황을 기다리고 앉아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당신들은 이 지역 자체가 여신의 에너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겁니다. 여신의 에너지가 당신들을 도와줄 것입니다.

여성 에너지가 꽃피워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영혼의 차원에서 진심으로 바란다면, 그 변화는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변화는 균형을 잡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남성 에너지로 세상을 운영해왔습니다. 이제 여신의 에너지가 남녀 모두에게 거리낌없이 발현될 시기이므로, 인류는 모름지기 수용적, 허용적, 직관적, 창조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지성과 균형을 이루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여성적 자질을 확장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겁니다.

당신들 가운데 여성들은, 흔히 자기 자신의 본질도 여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 물론 겉으로는 근사하리만큼 여성적으로 보이지요. 하지만 이 여성의 역사는, 역사상 지금 이 시점에서는, 종속에 대항하는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있는 곳에는 소위 남성 에너지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최근 여성 해방이라는 반란이 있었습니다. 풀려난 게 있다면 그건 오직 법률뿐이었습니다. 법률만이 좀 느슨해졌을 뿐입니다. 평등을 위해서 투쟁한 그 사람들은 남성적 파워를 갖기 위해 투쟁했던 것입니다. 남성이라는 사람들은 여성 파워를 두려워해 왔습니다. 당신네 문화에서 여성 에너지는 짓눌려왔고, 당신들 모두가 잘 아시다시피, 달의 어두운 측면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남자들은 죄책감을 지닌 채 가슴앓이를 해왔습니다. 그들 내면에 있는 여성 에너지를 퇴행시키고 억눌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젠 허용하세요. 당신들의 가슴속에 갇힌 여성 에너지가 흐를 수 있도록 닫힌 문을 열어 주십시오.

이 변화의 시기에, 여성의 권리를 허용치 않는 것으로 명성이 나 있는 당신네 대륙이, 첫발을 내딛는 선두 주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나라는 충분히 선두 주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여러분 모두는 그 변화를 목격하고 돕기 위해 이 시대, 이 행성에 태어난 것입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는 가슴속 불꽃에 붙이고, 그 열망, 그 빛을 향한 간절한 소망에 불을 붙이고, 당신들이 원하는 바를 창조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아십니까? 그 모든 것은 당신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을! 여러분 각자 모두의 한 개체로부터!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린 다시 따분한 옛 주제로 돌아갑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바로 당신이 우주의 중심태양이고, 당신의 모든 면을 받아들이게 될 때, 당신 자신의 빛 속으로 껴안을 때, 그때 비로소 당신은 자신의 영혼이 소망하던 바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호주, 특히 이곳 북쪽 지역은 안전한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벗이여, 안전하지 않은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당신은 안전한 우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그 점을 분명히 해둡시다. 최근 몇 년간, 안전하지 않다는 말들이 당신들을 겁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점을 당신에게 물어봐야겠군요.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지구적 변화에 대한 겁니까, 사랑하는 이여?

 

그렇습니다.

 

지진, 해일, 화산 폭발 등의 지구적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건 무서워할 바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여신이 기지개를 펴면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는 거지요.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숨일 잃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농장을 휩쓰는 홍수는 무엇이고, 질병을 또 무엇입니까?

당신네 행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우주가 안전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대재난을 경험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 자신이 본래 강력한 실체임을 가슴 깊이 알고 있다면, 죽음 같은 것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죽음은 망상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빅뱅이 있기 전에 죽을까봐, 그래서 4차원의 현실을 경험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안전하지 않은 장소는 없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이거나 방문하게 된 곳에 격변이 일어난다고 해도, 당신이 내면에 균형을 유지하고, 변화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안전하다고 알고, 삶이란 생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이미 그곳에 존재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리 엄청난 격변이 일어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와 같은 겁니다.

대변동도 실은 또 하나의 엄청난 기회입니다. 여신을 목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여러분 각자 모두의 내면에 있는 여신의 반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곧 신/여신이고, 전체성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지성이 저기 위에서 수염을 기르고 앉아 있는 늙은 신을 믿지 않게 되는 정도만큼 당신들은 근원의 여성 에너지를 회복하여 전체성의 균형을 잡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의 문화권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의 에너지를 항상 부인해 왔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허용하면 할수록 내면에서는 그 여신이 더 살아날 겁니다. 질문있습니까?

 

프타아, 지금 이러한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모임의 의식이 그러한 변화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게 되나요?

 

벗이여, 당신들은 고립된 존재들이 아닙니다. 어떤 이유로 모였든, 어떤 집단의 사람이든, 에너지의 띠를 창조하게 되고, 그 에너지는 가장 멀리 떨어진 은하계까지 뻗어 나갑니다. 당신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여러분은 그러한 변화에 도움을 주고 있고, 그것이 여러분 모두가 바라는 바입니다. 당신들이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류에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당신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별개인 물리적 신체를 가지고 있지요. 물리적 신체를 합쳐보려고 아무리 발버둥친다고 해도 되자 않을 것이니, 모두가 별개의 섬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육체가 끝나는 곳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끝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끝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여러분 자신의 육체를 만져 보세요. 그리고는 말해 보세요. 나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야 그렇게 하면서 손을 높이 들어 바깥쪽으로, 위로, 더 넓게 펼쳐보세요. 그건 본래의 당신 자신이 모든 사람, 모든 식물, 모든 생명체, 모든 인간과 비인간을 만지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이 물리적 신체를 지녔든 지니지 않았든 말입니다. 본래의 당신 자신은 모든 차원의 현실을 관통하며 존재 가능한 모든 현실을 뚫고 무한대에 이르기까지 다다름을 알도록 하세요. 당신은 실로 가장 강력한 존재이며,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의 우주 형제들은 어떤 식으로 이러한 장면에 끼어들죠?

 

, 벗이여,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수억 겁의 세월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식으로는 생각지 마세요. 왜냐하면 당신네 현실에선 모든 것이 매 순간마다 변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변화에 대해 사람들이 유난스레 수선을 피우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당신들 대부분이 대변동이 일어날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상당수가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지구가 전멸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류가 스스로 자신들의 행성을 파괴시킬 거라고 믿고 있죠.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당신들은 선택되었습니다. 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만의 방식으로 확장하고 변화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그러한 변화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공 연속체 밖의 존재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창조하였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다양한 현실 가능성 안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창조하고 있는지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이해하게 쉽게 매우 단순하게 얘기하려 하면 할수록 우리의 언어는 여러분 의식의 상자 안에 갇히게 됩니다. 우린 이미 알고 있는 여러분의 보다 위대한 부분에게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무시간에 대해, 그리고 존재 가능한 현실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너무 자세히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십시오.

 

안녕하세요. 프타아, 당신이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지구라는 행성은 에너지의 관점에서 일종의 여성적 원리를 펼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지구는 여성적 영혼의 법칙을 지닌 게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태양은 남성적 법칙이고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태양계에선 남성과 여성 에너지가 균형을 이루게 되겠네요?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겁니다. 벗이여. 그것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변화의 일부분이죠. 그리고 바로 그런 식으로 인류는 보다 확장된 의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뜻한 바대로 여신의 에너지, 여성 에너지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여성적 법칙이란 음의 원리이기도 하지요. 그리하여 모든 인류는, 어떤 성을 지녔든, 그러한 허용 속으로 들어서게 되어 마침내 균형을 이루게 될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소위 주파수의 도약을 창조하는 건 그러한 양극의 균형입니다.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가 균형을 이룰 때, 그러한 에너지의 균형이 지금 현재 상황보단 훨씬 많은 행복을 창조할 거라고 말해도 돼나요?

 

벗이여, 더 적진 않을 겁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라고 하면 맞는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신성의 반영이고 신성은 무한하니까요.

 

앞으로 일어날 이러한 변화에 도움을 주기 위해 현실 차원에서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나요?

 

있고말고요. 사랑하는 이여.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사랑하세요. 여러분 모두에게 요구되는 건 그것뿐 입니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세요. 당신들에게는 그게 왜 이토록 어려운지 모르겠군요. 나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들을 사랑하는데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적 에너지라 불리는 것은 없는지요.

 

벗이여, 완벽한 균형 상태를 바로 그렇게 부르지요.

 

프타아, 1992년 1월 11일이 인류 가족에게 있어 영적으로 중요한 졸업식 날이라는 정보가 지금 떠돌고 있는데요, 당신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올바른 예측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그런 방식에 우리가 지원을 보내 주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은 마지막 주기의 시작이고, 조화로운 주파수를 갖고 있는 빛이 시작되는 날이죠. 의식의 확장, 즉 주파수의 상승을 위해 자극제가 되어줄 빛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린 분명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걸 축하하라고요. 날이면 날마다 축하하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시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변화를 위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될 겁니다.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요?

하지만 여러분, 속임수를 쓰는 경우도 많다는 걸 알아두세요. 그러면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무엇이 진실인지?

이러한 에너지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결코 진급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굉장한 과장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아마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겠지요. 사람들을 겁먹게 해서 의식의 도약을 꾀한다면 그 전략 자체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겠어요?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떤 것이 당신에게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당신의 느낌에 달려있습니다. 당신의 느낌이 바로 바로미터지요. 당신에게 어떻게 느껴지느냐? 어떤 말을 들을 때, 내 말을 들을 때조차도, 잠깐만요, 그 말은 아무래도 내 가슴엔 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군요. 사랑하는 이여, 그땐 그게 진실인 거지요. 당신 가슴에서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바로 그 목소리가 진실인 겁니다. 우린 이미 판단에 대해 말했었고, 분별에 대해서도 얘기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항상 알게 될 겁니다.

 

앞으로 오게 될 변화와 관련해서 양극 지방의 중요성에 대해 전에 한 번 물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랬죠. 그런데 이제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하시나 보죠? 음, 좋습니다. 우리들은 당신들이 뭔가에 기대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자, 질문에는 항상 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양극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남극과 북극은 당신네 역사상 중요한 출입문이었습니다. 자력을 지닌 극, 그건 단순한 한 지점이 아닙니다. 그건 별의 사람들과 당신네 지구 속 사람들을 위한 통로와도 같습니다. 그들은 항상 이 문을 이용하여 접촉을 해왔고 은하계를 여행해 왔습니다.

당신네 행성의 전자기적 에너지가 이동되고 변화됨에 따라 그 문들 역시 이동되고 변화될 겁니다. 양극 지방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네 행성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문들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재배치되는 거지요. 인류의 의식이 넓어짐에 따라 그 문들도 역시 더 넓어질 것입니다. 당신네 역사상 이 문들을 통해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여행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물리적으로 매우 좁았던 지역이 더욱 넓어질 거라는 겁니다. 그 문들이 물리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 문을 여는 열쇠는 당신의 내면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버뮤다 삼각지대가 있었지요. 그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20년 이내에 그 문은 점점 더 커져서 당신네 지구를 감싸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변화의 전주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신들의 의식은 그 문들처럼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의 제한을 바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쯤에서 말씀 드리고 싶군요.

의식이란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당신네 지구는 당신들이 믿고 있듯이 그렇게 고정불변의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여러 개의 지구로 되어 있습니다. 단지 다른 시공 연속체 안에 있을 뿐이죠. 이러한 문 안으로 들어서는 소위 시간 여행은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사실은 진리와의 마주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자신들의 의식적 에너지를 지닌 채 이러한 문들을 이용하여 당신이 시간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그곳을 여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지구의 일부가 될 수 있죠?

 

진실로 그 어떤 것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거울이요, 반영일 뿐입니다. 소위 혼돈이나 지구상의 대재난이 일어나더라도 그건 인류의 내면에 있는 파국을 반영한 것입니다. 당신이 더욱 받아들이고, 모든 걸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당신이 인식하는 바깥의 모든 것도 변하게 됩니다. 당신 자신의 모든 면을 신성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껴안게 되면, 당신은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신으로서의 나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면, 당신의 행성도 고스란히 반영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는 레무리아 시대 이래 또 다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전자기적 에너지의 사용법이나 시간 여행에 관해서 혹은 최후의 전쟁이래로 지구상에 일어났던 많은 일들에 관해서 점점 더 많은 정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필라델피아 실험 같은 거요. 이제 사람들은 외부 세계를 향해 이러한 원리들을 적용시키고 있어요. 기계를 사용해서 말이죠. 우리가 배운 대로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의식만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제 다른 종류의 기계가 선보일 것입니다. 크리스탈 테크놀로지라는 것인데 당신들의 시대에 머지 않아 등장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크리스탈 테크놀로지란 일종의 거대한 증폭기이기도 합니다. 생각이 동력이 되는 이러한 기계가 당신네 대기 중으로 방출되면 두려움에 의해 추진력을 얻음으로써, 당신들의 소박한 꿈과는 달리 대재난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아닌 두려움이, 힘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권력에의 욕망이 증폭되었을 때의 결과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은 인류의 의식 에너지가 사랑과 빛으로 공명할 때까지는 보류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때가 되면 기쁨과 빛이, 사랑과 웃음이, 이 행성뿐만 아니라 전 우주를 가로질러 증폭될 수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탈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말입니다.

당신네 과학자들은 벌써 여러 해 전에 이러한 기술을 다루어 왔습니다. 과학자들끼리만 알고 있으면서 비밀에 부쳐진 지식이 많습니다. 별의 사람들과 접촉을 해왔고, 아직까지도 접촉을 하는 과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류가 별의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사실은 당신네 행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별의 사람들이며, 의식적으로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매우 교묘한 사람들이죠? 별의 사람들 말예요.

 

플라이아데스인들이 우리 과학자들 중 몇몇에게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기술을 나눠준 사람들 역시, 우리의 의식이 그러한 진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벗이여. 이러한 사람들의 기술을 다루어야 할 사람들의 능력이 아직까진 부족합니다. 지금까지의 실험은 사실 아주 간단한 것들이 많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의 의식이 확장되도록 도와 주면 줄수록 저는 그러한 기술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알고 싶은, 그러나..

 

벗이여, 그 퍼즐 조각에 대한 호기심은 불가항력의 것이며, 그래도 괜찮습니다. 매우 창조적인 마음이고, 훌륭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하는 저녁이면 늘 말하듯이, 문제는 항상, 항상 당신에게로 귀결됩니다. 당신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면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만의 신념 구조에 붙잡히게 되고 비허용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깨달음이란 당신의 지성과도 관계가 없으며 당신의 두뇌 속 컴퓨터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가슴으로 알지 못하는 한, 당신 자신의 모든 면,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경험을 위한 신성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 붙잡히게 되는 거죠. 번뇌와 고통을 창조하는 건 오직 당신의 판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 모두를 절망으로 죽고 싶게 만드는 건 여러분 자신의 판단입니다.

 

저는 지구의 피라미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피라미드는 외계인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나요?

 

지금 이 시대에선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술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길은, 확장된 의식에 이르는 겁니다. 당신네 행성에 대한 모든 지식, 당신네 행성과 다중 우주에 대한 전 역사가 당신 앞에 펼쳐질 겁니다. 아세요? 이 모든 것은 당신의 가슴에 관한 겁니다. 그건 사실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환상의 퍼즐 조각을 쫓는 기쁨과 흥분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건 무척 흥미롭지요. 우리는 여기에 관해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건 경이로운 추구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프타아, 이번 생애에서 죽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의 진동수를 충분히 높일 수 있을까요? 죽지 않고도 그러한 변형을 이룰 수 있게 말입니다.

 

물론이지요. 분명 가능한 일입니다. 벗이여.

 

좀더 자세히 말씀 해주시겠어요?

 

하지만 전에 이미 말씀 드렸는데요. 당신의 육체가 그토록 빨리 죽는 유일한 이유는 그래야만 한다고 당신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밑바닥에 깔려있지요. 당신은 육체를 보호하느라고 무척 바쁩니다. 당신의 육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까봐 연연해합니다. 당신에게 전염될지도 모르는 모든 세균에 대해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일종의 당신도 세균입니다. 벗이여, 당신은 사실은 우주의 거대분자입니다. 그게 당신이지요. 당신은 그 어떤 것에도 전염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희생자가 아니에요.

다른 곳의 휴머노이드 형 인간들은 신간으로 따진다면 천년 이상의 수명을 누립니다. 거기에 비하면 당신들은 유아기 때 사망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따라서 진실로 육체가 계속해서 기능하기를 원한다면, 육체에 대해, 그리고 육체가 거주하고 있는 우주에 대해, 당신들이 믿고 있는 바를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류의 집단 공명이 이러한 신념 체계를 창조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신네 행성에는 수백 년 동안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고 놀랍게도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살아남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성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경험의 핵심 포인트는, 이러한 경험들에서 생기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더 경험할 필요가 있는 감정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사랑하는 이여. 그저 요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벗이여, 당신이 의식이라고 여기는 부분과 당신 자신의 보다 위대한 부분과의 사이에는 분리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라곤 오직 그러한 소망을 내보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 상태를 허용해야지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느 정도로 레무리아 인들의 존재 방식으로 돌아간 겁니까?

 

사실은, 이미 그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네 대륙의 이 지역으로 끌려 들어오고,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이 하고 있듯이, 끌려 들어온 사람들이 집단 에너지를 창조한다는 사실은, 당신네 역사시대 이전의 위대한 문명에 대한 기억에 근거하는 겁니다. 레무리아라고 불리던 문명과 뮤라는 거대한 모선에 대한 기억이죠. 따라서 열대 우림과 정글에서, 꽃 향기 가득한 숲속에서 느끼는 그 부드럽고 상냥한 에너지로 가득한 이 지역은 레무리아 시대의 당신네 행성이 어떠했는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행성이 거대한 구름으로 감싸였던 시절, 빛은 늘 부드럽고 기온은 지금 이 지역과 비슷하고 계절도 비슷하던 시대..

 

그러니까 우리가 그러한 문명을 다스렸던 영혼과 실제적으로 같은 영혼이며, 지금 이러한 에너지를 회복시키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전에, 레무리아 시대에 지구상에 꽃피었던 문명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죠? 그 꽃이 시들어 죽어버릴 때까지 말입니다.

 

벗이여, 그건 남성 에너지가 급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마십시오. 경험을 위한 것이니까요. 모든 사람들이 레무리아와 , 장대한 아틀란티스와, 지구의 파멸과, 인류 역사의 위대한 드라마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지만 벗이여, 그 모든 건 경험을 위해서였습니다. 어떻게 느껴지는가를 알아보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역사 이전에 당신네 행성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슬픔의 앙금이 남아 있습니다. 굉장한 죄책감과 엄청난 판단을 가지고, 전쟁의 현실과 역사 이전의 현실로 도망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점을 말씀 드리죠.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창조하고 있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고. 그러니 판단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지금이라는 매순간마다 그 멋진 흥분을 낳기 위해, 지금 이 순간과 이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창조하고 있음을 이해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될 때 당신은 상처 받은 가슴이 변화하기 시작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당신 자신의 전체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귀향이지요. 벗이여, 여러분을 매우 사랑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은 제게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과 사랑 속으로 나아가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웃음 속으로 나아가세요. 웃음은 모든 것을 하나되게 하는 가장 위대한 도구입니다.

 

11. 주파수 맞추기

 

, 여러분 환영합니다. 그런데 의식의 탐험에 발을 들여놓은 많은 분들이, 혼란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때로는 압도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당신들이 바라보는 모든 곳에서 재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데도 그에 대한 대책은 아직 없으니까요. 신문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 가슴이 철렁 가라앉는 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만연해 있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당신들은 자문합니다.

이 모든 게 어디쯤에서 끝나게 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은 앞으로 다가올 변화에 대한 조짐인가? 모두가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는 머나먼 꿈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진실로 그것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당신들의 이해가 커질수록, 그리고 그러한 확장이 가속화될수록 당신들은 새로운 앎의 관점에서 당신들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타락의 양상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 자신의 고양된 깨우침과 인류의 성숙된 의식으로 인해 숨겨진 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빛 속으로 나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때로는 당신이 한낱 공상으로 허황된 몽상쯤으로 여겼던 것들이 어둠이 가심으로서 정체를 드러나게 됩니다. 의식이 확장되고 신이 발현함에 따라 어둠은 빛 속으로 포용됩니다.

권력브로커들을 너무 가혹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 아래 감추어진 걸 보십시오. 전쟁에 대한 갈증, 거짓, 권력, 타락, 탐욕, 살인과 고문의 밑바닥에 감추어진 것을 보세요. 인류가 심히 아파하는 것 너머의 것을 보세요. 그건 심판을 받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건 여러분의 가슴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거기에 존재하는 겁니다. 아무런 판단 없이 이러한 사람들을 당신 가슴에 끌어 안으면, 진실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겁니다.

당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 불편한 것으로 판단한 모든 것, 권력의 부패라고, 지구의 파멸이라고 판단한 모든 것들이 당신 자신의 일부임을 알도록 하세요. 당신들 모두를 비추는 거울인 것입니다. 그러니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판단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임을 자각하면서 잘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그것을 껴안게 되면 외부의 현실도 껴안을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당신이 어떤 식으로 과거에 얽매이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목매고 있는 미신이나 비난의 알맹이를 잘 살펴보도록 하세요. 당신의 행, 불행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도록 하세요. 당신이 누군가를 비난할 때마다, 자신을 과거의 희생자로 판단할 때마다, 당신은 스스로 책임을 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책임은 비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죄책감이란 실은 배우지 못한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당신들 세계에는 인류에게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데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과거라는 것은 없다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오직 지금이 있을 뿐입니다. 수치와 죄책감을 책임감 있게 지금 이 순간을 끌어 안을 때, 그때는 알게 됩니다. 사랑이 아닌 두려움을 바탕에 둔 생각을 할 때는 매우 큰 불편함을 느끼지만 죄책감을 껴안고 가르침을 일단 배우고 나면 다시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지금이라는 충만함 속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마로 축복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갖추어져 있지만, 여러분 각자의 가슴속에서 시작됩니다.

당신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잘 살펴보면, 당신들 가슴이 바라는 모든 것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비참한 환경에 너무 초점을 맞추지 말라는 말씀도 드리고 싶군요. 당신이 거기 주의를 기울일수록, 거기에 홀리면 홀릴수록, 당신은 그것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여 에너지를 쏟아 붇게 됩니다. 도망쳐서 숨어서도 안 되지만,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도 안 됩니다. 앎의 충만함 속에 존재하도록 하십시오. 심지어 두려움조차도 신성의 표현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어떻게 판단하든 모든 것은 근원에서 나왔으니까요. 당신 자신의 모든 면에 진실로 신성의 표현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이 시대를 통과하는 가장 쉬운 길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순응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희가 바라는 어떤 목표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맞추지 말아라, 다소간 그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일어나는 상황을 허용하도록 하라, 그런 겁니까?

 

벗이여, 거기에 진정한 지혜의 진주가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 모두가 길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소위 이성이나 지성이라고 불리는 길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매순간마다 당신의 가슴이 바라는 대로 직감에 따라 나아갈 수 있다면, 그땐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해집니다. 우리가 항상 말했듯이, 가슴이 노래 부르는 일을 하세요. 가슴이 바라는 바를 따르고, 진실로 당신의 직감에 귀를 기울이세요. 지성과 이성은 지성과 이성을 위해 여기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에요. 지성은 여러분 가슴의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보조 도구입니다. 그게 바로 균형이라는 겁니다. 당신이 투쟁과 논리로부터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설 수만 있다면, 그땐 분명히 전세계가 당신을 위해 길을 활짝 열어줄 겁니다.

 

그러니까 그 길은 조화를 느끼는 길이군요.

 

물론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가 문제죠.

 

호기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재정적인 측면이나 그밖의 방면에서 말입니다. 그들은 별의 사람들과 접촉을 하고 있나요? 또한 좀더 빠른 결말을 가져 오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이러한 변화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 별의 사람들과 작업을 하고 있나요?

 

벗이여, 호기심 어린 질문 치곤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최근 몇 년 동안 별의 사람들이 이른바 파워 브로커(권력중개인)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제기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별의 사람들은 사실, 당신네 과학자들, 당신네 정부측 사람들과 계속 의사 소통을 해왔습니다. 사실 별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다양합니다. 별들도 많고 사람들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측면에서 보면 정말 깜짝 놀랄 일이 이 행성의 인류에게 일어난 적도 없지 않습니다.

이 지구 밖에는 매우 많은 문명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한 문명들 전부가 당신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진보된 건 아닙니다. 물론 기술적으로는 이곳에 살고 있는 인류보다는 훨씬 진보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진보의 측면에서, 영혼과 기술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분리란 없으니까요. 가장 위대한 기술은 영혼의 확장된 의식에 의해서만 활용되어야 합니다.

최근 10년 동안, 혹은 여러분 시대의 중대한 주기인 최근 20년 동안에 이루어진 일들은 보다 높은 주파수대로 옮겨 가기 위한 것으로, 부디 이 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당신들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의 전체를 관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인식의 제한된 상자에 갇혀 논리적인 유추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류가 바로 그렇게 되도록 선택했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군요. 매우 조화롭게 될 것인지, 혼란으로 가득 할 것인지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당신들 모두 조화로운 변화를 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당신들 자신의 인식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자연의 대격변에 대한 당신들의 인식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위대한 기쁨이요, 거대한 계획이고, 주기적 변화입니다. 모든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벗이여, 인류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신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일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실제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사람들은 그저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전체의 시각에서 본다면 전혀 다른 문제랍니다. 당신의 가슴이 알고 있는 바를 확고하게 붙잡도록 하십시오. 부디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예전에 인간 영혼에 대한 신의 섭정권이 법에 첨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제안을 지금 다시 제시한다면 정부의 리더쉽이 그걸 받아들일 만큼 고양된 수준에 와있는지, 그리하여 우리가 신성과 물질간의 다리를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습니다.

 

사실은 필요가 없습니다. 의식 확장이라 불리는 것은, 구세주의 출현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신네 정부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소위 의식의 구세주라는 것은, 당신이 법으로 인식하고 있은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법을 갖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누군가가 불법적으로 될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사실 당신네 정부는 너무나도 바쁘기 때문에 영혼에 대해 염려할 시간이 없습니다. 신은 헌장에 존재할 지 몰라도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는 신이나 영혼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죠? 따라서 당신네 정부에 갈 필요는 없다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여러분 각자가 그 빛 속에서 힘을 얻어 모든 인류를 어루만지는 일을 일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알아채지 못하지요. 당신네 수상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정말로 흥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그는 권력이 없어질까봐 두려워하느라 몹시 바쁠 테니까요. 지금 이 시대에 당신네 정부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문서화된 법이 없는 진정한 정부를 운영할 사람들은 바로 당신들, 여러분 각자입니다. 고양이는 법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바를 아무리 자주 이야기 해도 고양이는 듣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더욱 더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자기 자신의 힘을 더욱 더 이해하고, 순간순간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선택임을 알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충만함 속으로 더욱 더 들어설수록 정부와는 작별의 키스를 하게 될 겁니다.

 

프타아, 당신은 지난 번, 우리는 모든 것이었다고, 가해자이기도 했고, 피해자이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확실히 이해가 안 갑니다.

 

, 그렇다면 간단하게 설명을 해드리죠. 그건 진실로 매우 간단합니다. 당신은 수천 번에 수천 번을 환생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리된 건 없다고 말할 때 진정한 의미는 이렇습니다. 매번 환생할 때마다 영혼 에너지의 12분의 11이 용광로로 되돌아가고 나머지 한 가닥만이 통과되어 나옵니다. 그래서 수천 번을 환생한 후에는 뒤범벅이 되어 버립니다. 매번 당신이 환생하는 이유는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때마다 예전에 껴안지 못했던 것을 껴안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살해자이기도 했고, 피살자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이기도 했고,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몇 년간은 사람들이 인구 폭발에 대하여 이야기할 겁니다. 일종의 경쟁처럼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변혁을 경험하기 위해 이곳으로 오기를 원합니다. 전에는 인간의 형체를 지니지 않았는데 지금은 인간의 형체로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인간의 형체가 아니었다면 어디에서 온 것이죠?

 

, 고래나 돌고래라고 불리는 것들로부터죠. 그리고 영혼 에너지, 즉 빛 에너지를 지닌 존재들로부터인데, 그들은 전에는 물리적 신체로 환생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거죠.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존재들이 많습니다. 질문할 게 더 있나요?

 

꿈에 대해 여쭤 보고 싶습니다. 꿈은 우리의 진화에 있어 중요한지요?

 

사실, 우리는 꿈에 대해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꿈이란 매우 중요한 것임을 말씀 드리고 싶군요. 사실 꿈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거대한 환상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게 꿈처럼 보이고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꿈의 상태는 다차원적입니다. 꿈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생애와 삶의 경험들을 이야기합니다. 육체를 벗어나 의식 속을 여행합니다. 아스트랄 단계와 다른 차원으로, 다른 은하계와 다른 시간대와 다른 대체 현실로, 존재 가능한 다른 현실로, 미래의 삶과 과거의 삶으로 여행을 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꿈 속에서도 매우 바쁩니다. 이러한 의식적 현실을 벗어난 그곳에서는 존재 가능한 현실 속의 수많은 차원들,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우아하고 편안하게.

영혼 에너지는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고 그 자체의 성실성을 지니고 있어서, 당신은 좀처럼 혼란된 상태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 점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해칠 수가 없으며, 이 모든 차원들을 다 여행할 수 있고, 의식적 수준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며, 절대로 길을 잃는 법이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그러니 당신 자신들을 진정으로 신뢰해도 좋습니다.

 

잠자는 동안 우리의 의식이 다른 어떤 곳에 갔을 때, 때로 두려움을 경험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인가요?

 

벗이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곳에 있음을 갑자기 알게 되면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또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육체를 벗어나는 경험을 했을 때도 이런 두려움을 경험하곤 합니다. 잠자는 상태에서는 자신의 의식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는 자기가 육체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될까봐 몹시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의심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의식은 다시 몸 속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흔히 있을 겁니다.

 

당신의 존재,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나라는 존재는 당신이라는 존재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프타아라고 부르는 존재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또한 집단 에너지이기도 하고요. 어떤 의미에서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자아라고 이해하고 있는 한 인격체로서의 당신 자신은 보다 큰 영혼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당신은 큰 영혼의 한 분신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당신은 다차원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모든 영역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면 당신은 아주 쉽게 저는 입니다. 하면서 이름을 대어버립니다. 자,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나는 존재의 신성한 표현입니다. 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자신을 신성의 표현으로 선언하면 할수록, 당신은 그러한 에너지가 나타나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당신이 나는 진실로 신성의 표현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신성의 표현이 됩니다. 말하자마자 당신이 곧 그렇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전생에 당신이 무엇이었다는 것을 다 알아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전생은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므로 나름대로 유효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신의 됨됨이를 지적으로 이해하고는 이것을 전생과 연결 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지금 이 순간 빛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 속에서 살게 되면, 당신이 과거라고 여기는 모든 삶과, 미래라고 여기는 모든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나라는 존재가 누구냐고 묻게 될 때, 그건 상당히 복잡한 질문이면서도 매우 간단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나다. 나는 신성의 표현이다. 벗이여, 내가 그렇다는 걸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도 곧 그렇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심리학이 규정하는 잠재의식, 초자아, 무의식, 에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초의식은 그것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의식이란 우리의 두뇌와 연결되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신경세포가 실질적으로 그것을 형성하는 겁니까? 그리고 DNA 시스템은 기억력을 갖고 있는지요?

 

그 문제에 대하여 책을 쓰도록 할까요? (청중 웃음) 소위, 무의식이니 초의식이니 하는 것들부터 알아봅시다. 사랑하는 이여, 이런 것들은 이름표에 불과합니다. 이름표는 분리를 더욱 촉진시키지요. 지적인 앎에 대한 갈망 속에서 당신은 이름표 상자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자들 속에다 단신은 모든 걸 차곡차곡 정리해 두고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어디있는지를 지각합니다. 그것이 의식적 앎의 전부입니다. 제한된 인식 상자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름표를 더욱 많이 사용할수록 당신은 자아를 본래의 자아로부터 더욱 더 분리시키게 됩니다. 분리된 건 없는데도 말입니다. 전혀 없지요.

, 이제 상자와 이름표의 문제에서 좀더 나아가 봅시다. 에고란 눈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눈은 하나의 도구로서, 눈 자체로서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현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하여 거기 있는 것입니다. 에고도 사실은 눈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확장된 의식으로 하여금 3차원의 현실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있었습니다. 특히 지금 이 시대에는 힘을 잃을까봐, 쓸모 없게 될까봐 몹시 두려워합니다.

당신들은 에고가 당신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힐 것이고, 에고를 지니고 있어서는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저항하는 것은 무엇이든 더욱 더 끈질기게 달라붙습니다. 당신이 에고와 싸우면 싸울수록, 그것은 더욱 더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무의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악마가, 통제를 벗어난 에고라는 괴물을 숨겨놓은 곳으로, 당신의 그 괴물은 그곳에서 지키고 앉아 소위 종교가 들어서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에고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온 당신이 그 괴물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벗들이여, 당신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러나 분리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물리적 신체는 빛의 몸, 에테르체, 영혼 에너지의 표현입니다. 그것 없다면 당신은 몸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당신의 DNA, 당신네 시대의 위대한 미스터리인 그것조차도 물리적 표현일 뿐입니다. 그것을 운영하는 건 바로 근원입니다. 인류가 더욱 더 분리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DNA는 자동적으로 나선형 통합을 이루게 됩니다. 당신네 3차원 현실에서 근원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네 과학자들은 아직까지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수학과 천문학과 양자 물리학 등등으로 인류는 이미 존재하고 있은 것에 대한 지도를 만들어 보고자 정말 애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당신네 물리학은 이해력이나 앎의 측면에서 많은 도약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네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가슴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제 질문은 큰 영혼에 대한 겁니다. 필요할 때 큰 영혼으로부터 조언을 받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며, 또 현명한 일인가요?

 

벗이여, 큰 영혼, 위대한 자아, 계급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더 넓은 스펙트럼의 의미에서 큰 영혼은 너무나도 완벽하기 때문에 항상, 항상,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훌륭한 조언을 해줄 겁니다. 사랑하는 이여,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 구할 때마다 항상, 항상 응답 받게 될 겁니다. 아시다시피 분리된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바깥이 아닌 당신 내면에 갖추어져 있음을 점차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여기 와서 이러한 말을 듣지만, 사실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수억 겁의 시간이래로 인류에게 모든 말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닙니다. 당신들 모두가,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들의 바깥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그림자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되어 보았던 모든 사람들의 모든 지식이 당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본래의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는 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허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생각을 중지하고, 고요하고 고요한 그곳에 머물러, 지혜가 솟아나기를 허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슬픔에 겨울 때나 삶이 너무 견디기 버거울 때면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며, 진정으로 사랑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당신이 허용하기만 하면, 전 우주가 당신을 후원할 것입니다. 그것을 진실로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모든 이들이 상처 받은 가슴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당신들 모두가 너무도 두려워한 나머지, 모두 같은 장소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경험하기 위해, 환생을 택하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이번 기회에 무언가를 맞이하겠다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선지 저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태도 때문에 제가 기차를 놓치게 되는 건 아닌지요?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분명히 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이미 깨달은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거대한 변화가 오는 건 사실이며, 당신네 행성은 그 내부와 표면 위에서, 앞으로 몇 년 이내에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물리적인 차원은 에테르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당신들은 당신들 행성의 관점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소위 공상과학 소설의 영광적이고도 야성적인 상상력을 넘어선 은하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공상과학 소설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야성적이고 열광적인 상상력? 근사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무엇인가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합니다. 상상력은 아주 작은 것에 의해 촉발될 수도 있는데, 기억이 때로는 그 촉진제가 되기도 합니다. 당신들이 미래라 고 부르는 것에 대한 기억이지요. 매우 흥미롭지 않습니까?

 

우리의 역사를 통해 소위 그러한 촉진제가 주어졌던 적이 있나요? 신교와 구교의 충돌로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패한 것 같은 경우 말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도록 외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요?

 

, 어떤 의미에서는요. 하지만 꼭 그와 같은 방식은 아닙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패한 것은 의식에 의해 창조된 것이지, 외계인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이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이기는 쪽은 항상 신의 편이겠죠? 그것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은 모든 사람의 편입니다. 그것이 진실이지요. 별의 사람들이 당신네 행성의 일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면 사실 몇 차례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당신네 행성은 결코 파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신네 행성은 하나의 실체만이 아닙니다. 당신이 믿는 바대로 무엇이든 창조할 것이지만 그 어떤 것에도 종말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멸종된 생명체에게도. 그것들은 오직 당신들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라졌을 뿐입니다.

 

변혁 말인데요, 이건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단일 사건일까요? 의식의 폭발 같은 건가요? 어떤 식으로 경험되는 것인지요?

 

나더라 당신들의 재미를 전부 망쳐놓으라고요? (청중 웃음)

 

약간만 맛을 보여주면 어때요?

 

당신은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약간은 맛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어떻게요?

 

모든 것이 하나임을 경험함으로써 입니다. 그게 바로 신성한 엑스터시라는 것이고 변형이라는 겁니다. 당신이 그것을 어떤 식으로 창조할 것인지는 당신의 모험에 달려 있습니다. 변형, 만물과 하나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인류에게 3차원에서 4차원으로의 변화를 경험하길 원하는 모든 이에게 성큼 내 딛는 첫걸음이 되는 거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3차원에서 4차원으로의 도약은 일종의 이름표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원치 않는 사람들은 경험하지 않게 될 겁니다. 항상, 항상,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요즈음 나온 예언서적 등을 보면 인류의 10%만이 대변동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대변동에서 살아 남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들은 이곳에 머무르나요? 아니면 다른 행성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돌아오나요?

 

맙소사 정말 절박한 상황이군요. 그렇죠? 자, 사랑하는 여인이여, 예언이란 돌에 새겨진 게 아닙니다. 당신은 매순간마다 현실을 바꿉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일이 일어나길 바라나요?

 

모든 사람들에게인지, 10%의 사람들에게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사실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그러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지구에 다시 거주하기를 선택한 사람들, 혹은 지구를 갱생시키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벗이여, 그 변동 후에 지구가 새로운 거주자를 필요로 할 거라는 상상을 왜 하는 거죠? 보세요. 당신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무시무시한 비전을 받아들이고 있군요. 10%만 남지는 않습니다. 지구가 다시 새로운 인구를 필요로 할 만큼 그렇게 황폐한 상태로까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지구 자체의 변화는 경이롭고도 경이로운 변화입니다. 지금 이 순간, 화산폭발, 지진, 해일 등으로 야기된 무시무시한 상황은, 오직 변혁이라는 에너지의 확장을 위해 여유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지구가 스스로 움직이면서 준비하고 있는 거지요. 변혁의 순간에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 지구로 오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그저 전멸되기 위해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당신들은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도 없을 거라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당신들의 언어로는 그 폭발의 극치를 묘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당신들 모두가 어떠할지 상상할 수도 없을 겁니다. 이 행성 위의 모든 원자와 분자가, 행성 전체가 신성의 빛을 발하는 그 순간 말입니다. 그처럼 절묘한 아름다움은 상상을 넘어서는 겁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러한 변혁이 일어났을 때 무수한 존재들이 떼지어 당신네 행성으로 달려와 기쁨과 환희, 감사와 축복에 넘치는 열광적인 찬미곡을 부르게 될 겁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그 존재들이 당신들의 눈에 띄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당신들은 모든 것에서 신성을 감지할 수 있을 겁니다. 형태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모든 것에서 신성을 느낄 테니까요. 그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될 겁니다. 그러니 우주선이 있을 거라는 상상은 하지 마십시오. 그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질 때 당신을 옮겨 가기 위해 우주 함대가 올 거라는 상상 말입니다. 당신은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벗이여, 당신은 위대한 힘을 지닌 존재로서, 당신이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그러한 힘을 이해하는 경지로 들어서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러한 변혁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환희로 넘치는 창조성으로, 위대한 영광과 무한함으로.

 

마치 이미 모든 걸 다 목격하신 거처럼 들리는데요.

 

사랑하는 이여, 그건 이미 일어났고, 사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했답니다.

 

당신은 물리적인 형체도 갖추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역시 물리적인 세계의 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행성에 물리적 존재, 즉 물리적 형체로서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의 여인과 여러 차례 함께 있었지요.

 

우리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그런 형체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우 교묘하다는 걸 아시죠? 우리는 형체를 바꿀 수 있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당신도 필요로 하나요?

 

사랑하는 이여, 신성을 지닌 창조물, 신으로서의 당신은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바라고 그것을 창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의 배움을 위해 이곳에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배움의 위대한 기쁨을 위해, 경험을 위해 여기 있는 겁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따분하게 했다면 우리는 여기 에 있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 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은 것처럼 들리는데, 아직 경험해야 할 영역이 분명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물론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에 도달하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오직 시작일 뿐입니다. 결코 끝이 아닙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제 어떻게 할지 그 방법을 알뿐입니다.

 

성령은 남성에너지인가요?

 

벗이여, 성령은 성별이 없습니다. 성령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다 내포합니다. 신이 남성이라고, 성령이 남성이라고 말한 건 아주 최근의 종교일 뿐입니다. 신은 균형입니다. 신은 모든 걸 내포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도 모든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다는 걸 당신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그렇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했는데, 어떻게 하면 온전히 도달할 수 있는지요.

 

허용하십시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허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허용입니다. 모든 면에서 양극성이 균형을 이루게 되면 그때 활짝 꽃피우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장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우리가 이미 깨달았다면 어째서 우리는 알 수 없는 걸까요?

 

잊어버렸기 때문이죠.

 

왜죠?

 

경험을 위해서죠.

 

어째서 그토록 절망스럽게 보이는 겁니까?

 

당신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저의 어떤 부분이 허용하지 않는 겁니까?

 

남성에너지라 불리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것을 지배하지요? 어떻게 해야 그것을 끝장 낼 수 있나요>

 

벗이여, 지배하려는 것이 곧 남성에너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싶어하는 이 장벽, 우리로 하여금 배우지 못하게 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허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 장벽은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형성되는 건가요? 제가 느끼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어린 아이 때 겪은 세뇌입니다. 제가 믿은 진리는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저를 오히려 퇴보시켰죠. 제가 경험하게 된 이모든 조건화는 제게 의문을 품게 하였고, 그러자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매번 환생할 때마다 인류 전체의 집단 공명에 대한 앎을 가지고 나옵니다. 이미 전에 사라져버릴 모든 것에 대해서도요. 그리하여 당신은 자신의 신념 체계 위에다 현실을 지어나갑니다.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정말 위대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베일은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두껍지 않습니다. 그들은 허용, 무조건적 사랑, 내면적인 앎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이 세상에 위대한 스승으로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우리는 당신에게 앞의 내용을 읽어보도록 권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 창조되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머리로는 이해하게 될 겁니다. 가슴으로 이해해야 온전한 것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그것도 괜찮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이해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온다는 것을 아시죠. 당신이 가슴뿐 아니라 머리로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몹시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균형이 아닌가요?

당신들의 에너지는 나라는 존재에게로 와서 놀라운 빛을 창조합니다. 당신들 모두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답니다. 매순간마다 지금 속에 살고, 매순간마다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도록 허용한다면, 당신들은 점점 더 장엄한 빛을 창조하여, 이 경이로운 나라 전체로 빛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마치 거미줄에 맺힌 이슬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듯이.

이제 당신네 나라를 빛으로 밝힐 것이고, 그 빛은 전 세계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빛과 웃음 속으로 나아가십시오. 빛의 가슴으로 존재하세요.

 

12. 삶이라는 교향악

 

오늘 밤은 소위 비법을 밝히는 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당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어떤 식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잠시 얘기할까 합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정말 간단하지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건, 3차원의 현실에서 매순간마다 당신들이 만든 창조물의 진동 속에 휩쓸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스스로 창조한 이 3차원의 현실은 너무나도 흥미롭습니다. 생동감이 넘치지요. 아시다시피, 당신들은 당신들의 세포차원에서 이러한 진동과 창조성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 있듯이, 당신들은 매순간마다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물리적 신체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이토록 생동감 넘치는 삶에, 당신 자신들의 드라마에 너무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신들이 만들고 있는 그 만화경 같은 영화에서 당신들은 모든 것입니다. 당신들은 모든 장면을 디자인합니다. 당신들은 각 부분을 담당합니다. 물론 훌륭한 연기자이기도 합니다. 당신들은 그것을 너무 멋지게 만들어 놓고는 그것이 단지 영화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겁니다. 거기에 휘말려 들어간 나머지 대개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 드렸듯이, 당신들은 이러한 창조 양식 속에서 당신들이 갖고 있는 힘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에 따라 생각을 내보내면 그것이 창조됩니다. 자, 이제 비법의 한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당신들은 이 현실과 그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의 집단 공명 속으로 들어설 수 있는 능력을 내면에 갖추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 안의 집단 공명, 모든 세포의 집단 공명, 보이지 않는 현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존재의 모든 집단 공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당신들은 그러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의아해 합니다. 삶이라 불리는 이 캔버스 위에 진정 그리고 싶어하는 것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그림인데도, 어째서 그렇지 못한가? 당신들의 삶에서 조화롭지 못한 모든 것은, 모든 상황 속에 진주가 숨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거기 존재합니다. 진주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저 알기만 하면 과연 어떠할지를 보여주기 위해, 거기 부조화의 상황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은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은 채, 당신들은 자신들이 창조하고 있는 부조화에 대해 의아해하기만 합니다. 판단 없이 받아들이면, 허용하기만 하면, 연꽃 속의 진주는 당신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소망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제한하지 않고 내보내면,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기 위해, 모든 가능성들이 스스로를 정렬합니다. 이것을 절대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단신이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믿어버리면, 자격이 없다고 믿으면, 당신의 문화나 당신의 가족을 인류의 집단 공명 구조 속에 제한 시켜 믿게 되면, 당신은 거침없는 창조성 자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어떤 식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면, 당신은 이미 그것을 제한시켜 버린 것입니다. 모든 가능성이 당신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당신은 그토록 강력하므로, 창조성을 허용하지 않는 의심이나 기대, 신념 구조에 의해 방해 받지 않고 생각을 내보내게 되면, 우주가 스스로를 재정렬하여 당신에게 화답해 줄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토록 간단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이 알든 모르든, 그것들은 소위 과학적 사실입니다. 그 모든 것은 수학 방정식처럼 조금도 어김이 없습니다. 조화를 원한다면, 의식이 확장되기를 원한다면, 바깥에서 맴돌면서 소위 큰 거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모든 면에서 당신은 안 되는 것들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안 되는 것은 매듭이 아니니 아무리 매듭을 지으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부조화, 흥분, 스릴에 가득 찬 삶이라는 드라마에 너무 골똘한 나머지, 삶이 그 같은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배우기 위해 대단한 드라마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드라마 자체가 알고 있는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과거라는 족쇄에 매여 혹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매여, 당신 자신의 힘을 자아 바깥에다 주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 자신은 하나의 교향곡입니다. 당신들이 창조하는 것은 경이로운 음악입니다. 당신들은 지휘자입니다. 당신들은 작곡자로서 교향곡을 창조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 아름다운 음악에 매료되길 권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들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벗들이여, 당신들은 서정시인입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쓸 수가 있습니다. 당신들의 현실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적인 연습이 아니라는 걸 당신들 내면에서 알아야 합니다.

당신들의 지성이나 에고는 당신들의 가슴, 당신들의 직관에 도움을 주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겁니다. 지성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면 당신들은 또 다시 가능성을 차단하게 되고, 가능성을 축소시키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행위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소망을 품은 생각을 내어보세요. 벗들이여, 그것을 우주로 던져보세요. 기쁨 소에서 소망으로 품은 생각을 하는 순간, 그건 이미 존재한다는 걸 아십시오. 바로 그 찰나에 당신은 구걸 창조한 겁니다. 그땐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허용하세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남은 인생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거나 누워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위 낙오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의 의향을, 그것이 이 미 거기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의향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걸 소위 물리적인 확신이라 하지요. 당신의 지성이, 당신의 앎, 당신의 직관, 당신의 가슴에 도움을 주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에서입니다. 당신은 생각을 내보내면서 이미 그것이 이루어진 것임을 아는 가운데, 실제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정도 비법이면 당신들에게도 아주 간단하지 않나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인생 여정에 대해 미리 내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앞날을 미리 내다 본다면 당신은 마음 속에다 구체적으로 그걸 쓰게 되고, 어떠한 창조성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이걸 아시는지요? 당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우주의 메시지라는 것을! 당신의 물리적 현실 속에서 무엇이 당신에게 공명을 일으키고 있는지, 당신이 무엇을 해야 조화로운지를 알려주는 메시지들이라는 것을.

조화로운 삶, 그건 지성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소위 직관으로 사는 것입니다. 매순간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당신의 가슴에 공명하는 것이죠. 당신이 내일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내일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해도, 모든 것이 마땅히 있어야 될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당신은 이미 절대적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당신은 경이롭고도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으며, 어떠한 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고, 원하는 건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바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모두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기 위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신성의 표현임을 진실로 아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분리된 건 없음을 아는 것이죠. 하지만 당신 자신의 영혼이 조금도 흠없이 완전하다는 믿음이 왜 이렇게 없는 겁니까? 진실로 잘못된 길이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당신의 머리를 제외하곤 어디에도 심판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우주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바라든, 우주는 놀랍도록 그것을 허용하는 가운데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판단하는 것은 오직 당신 뿐입니다. 모든 인류가 다 그렇습니다.

 

프타아, 당신은 어떤 식으로 가슴의 깨달음에 접근하십니까?

 

단지 허용하는 가운데 있는 것이죠. 당신은 무엇을 하느라고 몹시 바쁘지만, 가슴의 깨달음이란 하는 게 아니라 그저 허용하는 겁니다. 자신을 명상의 상태로 데려가, 내면의 그 고요한 장소에서, 그저 허용을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할 일이라곤 그것이 전부입니다. 대단한 의식이나 절차는 필요 없습니다. 가슴에 접근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으로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이여, 분리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쪼개고 나누어진 당신의 그 모든 부품들은 판단 속에만 있습니다. 가슴, 마음, 잠재의식, 초의식, 영혼, 신체, 집단 공명 같은 것들은 당신의 판단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모두 분리되어 있는 부품들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허둥지둥 달려 가느라고 바쁘죠. 당신네들의 백화점에서처럼 말이죠. 이걸 사려면 저쪽으로 가야만 하죠.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완벽하게 가만히 앉아서 그 모든 부분들 속에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내면에 있는 그 고요한 장소에서 입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상태로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꽃이 피어나는 걸 상상할 수 있습니다. 꽃의 모든 부분들이 부드러운 햇살에 감싸이고, 그 햇살은 개화를 재촉하죠. 모든 세포들이 살아 움직입니다. 깨어나는 것이죠. 꽃잎은 하나의 부분이지만, 꽃은 하나의 전체로서 진실로 신의 표현이라고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의 신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근원, 바로 그와 같은 겁니다. 모든 게 당신을 거기 존재합니다.

 

저는 플로리아 상공에서 날고 있다가 레이더 스크린에서 사라진 비행선에 대해 읽은 바 있습니다. 대형 여객기가 사라졌다가 10분 후에 다시 나타났다는 겁니다. 비행기에 타고 있이던 사람들은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겁니까?

 

이런 경우에는 순간적으로 비행기가 휘어진 시간대로 들어간 것입니다. 비행기 안의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시간이 휘어지는 현상이죠. 시간이라는 것은 매우 탄력적입니다. 매우 유연하죠. 외계인들의 우주선의 기술은 여러 차원 안에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당신네의 기술로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우주선 바깥의 현실에서는 우주선 자체가 특정 차원을 갖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일단 우주선 안으로 들어서면 외부에서 인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방식으로 이 3차원 현실이란 것이 얼마나 탄력적인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거나 잠들 무렵이면 때로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나는 여기 없고 다른 어떤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걸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의식은 시간과 공간을 지나 여행을 합니다. 육체가 또 다른 현실로 옮겨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할 때마다 시공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전에도 말했듯이 꿈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의식을 지닌 채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의식 상태에서 당신의 몸을 떠나 마음 데로 돌아다닐 수 있으며 당신이 없어진 동안에도 육체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의 영혼 에너지는 당신들의 물리적 신체에 묶여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신들 모두 그 무엇보다도 위대합니다. 무엇보다도 다양하고, 무엇보다도 강력합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듯이 인격체를 지닌 자아만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괜찮고,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며,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면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 어른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지요?

 

벗이여,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우선 이런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우린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여, 우린 그저 모든 것이 존재할 뿐이고, 우주 법칙에는 판단이 없다고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슬픔에 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소위 아동 학대라든지, 기아, 질병에 인한 슬픔 말입니다. 인간에 의해 사랑 받고 있는 동물들에게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요. 자신들이 학대 받고 있을 때, 의지할만한 사람도 없고 자신들의 상처나 고뇌에 대해 말할 수 없을 때 동물들도 슬픔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관련된 모든 생명체의 가슴속에 엄청난 동정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이여, 어린아이든, 애완동물이든,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든, 당신이 감정적으로 너무 밀착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면, 감정에 몰입된 나머지 소위 공동창조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감정적 상태, 분노, 고뇌, 판단 안에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단 한 번 의 삶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수천 번에 수천 번의 삶이 존재합니다. 이건 매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지적으로 내가 말하는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간단하지만 가슴의 깨달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그리 간단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 드렸지만 당신은 지금껏 존재했던 모든 인간의 모든 면을 갖추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이었습니다. 살해자이기도 했고, 피살자이기도 했습니다. 어린아이이기도 했고, 아동 학대자이기도 했습니다. 전쟁광이기도 했었고, 평화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아동 학대, 살인, 고문, 강간과 같이 감정적인 사건이나 상황에 관련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 같은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조차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그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린 아이를 무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정말이지 강력합니다. 상황 상황마다, 특히아직 신념을 쌓아 올리지 못한 아이들도 영혼 차원에선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분명하게 압니다.

아이에게 먹일 음식이 없어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아이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아야만 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당신네 행성의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을 창조한 그런 존재들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동 창조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전쟁 중인데도 그 지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또 어떻습니까? 왜 거기에서 태어나기로 선택한 것일까요? 그것은 모두 경험을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같은 일들이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경험을 위해서, 믿음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환생한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동정심을 가르치기 위해서, 판단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껴안음을 가르치기 위해, 의식의 확장과 수용을 가르치기 위해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지적으로는 이해합니다만, 지금껏 보고 들은 바로는 현재의 인류에게 있어 모든 것을 괜찮다고 믿고 넘어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력한 동물들이나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이 같은 일들을 보고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일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있이지요. 사랑하는 이여, 요청되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바깥에 있다고 판단한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의 거울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의 모든 면을 받아들일 때, 판단과 하나가 되어서 화내는 것도 괜찮게 여기고, 분노와 고뇌로 눈물 흘리는 것도 괜찮게 여기고, 당신들 모두가 상처 받은 가슴으로 죽음도 괜찮게 여기게 될 때, 그 때 진실로 변화를 창조하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상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상, 항상, 당신 자신입니다. 항상, 항상, 당신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도 우연이나 사고가 아니라는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군요.

 

그렇습니다. 벗이여, 사고란 없으며, 우연의 일치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껴안기 위해, 받아들이기 위해, 영혼차원에서 나온다는 걸 아는 가운데 수용하라고 여러 차례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의무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고통을 덜어주는 데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벗이여. 하지만 고통을 덜어주는 걸 의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건 의무가 아니지요. 그걸 의무로서 한다면, 하지 않는 게 더 낫습니다. 가슴속 기쁨으로 한다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와 한다면, 그건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에너지를 보내는 겁니다. 하지만 상처 받은 가슴들도 당신 자신의 반영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이여, 우리도 당혹감과 부당함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부당하다고 인식할 때 그것은 오직 받아들여지기 위해 거기 있으며, 보다 큰 구조에서 볼 때는 모든 것이 신에게로 가는 길이요, 전체성으로 가는 길이요, 분리가 없는 세계로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들 모두가 흘리는 눈물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인 경우가 많지만 실은 자기 자신의 고통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도록 나 자신을 상기 시키곤 합니다. 그런 순간에는 느낌 속에 존재하면서, 이리(태양신경총을 가리키며)로 돌아오곤 합니다. 지난 주에는 하나임의 상태를 의식하려고 마음을 집중시켰는데, 느낌이 변하더군요. 느낌이 여기(태양신경총)로부터 오는 것 같지가 않고 제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은 지극히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죠.

 

그렇군요. 당신이 자신을 현재로,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올 수 있다면, 과거도 없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자동적으로 느낌 속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열게 되면, 분리가 없는 경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내면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러한 느낌, 그러한 감정의 흐름은 마치 나선형의 소용돌이 같아서 세포차원까지 공명하게 하여 하나임의 느낌, 전체성의 느낌을 만들어 줍니다. 진정한 행복감이지요.

 

그렇다면 그런 것들 역시 제 느낌인가요? 내부에 아무런 얽매임도 느껴지지 않는데도요?  

 

벗이여, 사실 느낌이란 오직 에너지일 뿐이며, 중립적입니다. 좋은 느낌이나 나쁜 느낌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그저 존재할 뿐이며, 에너지일 뿐입니다. 어떻다는 판단 없이 허용의 순간 속에 있게 되면, 에너지 센터가 열리면서 에너지가 태양신경총에서 가슴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변형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변형이란, 느낌이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상태 자체입니다. 고통을 창조하는 건 오직 판단일 뿐이며, 고통이란 저항일 뿐입니다. 고통이란 에너지의 이동을 허용하지 않는 겁니다.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느낌에 저항하는 거지요.

 

저는 과거에 천체 하모니라 할 만한 걸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의 심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전체의 하모니와 관련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상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음악으로 나타난 하모니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제가 지금껏 들어왔던 지상의 음악과는 견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다중 우주의 거대분자라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당신의 물리적 신체 안에는 지구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원소가 다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 에너지 안에는 은하계의 모든 원소가 다 있습니다. 전체의 하모니라는 건 사실 전체의 에너지이고, 음악으로도 들을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색깔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빛의 주파수가 맞으면 소리나 색깔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존재의 상태에 들어서게 되면, 당신은 의식적으로 전체의 하모니를 들을 수도 있고, 무심결에 통하게 되기도 합니다. 전체의 교향악이 연주되는 느낌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소우주이자 거대분자이므로 당신 내면에는 그러한 하모니에 대한 앎이 있고, 그러한 하모니가 실존하고 있습니다. 그건 경이로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당신 내면에 그러한 전체의 하모니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거기 대하여 판단하지 말라고 제안하고 싶군요.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건 한갓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의기소침해질 때면,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여러분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렇게 일상의 나날을 견디고 있는 거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이지 마법 같은 세계가 이미 여러분의 내면에 갖추어져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저는 원주민들의 영혼에 특별한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다소 부정적 상황에 의해 압도 되어 왔던 원주민들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조화를 이룰까요?

 

무엇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존재하면서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기만 하면 됩니다. 자신과 조화를 이루고, 분리된 것은 없음을 이해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원주민들의 고난과 시련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당사자들 모두에게 커다란 가르침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위대한 경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의식적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유럽인들의 고대 종족에 대한 관심과 흥미, 거의 잊혀져 버린 의식적 기억에 대한 앎은 원주민들뿐 아니라, 과거에 원주민이었던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 기억의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앎에 있어서 매우 위대했던 한 종족이 자신들의 문화를 잃어버렸지만,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을 얻었으니까요. 이 시대에는 당신네 행성 사람들 전체의 생애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영혼에너지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프리카 대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실로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구하려고 급하게 달려갈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존중하지 않으면 남을 존중하는 것도 힘겨울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또 다시 당신에게도 돌아옵니다.

 

암 환자들에 대해 묻겠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느낌에 대한 저항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러한 고통을 덜어줄 수 있나요?

 

벗이여, 당신이 치유의 에너지를 주는 겁니다. 하지만 사실,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당사자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각자가 자기 현실을 창조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창조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마음이 되기까지는, 자신이 창조한 것과 하나가 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맨 처음 불편함을 창조했던 판단과 하나가 되는 것. 그러므로 환자에게는 모두가 다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도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당신은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병이란 길 잃은 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어떠한 신체적 질병도 감정의 반영으로서만 창조된다는 점을 일깨워 주십시오. 책임감만이 당신들 모두를 피해의식으로부터 구해줍니다.

당신이 해준 말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어떤 식으로 그들의 현실을 창조하든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 드렸다시피 가슴속 그 동정심으로부터 사랑과 치유의 에너지를 보내게 되지만, 치료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치료되지 않는 것이 근본 원칙입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결정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특권입니다. 자신의 영화를 쓰는 것은 자신이니까요.

 

지난 주에 세상에서 멸종되어 가는 동식물에 관해 말씀 하시면서 그들은 사라져 가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요.

 

물론이지요. 당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테니까요. 없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멸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당신의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서만 그렇습니다. 지구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여,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현실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닙니다. 유연하지요. 수많은 지구가 있고 수많은 현실이 있습니다. 당신이 영원히 사라졌다고 믿는 많은 생명체들이 사실은 다른 지구뿐 아니라 다른 행성에서 매우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네 동물과 식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당신들만 관심을 가지고 있은 게 아닙니다. 더 이상 진화 패턴 안에 머무를 필요가 없는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다른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 사라진 겁니다.

여러분의 질문에는 여러분이 인식하는 만큼의 다차원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대답 역시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대답이 여러 가지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신념체계라는 상자의 틀 안에서 분명하고 단순한 말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모든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신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시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류를 혼란케 하는 말들은 이미 충분히 주어졌으니까요.

당신들은 소위 행위에 너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무엇이 되는 것에 너무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이미, 당신들이 그렇게 되려고 애쓰는 존재 상태 그대로입니다. 당신들은 이미 그러한 존재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당신들 각자는 진실로 당신들 우주의 중심 태양이며, 당신들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의 반영이요, 거울일 뿐입니다. 당신들이 무엇을 하든, 어떠한 스토리를 선택하든, 당신들은 결국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합치는 상황을 낳게 될 것입니다. 전체가 되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곳 지구에서의 우리들 사명이, 영적인 것을 물질로 변환시키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시는지요?

 

벗이여, 당신은 이미 물질로 환생한 영혼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위대한 영적 존재로서 환생을 선택했고, 3차원의 현실을 경험하기로 선택했습니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이미 도달해 있는 곳으로 빨리 가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당신은 기억을 잊은 것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을 외롭고 가엾은 인격체로 생각하면서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경험을 위해 이걸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변형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은 이미 되어 있은 상태로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고뇌를 엑스터시로, 분리를 비분리로 변형시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아주 빠르고 쉽지요. 당신이 창조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고통스런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그런 상황에 대한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고통이란 누적되는 것이며, 판단에 의해 야기되는 저항일 뿐이라는 점을 알도록 하십시오. 고통을 받아들이고 무엇이든 가치가 있음을 알도록 하세요. 그렇게 되면 급속히 에너지센터가 열리면서 하나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허용해야지요.

 

하지만 이 없이 어떻게 그걸 허용하지요?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세요.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신성의 표현임을 알도록 하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그곳에 있다는 거군요. 그러니까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서둘러 간다고 해도, 실제로는 우리가 그의 경험을 빼앗고 있는 건가요?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렇다고 말씀 드릴 수도 있습니다. 벗이여, 우리는 돕지 말라거나, 가슴의 지시를 따르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동정심이나 동료를 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시나리오는 창조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뿐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이 그 일과 주파수를 맞추게 되면, 당신은 거기에서 당신 자신의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경시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압니다. 도움이나 동정심, 놀라운 치유의 에너지를 주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지요. 단지 도움을 줄 때, 판단 속에서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되어야만 한다고 기대하지 마라는 겁니다. 그것뿐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이 점도 말씀 드려야겠군요. 당신이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해도, 당신은 결국 자기 자신의 배움을 위한 기회를 창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파트너와 상황을 공동 창조할 때 모두가 동등한 파트너라면 카르마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는 카르마를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다른 기회에 그것을 바로잡아야만 하는 것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주는 아무것도 심판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잘못된 행동에 대해 처벌을 받는다는 이 카르마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늘 의아하게 생각했던 게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대답해 보시죠.

 

카르마란 없는 것이죠.

 

완벽한 대답입니다. 최고에요. 카르마라 불리는 것은 낡은 종교에서 나온 하나의 사상 구조물일 뿐입니다. 사상 구조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당신들의 보다 새로운 종교들 중 하나인 기독교의 사상 구조는 이렇게 말하죠. 잘못을 저지르면 내생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말이죠. 기독교인들이 환생을 믿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빠르고도 쉬운 방법이죠? 단 한 방이면 끝납니다. 올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간다?

, 이 점을 말씀 드리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이 물리적 현실에서 떠나게 될 때, 바로 정확히 그러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옥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 상상했던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그들은 따분해질 것이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처벌이라는 방식의 카르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환생한 모든 것들은 사실은 동시에 존재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기절 초풍할 일이지요. 그건 기술적으로 불가합니다. 이 시간 틀 밖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어느 한 생애에서 껴안지 않은 경험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른 생애에서 껴안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건 처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으니까요. 조화 안에 있이든지, 밖에 있든지 둘 중 하나의 상태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엇이든지 사랑이 아니면 두려움이라는 우주 법칙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 판단 없이 그저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당신은 이번 생애의 과거나 미래뿐 아니라 모든 생애의 과거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리된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변형을 경험하게 되면 바로 그 같은 일이 당신에게 일어날 겁니다.

 

이 지역의 동식물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 해변에 고래들이 떼지어 올라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고래들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얼마나 여러 가지의 대답을 원하는 겁니까? 사랑하는 이여, 물리적 현실이 있고, 고래류 나름대로의 현실이 있습니다. 고래나 돌고래는 인간과 같은 영혼에너지로 되어 있습니다. 고래는 놀라울 정도로 다차원적인 존재로서, 천체의 하모니를 듣기도 하고 연주할 수도 있는, 당신네 행성의 역사가입니다. 그들은 별의 사람들과 실제로 의사소통을 하고 항상 그렇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인류에게 배울 수 있는 놀라운 기회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북극에서 살았던 탁월한 고래류가 있었는데, 그 종족들은 모두 함께 조화를 이루며 지냈습니다. 그러한 고래들 중 한 마리는 높은 경지에 올라 전세게에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고래류의 의식과 합류할 수도 있습니다. 내면의 고요한 장소로 가서 고래나 돌고래의 의식과 만날 수 있도록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고래류의 경이로운 에너지가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고, 당신은 놀랍게도 하나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래류는 기쁨이 무엇인지 진실로 알고 있고, 하나임의 상태와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과 이 행성의 경이로움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근원의 절대적 표현임을 알고 있습니다. 분리된 건 없음을 아는 것.

당신과 신, 당신과 어떤 종과의 사이에도 분리는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행성 위에서든, 지나간 과거의 시대에서건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주,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에서의 어떤 행성에서도 분리된 건 없습니다. 모두 당신을 위해 거기 존재합니다. 필요한 거라곤 오직 구하고 수용하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것이 당신들 내면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들과 함께 하는 것이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우리가 또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것은, 가장 위대한 스승은 당신들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13. 뿌린 대로 거두리라.

 

당신들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현실을 창조하는 방식은 분명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당신들의 큰 영혼, 보다 위대한 당신들의 속사람은 당신들의 겉사람이 하는 일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우주에 자신을 표현하면서 당신들 속사람의 가장 큰 기쁨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순간에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각자 모두는 나날의 삶 속에서, 약동하는 3차원의 이 현실 속에서, 흥분을 가져다 주는 일들을 창조합니다. 여러분은 그 흥분이 위대한 기쁨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결코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처럼 간단한 겁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멋진 여행을 할 작정이라고요?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떨쳐버리고 육체의 여행 길에서 놀라운 모험을 창조하게 될 것임을 진정으로 알도록 하세요. 영혼 에너지의 모험 못지 않게 의식의 모험도 하게 될 것입니다. 모험을 향해, 배움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하지만 사실은 여행하는 동안, 당신이 위대한 앎을 나눠주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정말 멋진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 쓰지 마세요.

여러분 모두 모험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 모두가 위대한 배움을 불러들이고 있고, 최근 당신네 현실에서는 주기의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매순간마다 당신들은 신성의 표현의 정수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이 변화의 시기에 기쁨 속에서, 웃음 속에서, 사랑 속에서, 모험을 창출하도록 하세요. 당신네 행성에 만연한 두려움과 파멸 속으로 빠져들지 마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앞으로 다가 올 시기에 당신들은 5만 년 역사 가운데 최절정의 시나리오를 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다가올 변화, 여러분 행성에 일어날 변화를 증거하고, 그 변화에 기여하기 위해 지금 이렇게 육신의 모습으로 자신을 창조한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임박했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가슴 속에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지구 위에 사는 인간으로서 의식을 지닌 채로 그 변화를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 말입니다. 그래서 지구 여신의 발 걸음도 빨라졌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변화들은 풀잎 위에 맺혀진 이슬일 뿐입니다. 당신들이 지구라고 부르는 여신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왜일까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의식적이고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크게 절망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그 모든 게 저쪽에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출 수가 없단 말야. 사랑하는 여러분,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말씀 드린 바 있지만, 당신들의 지성과 인격체로는 전체성이라는 신의 정수를 끌어안을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당신의 가슴뿐입니다. 당신의 가슴은 신성한 본질 속으로, 모든 시간 연속체와 모든 은하계의 앎 속으로, 이미 일어났다고 인식되는 모든 일과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한 앎 속으로 성큼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가슴이지, 당신의 지성이 아닙니다. 당신의 의식적 이해력도 아니고요.

직관을 허용하고, 받아들임을 허용하는, 당신이라는 존재의 여성적인 면을 만나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믿음의 도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적인 마음으로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품어 안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뜻하는 바대로 창조할 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건 당신만의 주권이지요. 그건 어떤 것을 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거지요. 우리는 그러한 존재 상태에 대해, 그 모든 것의 영광에 대해, 당신들을 위해 한 장의 그림을 그려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면, 현실이라는 하나의 차원에 국한되어 버립니다. 당신들의 영혼에너지, 당신들의 가슴은 현실의 모든 차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림을 미리 보여준다고 해도, 이른바 무한성의 극히 일부분만을 나타낼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생애,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항상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얘기할 때도, 이미 말했듯이 당신들이 본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부족 상태에 있게 되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 당신들은 모든 것을 제한하게 되고, 분리를 창조하게 됩니다.  매사에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매순간의 선택은 결국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입니다. 충분치 않다는 두려움, 사랑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무가치하다는 두려움, 죽을 것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항상, 항상 선택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당신들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모든 병, 모든 불편함은 두려움이라는 선택, 판단이라는 선택에서 옵니다.

사랑을 선택할 때 판단하지 않음을 선택할 때, 당신들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함을 알게 되고, 그 존재함 속에 신성의 표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당신들의 우주, 그 다중 우주로 나아가 사랑을 선택하고 수용 안에 있게 되면, 당신들은 현실이라는 캔버스에 한 번의 붓칠을 하는 셈입니다. 두려움을 누르고, 사랑을 선택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하려는 욕망을 누르고 사랑을 선택할 때마다, 당신들은 이 현실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변형에 대해 얘기했지만 많은 분들에게 그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죠. 변형이란 당신들 가슴속에서 느끼는 모든 고뇌, 번민, 고통의 변화를 뜻합니다. 수천, 수만 번의 생애에서 겪은 고통, 상처 받은 가슴으로 죽을 것만 같은 심정이 신성한 엑스터시로, 화합으로, 하나됨으로 변하는 겁니다. 당신들은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고, 분리된 적도 없습니다. 그것을 알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은 진정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은하계의 무수한 행성에 살고 있는 형제 자매들과도 결코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당신네 행성의 어떤 생명체와도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당신네 태양과 달로부터도 따로 떨어져본 적이 없고, 나뭇잎, 풀잎, 그리고 당신네 정원의 활짝 핀 꽃들과도 따로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잊어버린 것뿐이지요. 그것뿐입니다. 고통과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 속에서 문을 닫아버린 거지요. 당신들 자신이 이 3차원 현실의 흥분과 떨림을 지닌 장미향내 나는 신임을 잊어버린 겁니다. 당신들의 가슴속에 저항이라는 고통을 창조한 건, 이러한 현실에 대한 당신들의 판단,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들의 판단입니다. 그리하여 그 모두가 하나임을 잊어버린 것이지요. 그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이야말로 우주적 진리입니다. 정말로 그토록 간단한 겁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겁니다. 당신이 어떠한 사람이든,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떠한 행동을 하든, 모두 신성의 표현임을 알도록 하세요. 신성한 근원은 모든 은하계와 모든 다중 우주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하찮다고 생각하고, 나쁘고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생애를 통한 그 같은 자기 비하는 어린 시절부터 쌓이기 시작하여 결국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괜찮고 말고요. 당신과 신성한 엑스터시 사이에 가로놓인 건 오직 판단일 뿐입니다. 수많은 생애를 통해 알게 된 고통, 번민, 고뇌를 창조한 건 오직 판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그것은 느낌을 느끼지 않으려는 저항일 뿐입니다. 당신은 느끼는 걸 너무나도 두려워하니까요. 상상력과 감정으로부터 창조된 신성한 불꽃, 그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의식으로부터, 영혼의 하나됨으로부터 물질의 형태로 자신을 창조해 놓고는 다시 근원과 합치려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 자신을 판단하지 마세요. 당신 자신은 경이롭습니다. 당신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이 3차원의 현실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근원으로서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수용하세요. 고통이 가져다 주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결국은 하나임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창조했음을 알도록 하세요.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창조했습니다. 당신은 고통을 가져다 주는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을 창조해 놓고는 ! 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 고통 안에는 아무 판단 없이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한 따뜻한 사랑만을 요구하는 연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머랄드 같은 당신 가슴 안에서, 하나임 안에서, 신성과 더불어 꽃피우고 드러날 것입니다. 그 모든 걸 창조한 건 바로 당신입니다. 저 밖에서 당신에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의 장엄함으로, 당신은 계속해서 껴안아야 할 상황을 창조해낼 것입니다.

본래의 자기 자신과 통하는 길은 판단하지 않는 겁니다. 그저 존재하고, 그 존재함 속에서 모든 걸 수용한다면,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변형, 고뇌에서 엑스터시로의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은 인류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당신 몸 안의 모든 세포를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이번 생애의 과거와 미래를 변화시키고, 당신의 인식 구조상 이미 살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생애와 미래라고 믿고 있는 모든 생애를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변화는 수용함으로써만 이루어집니다. 수용 속에서 당신들은 인류의 황금시대를 창조하게 됩니다. 5만년 만에 나타난 황금시대입니다.

순간순간마다 당신이 선택하는 겁니다.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을 밀쳐내서는 안 됩니다. 없애 버리려고 애써서도 안 됩니다. 실은 변화시키려고 애써도 안 되며, 두려움조차도, 당신 자신에 대한 판단조차도 유효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 역시 신성의 표현이며, 변화를 창조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당신의 빛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겁니다. 그것도 괜찮은 것임을 아는 것이죠. 그건 마치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이를 어루만지며 당신은 말하죠.

괜찮단다,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그 모든 것을 껴안으세요. 당신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판단, 다른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판단을 껴안으세요. 그것은 당신 자신에 대해 내면에서 느끼고 있는 것들의 반영일 뿐입니다. 이렇게 수용함으로써 당신은 모든 판단과 하나가 됩니다. 당신은 수용함으로써 변화를 창조하는 것이지, 변화를 향한 필사적인 노력이나, 당신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김으로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밟아 온 모든 발 걸음,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모든 반응, 두렵고 사소하고 비열한 것으로 판단한 모든 것, 질투와 소유욕으로 인한 모든 반응들, 다른 누군가에 대한 모든 반응들은 사실은 당신 자신에 대한 반응임을 아는 것, 즉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임을 앎으로써 변화를 창조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건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한쪽 발 앞에 또 다른 한 걸음을 용감하게 내딛는 방법을 아직 모른다고 해서 어린아이를 때리지는 않습니다. 아이를 껴안고는 이렇게 말하죠. 잘했다, 얘야, 또 한 걸음을 내딛었구나 그런 식으로 당신은 자기 자신과 함께 할 수 있으며, 그러한 껴안음과 수용 안에서 내면의 에너지 센터가 열리게 되며, 고통스러웠던 것이 복부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정수리로 옮겨져 불꽃을 창출하고, 그 불꽃은 은하계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본래의 진정한 입니다. 그것이 신입니다. 통합과 비분리의 경지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변형은 기적입니다. 책임을 지세요. 불편함이라는 모든 창조물, 고뇌라는 창조물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축복하세요. 그것을 축복하세요. 판단하지 않고 수용하는 가운데, 당신은 자신이 신임을 진정으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가운데, 그저 아무 판단도 하지 말고, 어떤 것을 변화시키려고 애쓰지도 않으면 당신은 무지개와 별빛을 창조하게 됩니다. 그렇게 존재하세요.

 

최근 성직에 뜻을 품은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성직을 갖게 되는 것은 원천적으로 거부당해 왔지요. 사람들을 갈라 놓는 그러한 종교적 장벽이 낮아지도록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여성들을 지지하고 싶습니다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거부되는 게 필요한 일인가요? 종교에서 남녀간의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 여성의 영향력을 진정 높이는 일이 될까요? 아니면 남성 세력에 대한 반발 정도에 지나지 않을까요?

 

벗이여, 성이 여성이라는 것은, 각 개인의 내면에 있은 남성 에너지나 여성 에너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평등을 확립하기 위해 법을 만든 것은, 여성 에너지가 높아진 것을 반영하는 것뿐입니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영역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전에 말씀 드렸듯이, 소위 여성 운동이라는 것은 사실은 지나친 것입니다. 여성 운동을 한다면서 남성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당신네 종교는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 종파가 무엇이든, 여전히 당신네 역사의 반영이라는 점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종교는 수천 년 동안 인류를 노예로 만들고 구속해왔습니다. 분리시키고, 무가치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옭고 그르다고 판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죄가 많다고, 원죄가 있으므로 회개를 해야 한다며 두려움을 조장해왔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변화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우주는 어떠한 심판도 없다는 것을 인류가 이해해야 할 시간입니다. 당신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구름 위에서 인류를 심판하는 신이나, 찬사계급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주에는 옭고 그른 것이 없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이며, 존재하는 것은 모두 유효합니다. 모두 신성의 표현이니까요. 모두 사랑으로 껴안아야 할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낡은 제도의 틀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낙타가 사막으로 도망친 후에 낙타 우리의 문을 고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미래는 관습에 묶여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선 정해진 미래가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순간마다, 가슴에서 느끼는 매순간마다, 사랑과 화합의 울타리 안에서, 다음 순간을 창조하는 겁니다. 가서 가슴이 노래 부르는 일을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자발성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의 기쁨과 경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종교라는 제도에 묶어버리면, 과거라는 쇠사슬에 얽매여 노예가 되고 맙니다. 자신만의 자유로운 지배력, 자신만의 통치권을 부정하게 되지요.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결정한다면, 사실은 그것도 유효합니다. 항상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는 개념을 납득하기 힘이 듭니다. 긴 안목에서, 영원의 차원에서, 혹은 영원한 지금이라는 차원에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우리의 존재 영역에서 그런 겁니까?

 

벗이여, 영원한 지금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누군가를 살해 한다면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왜냐하면 그 안에는 사랑이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벗이여, 인류는 항상 사랑 아니면 두려움을 선택해 왔습니다. 만약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했다면, 살인으로 얻은 그것을 갖지 않은 채 존재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고, 두려움은 곧 판단에서 오는 겁니다. 사랑이 아닌 것은 무두 두려움의 표현이고, 그것 역시 유효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것도 신성의 표현이니까요. 다중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창조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실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판단하지 말고 이해하도록 해보세요. 여러분 각자는 모든 것이었고 모든 표현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가슴속에는 종종 살의가 있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런 생각을 만들어 내는 두려움을 껴안도록 하세요. 어째서 이토록 많은 법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 자신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야생마처럼 날뛰게 내버려두면 남아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법을 만든 겁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 내면에는 신성의 빛, 그리스도의 빛, 근원의 빛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모든 것, 모든 사람과 연결시켜주는 빛의 필라멘트지요. 두려움으로 인해 당신은 그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건 이번 생애만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고통은 누적되는 겁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시간이 무르익었습니다. 인류의 의식 안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원자와 분자의 살아있는 의식 안에서, 여러분이 무생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동물과 식물, 지구 여신의 의식 안에서, 시간이 무르익었습니다. 그 변화가 전 우주를 통해 울려퍼집니다.

이 행성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이 시공 연속체 밖에서는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행성의 수천 가지 표현들, 인류의 수천 수만 가지 표현들, 그 모든 것들이 변화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존재의 매순간마다 써 내려가고 있은 이 멋진 미래를 향해, 지금이라는 그 존재함 속에서 내가 곧 신임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을 향해.

 

안녕하세요, 프타아. 제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요. 아, 제 질문이 뭔지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군요.

 

벗이여, 그건 당신의 가슴속에선 실은 질문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모든 말은 이미 전에 들은 것이라고요. 당신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말들은 당신 안에 있는 앎에 불을 붙이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사실 덧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하면 생각, 혹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나요?

 

무엇보다도, 어떠한 것도 억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억제하는 것은 남성 에너지이니까요. 나아가서 정복하라, 이거죠? 반항적인 생각들을 억누르고, 소위 에고를 떨쳐버리고, 지성을 장악하고, 마음을 영원히 잠재워라. 자,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그건 균형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는 것은 남성적이지요. 그런 반항적인 생각들을 허용해도 좋습니다. 그저 허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여성 에너지입니다.

수용하고, 허락하고, 양육하는 에너지, 그러한 허용 소에서 고요함을 창조하고, 공간을 창조하여 그 안에서 존재하는 거지요. 당신들 모두에게 있는 그 에너지는 나선형과 비슷합니다. 당신을 다중 우주와 연결시켜주는 나선형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해주는 말조차도 그 나선형의 가장자리에서 벌어지는 유희 정도로 상상해도 좋습니다. 말, 생각, 지적 이해, 이해라는 제한된 상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실은 그 나선형의 경계선상에서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빛의 필라멘트와 같습니다. 그 안에 창조의 공간이 있습니다. 수용의 공간, 무한성의 공간, 억제하려고 애써서는 그 존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저 허용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우리는 실은 우리의 생각인 거지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그 이상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이상이지요. 당신이 생각이라고 말할 때, 당신은 지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념체계나 인격체로서의 나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그 모든 것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생각은 다 괜찮은 겁니까?

 

물론이지요, 벗이여. 무슨 생각이든 다 괜찮습니다. 그저 허용하고, 완전한 영혼 에너지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허용의 경지로 들어서는 것, 단일성, 하나됨의 경지로 들어서는 것을 가슴은 열렬히 바라고 있습니다. 억제하려고 할 때마다 자발적인 창조성이 차단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세요.

 

두려움과 관련하여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는 병이 두려움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병이란 두려움이고, 자신에 대한 사랑의 부족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저 자신의 수용적이고, 제대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제 몸에 어떤 현상이 생기는 걸 알게 되고, 그래서 내게 뭔가를 더 보여주기 위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는, 내가 놓치고 있은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봅니다. 뒤로 물러앉아 수용의 자세가 되어 느끼는 거죠. 저는 두려움이 어디 있는지, 잠재의식 안에서 그 두려움을 창조한 게 무엇인지를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뚜렷하지가 않고, 혼란스럽기 일쑤입니다.

 

그렇군요, 사랑하는 이여. 오늘날의 인류는 잠재의식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의식 아래 숨어 있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한때, 당신네 기준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때, 인류는 그 모든 두려움을 종교에, 신에 대한 믿음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종교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구속하든, 종교에 항상 모든 걸 맡겨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변화의 시기에, 사람들은 저 위에서 그들을 심판하기에 바쁜, 신이라 불리는 어떤 노인이 존재하는 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심리학이 등장하여, 당신의 잠재의식 안에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은 분노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동전의 또 다른 면이지요. 당신의 잠재 의식은 적이 아닙니다.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당신의 삶 속에 창조하는 괴물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게 아닙니다. 몸 안의 병은 감정적 불편함을 반영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제가 그걸 인정한다고 해도 그걸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하지요?

 

변화를 원한다면, 질병을 껴안아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걸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충분합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판단 없이, 그 질병을 사랑해야 합니다. 질병 안에는 보석이 담겨있으니까요. 당신이 그것을 창조했으니 당신이 그걸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병을 두려워하면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 속에 있으면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 이해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제대로 알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삶의 여러 영역을 살펴봅니다. 제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영역들을요. 다시 말해 어느 정도까지는 제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만 합니다. 제가 다이어트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따위를요.

 

벗이여, 당신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당신의 현실은 느낌으로 창조됩니다. 감정이 느낌을 창조하지요. 그렇죠?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 지칠 대로 지친 느낌입니다. 모든 것을 잘하고 있는데도 웬일인지 항상 피곤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딘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나 봅니다. 비타민이 부족한 걸까요? 아니면, 제게 뭔가를 제대로 못하고 있은 건가요?

 

벗이여, 비타민이 부족하다면, 사실은 당신이 뭔가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 입안에 무엇을 입 안에 집어 넣느냐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무엇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지를 발견하는 것이 핵심이 되는군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기쁨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요.

 

더 많이 웃고, 더 기쁨 속에 있게 되면, 당신 몸은 더욱 더 건강해지고, 놀라울 정도로 약동하게 될 겁니다.

 

그래요, 그저 조화를 이루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조화를 이루면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당신들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얼마나 어렵게 느껴질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듣지요. 당신이 매순간마다 당신의 현실을 창조하며, 할 일이라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또 할 일이라곤 기쁨 속에 사는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저는 최선을 다하는데요 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걸 잘 압니다.

몸에 질병이 나타나면, 당신은 블랙홀에 빠져 맨 처음 질병을 창조한 판단을 판단합니다. 당신은 완벽한 육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완벽한 조화 속에 있게 되면 육체가 건강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완벽하고 생동감 넘치는 건강 상태에 있지 못하면 자신이 너무 어리석고 조화롭지 못하여 이러한 질병을 창조해 버렸다고 판단합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어리석다는 걸 알게 될 꺼야 하고 걱정합니다. 자, 당신이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가혹하게, 다른 사람이 당신을 판단할까봐 항상 염려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될 수 있는 한, 즐겁게 살고 있는 데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그냥 인정하고 계속 밀고 나가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벗이여, 당신은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그런 질병을 창조한 감정적 고통도 인정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창조했다고 책임감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판단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껴안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신성의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균형 속으로 들어서게 하는 기회들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하지 않음으로써 변화를 창조합니다. 껴안음으로써 변화를 창조합니다. 질병을 다시 한 번 어린 아이인 것처럼 받아들여보세요. 껴안고, 쓰다듬어 주며 자장가를 불러주세요. 강제로 쫓아내지 마세요. 억누르지 말고 사랑으로 품어 빛 속으로 인도하세요.

 

타이밍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최근 제 마음은 타이밍 쪽으로 쏠리고 있어요. 제가 어떤 일을 언제 하면 좋을지, 혹은 다른 사람은 언제 하면 좋을지에 관해서요.

 

, 타이밍이라고요? 당신의 가슴이 노래 부르는 때가 최적의 시기이지요.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타이밍에 관해서라면, 사랑하는 이여, 그것은 그들의 일입니다. 나날의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타이밍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가슴속엔 완벽한 시계가 있으니까요. 일단 무엇을 했으면, 잊어버리세요. 가슴이 노래 부르는 일을 했다면, 그건 모든 가능성이 일어나도록 허용한 것이며, 당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쪽으로 일이 펼쳐질 것임을 아는 가운데 한 겁니다.

, 제일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심입니다. 전에 말씀 드렸듯이, 당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자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이 우주에다 생각을 내보내면, 전 우주가 당신이 우주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믿고 있는 바에 따라 재정렬을 하게 됩니다. 당신이 곧 강력한 창조자요,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창조할 수 있노라고 내가 말하면 당신은 이렇게 말하죠. 아이고 제발 효과가 있기를! 당신이 그걸 망쳐 놓은 겁니다.

당신이 긴박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고 금요일까지 어떤 것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았던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하죠.

내가 그토록 강력한 존재라면, 어째서 금요일까지 그 일이 생기지 않는 거지?

 

, 그래요.

 

그게 바로 필요라는 겁니다. 신은 필요한 게 없어요. 그는 오직 바라고 그 바람을 통해 창조하는 것이지, 필요 때문에 하지는 않습니다. 필요는 절망, 두려움이라는 동전의 또 다른 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잘 포장되어 있기는 하지만요. 일단 놓아버리고 가능성을 허용하게 되면 당신이 원하던 바를 창조하게 됩니다.

 

더 이상 그 일에 투자를 하지 않을 때도요?

 

물론이지요. 전에 말씀 RFUT듯이, 물리적 현실로 나타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언제,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면서 당신이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압력을 가하는 것, 그게 바로 기대라는 거지요. 우주가 자신의 방식으로 그 일을 허용하도록 허용하며 그땐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고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창조적인 부분은, 당신에게 가장 이로운 게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전체 의식이 그것을 안다고요? 그렇다면 저는 물러나고, 저의 보다 위대한 의식이 대신 맡으면 되겠네요. 그렇게 하면 남성적인 정신 에너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고요.

 

머리를 떼어내어 겨드랑이 아래에 집어넣으세요.

 

프타아, 당신이 여기 이 방에 있지 않을 때는 무엇이 당신의 현실입니까?

 

사랑하는 이여, 수없이 많은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현실에 우리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어떤 일을 하면서, 그것이 결국 배움을 위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판단에 꼼짝없이 갇혀서 이제는 계속해서 배움을 반복해야 한다는 게 두렵습니다.

 

하지만 판단을 완전히 통과할 때까지는 계속해서 그것을 창조해야만 합니다.

 

이제는 그것을 아는데, 그렇다면 이제 그만 굴리고 치워버릴 수는 없을까요?

 

물론이지요. 사랑하는이여, 당신은 자기 자신에 데해 그토록 가혹한 심판관이고, 또 그 판단에 다시 판단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뉴 에이지의 불행입니다. 망상의 복수, 뉴 에이지들의 저주. 당신이 판단 혹은 판단에 대한 판단과 하나 되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알고 한 바탕 크게 웃는 겁니다. 그 웃음 속에서 모든 것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느낌이 어떻게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당신이라는 존재는 사실 느낌입니다. 느낌이 무엇입니까? 그건 에너지이지요. 진동하는 주파수입니다. 그게 바로 당신입니다. 진동하는 주파수. 그리고 그 주파수는 당신의 느낌에 따라 변합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당신은 자기가 무얼 믿고 있는지 정말로 모를 때가 많습니다. 믿고 잇는 바가 곧 그 개인의 인격적 자아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믿음이 곧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알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인류는 사실 느낌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항하는 데에 매우 익숙하고, 느낌에 대한 두려움에 매우 익숙합니다. 그것은 전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당신들 대부분이 느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 합니다. 당신이 느낌을 수용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 그걸 판단했든, 사실은 그것이 중성적 에너지임을 알게 됩니다. 느낌이 받아들여질 때, 그건 온몸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기쁨을 창조하고, 화합을 창조하고, 비분리를 창조합니다.

당신이 어떻다고 판단하면 저항을 창조하고, 그것이 곧 고통입니다.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많이 말했고, 당신은 그 내용을 읽어서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납득했을 겁니다. 사랑하는 이여, 변형이란 느낌을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태양 신경총 안에 자리잡고 있는 중성적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것이 가슴으로 옮겨지고, 정수리로 옮겨가서 엑스터시를 창조하는 겁니다.

당신이 뒤로 물러앉아 그 모든 것을 진정으로 웃어넘길 수 있으면, 절망이나 불행도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것은 변화됩니다. 복부로부터 웃음이 피어 오르고 그렇게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필사적으로 깨달음을 찾아 헤매지요. 그건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절박한 소망입니다. 당신들이 이미 고향에 와있음을 인정한다면, 이 의식세계, 이 현실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의 면모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아무런 기대도, 의심도 없이 그런 소망을 갖게 되면, 그 순간 이미 당신은 고향에 와 있음을 진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나의 소망은 당신들 모두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고 보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리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러한 충만한 존재 상태에 있는 당신들에게 진실로 경의를 표합니다.

 

14. 존재의 향기를 퍼뜨리라.

 

프타아, 당신이 우리를 돕는 일은 상호 작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정말 많은 것을 얻었는데, 당신도 우리로부터 되받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기쁨을 얻는답니다. 배움의 경험을 하기도 하고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함께 어울려 당신들의 본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그것이 당신들과 더불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항상 인류와 함께 하는 것은 기쁨을 줍니다. 의식의 확장을 지켜보는 것은 항상 기쁜 일이지요. 당신네 행성이 불을 환하게 밝히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기쁜 일이고요.

 

저는 황금의 천사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순수한 신의 사랑을 향해 한 단계 낮춘 주파수가 황금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황금은 상인의 손이 아니라 치유자의 손에 맡겨져야 하지 않을까요?

 

값비싼 보물인 황금은, 사실은 신성한 만유의 반영으로서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벗이여, 당신은 그것이 상인이 아니라 치유자의 손에 맡겨져야 하나고 말했습니다. 치유자가 상인보다 더 훌륭한가요?

 

생명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니까 때로는 더 낫지요. 제가 특별히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황금이 일종의 친화력을 가진 것 같다는 거예요. 생명의 주파수가 본래의 하모니를 찾아 되돌아가는 힘 말에요. 특히 금은 원자구조의 이온화를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구이지요. 하지만 전에 우리가 말했듯이, 당신에게 필요한 유일한 도구는 사실 당신의 가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도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치유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에 너무 빠져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무엇을 바라보든, 그것이 크리스탈이란 황금이든, 혹은 당신네 행성에서 산출되는 다른 종류의 보석이든, 그것은 그러한 특별한 광물들 안에 내재된 하나의 반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동물과 식물이라는, 당신들 본성에 대한 반영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여, 인류 안에 내재된 위대한 반영도 있습니다. 황금이 신성한 만유의 반영이라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 어느 것을 다른 것보다 위에 올려놓지 마십시오. 지금 인류가 알아야 할 가장 큰 가르침은, 사실은 모든 것이 만유의 반영이라는 것, 신성의 본질이 스며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프타아, 저를 저 자신, 즉 저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분리시키는 유일한 건 저의 신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신념을 확장시켜서, 저의 진정한 자아를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지적인 이해를 하는 것도 매우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당신이 실제로 믿고 있는 바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까? 이미 말씀 드린 바 있듯이, 자신들이 무얼 믿고 있는지 정말로 모르는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념 체계가 그 사람의 일부가 되어버린 나머지, 머리 위에 머리카락이 있는지 없는지가 의식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의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곤경에 빠졌을 때는, 당신에게 조화롭지 않은 방식으로 일이 펼쳐졌을 때는, 연필과 종이를 들고 적어보는 것이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겁니다.

예를 들어 풍요에 대해 적어보세요. 아니면 사랑을 베푸는 것에 대하여 적어보세요. 때로는 이것이 궁핍함보다 더한 고뇌를 인간에게 안겨주는 것 같더군요. 종이 맨 위에다 사랑, 혹은 돈이라는 말을 적고 나서 세로로 줄을 그어보세요. 그리고 왼쪽에는 거기에 대한 당신의 부정적인 견해들을 적어보세요. 또 오른 쪽에는 긍정적인 견해를 적어보세요. 당신은 놀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이 부정적으로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안 된다고 알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당신들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잇고,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들을 덮어 버리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지요. 그것들을 쫓아버리고, 깔아 뭉개려고 말입니다. 억압하고 은폐하지요. 이런 식으로 당신들은 자신이 진짜로 믿고 있었던 신념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당신 자신조차 몰랐던 자신의 부정적인 신념들을 이해하게 되면, 그땐 그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됩니다. 그것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할 것도, 은폐되거나, 억압되어야 할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거지요.

그 동안의 신념 체계가 더 이상 당신에게 작용하지 않는 거지요.  그땐 괜찮아 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 안에 그것을 껴안을 수 있게 되는 거지요. 괜찮아 그건 어제의 생각이었어, 이젠 더 잘 할 수 있게 되었어 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어제의 신념을 껴안고 오늘의 보다 확장된 의식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신을 위해 제대로 봉사하지 않았던 삶의 측면들이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당신을 위해 봉사하게 됩니다.

 

프타아, 사랑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사랑에 대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사랑이 없다면 당신은 생존을 위해 싸울 뿐이고, 사랑과 함께라면 당신은 위대하고 창조적인 마스터가 되어 당신 주변에 신성을 반영하게 된다고나 해야 할까요.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그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당신이라는 존재는 이 3차원 현실의 모든 면에서, 모든 색조로, 모든 방법으로, 모든 빛깔로 표현되고 있는 근원 자체임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괜찮은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당신 밖에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당신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프타아, 이 남자의 아들은, 뇌종양을 앓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해야 제거될 수 있으며 그 소년이 영혼의 선택으로 이런 일을 발생시킨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또 극단적인 처지에 빠진 아이에 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를 수가 있느냐고 의아해 합니다. 그토록 순진무구한 아이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벌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 아이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 특히 가족들은 슬픔을 이해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생애는 단 한번에 결정되는 게 아님을 항상 자신에게 상기시키라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가족으로서 다시 모인 여러분은 이미 수많은 생애를 함께 했었고, 각 생애마다 함께 재창조하기로 선택했었고, 각자 경험을 위해 다른 역할을 해왔던 겁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각자는 역할이 뒤바뀔 때마다 다른 생애에서 껴안지 않았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매번 환생할 때마다 의식이 더 확장되는 것이지요. 지금 이 시대에서는, 오늘날 여러분 시대에서는 배워야 할 가르침이 더 많이, 더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극단의 것들을 불러들여 기꺼이 끌어 안고, 고뇌를 엑스터시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밝힐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깨달음을 위해 당신들의 지구 여신을 도와 지구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매번 환생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영혼 차원에서, 가족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다 함께 모여 이미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거대한 스펙트럼의 게임 플랜을 짭니다. 자, 이제 한 아이가 영혼의 차원에서 그 가족과의 짧은 경험만 갖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영혼은 전에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것을 어떤 특정 기간 동안만 경험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변형에 대해서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모든 것을 변형시킬 수 잇는지, 수용 안에서 어떻게 변형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고통과 번민은 느낌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도요. 당신이 진정으로 수용의 경지에 들어서면, 그 고통이 수억 겁 동안 계속되어 온 고통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이번 생애, 이번 상황만의 고통이 아닙니다. 당신은 껴안기 위해, 그 안에 담겨진 보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위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겁니다.

자기 안에 담겨진 보물, 당신 가족 전체 안에 담겨진 그 보물의 반영을 이해하게 위해서. 그것이 바로 사랑과 수용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그 시간은 겹겹의 보물이 되어 왕관을 창조하고,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 당신네 가족 각자와 함께 했던 모든 생애를 밝게 비추어 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서로 정겹게 지내시고 모든 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충만하게 보내세요. 미래에 대한 생각은 접어둔 채, 순간마다 기쁨을 창조하면서요. 사랑은 결코 끝이 없음을 진실로 알도록 하세요. 당신이 기나긴 세월 동안 창조해 온 가족 간의 사랑의 유대는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사람이 이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게 되면, 육체적 의식과 현실에 있을 때보다도 그러한 유대가 더 강해진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어느 정도 의사 소통을 하고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 컨트롤 할 수 있는 겁니까? 한 예를 들어 우리는 순간마다 완벽한 선택을 한다고 말씀 하셨는데..

 

우리는 지금 의식적 선택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든다면, 그 아이는 오직 짧은 기간 동안만 그 가족과 함께 하기로 결정 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약간 모순이 있는 것 같아서요.

 

사실은 모순이 아닙니다. 영혼과 의식 사이에는 분리가 없음을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지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요. 자, 전에 말씀 드렸죠. 사랑하는 이여, 머리를 떼어 내어 겨드랑이 아래로 집어 넣으세요. 이 길을 가는 데 있어 그건 참으로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혼란스러운 건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당신의 의식적 현실은 90%가 지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지성은 사실은 당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수많은 생애를 거쳐 오늘날 벌어진 사태는, 당신이 에고의 노예가 되어 버렸듯이, 지성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당신이 보다 직관적으로 되면 일상의 현실이 가슴에 의해, 당신의 가슴이 부르는 노래에 따라 그 모든 것을 허용하면, 그땐 영혼이라 불리는 것과 더욱 더 주파수를 잘 맞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바라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알게 될 겁니다. 그땐 가슴의 바람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성과 에고를 사용하는 것이 순간 순간마다 기쁘고 즐거울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의 영혼은 흠없이 완전하며, 신성의 은줄입니다. 당신의 영혼은 그것이 신성의 표현임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지성은 자신이 신성과 관계가 있음을 잊어버렸지요.

 

이전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당신은 어떤 것도 돌에 새겨진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나 그 사람은 질병을 변화시킬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변화될 수도 있지요. 벗이여, 당신이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저 그런 생각을 내보내면 된다고 말씀 드렸던 걸 기억하나요? 그리고 기대에 의해 창조되는 제한, 신념체계에 의해 창조되는 제한에 대해서도 말씀 드렸죠. 자, 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영혼에는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유익한지, 당신의 마음보다 훨씬 잘 알고 잇습니다. 그러니 이건 진실로 내가 원하는 바야 라고 말하세요. 그러나 결과를 갈망하지는 마세요.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오든 괜찮은 것임을 알도록 하세요. 이해하시겠어요?

잘생긴 한 남자가 육체적으로 아주 건강했었는데 병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 병은 분명히 감정으로 껴안지 못한 어떤 것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육체 안에는 감정을 껴안지 않은 지역에 따라 질병이 나타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자, 몸에서 그 질병을 없애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그 근원으로 가서 고통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세포적 차원에서는 몸이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이 주는 가르침을 이미 배웠다면 영혼 차원에서 질병이 떠나기를 바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고 나면 질병은 이제 불편함이 아니라 편안함이 되어 버립니다.

, 여러분 몇 주 동안 우리는 많은 말들을 해왔습니다. 이 말들은 전에도 수없이 많이 들어 왔던 것입니다. 당신은 그 모든 걸 들었고, 수많은 생애를 거쳐서 들어왔지만, 실제론 듣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듣고 나서 거기에 도달하여 그것을 하고 싶어하고, 깨닫고 싶어하고, 이 행성을 떠나고 싶어하고, 당신 세계 밖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당신들 모두는 너무도 필사적으로 무엇을 하려 합니다. 매주 마다 말했죠.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다중 우주의 모든 지식은 당신 내면에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이런 말을 해준 사람들이 있어 왔는데 당신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더 계속할 건가요? 당신이 밖에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반영일 뿐이라고 나도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당신이 부적적으로 판단하는 그 대상도 역시 당신 자신의 반영이라고! 당신이 삶에서 저항하고, 판단하고, 밀쳐내고, 억누르고, 은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부 당신에게로 되돌아옵니다.

당신이 저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끈질기게 지속됩니다. 당신이 받아들일 때까지, 끌어 안을 때까지, 판단하지 않을 때까지. 당신 자신의 모든 면, 모든 생애에서 가졌던 모든 생각, 모든 행동, 당신의 모든 부분, 당신 몸의 모든 세포는 다 신성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당신을 제외하고는 판단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 우주에는 판단하는 자가 없습니다. 당신은 신이요, 만유 자체로서 이 3차원 현실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 모두 영적 마스터들입니다.

나더라 왜 왔냐고 물었죠?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보는 일의 경이로움 말입니다. 당신들 모두 배를 놓칠까 봐 두려워합니다. 변화가 일어났을 때 뒤에 남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거기에 도달하려면 무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이미 그곳에 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제한된 인식을 받아들이세요.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것을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인식이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당신들은 모든 현실 차원의 영적 형제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당신들을 사랑하고 당신들의 행성을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당신들은 당신 자신, 당신들의 행성, 그리고 한 종족으로서의 당신들의 운명을 변화시킬 힘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은 지구 자체가 무력하며,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의 지구는 위대한 여신으로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창공에 떠 있는 별과 같아서 전 은하계를 빛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은 가장 위대한 여정에 올랐습니다. 당신들은 영광스런 길을 선택했고,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매순간마다 당신이 당신의 현실과 미래를 창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마세요. 당신네 종족의 과거 역사에 얽매이지 마세요. 어떤 한계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며, 당신네 행성에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당신 자신의 부분입니다. 당신은 진실로 어떤 것과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사람과도 분리되어있지 않습니다.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하나의 선택을 합니다. 당신은 사랑을 선택하거나 두려움을 선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두려움을 판단하지 마세요. 그것도 당신 자신의 신성하고 유효한 표현입니다. 그것을 당신 안으로 껴안으세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당신이 그렇게 할 때마다 은하계를 비추게 되고, 전 우주를 밝히게 되며, 당신 몸 세포 안의 구조를 변화시켜 소위 두뇌라는 크리스탈 창공에 불을 밝히게 됩니다.

당신들 모두를 너무도 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들과 함께 하는 것은 진실로 멋지고 기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여기 잇습니다. 당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당신 자신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당신들 모두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뿐입니다. 당신들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지금 이순간 이 방에서 놀라운 빛깔을 발하며 천정을 뚫고 우주로, 우주로 존재의 향기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사랑 하는 여러분 안녕.

 

글옮긴이 : 하늘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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