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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

자유지향 2008. 9. 10. 17:44

관음 

    Default 관음법문 : 세상의 소리와 초세계적 소리

    우선 이 세상의 평범한 소리에 대해 말한 뒤에 초세계적인 소리, 신의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고대로부터 음악은 우리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음악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어둡게 될 것인가는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고전음악이 더 온화하고 부드럽습니다. 고전음악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행복하고 평온하고 온화한 기분을 갖게 해줍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고상하고 인자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현대음악은 보다 자극적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종류의 음악을 듣고 자란 사람은 가르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음악은 현대인의 성격과 품성을 대변해 줍니다. 정신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은 종종 환자의 기분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부드러운 음악을 들려줍니다. 우리가 무료하거나 일에 지쳐있을 때도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점차로 평화로워지지요.

    우주의 모든 것은 진동한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진동하며 이 진동이 소리가 됩니다. 이것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보내는 파장과 비슷합니다. 이 파장이 라디오 수신기에 포착되면 소리로 바뀌지요. 돌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우주의 모든 것은 자신의 독특한 주파수에 따라 진동합니다. 동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심지어 남편과 부인이 서로 교통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파수의 차이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의 진동은 매우 거칠어서 우리가 접촉했을 때 큰 불편을 느끼게 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의 진동, 말, 오오라는 아주 부드러워서 곁에 있는 사람을 매우 편안하게 해주고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즐겁다고 느끼게 합니다. 자신의 진동과 유사한 장소에 갔을 때 우리는 아주 즐거워집니다. 한편 나쁜 오오라를 가진 사람이 어떤 곳에 들어오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즉시 초조함과 불안을 느끼게 되지요. 이것은 그의 진동이 낮고 무겁거나, 그가 아주 사악하며 무거운 업장과 악마적인 장애를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음(부정적인) 에너지에 너무 기울어져 있어서, 양(긍정적인) 에너지쪽에 가까운 우리는 그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초조함과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지구의 모든 장소가 똑같은 주파수로 진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밀도가 서로 다른 온갖 종류의 금광석이 전 세계에 걸쳐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수행자가 아닌 사람들은 거주하기에 불편을 느끼는 곳이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수행자에게는 모든 곳이 정토이며, 성지입니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조화롭지 못한 그런 분위기는 극소수의 무지한 사람이나 나무처럼 감각이 무딘 사람을 제외하면 영적 수행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더욱 민감해지지만, 나중에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모든 곳이 다 똑같게 됩니다.

    누구와 있든지 우리는 그 사람의 진동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 사람의 오오라가 아주 부드러우면 우리 역시 부드럽게 되고, 그들이 흥분해 있으면 우리 역시 흥분하게 됩니다. 성인은 다른 사람들이 발산하는 나쁜 영향이나 자장, 즉 이른바 업장이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들에게 최상의 진동을 주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들의 업장을 짊어진다고들 말합니다. 영적 수행에서 얻은 힘으로 성인들은 업장을 빨리 씻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업장을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업장을 처리하는 시간이 다르게 됩니다. 이런 업장들을 처리할 수 있기 전에는 그들도 여전히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병에 걸리거나 명예에 손상을 입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

    이런 예 가운데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중생들의 업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경우는 중생의 업장을 짊어졌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경전에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흔아홉 명을 죽인 어떤 사람이 부처 역시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부처에게 제도된 일이 있지요. 그리하여 그 사람은 마침내 아라한(해탈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만일 부처가 그 사람의 업장을 짊어지지 않았다면 아흔아홉 명을 죽인 그 사람의 업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과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엄청난 공덕과 무량무변의 복보를 지니고 있어서 아무런 문제없이 그 사람의 모든 업장을 갚아 줄 수 있었던 것이지 그 사람이 인과응보에서 면제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그 사람의 업장을 떠맡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해탈을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든 먼저 이런 위대한 스승을 만나야만 합니다. 수행을 시작하는 초심자들이 자신만의 힘에 의지하여 그렇게 많은 자신의 업장을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위대한 스승들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수많은 생에 수행을 함으로써 엄청난 축복의 힘을 쌓았습니다. 충분한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는 동안에 스승들이 우리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인간에겐 인간의 힘이 있고, 수행자에겐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그 힘은 무량무변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힘은 비교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내게 입문하면 5대가 천도된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모두 데리고 올라가는 것이 이 영적인 힘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에서 얻어지는 영적인 힘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이 힘은 억만 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최고의 권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강연을 하러 갈 때, 어떤 때는 매우 편안하게 느껴져서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반면, 어떤 때는 압박감이 느껴지고 아주 피곤하여 말을 할수조차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을 입문시킬 때도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진행되지만 어떤 때는 죽을 것만 같습니다. 이것은 강연장에 오거나 입문을 하러 오는 사람들의 진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업장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개인적인 자장입니다. 그럼 실제로 무엇이 이렇게 서로 다른 진동을 만들어낼까요? 그건 바로 인과율입니다. 이렇게 인과율에 의해 만들어진 각자의 진동은 전생에 초래한 업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우리 모두가 깨달은 성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는 모두 신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왜 어떤 사람은 부유한데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영리한 반면 어떤 사람은 둔하며, 어떤 사람은 온순한데 어떤 사람은 사악할까요? 그건 첫째, 우리가 원래 깨달은 성인이었다해도 이 환상의 세계에 있는 동안 등급이 계속 떨어졌고 대부분의 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가 외부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이 세계는 높은 차원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높은 차원의 세계는 우리가 영적으로 진보하고 더욱 이완되고 숭고해지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상황은 우리가 쉽게 퇴보하고 점점 어리석고 사악해지도록 만듭니다. 천국의 낙원에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지만, 이 세계에서는 생존을 위해 자연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심지어는 석가모니 부처마저도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탁발을 하고 세상의 물건들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 세계는 형체가 있는, 보이는 세계이므로 분별이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 아름다움과 추함, 남자와 여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천국의 낙원과는 다릅니다. 천국은 형체도 없고 분별도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계에 오면 외형을 추구하는 중생이 됩니다. 음식을 보면 먹는 생각을 하고, 또 무엇을 보면 좋다거나 싫다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위대한 지혜를 잊게 됩니다. 계속 우주의 전지전능한 힘에게서 멀어져만 가니 점점 더 외로운 존재가 됩니다.

    원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소유였으나,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몇 가지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서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작은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갇혔습니다. 우리는 분별이 전혀 없는 존재에서 (천국의 낙원에서는 모든 존재가 똑같은 황금 빛 몸을 지니고 있고 남자나 여자의 분별이 없음) 분별심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한두 사람이나 한두 가지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점점 더 우주의 전지전능한 힘으로부터 단절된 외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의 힘은 점점 축소되다가 조만간에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갠지스강 한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은 물로 둘러싸여 있으니 물이 부족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강가에 있는 어떤 것에 이끌려서 그것을 쫓아가느라고 갠지스강을 떠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거기에 너무 빠져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까맣게 잊게 됩니다. 그러다가 목이 마르면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물을 찾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거기엔 충분한 물이 없지요.

    결국 지혜가 없어짐에 따라 우린 점점 더 약해집니다. 그리고 지혜가 충분치 않으면 탐욕스러워집니다. 불안정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움켜쥐려고 하는 거지요. 그런 탐욕에서 분노와 집착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독특한 자장을 형성해서 우리가 거기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개인의 상황이 제각기 다르니 자장도 다릅니다. 그리고 유유상종이므로 탐욕스럽거나 쉽게 흥분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장 안으로 이런 성질의 것을 끌어당깁니다. 또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사람은 부드러운 상황을 끌어당깁니다. 그래서 이른바 업장이란 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을 항상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장이 언제나 파괴적인 힘이나 방해하는 에너지, 어리석은 에너지, 또는 악마적인 에너지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지혜를 끌어당길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강한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 또한 그들의 자장 때문입니다. 혹은 세세생생에 걸쳐 쌓아온 습관이 바뀌지 않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우리의 자장이 개선된다면 그건 우리가 상승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바로잡는데 걸리는 시간은 마음이 얼마나 순수한가에 달려있지요. 천국으로 돌아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아져야 한다고 여러 경전과 도덕경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습관이나 자장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호흡을 헤아리는 수련이나 요가 훈련을 통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습관의 개발은 마음에 의해 통제되므로 습관을 바꾸려면 우선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단전(태양신경총)이나 뼈, 물이나 호흡에 집중하는 방법으론 충분치 않지요. 오직 관음법문만이 궁극적인 방법입니다.

    신의 소리

    이 소리는 ‘신의 소리’, 우리 본성의 소리이며, 이 우주에 존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이 세상 너머의 소리’로서 범부의 청각기관으로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모든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각자의 수준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들을 뿐입니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진동하기 때문에 소리가 있습니다. 심지어 돌도 소리가 있지요. 그러나 이 소리는 너무나 미묘해서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습니다. 오직 내면의 지혜로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다기보다는 관(觀)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모든 중생이 다 소리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왜 그들은 이 소리를 관할 수 없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 소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이 문을 열어줄 스승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소리가 그토록 중요할까요? 그건 우주의 모든 만물이 이 소리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차원에서 낮은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가 이 소리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어떤 사람의 진동이 다른 사람의 진동과 같지 않아서 서로가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우리의 진동이 동물이나 어떤 특정 장소와 조화롭지 않다면, 동물과 함께 산다든지, 그 장소에서 지낸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살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보다 낫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오히려 그들의 자장이 매우 낮거나 동물의 것과 흡사하여 그들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돼지와 개구리는 아주 더러운 곳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곳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즐겁게 살 수 있는지 알 것입니다. 그건 그들의 오오라가 그런 장소와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우리의 자장은 더 높고 부드러워서 그렇게 낮은 자장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겁니다. 이렇듯 우리가 그런 곳에서 살 수 없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무능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유순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들과 지내기 어렵지요.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 지고의 소리에 의지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 소리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가지고 있으며, 진동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진동이 낮기 때문에 동물들과 함께 이 낮은 수준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유유상종이니까요.

    그러나 모든 중생들을 감싸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신의 소리’, 본성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관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진동과 영적 등급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외면적으로 전과 다른 점이 없어 보여도 몸에서 빛이 나게 되지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강연을 듣기 좋아하고 우리가 사람들을 쉽게 제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진동이 나날이 더 부드러워져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해탈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동이 그들의 진동을 감싸안아 우리의 좋은 진동으로 그들의 나쁜 진동을 녹여주는 것이지요. 환자의 혈액이 좋지 않으면 의사는 환자의 나쁜 혈액을 좋은 혈액으로 바꾸어줍니다. 또 물통의 물이 더러워지면 다시 깨끗한 물로 물통을 채우기 전에 더러운 물을 버리지요. 그러나 우리의 진동이 충분히 좋아지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나쁜 진동을 바꾸어 줄 수 없습니다. 성급히 굴다가는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중생을 제도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수행을 해야 합니다.

    방금 우리는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이 이 ‘소리’를 지녔으며 만물이 이 소리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도덕경’에서는 이 소리를 ‘이름’ 또는 ‘도’라는 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도(道)는 불변의 도(道)가 아니요, 이름할 수 있는 이름은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모체이다.” 여기서 이름 또는 도(道)라는 것은 ‘소리’ 또는 ‘진동’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고대 중국어라서 표현이 다른 것이겠지요. 실제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앞으로 이것을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더 높은 소리에 맞추어라

    우주 만물은 이 ‘이름’ 또는 ‘소리’에서 생겨났습니다. 우리 또한 그것의 일부이지요. 그러나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소리의 가장 높은 부분을 지니고 있고, 또 그 소리 전체를 얻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동물은 이 소리를 전부 소유할 정도로 수준이 높지 못하지요. 우리는 이 소리를 수행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이 소리를 완전히 지니게 될 때까지 우리는 더 높은 소리에 자신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주에 있는 모든 중생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모든 중생이 이 소리의 일부이므로 전체를 지닌 우리에겐 모든 곳이 정토이고 모든 사람이 성인이며 모든 중생이 신의 본성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오직 그때에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들은 말, 혹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와 같은 말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방도가 없지요.

    직접 체험하는 것은 경전이나 다른 사람의 체험을 읽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경전에서 다른 사람의 체험을 접합니다. 하지만 관음법문을 수행하면 우리 자신의 체험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것을 경전에 기록된 내용과 비교할 수 있으며 우리가 옛날 사람들과 같은 체험을 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체험이 옛날 사람들의 체험보다 높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그들보다 높은 건 아니고, 그들이 체험을 기록할 당시에 그리 높지 않은 단계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우리가 그 당시 그들의 경지보다는 약간 더 높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리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중생은 이 진동이나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 세상에 동물,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신경질적인 사람, 평온한 사람,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이 세상은 확실히 서방정토와는 다릅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분위기들이 혼재된 이런 혼란한 곳에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수행하기가 힘이 듭니다. 언제나 많은 장애와 나쁜 영향들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집중해서 수행해 나갈 수 있다면 매우 빨리 진보할 것입니다.

    많은 천인들이 인간으로 환생하기를 원합니다. 이 육체가 영적 수행을 해나가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지요. 간혹 우리는 이 육체가 쓸모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육체 없이는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육체는 아주 소중한 것이니 잘 돌봐야 합니다. 몸을 유지하기 위해 충분히 영양 있는 음식을 섭취하되 과식은 피해야 합니다. 지나친 추위나 더위, 극도의 피로나 무리한 일로부터 몸을 보호해야 합니다. 고행은 좋지 않습니다. 고행은 우리 자신을 벌하는 것이며 가장 커다란 죄악입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성인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가 고행을 하며 자신을 벌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상황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다르겠지요.

    예를 들면 여러분은 내가 히말라야에서 수행할 때 매일 생 야채만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곳의 고도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공기가 희박하고 온도와 기압이 낮아서 밥을 짓는다든지 야채를 요리한다는 것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야채를 날로 먹는 편이 훨씬 수월했습니다. 야채를 갠지스 강물에 씻은 다음 소금을 약간 뿌려서 먹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고행을 원해서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한때 나는 훠모사 산중의 어느 절에서 홀로 수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3개월 동안 하안거를 했죠. 매일 나는 현미에 깨소금을 약간 곁들여 먹고 약간의 물을 마셨습니다.
    그 당시 나를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매일 시장에 야채를 사러 나간다면 그게 무슨 안거겠습니까? 그러면 아마도 ‘야채 선’이 될 겁니다. (웃음) 그 모든 것이 다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내게 있던 것을 그냥 먹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고행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고행을 한다고 깨달은 성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고통스런 사람이 될 뿐입니다. 사는 것이 이미 고(苦)인데 무엇 때문에 또 고행을 해야 할까요?

    ‘소리’는 우주의 최대 역량이자 최고 지혜이다

    깨달은 성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관음법문을 수행해야 하고 자신의 지혜로써 이 근원적 소리를 관해야 합니다. 이 소리가 우주 만물을 창조합니다.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고 가장 높은 지혜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위대한 힘과 지혜에 의지하여 수행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작고 어두운 단전(태양신경총)이나 덧없는 호흡에 의지해야 할까요? 명상할 때 우리 몸이 약간 움직인다고 무슨 문제가 됩니까? 죽어서 호흡을 멈추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수행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위대한 힘으로 수행을 한다면, 몸이 약간 움직인다거나 상해를 입었다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스승이 이 소리와 연결되어 있고 이미 해탈하여 이 육신과 더 이상 관련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수행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위대하고 높고 원초적인 이 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태초의 소리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나아가 우주가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또한 이 삼계가 파괴된 후에도 영원토록 존재할 것입니다. 이 영원한 힘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야만 영원한 존재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상한 호흡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무상한 등급에 도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능엄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다른 모든 법문은 방편일 뿐 궁극의 법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관음법문만이 영원하고 궁극적이며 가장 올바른 법문이라는 것이지요. 관음법문을 수행한 후에는 모두 석가모니 부처의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소리)이 있었다.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였으며 그 말씀이 곧 하느님이었다. 모든 것이 하느님(소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느님(소리)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1:1-4) 그리고 ‘도덕경’에서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장자가 말하길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도(道)는 불변의 도(道)가 아니요, 이름할 수 있는 이름은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모체이다”고 했습니다. 즉 이 ‘이름할 수 없는 이름’이 존재했을 때 우주 만물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우파니샤드’에서도 똑같은 언급이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이 소리는 창조가 시작되었을 때 존재하였습니다. 이 소리가 존재했을 때 모든 만물이 탄생하였지요. 이 소리가 바로 하느님이며 창조입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 노자, 성경, 힌두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나 가르침이 최초에는 동일한 교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관음법문을 수행한 다음에는 경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큰 깨달음을 얻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경전이 실제로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칭하이무상사의 즉각깨닫는열쇠 중문판 1권 p. 99~109에서 발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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