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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향 2008. 6. 9. 14:47

의식과학의 창조방법 

 

 

 

.................... 새 집을 사거나 몸무게를 즐이거나 새 일자리를 얻겠다는 등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당신은 흔히 이것을 창조의 대상으로 오해합니다. 진정한 창조의 대상은 당신의 존재 방식인데도 말이지요. 집이나 몸매, 직업 같은 것은 당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돕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중 어느 것도 진정한 창조의 대상은 될 수 없지요.

 

진정한 창조의 대상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의

존재 혹은 감정 상태,

이것이 바로 창조의 대상이지요.

당신의 존재 방식을 관찰할 방법을 찾는다면

당신이 어떻게 자신을 창조하고 있는지 보다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원하는 감정 상태와 존재 방식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의도했던 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이미 창조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창조는 결코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지요.

 

대부분의 인간들은 먼저 행위를 함으로써 감정 상태에 영향을 미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서 행위가 삶의 경험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요. 하지만 행위 대신 원하는 감정 상태나 존재 방식에 집중하면 추구하는 것을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 방식을 확인함으로써 보다 적절한 행위를 선택하게 되지요. 부정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모두 성공이라는 목적에 역효과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자유와 성장, 기쁨이라는 긍정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행위당신의 목적에 완벽하게 부응하지요.

 

부정적인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위를 한다면 이는 자유와 성장, 기쁨이라는 목적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건강, 부, 인간관계 등 그 무엇을 위한 행위라도 마찬가지이지요. 예컨대 일을 안 하면 돈을 못 벌고 그렇게 되면 상황이 더욱 나빠지리라는 생각에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일을 하러 간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 혐오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이 가장 주요한 영향력으로 작용하고 당신은 결국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들을 더욱 많이 유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태에서 행위를 먼저 하는 대신 자유를 향한 갈망(일을 해서 벌어들이는 돈은 곧 자유와 같은 의미입니다)성장을 향한 갈망(타인들과의 상호 작용은 언제나 새로운 깨달음의 기회를 가져다 주지요), 기쁨을 향한 갈망(찾고자 하면 언제 어디서든 기쁨을 얻을 수 있지요)을 먼저 확인하다면, 이러한 목적에 부응하는 행위를 선택하게 됩니다.

 

당신은 존재와 감정 상태에 따라 그대로 유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원하는 존재 상태와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행위가 그 초점의 인도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감정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위는 오히려 퇴행적인 것으로 아무런 효과도 일으키지 못하니까요.

 

원하는 감정 상태를 얻는 데에 99%를 쏟고, 나머지 1%는 구체적인 행위에 집중한다면, 언제나 즐겁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힘있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소망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행위

언제나 기쁨을 안겨 줍니다.

하지만 결핍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행위는

결코 기쁨을 낳지 못합니다.

긍정적인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든 부정적인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든

구체적인 행위는 똑같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행위를 하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기쁨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지요.

불행한 여행에

행복한 결말은 없는 법.

우주의 법칙이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

 

 

 마법의 법칙  

 

인과법칙(Cause & Effect Law)은 삶의 가장 깊은 법칙이다. 모든 과학은 인과율에 근거하고 있다. 즉 원인이 있으면 그 결과가 따르게 되어 있다. 생명은 인과율의 고리다. 땅에 씨를 뿌리면 싹이 튼다. 불 속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다. 원인이 거기에 있으면, 결과는 반드시 뒤따르게 마련이다.

 

가장 기본적인 과학법칙 중 하나는 원인과 결과가 생명의 모든 과정에 깔린 가장 내적인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이보다 더 깊은 두 번째 법칙에 관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법칙을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합리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종교는 말한다.

"결과를 만들라. 그러면 원인은 뒤따른다."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완전히 거꾸로인 셈이다.

과학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뒤따른다"고 하지만,

종교에서는 그 역도 진실이라고 말한다.

즉 그대가

결과를 창조하면,

원인이 뒤따르는 것을 보게 된다.

 

친구가 찾아오거나 연인이 부르면 그대는 행복감을 느낀다. 하나의 상황이 원인이 되어서 그대는 행복감을 느낀다. 이때 행복감은 결과이고, 연인이 오는 것은 원인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라. 그러면 연인이 올 것이다." 결과가 원인을 부른다. 두 번째 법칙이 첫 번째 법칙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것,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행해왔고 또 어김없이 그렇게 되어왔다. 행복하라. 그러면 연인이 찾아올 것이다. 그대가 행복하다면 모든 것이 뒤따를 것이다.

 

예수는 이와 똑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했다. "너희는 우선 하느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뒤따를 것이다." 이 하느님 나라는 결과이자 끝이다. 이 '끝'은 결과를 뜻한다. 먼저 결과를 구하라.그러면 원인이 따라온다. 이것은 법칙이다. 그대가 씨를 뿌리면 나무가 자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나무로부터 수백만 개의 씨가 생겨난다. 원인은 결과를 부르고 결과는 다시 원인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인과의 사슬이다! 하나의 순환이다!

 

                   

 

나라면 결과를 창조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고 말하겠다. 결과는 전적으로 그대에게 달려 있지만 원인은 그대에게 달려 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그곳에 있을 때 행복을 느꼈다면, 그 행복은 친구에 의존하는 것이다. 내가 부자가 될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행복은 온 세상의 경제 상황과 그밖의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칫 부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나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원인은 내 밖에 있지만, 결과는 내 안에 있다. 원인은 환경과 상황 속에 있으므로 외적인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나'이다. 내가 결과를 창조할 수 있다면 원인이 뒤따를 것이다.

 

행복을 선택하라.

이것은 결과를 선택한다는 의미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황홀경을 선택하고 축복을 선택하라.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인생 전체가 즉각 바뀌면서 그대 주변에 기적이 일어나리라.

지금 그대가 결과를 창조했으므로 앞으로는

원인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술처럼 보이므로 '마법의 법칙'이라 부를 수도 있다. 첫 번째 것이 과학의 법칙이라면 두 번재 것은 마법의 법칙이다. 종교는 마법이다. 그대는 마술사가 될 수 있다. 일단 시도해보라! 그대는 지금까지, 이번 생애만이 아닌 전 생애에 걸쳐 정반대의 노력을 해왔다. 이제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가 그대에게 준 이 마법의 공식, 이 만트라를 시도하라. 결과를 창조하고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원인이 곧바로 그대를 둘러싸면서 뒤따를 것이다.

 

원인을 기다리지 말라.

그대는 지금까지 충분히 기다려왔다.

행복을 선택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

     

 

       
 

비밀을 하나 알려주겠다. 이 비밀을 나는 '원하는 대로 자기 인생을 창조하는 지름길'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비밀이다.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행복하려고 새 자동차를 갖고 싶어한다. 행복하려고 건강해지고 싶어한다. 행복하려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행복은 당신(영혼)의 진짜 목표다. 하나의 비밀이 더 있다. 당신은 지금 당장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물건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행복하겠다고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비밀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이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때 비로소 목표로 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과 단절할 수 있다. 당신이 목표를 천명하고 그것의 달성에 관계없이 당신이 행복할 때에만 유도의 법칙이 작동한다. 이것은 미묘한 균형의 문제다. 동시에 우주의 원리가 작동하는 비밀이기도 하다. 디팩 초프라는 <욕망의 동시적 충족>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진 다양한 목표들의 궁극적인 목표영적인 차원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나 기쁨, 사랑이라고 부른다. 우주에서의 모든 활동은 의도에 의해 일어난다. 인도의 베단타 철학에 따르면 의도는 자연의 힘이다. 의도를 통해 우주의 모든 요소들과 힘은 균형을 유지하고, 그것이 우주를 계속 진화하게 한다. 따라서 의도는 보편적인 의도에서 생겨나서, 개인적인 영혼에 한정이 되고, 마침내 개인적이고 국소적인 마음을 통해 표현된다.

          의도는 단순한 변덕이 아니다. 강한 주의력이 필요하고 집착을 버리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의도를 선명하게 가진다면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고 우주의 힘이 당신 의도의 세세한 부분까지 통제할 수 있도록 놓아둘 줄 아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한마디로

당신의 의도를 자유롭게 놓아줄 때

유도의 법칙은 최대치로

작동한다.

[조 비테일/돈을 유혹하라] 

 

 

....................생각과 말 그리고 행위 또한 창조의 도구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들은 마음(맘나)과 몸(몸나)의 창조 도구로서 마음이 방법을 생각하고 몸으로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느린 방식의 창조가 된다. 그에 반해 원하는 것과 그것이 이미 거기에 있음을 알고, 그것의 창조자로서의 존재상태가 됨으로써(다시 말해, 그것으로 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의식과학 시대의 '믿음에서 앎'으로 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창조의 진정한 의미는

나의 존재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창조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나는 나의 존재상태를 창조해 내는 창조자인 것이다.

이런 앎(자각)의 상태에서는

원하는 현실을 만드는 창조자는

창조의 과정을 즐기는 기쁨 속에 있다.

 

예들 들어,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의 기쁨은 완성된 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데 있다. 결국 그는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내는 자신의 창조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의 존재상태를 창조해 내는 창조자인 것이다.

 

구시대의 낡은 창조 방식은, 나의 몸과 마음을 나라고 믿는 착각 속에서 행위야말로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고, 원하는 현실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도구라고 믿어왔다. 삶 속에서 행위의 욕구는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우리는 행위를 자신의 존재상태로부터 우러나오는 창조를 즐기는 하나의 방식으로서가 아닌, 원하는 현실을 만드는 수단으로 생각해 왔다. 이는 모든 행동보다 그러한 의도에 상응하는 감정을 느끼려는 의지가 더욱 효과적으로 원하는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행위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행위의 대부분이 자신의 보다 중요한 의도에 맞지 않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감정에서 행위를 하는 낡은 창조 방식의 악순환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아왔다. 결국 많은 시간을 일에 쏟아 붓고 많은 노력을 쏟았는데도 불구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빚어진 원치 않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우를 범해 왔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자기도 모르게 병을 만들어놓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느라 동분서주하는 것이다. 행위는 자연스럽게 할 마음이 우러나올 때 기분좋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며 마지못해 하는 또 다른 행위를 되풀이하게 만든다.

 

의식과학 시대의 새로운 창조방식은

풍요와 행복의 느낌 속에

존재할 때

비로소 그와 같은 존재상태의 놀라운 물질적 증거들을

거기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난(겪고 나서) 뒤가 아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미리 그런 존재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가짐으로써

풍요롭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풍요와 행복의 느낌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있음으로써

거기에서 많은 돈이 창조되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창조모델은 의식과학의 창조법칙이다.

의식과학의 원하는 현실 만들기는

이미 그것이 만들어져 있음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질적 현실이

모두 마음이 지어낸 환상임을 깨닫고,

것을 참나의 입장에서 다시 만들어 즐기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창조 방식으로 누구나 마음 너머의 그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공간에서

창조 과정을 즐기면서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현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원하는 현실을 만들어내려는 (의도)을 분명히 세우면

창조의 과정은 시작된다. 그 다음은

그것이 이미 만들어져 있음을 알고 허락하면 된다.

그리고 긍정적인 감정이 실린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

 

 

 

의식적 창조는 자기 자신이 신성(神性)이라는 자각 속에서 의식적으로 행하는 창조행위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신성한 의식에 의한 창조를 뜻하는 것이죠. 신성한 의식이란 내면의 상위자아, 영(靈)과 하나 된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심령(心靈)을 통일하여 나와 신성이 다르지 않고 하나 된 경지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 의식적 창조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모든 창조의 중심이라는 확고한 자각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창조야말로 의식적 창조의 중심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의 대상은 본질적으로

창조주체의 존재상태이며,

창조의 내용은

창조주체의 존재의 기쁨과 자유, 성장과 경험의 확대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자기자신의 존재의 상태를 창조하는 것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창조의 층위가

결정됩니다.

내가 곧 신(神, 창조주)이며 신이 곧 나(道卽我 我卽道)라는 경지에서 마음과 영을 통일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의식적 창조의 본질이며, 이런 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는 신성한 의지(Divine Will)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충분히 풍요롭습니다. 풍요를 물질이 넘쳐나는 과정으로 생각지 마세요. 풍요는 내면의 신성과의 연결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신은 곧 풍요입니다. 신의 왕국에는 결핍이 존재하지 않으니, 풍요를 이루는 에너지는 도처에 무한한 까닭입니다. 풍요는 우리들이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데, 풍요에 대한 잇슈는 결국 에너지의 문제입니다.

 

진실로 여러분의 영적 풍요는 생득적 권리입니다. 단순히 그것을 우주에 요청하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세요.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의심하고,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하고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오는 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요소로 됩니다.

 

여러분이 그 풍요를 누리는 데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 없이 주어지는 영적인 풍요를 여러분이 조건 없이 받고, 여러분이 조건 없이 받은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도 조건 없이 나누어주세요. 이것이 여러분의 주변에 끊임없이 풍요가 흐르게 하는 비결입니다.

 

창조를 지키는 방법이

바로 그 창조를 나누어주는 것임을,

풍요를 지키는 방법이 그 풍요를 나누어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세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방법을 터득하세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 제공하는 일에 전념할 때, 여러분에게는 무한한 풍요가 밀려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베풀고자 하는 바로 그 풍요의 질과 양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우주적인 풍요의 질과 양이 규정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세요.

여러분의 가슴이 노래 부르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The Group]

 

먼저 소위

"행복한" 상태가 "되고" 나서,

되어 있음(beingness)의 자리에서 뭔가를 "하기" 시작하라.

그러면

얼마 안 가 너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네가 항상 "갖고" 싶어하던 그것을 가져다주면서

끝맺는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이 창조하는 과정

(바로 이런 게...... 창조과정이란 것이다)

을 작동시키는 방식은,

먼저 네가

"갖고" 싶은 게 뭔지 살펴보고,

그것을 "가진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자문해본 다음,

곧 바로 그런 되어 있음(beingness)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너는 지금껏 써오던 '존재-행위-소유'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 실제로는 그것을 바로 세워 -, 우주의 창조력에 맞서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다. 이 원리를 진술하는 지름길은 이렇다.

 

"내가 삶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내가 무엇이 되고 있는가(being) 뿐이다!"

 

 

"천국에 가는" 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이미 그곳에 있음을 아는 것만이 있을 뿐이며, 수고나 애씀이 아니라 받아들임과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이 이미 서 있는 곳으로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깨달음이란 어디도 갈 데가 없다는 것과,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 지금 있는 꼭 그대로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건 오로지 현재뿐이다. 네가 자신을 체험하는, 항상이라는 영원한 순간...   

 

삶의 목적은

어딘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네가 이미 그곳에 있고,

예전에도 항상 있어왔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나는 네가 행복한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는 점을 이해하길 바란다.

네가

구원받지 않을 길은 없다.

이사실을 모르는 경우만 빼고는,

어디에도 지옥은 없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천국과 지상은 사라져도 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원이라는 시야를 가지면

너는 사물들을 그 본연의 빛 속에서 보게 되리라. 

 

네 삶의 모든 순간이

신성한 순간이고, 창조의 순간이다.

순간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니, 순간 순간 너는

다시 태어난다.

만일 네가 삶을 행동과 관련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는 자신이 여기서 뭘하는지 모르고 있다. 네 영혼은 네가 뭘 하든, 그걸 하는 동안 네가 무엇이 되고 있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영혼이 관심을 갖는 건 행동 상태가 아니라 존재 상태다. 너는 자신의 몸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이 행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자신의 영혼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이 행성에 존재한다. 네 몸은 그저 영혼의 도구일 뿐이고, 네 마음은 몸을 움직이는 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너는 일종의 동력도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영혼이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동력도구를.

 

너는 행복을 원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너는 행복을 갖는 체험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 행복을 선택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안다. 사실 너는 행복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줄곧 행복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네가 행복을 선택하지 않을 뿐이다. 너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믿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너는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자, 여기에 위대한 비책이 있다.

 

행복은

특정 조건들이 낳는 결과가 아니라,

행복하기 때문에 특정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워낙 중요한 명제여서 다시 한번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행복은 특정 조건들이 낳는 결과가 아니라,

행복하기 때문에 특정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이 명제는 다른 모든 존재 상태에 똑같이 적용된다. 

 

사랑은 특정 조건들이 낳는 결과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특정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자비는 특정 조건들이 낳는 결과가 아니라, 자비롭기 때문에 특정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풍요는 특정 조건들이 낳는 결과가 아니라, 풍요롭기 때문에 특정 조건들이 만들어진다. 네가 상상하거나 고안해낼 수 있는 모든 존재 상태를 대입해보라. 체험에 앞서 되어 있음(Beingness)이 있고, 그것이 체험을 낳는다는 명제에 잘 들어맞을 테니. 이 점을 알지 못했기에, 너는 행복해지려면 특정 상황이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잊지 마라.

네가 미리 무엇이 되기로 정하는가가

그것을 너의 체험으로 만들어낸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니,

모든 마음상태가 으레 그러하듯,

그것은 자신을 물질형상으로 재생산한다.

 

"모든 마음 상태는 자신을 재생산한다." 

그러니 무엇보다 너 자신의 존재상태(a state to being)를 우선 창조하도록 하라. 너 자신이 되어 있는 것(what you are being)을 전혀 바꾸지 않은 채 단지 "뭔가를 하기" 위해 뭔가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자신이 되어 있는 것에서 자연스럽게 일을 하도록 흘러가게 놔두라. 그저 뭔가를 하는 것(doing something)은 답이 아니다.

 

너는 매우 오랫동안 자신의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 어떤 지속적인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너는 수십년 동안 해온 것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가 되는 것(being something)이 답이다! 

 

잊지 마라. 너는 인간 존재human being 이지 인간 정신human minding이 아니다. 그러니 되어 있음beingness 속으로 옮아가라. 그리고 지금 네가 느끼는 것이 네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너더러 느낌은 영혼의 언어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지금이라는 순간들마다,너는 뭔가가 "되어 있다". 그리고 네가 무엇이 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말해주는 게 네가 느끼고 있는 것이다. 네 느낌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느낌을 거짓말할 줄을 모른다. 그것들은 네가 그 순간에 무엇이 되어 있는지 네게 정확하게 말해준다. 그러니 너는 자신이 되어 있는 상태만 바꾸면 자신이 느끼는 상태를 바꿀 수 있다.  너는 다른 식으로 "있기"를 선택할 수 있다!  네가 느끼는 방식은 네가 되어 있는 방식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되어 있음"은 네가 자신을 놓는 상태지, 반응이 아니다. "느낌"은 반응이지만, "있음"being은 반응이 아니다! 네 느낌은 네가 되어 있는 상태에 대한 네 반응이지만, 네 있음은 뭔가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다! 매일 매 순간 너는 뭔가가 되기를 선택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네 존재상태는 "반응"이다. 존재상태는 반응일 필요가 없다. 너는 존재상태를 "창조"로 만들 수 있다.

 

감정은 너를 지배하는 체험이 아니라 네가 선택하는 체험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물질적 삶의 외부 환경이 영적인 삶의 내면 체험과 반드시 관계를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고통에서 자유롭기 위해 반드시 아픔이 없어야 하는 건 아니고, 평온히 있기 위해 네 삶에 반드시 소란이 없어야 하는 건 아니다. 사실 참된 선각자들은 소란과 분쟁을 피할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소란과 분쟁을 앞에 두고도 평온을 체험한다. 모든 존재가 추구하는 것이 이런 내면 평화이다. 그것이 모든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또한 너는 언제나 '참된 자신'을 체험하길 추구할 것이다.

 

 

네가 되기를 추구하지 않고, 되어 있음에서 나올 때 모든 게 변하고, 모든 게 뒤집힌다. 너는 되어 있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네가 행복해<지려고> 애쓰든, 현명해지려고 애쓰든, 혹은 신이 되려고 애쓰든, 행함으로는 <거기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일단 <거기에 이르고> 나면, 네가 멋진 일들을 할 수 있으리란 건 사실이다. 여기에 '신성한 이분법'이 있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냥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곳에 있어라! 그건 이토록 간단하다. 존재상태를 창조하기 위해 네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행복해지길 바라느냐? 행복하라. 현명해지길 바라느냐? 현명하라. 사랑이길 바라느냐? 사랑이어라. 어쨌든 바로 이런 게 '너'다. 

 

일단 네가

뭔가가 "되어 있는" 데서 출발할 때,

너는 이미

신성한 <너 자신>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창조기의 기어를 넣은 것이다.

네가

어떤 것으로 되어 있든,

너는 그것을 창조하고 있다! 

순환은 완결되어,

너는 삶에서 그것을 점덤 더 많이 창조할 것이고,

그것은 너의 물질 체험으로 드러날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의 가장 깊은 바램에 닿아있고,

나는 언제나 그것을 너에게 준다.

네삶에서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이란 건 없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네가 진실로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하라!

그 외에 다른 건 일체 하지 마라!

적어도 너를 기쁘게 해줄 일,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일을 하도록 하라.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행복하고 기뻐하는 것이

하느님이 당신에게 바라는 유일한 소망이다.

실로 이것이 가장 고귀한 감성적 가치이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가 이것이다.

어느 세상에 살아가든지,

어떤 이해를 성취하든지 상관없이,

기쁨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이 전 인류에게 부여한 운명이다.

당신이 기쁨과 행복의 상태로 돌아오면 하느님의 자리에 돌아온 것이다.

기쁨 자체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쁨 속에 있다는 것이 바로

있음Isness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서부터 가장 아름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당신에게 부여했다. 당신이 기쁨을 이해하는 탐구를 계속하는 중에도 당신이 하느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는 그렇게 되어 줄 것이다. 그가 당신의 행동과 욕구의 성취 정도를 심판하는가? 아니다, 그/그녀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아버지/어머니의 사랑이다. 생명력에 대한 생명력의 사랑이다. 그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라는 것이다. 그것만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같이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방해받지 않고 움직이는 자유다.

그것은 판단없이 표현하는 자유이다.

또 이것은 두려움도 죄의식도 없는 존재의 자유이다.

기쁨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을 창조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허용하는 지고의 움직임이다.

이것이 기쁨이다.

 

왜 기쁨은 존재의 가장 숭고한 상태인가? 기쁨의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은 하느님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흐름 속에 질투나 분노, 비통함이나 전쟁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기쁜 상태에 있다면, 누군가를 증오하기 어렵고, 공격하기 어렵고, 상처를 주기도 어렵다. 당신이 행복하고 즐거울 때, 당신은 모든 것에 내재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지극한 기쁨 속에 있다면, 당신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과 평화로운 관계가 될 것이다. 삶을 기쁨 속에 영위할 수 있다면 후회나 불안, 두려움, 분노나 부족함을 느낄 수 없다. 기쁨의 상태에서 당신은 충만하고 완전하며, 생명과 지혜, 창조성이 당신 존재의 내부에서부터 큰 강물처럼 흐른다. 당신은 최고의 위대함과 가장 심오한 느낌에까지 이르게 된다.

 

기쁨의 상태에서 삶은, 하늘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장미빛을 띠고, 구름은 타는 듯 붉게 물들며, 새들은 나무에서 노래하고 있는 새벽녘의 열정과 강렬함이 된다. 기쁨 속에서, 당신은 나이를 먹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더 이상 고단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놀라운 모험이기 때문이다. 기쁨이 흘러나올 때 당신은 자신의 왕국 안에서 하나가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당신은 낙원을 발견한다.

 

 

어떻게 기쁨의 상태가 되는가?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 삶의 매순간은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된다.

그리고,

자신을 행복과 기쁨....

그리고 하느님과 떼어놓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된다.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완전하게

자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 진정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 자유가 존재하는 것은 자신을 포용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유로부터 기쁨이 탄생한다. 이 탄생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하느님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하고 깊고 의미있는 사랑은 순수하고 순진한 자신 - 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위대한 피조물로서 움직이고 깊이 생각하고 창조하고 허용하고 그리고 존재하는 존엄함 피조물 - 에 대한 사랑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당신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모든 이의 얼굴 뒤에 있고,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내가 사랑하는, 그 장엄한 근본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하느님이 사랑하듯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사랑하는 것이 쉬워질 것이다. 용서하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모든 생명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보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면, 이제 당신은 정복할 수 없는 것이 없다.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없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신의 삶은 웃음으로 빛나고, 기쁨의 행로를 따라 가게 된다.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빛, 통합된 힘, 행복, 기쁨, 존재의 유쾌한 상태는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된다. 사랑이 경이로운 당신 존재 안에 가득 차면, 불만으로 가득 찼던 세계가 아름답게 되며,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되고 기쁨이 넘치며, 또한 기쁨은 당신 존재의 충만함을 통해 모든 생명을 끌어올리고 영광스럽게 하며, 당신 존재가 순수하다고 선언하게 된다.

 

 

삶에 있어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충족만큼 위대한 목적은 없다. 이것은 오로지 삶에 참여하여 자신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을 함으로써 성취된다. 그 일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감히 누가 그것이 틀렸다거나 당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이 가는 모든 방향이며,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의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말라. 당신의 삶에서 그토록 방해가 되었던 그 제한이라는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기쁨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하느님은 당신에게 기쁨을 강권한다.

당신이 문을 열고 기쁨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리며,

그는 항상 거기에 있다.

이것이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의미하는 바이다.

어떤 경우에도 아주 쉽게 기쁠 수 있다.

구하라,

그리고 당신은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라! 

 

 

 

 

" 네 행복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는 건 어때?

하나뿐인 목표로 삼는 거야.

'내 기분이 좋아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게 말이야."

 

"그러면 내 난간은 어떻게 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니, 사라?"

 

"왜?"

 

"어찌 됐든 넌 행복하니까."

[사라 Boo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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