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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삶과 죽음의 이야기

자유지향 2024. 1. 30. 23:39

 

삶과 죽음의 이야기

The Story of Life and Death

Heavenletter #1637 Published on: May 14, 2005

https://heavenletters.org/the-story-of-life-and-death.html

 

 

신이 말했다.

 

고통은 너의 선택이다. 그것은 항상 그랬다. 같은 사건들이 모의 되었을 수 있고, 너는 고통을 겪지 않았다. 너는 지금 그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너는 네가 선택을 가졌음을 알지 못했다. 지금 너는 그 고통이 필요하지 않았음을,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무엇보다도 본질적이 아님을 볼 수 있다. 고통은 삶 하나의 관점이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는데, “확실히, 그 아이가 심하게 앓고 있는 누군가에게 그것을 말하라”라고.

 

나의My 어떤 대답도 만족시킬 수 없는데, 네가 갈망하는 수준에서 대답을 찾을 때 말이다. 그 수준에서는 어떤 대답도 없다. 단지 말들만이 있다. 그런데도, 삶이 더 큰 관점으로부터 보일 때, 고통은 없다. 크라이스트Christ가 고통당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는 그렇지 않았다. 몸의 고통이 그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나와 함께 행복함은 나와 함께 있는 행복이고, 크라이스트Christ는 행복을 가졌다. 너도 또한 그것을 가질 수 있다. 너는 그것을 변경된 앎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다. 나는 단순히 그것을 앎이라고 부르겠다.

 

그때 누군가가 물을 것인데, “저, 그는 어떻게 그 상태에 도달합니까?”

 

그는 계속 가야만 하고, 계속 살아야만 한다. 너는 이미 고통 없는 눈물들이 있을 수 있음을 안다. 그것은 고통을 창조하는 것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저항과 반항이다. 만약 진실로 닥치는 모든 것이 이점을 가진다면, 왜 아파하는가? 닥치는 것은 너에게 봉사하지만, 네가 너무나 조금 알고, 오직 그만큼만 보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을 그 이점이다.

 

가끔 삶은 심각하게 너의 관심을 끈다. 고통에 대해 심지어 좋은 점은 그것이 네가 삶을 보도록,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보는 것을 피하고, 고통을 사랑이 아닌 무언가로 돌리며, 따라서 그들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더 많은 고통을 모은다.

 

최소한 삶에서 너의 목적이 다른 이들이 고통을 피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사랑은 용해제이다. 사랑 외에 다른 무엇도 없다. 사랑은 여기 너의 가슴속에 있다. 너는 너의 가슴 속에 사랑이 없다면 심지어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배려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고통이 좌절된 사랑이라고, 남은 성마름/심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건들, 신, 삶 그 자체가 너의 바람과는 반대로 행해졌고, 너는 상실감에 빠진다. 사랑하는 이들아, 너는 나에Me 대한 너의 사랑을 상실했다고 느낀다,

 

가끔 너는 나에게Me 너의 주먹을 흔든다. 신God이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느냐고? 아니면, 최소한 신God이 어떻게 이것을 허용할 수 있느냐고? 사랑하는 이들아, 너는 꿈 상태의 맨 끝에서 사로잡혔다. 너는 신념들에서, 확신들에서, 해석들에서 마약이 먹여졌고, 그리고 너는 너의 고통 속에서 자부심을 고백하겠는가?

 

아무도 너처럼 고통을 겪지 않았다. 심지어 고통에 대한 더 큰 원인을 가진 자들조차 너의 민감성을 갖지 못했다. 너는 고통이 포기하기가 힘들다고 발견한다. 고통에 대한 너의 장악을 포기하는 것이 힘들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을 때, 그것은 나의 의지My Will라고 말해진다. 몸의 생명과 몸이 없는 생명은 나의 의지My Will이다. 진화가 앞으로 걸어 나간다. 그것은 나의 의지My Will이다. 너의 고통은 아니다. 네가 개인적으로 그 땅의 지형을 받아들임은 아니다. 같은 육체적 몸 안에서 아무도 영원히 살지 못한다. 나의My 의미에서는 모든 이가 영원히 산다.

 

아기가 까꿍 놀이하고, 그 가족이 그 얼굴을 일시적으로 담요로 가리고 거듭 다시 나타날 때 기쁨을 갖는다. 그것은 기적적이다. 그리고 그 어린 아기는 그의 눈을 가리고, 그가 또한 다시 나타난다! 이 어떤 기쁨인가! 그리하여 그 아기는 네가 아직 배우지 못했던 것을 배우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사라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것이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다. 왜 뿌루퉁하냐? 왜 끝난 것과 아직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해 고통을 겪느냐? 너는 너에게 비추는 바로 그 해와 달을 억제하려느냐? 너는 삶이 그것이 있는 듯이 보이는 것으로 되돌아오기를 요구한다. 너는 모양을 붙잡기를 원하고, 현실을 부인한다. 사랑하는 이들아, 그 현실은 사랑이고, 사랑은 줄어들지 않는다. 너의 사랑을 유지해라, 그리고 고통이 가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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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AH(http://www.abundanthopekore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