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스크랩] 트롯트(Trot)와 엔까(演歌)

자유지향 2009. 7. 20. 22:22

 

트롯트(Trot)와 엔까(演歌)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향기를 담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라도 즐겨 불려지는 트롯트!

때로는 소박하고 순진무구하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생활가요로, 때로는 국권을 되찾기 위한 저항가요로, 또 때로는 침략자와 맞서 조국을 지키려는 선무가요로, 또 어떨 때는 권력에 종속된 목적가요로 시대와 함께 부침하는 영광과 오욕의 저 편에 "트롯트"는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곧 "트롯트"의 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혼을 일깨워 독립에 대한 희망과 일제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저항가요로 나라잃은 설움과 일제의 착취에 이그러진 민중의 가슴에 위안과 꿈이 됐던 "트롯트"

그 한편으로는 비록 강압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대동아 공영권의 기치를 내 건 일제를 찬양하는 찬일가요 혹은, 징용과 전쟁 위안부 징발을 정당화하는 제국가요로 이질화하는 사생아이기도 했던 "트롯트"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당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전선에 나선 젊은 용사들의 고향이요 어머니의 품과 같은 위로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 역시 "트롯트"였다.

자유당 정부의 학정을 보다 못해 일어 선 것 역시 "트롯트"였고, 경제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조국의 재건 현장의 망치소리를 힘차게 들려 준 것도 "트롯트"다.

때때로 선정적이고 상업적인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해 지탄받던 시절도 있었으나, 우리는 "트롯트"와 함께 울고 웃고 좌절하고 또 번영해 온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트롯트"가 그간 제 모습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굴절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다.
심지어는 "트롯트"는 거짓음악 운운 하며 까닭없이 돌을 던지는 이도 있다.

"트롯트"의 참된 모습을 얘기할 때가 지나도 한참을 지났지만 그동안 누구 하나 "트롯트"의 역사적 발자취를 얘기하지 못하고 그저 주워온 자식 마냥 홀대하기에만 급급했다.

이제는 "트롯트"를 올바로 알고 욕을 하든 찬양을 하든 해야 한다.
필자는 지금부터 "트롯트"의 실체와 반성을 몇차례에 결쳐 시도해 보고자 한다.

"트롯트"가 어떤 음악인지 알고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트롯트"가 어떤 음악인지 알고서 돌을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필자가 연재할 중요한 내용을 미리 정리해 본다.

■ 트롯트의 연원 - 누가 트롯트를 엔까(演歌)의 아류음악이라고 말하는가?

■ "트롯트"와 "엔까"의 이동점(異同点)

■ 트롯트의 역사적 의의

■ 트롯트 수난사 - 트롯트의 분서갱유 사건들

■ 트롯트는 우리 고유의 음악이 아니다.

■ 트롯트 가수 계보도(系譜圖)와 창법 분석

■ 트롯트도 변해야 산다.

"트롯트요? 그게 음악이랄 수 있나요? 그 노래가 그 노래 같고 형식이나 내용이 너무 뻔하잖아요. 너무 싸구려 음악 같아요."
언젠가 필자가 어느 대학생에게서 들었던 트롯트에 대한 젊은층의 비판이었다.

"내 사연같습니다. 어쩌면 내 사연을 그리도 잘 알고 있듯이 노래를 만들 수 있었는지 신통합니다. 그래서 트롯트가 좋은거죠."
중년을 바라보는 세대가 필자에게 들려준 트롯트에 대한 예찬론이다.

그렇다면 "트롯트"라는 음악을 놓고 왜 이렇게 세대간의 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일까?

그것은 살아온 세대의 문화와 가치관이 다르고 음악을 향유하는 방식과 미디어적인 수단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 두 세대에게 거꾸로 물었다.

"젊은 이에게는 우리들만의 언어와 표현이 있죠. 감각적이고 직설적이고 또한 유머러스한 세련된 여러 가지 형태로요. 댄스뮤직과 랲 속에는 우리 사회와 기성층들의 많은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려는 시대정신이 있는데, 트롯트는 사랑타령 아니면 눈물이잖아요. 의식도 없고......"

"랲 댄스 노래를 아무리 듣고 이해해 보려고 해도 가사가 무슨 소릴하는지 당최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못 듣겠어요. 그리고 이 노래나 저 노래나 우리 귀에는 똑같은 노래로 들려서 뭐가뭔지 모를 때가 많아요."

우리는 이 대답에서 보듯이 세대간의 몰이해 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수용도도 너무나 큰 격차를 보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젊은 이들의 다수는 "트롯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중장년층들은 "랲.댄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마치 서로가 서로의 장르를 잘 아는 것처럼 배척하고 무시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서로 병존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온통 10대를 중심으로하는 젊은층의 음악 일변도로 기울어져 있다.

70년대 낭만을 구가했던 이제는 40대~50대가 된 중년들의 음악 - 포크 송은 지금 양수리.대성리등의 까페촌으로 쫒겨나 있고, 이 나라의 근대사와 함께 호흡했던 "트롯트"는 그나마 방송의 한 귀퉁이에 소위 "보호차원"의 극빈자 구호받는 모습으로 찌든 채로 쪼그리고 앉아 있다.

오늘 우리는 "도" 아니면 "모"라는 식의 전제 군주국가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음악 일체주의"와 "옐로우 저널리즘"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고, 끊임없이 음악의 획일화의 선봉대에 가담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아버지.어머니가 부르는 "트롯트"를 비하시키고, 나아가 그 분들이 좋아하는 노래 "트롯트" 대신에 신세대 노래를 가르치려고 하는 극히 불손한 기도마저 자행됨을 우리는 본다.

이런 반성없이는 "트롯트"든 "댄스" "발라드"든 어떤 장르의 음악이건, 대중음악을 얘기하는 자체가 무의미할 뿐이다

 

'트롯트(Trot)'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바쁜 걸음으로) 뛰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산보(散步)하다'는 의미로도 쓰이는 단어다.

이것을 "산보하다"는 의미로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엔까(演歌)의 창시자로 알려진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왜 하필 "Trot"라는 용어를 썼는지 그 배경을 알 수 있게 된다.

전통적으로 일본사회의 지배계급인 다이묘(大名)들이나 사족(무사계급)의 호화로운 생활속에는 산보(散步)가 일상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1872년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濱) 구간의 철도를 개통시킬 때부터 노동력 착취수단으로 만들어 불러왔던 행진곡풍의 쇼까(唱歌-뎃또쇼까)의 리듬이 마치(March)였기 때문에, 이와 구별하려는 독자적인 발상이 바로 "Trot"라고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된 주된 요인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면 "Trot"는 과연 일본이 창안한 음악이며, 한국의 "트롯트"는 그들 음악의 아류인가?

혹자는 "요나누끼 음계" "미야꼬부시 음계"를 내세우며 한국의 "트롯트"를 지칭하여 엔까의 아류일 뿐만 아니라 거짓음악이라고 단언한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엔까"든 "트롯트"든 그 형식은 서양악에서 유래하며, 내용만 동양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데, 엔까의 내용과 한국 트롯트의 내용은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오랜 [엔까의 아류 시비]-이것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우리는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엔까"가 만들어지던 그 시대와 한국의 "트롯트"가 만들어지던 그 시대로의 여행을 직접 떠나 보는 것이다.

일본에 서양악이 처음 소개된 것은 1603년 에토 막부 이후 막번 체제의 봉건사회가 확립될 무렵,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가톨릭과 찬송가가 전파될 때이다.

1639년 가톨릭 교도들에 의한 반란으로 탄압을 받긴했어도, 민가에서는 카톨릭의 보급과 함께 찬송가와 서양민요에 가사를 만들어 부르는 서양악식이 지속되었다.

한편 이미 554년경에는 백제의 음악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생활속에 깊숙히 영향을 미쳤고, 이 백제의 음악을 일본사람들은 "구다라가꾸(久太良樂)"라고 불렀다.

"엔까(演歌)"가 생겨나던 1920년경, 일본은 가깝게는 백제의 음악과 조선의 음악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멀게는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등 세계 열강의 음악과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가요는 초기에 찬송가나 서양민요에 가사만 바꿔부르는 형태로 유행하다가, 서양음악을 공부한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창작가요 시대로 접어 들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초창기 작품들은 대부분 행진곡 풍이거나(나중에 이것마저 일본은 "도죠 음악"이라며 일본 고유의 음악이라고 주장한다), 4분의 3박자로 구성된 비탄조의 왈츠(Waltz) 리듬이었다.

왜냐하면 찬송가가 그들 창작의 모델이었기 때문에 행진곡풍이거나 왈츠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었던데 기인한다.


<악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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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 "사쿠라이노 와카레(櫻井 jpn_no.gif (82 bytes) 訣別)"는 일본 창작가요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초창기 가요중의 한 곡이다. 4분의 2박자로 구성된 행진곡풍의 마치(March) 리듬이다.

 

<악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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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대정(大正) 11년(1922년) 2월 20일/ 경성 삼성사 발행/ 이상준 선생 채보 가요집/ 신유행 창가 원본에서 발췌한 "장한몽가"이다.

위의 "사쿠라이노 와카레"와 흐름이 거의 비슷하고 또 각 음표의 박자가 똑 같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가요 초창기 역시 작곡가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양 찬송가나 민요 또는 일본가요에 가사를 만들어 불렀던 것이다.


<악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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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통치마"라는 이 노래는 위의 "장한몽가"와 똑같은 곡에 가사를 다르게 지어 부른 노래이다.

이와같이 작곡가가 없었고 또 레코드조차 보급되기 전의 한국 가요 초창기에는, 스코트랜드 민요 [오울드 랭 자인:Au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여 "애국가"를 만들어 부른 것을 필두로, 영국 민요 [커밍 스루 더 라이:Comin' through the Rye]에 '최남선' 선생이 가사를 붙여 "경부 철도가(1905년)"를 만들어 부르는가 하면, [심청가]는 미국민요 [클레멘타인]에, 저 유명한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바노비치' 작곡의 [도나우강의 푸른물결]에, 그리고 위에서 보듯이 일본의 쇼까(唱歌)-이 때까지는 엔까가 없었다-에 우리 가사를 붙인 "장한몽가"나 [뎃또쇼까(鐵道唱歌)]에 가사를 붙인 "학도가(원 제목은 청년경계가였다)"등을 만들어 우리식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가마사오' 작곡의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 jpn_wa.gif (86 bytes)jpn_ka.gif (84 bytes) 溜息 jpn_ka.gif (84 bytes))"를 본 따서 한국 트롯트가 만들어 졌기에 엔카의 아류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

 

왜 엔카의 기원을 "고가마사오"로 설정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엔카의 변천과정과 그가 창안했다는 트롯(Trot)이라는 용어의 탄생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하게 된다.

'고가마사오' 이전에도 1920년경부터 1930년까지 약 10여년간 일본에서는 서양음악의 악식을 기초로하고 동양적인 요소를 가미한 신가요들이 '나까야마(中山晉平)' '후지야마(藤山一郞)' '고바야시(小林千代子)' '도꾸야마(德山璉)'등에 의해 우리나라의 굿거리와 같은 장단인 8분의 6박자로 된 ゴンドラの 唄宵待草, 그리고 4분의 3박자로 된 城ケ島の雨雨ふりお月, 혹은 4분의 2박자로 작곡된 うれしいひなまつり샹하이(上海) 다요리, 그리고 4분의 4박자 형태로 작곡된 箱根八里君戀し등 다양한 박자의 다양한 노래가 만들어져 불려졌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세계 각국의 민요를 번안해서 부르는 것도 유행이었다.

다음 두 곡은 이 시기에 러시아 민요에다 카츄샤 악단의 작사로 발표되어 유행한 노래다.


( 악보6 )

카츄샤 樂團 작사/ 러시아 민요

 

( 악보 7 )

카츄샤 樂團 작사/ 러시아 민요

 

위 두 곡을 노래해보면 오늘날 라틴계열의 음악과 흡사한 스케일 진행이 두드러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이 시기의 일본의 신식가요-이것을 통틀어 만약 엔까(演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엔까는 세계 각국의 민요와 가요형식의 가장 중요한 모델인 찬송가, 그리고 마치(March) 리듬의 쇼카(唱歌) 및 행진곡 그리고 일본민요인 부시(節)가 합성된 모습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1930년경 '고가 마사오'가 일본 가요계에 진출하면서부터 보다 동양적인 요소-굳이 이것을 일본적인 요소라해도 무방하다-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고가'가 작곡하고 유명한 일본 초창기 작곡가겸 가수인 후지야마(藤山一郞)가 취입한  노래다(악보 8).

 

( 악보8 )

악보를 보면 느끼겠지만 이 때만 해도 분절음이나 쉼표의 활용이 유연하지 못하고 곡이 줄줄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성악적 요소보다는 기악적 요소로 곡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양적인 색채만큼은 눈에 뜨게 두드러져 보인다.

'고가마사오'는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랐다고 전해지는데, 이 때 한국의 경기창,남도창, 그리고 서도창이나 민간 속요들을 상당수 알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한국의 민요적인 요소가 '고가마사오'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여러 가수들의 창법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건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고가마사오'는 그 이전 다른 작곡가들이 리듬형태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던 틀을 깨고 자신의 음악에 "폭스 트롯트(Fox Trot)"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폭스 트롯트"란 1914 ~ 1917년경 미국에서 태어난 보통템포 정도의 래그타임곡이나 재즈 템포의 4분의 4박자곡으로 추는 사교댄스의 스텝, 또는 그 연주 리듬을 말하는데. 1917년경 가장 보편적인 댄스음악이었을뿐만 아니라, 한때는 댄스음악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했다.

원래는 동물들의 걷는 속도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1907년경에는 bunny hug, 12년경에는 turkey trot, 13년경에는 camel walk 등의 이름으로도 유행한 대단한 춤 리듬이다.

템포가 빠른 것을 quick fox-trot, 느린 것을 slow fox, slow trot 등으로 불렀는데, 고가마사오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폭스 트롯으로 표기하다가,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jpn_wa.gif (86 bytes)jpn_ka.gif (84 bytes) 溜息 jpn_ka.gif (84 bytes))"를 발표하면서부터 '폭스'를 떼어버리고 '트롯트(Trot)'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폭스 트로트라는 이름은 춤곡은 후에 오늘날 사교댄스의 큰 지류인 <지터벅(흔히 일본식으로 지루박이라고 불리우는)>과 <자이브>로 발전하여, 전 세계에 보급되어 각광을 받게 된다.

무도계에서는 폭스 트로트를 간단히 <폭스>라고도 부른다.

일본에서는 보통 빠르기의 템포를 가진 엔카를 안단테 트롯트(Andante Trot), 조금 느린 템포의 엔카는 미디엄 트롯트(Medium Trot)라고 표기하는데, 엔카(演歌)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인 트롯트(Trot) 리듬이 다름 아닌 1914년 ~ 1917년 사이에 미국에서 생겨난 댄스리듬인 폭스 트롯트(Fox Trot) 리듬이라는 사실은, 이 시기의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제국과의 음악적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일본이 미국과의 음악적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아본다.

1903년 일본의 천상당(天賞堂)이란 상사에서 미국 콜럼비아 레코드의 평원반 레코드를 최초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을 계기로, 1908년에는 미국의 빅타레코드를 수입하고, 1910년에는 일본 축음기회사(日蓄:닛지꾸)를 설립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신식가요가 어떤 경로와 기술적인 영향밑에서 자리를 잡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유행하는 모든 음악은 '콜럼비아'나 '빅타' 레코드사를 통해 바로 바로 수입되었고, 이 형식을 빌려 일본의 가요들이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레코드 역사가 시작되자마자 위에서 언급한 폭스 트롯트뿐만 아니라, 모든 재즈, 폴카(Polka), 마치(March), 월츠(Waltz), 그리고 라틴(Latin) 리듬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 실제적인 예이다.

1914년 닛지꾸(日蓄)회사는 일본 최초의 유행가라 할 수 있는 "松 聲"과 "카츄사의 노래(復活唱歌)"를 松井須磨子의 노래로 취입하고, 1915년에는 "곤도라의 노래( )", 1918년에는 "사스라히노 우타( )"를, 그리고 1919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주인공을 이수일과 심순애로 등장시켜 "장한몽가"로 옮겨놓은 "금색월차(金色月叉)"를 취입하여 드디어 자국 가수 취입시대로 접어 들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엔카의 형식을 가진 노래가 아니라 서양곡에 가사를 따로붙여 노래한 번안곡이거나, 일본의 민속음악인 부시(節) 형식의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본격적인 엔카(演歌) 형식이라고 볼 수 있는 노래는 1921년에 발표된 "나까야마 신요우(中山晉平)"작곡의 "센도코우타(船頭小唄)"이다.

이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1923년까지 "카레루 스스키( )"라는 제목으로 일본 전역에 유행했다.

그러나 이후 1930년까지는 이렇다할 노래가 발표되지 않았다.

1922년∼1930년 사이에 일본 가수의 노래가 거의 발표되지 않은 대신, "닛지꾸(日蓄)"회사와 '콜럼비아' '빅타'레코드 등은 한국 가수들을 대거 취입시키는데, "사의 찬미"의 '윤심덕'을 비롯해 "낙화유수(김서정 작사/작곡)"의 '이정숙'과 "봄노래 부르자(김서정 작사/작곡)"의 '채규엽' 및 "세동무"의 '채동원', 그리고 "암로(暗路)"의 '김연실'등이 대표적인 가수였다.

이들은 1926년∼1930년에 취입한 가수들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엔카의 비조(鼻祖)로 삼는 '고가마사오'의 1931년 작품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 溜息 )"가 발표되기 한 해 전까지, 이미 한국의 가수들은 한국 작곡가가 작곡한 신식가요(유행가)를 레코드로 발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트롯트와 일본의 엔카는 같은 시기에 같은 궤적을 따라 일란성 쌍둥이와 같이 흡사한 모양으로 태동하고 또 발전해 온 것이다.

이런 역사를 바라본다면, 한국의 트롯트를 '뽕짝' 운운하며 일본 엔카의 아류음악이기 때문에 거짓음악이고 따라서 말살돼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하고 터무니없는 억지에 불과한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더구나 엔카를 구성하는 큰 축이라고 할 수 있는 트롯트(Trot)라는 용어조차 미국의 폭스 트롯트(Fox Trot)에서 따 온 것이었다.

그럼 '엔카'라는 용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가요 초창기, 레코드가 아직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1910년경 번안곡이든 창작곡이든 노래 가사만 인쇄해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거리로 돌아다니며 노래 가사집을 팔던 사람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그들은 엔카시(艶歌師)였다.

오늘날 엔카(演歌)라는 용어가 원래는 엔카(艶歌)였다는 사실은 이미 밝힌바가 있다.

그래서 가사집을 팔러 다니던 거리의 악사들을 演歌師(엔카시)가 아닌 艶歌師(엔카시)라고 썼던 것이다.

남의 집에서 가져온 물건에 약간의 손질만 가해도 자기가 개발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속성을 가진 일본, 일본 가요계는 훗날 일본 유행가요에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끼게 됐고 보다 일본적인 이름을 찾다가 艶歌에서 착안해, 이와 발음이 똑 같은 演歌라는 말로 고쳐쓰게 됐음은 쉽게 상정해 볼 수 있는 일이다.

'고가마사오'는 그 후 오늘날의 엔카(演歌)로 자리잡을 때까지 일대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힛트곡을 양산해 낸다.

일본의 정신이자 일본의 역사라고 추앙받는 가수 미소라히바리( ), 키타시마사부로(北島三郞)로부터 미야꼬하루미( ) 및 호소가와타카시( )에 이르기까지, 실로 일본가요사의 금자탑을 이룬 수많은 가수들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고가마사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가수가 없고, 그래서 '고가마사오'를 엔카의 대부로 부르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일본에 '고가마사오'가 있다면 한국에는 한국 트롯트의 대부 손목인.전수린.김교성.박시춘이 있다.

그런데 엔카의 대부로 불리우며 1931년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jpn_wa.gif (86 bytes)jpn_ka.gif (84 bytes) 溜息 jpn_ka.gif (84 bytes))"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고가마사오'의 이 곡이, 실은 그가 한국에 있을 때 들었던 이현경 작사/전수린 작곡의 "고요한 장안"을 표절한 것이라는 설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데, 그 전말을 간추리다보면 일본의 엔카와 한국의 트롯트가 어떤 관계인가를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구나 '고가마사오'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절친했던 작곡가 전수린과 포옹까지 나누며 반가워했다는데, '전수린'과 '고가마사오'는 과연 어떤 사이였을까 궁금해진다.

일단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한국의 작곡가 전수린과 고가마사오는 상당한 교우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수린'은 1907년 개성 출생이며 어렸을 때부터 호수돈 여학교 교장 '루츠 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어린나이에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5세때 송도고보를 중퇴한 '전수린'은 서울로 올라가 연악회(硏樂會)를 주도하고 있던 '홍난파'와 함께 활동하다가 한국 작곡가 최초로 빅타에 전속되어 "황성옛터"와 "고요한 장안"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활약하던 '전수린'이 어떤 경로로 '고가마사오'와 조우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전수린'이 일본에 가면 서로 만나고, '고가마사오'가 한국에 오면 더없이 반갑게 맞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교분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두 사람의 이런관계는 서로의 음악에 대한 정보를 나누게 되고 따라서 미래지향적인 노선 또한 닮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문제는 1932년 가수 '이 애리수'가 '전수린'작곡의 [고요한 장안]을 [원정(怨情)]이라는 곡명으로 일본어판으로 발표했을 때,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출판하는 잡지 "신청년"에서 '고가마사오'의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jpn_wa.gif (86 bytes)jpn_ka.gif (84 bytes) 溜息 jpn_ka.gif (84 bytes))"가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원정)"을 표절했다고 비난했다는 사실이다.

가요평론가이자 작사가 '김지평'이 [권부에 시달린 금지가요의 정신사]에서 이들 두 곡을 악보로 대조해 분석한 바가 있는데, 두 곡은 모든 점에서 흡사한 점이 많다.

당시 한국에는 레코드 시설이 전혀없었기 때문에 이미 1926년경에 작곡한 [고요한 장안]이 1932년에 가서야 일본에서 [원정]이란 제목으로 '이 애리수'의 노래로 취입되어, 레코드로는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jpn_wa.gif (86 bytes)jpn_ka.gif (84 bytes) 溜息 jpn_ka.gif (84 bytes))"가 한 해 먼저 나왔지만 실제로 한국에서는 [고요한 장안]이 극중에 막간가수의 노래로 그 이전부터 불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곡이 조선곡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음악 평론가 '모리(森一也)'는 당시 '고가마사오'가 조선에 살고 있을 때 들었던 '전수린'의 멜로디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일본의 유행가와 한국의 유행가가 닭과 계란의 관계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태동하고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일본과 음악적으로 교류하기 이전인 1870년경부터 조선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이 가르쳐지고, 1910년경에 와서는 본격적인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어 이미 "조선 정악 전습소" "이화학당" "배재학당"등에서 서양악식의 성악과 기악이 가르쳐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이미 "시카고 음악학교"등 미국이나 구라파로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창작가요를 작곡할 소양과 외국음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가능성 위에서 '전수린'을 기폭제로해서 1932년에는 가히 한국 작곡가의 절정시대가 개막된다.

1926부터 1936년간 10여년 사이에 데뷔한 작곡가들을 살펴 보노라면, 우리 가요가 과연 독창적인 것인가 아니면 일본 엔카를 표절하고 있는가를 금새 알 수 있다.

1927년 '홍난파'와 함께 경성방송 개국과 더불어 관현악단을 창설했던 [찔레꽃] [직녀성]등의 대작을 남긴 '김교성'이 1932년 빅타레코드에 전속되었고, 또 '김정구'의 친형이면서 배우.가수.작곡가를 겸한 천재 작곡가 '김용환'이 1932년 폴리돌에 전속되는가 하면,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한국 서양음악의 선구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홍도야 울지마라] [처녀총각]등을 남긴 '김준영'이 이 시기에 데뷔한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바이올린니스트 '문호월'은 [노들강변] 이난영의 [봄맞이] 남인수의[천리타향]을 남겼고,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등의 주옥같은 선율을 남겼다.

일생동안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신라의 달밤] [삼다도 소식]등 수많은 힛트곡을 양산한 한국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이 데뷔한 시기도 이 때이고, 일본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전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가 있다가 북한에 억류되어 평양음대 총장을 지내고 북한의 가극 "피바다"를 작곡한 '이면상'이 역시 이 시기에 빅타레코드에 데뷔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는 '이재호'는 일본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오케레코드에 전속되어 이후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등 불후의 명작을 쏟아낸다.

'홍난파'도 이시기에 데뷔하는데 안옥경의 [여인의 호소] 이규남의 [유랑의 나그네]등을 발표하지만, 그는 가곡분야에서 더 두각을 나타내어 [성불사의 밤] [봉선화]등의 주옥같은 음악을 남겼다.


그럼 '엔카'라는 용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작곡가 '전수린'과 '김서정' 그리고 '채규엽' 및 '손목인' '문호월'에 의해 창작 유행가 시절의 기틀을 잡게 된 조선 가요계 - 초창기에 발표된 조선의 유행가와 일본의 유행가를 발표된 음반을 중심으로 연도별로 비교해 보자.

 

년  도 한     국 일     본
1908년 명창 이동백 "적벽가" 취입  
1913년 찬송가,판소리,조선속요를 담은 [조선 신음보 제1] 발매  
1914년  
1918년  
1919년  金色夜叉
1920년  鴨綠江 節
  이상은 조선 판소리 음반이 주류를 이룸 이상은 주로 일본의 부시(節)에 기초한 민요풍의 노래임
1921년   일본최초의 유행가요라 할 수 있는 [船頭小唄] 발표
1925년 닛찌꾸(日蓄)에서 '닙보노홍'상표로 판소리 음반 발매  
1926년 조선 최초의 가수 '윤심덕'의 [사의 찬미] 발표  
1927년   빅타레코드에서 [ jpn_no.gif (82 bytes) 港]  [ ] 발표
1928년 빅타레코드에서 [낙화유수] 발표  
1929년 콜럼비아에서 [아리랑] [장한몽] [홍난파의 조선동요 100곡집] 동요[반달] [푸른하늘] [서울 마-] 발표  
1930년 채규엽의 [유랑인의 노래] [봄노래 부르자] [종로 행진곡] 발표 발표
1931년 시에론레코드에서 '신카나리아'[한숨고개] 및 콜럼비아에서 [방랑가] [베니스의 노래]발표 일본가수 겸 작곡가 小林千太子[아리랑]을 번안 취입, 女給 jpn_no.gif (82 bytes),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jpn_wa.gif (86 bytes)jpn_ka.gif (84 bytes) 溜息 jpn_ka.gif (84 bytes)) 발표
1932년

폴리돌레코드-[세기말의 노래]
태평레코드-[하로.서울] 발표
전수린 작곡[고요한 장안] 발표,
빅타레코드사에서 '이애리수'[황성옛터]

채규엽, 이애리수, 강석연등 조선인 가수들 일본진출, 일본어로 신보 취입 붐을 이루다. 銀座 柳, 爆彈三勇士, 발표
1933년 이난영,고복수,선우일선등 걸출한 가수 대거 데뷔, 가요 부흥기 맞음.

김영길 일본 음악콩쿠르에 입선함.
일본 가요계도 부흥기 맞음.

이 표에서 비교해 보듯이 한국의 가요계나 일본의 가요계나 같은 궤적을 그리며 비슷한 시기에 여러 창작가요들이 발표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레코드라는 새로운 매체를 우리보다 훨씬 먼저 누렸던 일본이 어떻게 해서 우리 한국과 비슷한 보폭으로 가요가 발전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의문이 남게 된다.

그 이유는 위 표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에 설립된 이 시기의 대부분의 레코드사들이 실은 일본의 회사가 아니라 미국이나 독일에 본사를 두고 있는 외국회사였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들 외국회사에서 만들어진 음반을 일본은 수입해서 판매하는데 머무르다가 1920년대 접어들면서 조금씩 자국가요를 취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외국회사들이 일본에 지사나 합작회사를 설립하면서 거의 동시에 조선 지사를 함께 설립함으로써 일본과 조선은 큰 시차없이 레코드의 제작과 발매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음반 취입사를 조금 더 훑어 보자.

1895년 6월 미국 시카고에서는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때 사절단으로 국악인 10명이 주한 미국영사 알렌의 주선으로 참석했는데, 미국에 건너간 사절단중에는 경기 명창 박춘재가 포함되어 있었다.

박춘재는 빅타(Victor)에서 첫 취입을 했다.(이 음반은 현재는 유실되고 없다)

박춘재는 그 후에도 1906년 미국 빅타의 초청으로 기생 4명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가서 [적벽가]를 비롯해 경기잡가를 취입했다.

1907년 3월에는 한인오와 최홍매가 미국 콜럼비아(Columbia)에서 음반을 취입했다.

그런가 하면 1908년 2월에는 미국의 빅타에서 처음으로 원통형레코드가 개발되는데, 이 새로운 음반기술이 처음 적용된 음반에도 조선음악이 들어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때 발매된 원통형레코드의 상표에는 "조선 벽도(碧桃), 채옥(彩玉), 창부병창(唱夫幷唱)"이라고 인쇄되어 시판되었다.

이렇듯이 1910년 이전에도 조선 음악인은 주로 명창이나 기생들을 중심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미국 본토에까지 가서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가 전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유행가를 비롯해 양악을 전수받았다는 일부의 그릇된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다시말하면, 우리나라에 대중음악이 전파된 경로는 한줄기는 외국에서 직접적인 경로를 통해 교류를 하며 들여온 것이고, 또 한줄기는 일본을 통해 우회적으로 들어온 경로-- 이렇게 두가지의 길이 있었던 것이다.

 

출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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