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두려움의 행로, 사랑의 행로

자유지향 2008. 6. 10. 07:07

 

 

 

당신의 일생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이

오직 당신에게만 진리인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


당신의 진리는

다른 누구에게도 진리가 아니며,
심지어 당신의 자녀나 부모에게조차 그렇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믿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에 대해 믿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라.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을 매우 잘 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진짜 당신이 누구인지는

전혀 모른다.


당신은

어머니가 모른다는 걸 알고 있다.
당신 역시 어머니를 매우 잘 안다고 믿을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모른다.


당신의 어머니는

다른 누구와도 공유한 적이 없는

그 모든 환상들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다.
당신은 어머니의 가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열한 살이나 열두 살이었을 때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을 떠올려 보라.
단 5퍼센트도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아주 중요한 일들은 기억이 날 것이다.
당신의 이름 같은 것들.
그런 건 수없이 되풀이하는 거니까.
그러나 어떨 때는 당신의 자녀나 친구들의 이름조차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당신의 삶은 꿈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항상 변화하는 여러 가지 작은 꿈들로.
꿈은 점점 희미해지는 경향이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쉽게 망각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삶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꿈은 다른 누구의 꿈과도 전혀 다르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믿음에 따라 꿈을 꾸며,
우리가 판단하는 방식에 따라,

고통을 당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꿈을 수정한다.
그런 까닭에
꿈은

누구에게든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관계에서는
두 사람이 똑같이 사고하고, 느끼고, 꿈꾸는 척할 수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망성은 거의 없다.
저마다 다른 꿈을 꾸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꿈꾼다.
그러므로

꿈을 꾸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서로의 꿈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내 아이들 하나하나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각각의 관계는 다른 관계들과 전적으로 다르다.
두 사람은 꿈을 꾸는 방식에 따라,
우리가 관계라고 부르는 그 꿈의 방향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엄마와, 아빠, 형제들, 자매들, 친구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저마다 고유한 것이다.
모든 관계는

꿈을 꾸는 두 사람이 만드는 것,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당신의 육체가

세포들로 만들어진 것처럼,
당신의 꿈은 감정들로 만들어졌다.
그러한 감정들에는 두 가지 주요 원천이 있다.


하나는 두려움이다.
이때 모든 감정은 두려움에서 생겨난다.


다른 하나는 사랑이다.
이때 모든 감정은 사랑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경험하지만,
날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이 세상의 통상적인 관계의 95퍼센트는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고,
나머지 5퍼센트는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테지만,
두려움이 60퍼센트이고 사랑이 40퍼센트라 하더라도,
여전히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감정들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사랑의 행로''두려움의 행로'라 부르는
사랑과 두려움의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자.
이 두 가지 행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임의로 정한 말일 뿐이다.
이러한 구분은

논리적인 머리로

리가 내리는 선택들을

어느 정도 통제하려 노력하기 위한 것이다.
사랑과 두려움의 일부 특징들을 살펴보자.

 


 

사랑에는 의무가 없다.
반면 두려움은 의무들로 가득하다.


두려움의 행로를 따를 때,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의무가 있고,

그 일을 해야 하는 순간 우리는 그 일에 저항한다.
저항이 클수록, 더 큰 고통을 당한다.
머지않아 우리는

의무들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한편,

사랑에는 저항감이 없다.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그 일을 하고 싶어서 기꺼이 하는 것이다.
그 일은 기쁨이 된다.
그것은 놀이와도 같고,

우리는 그 일로 인해 즐거움을 누린다.

 

 


사랑은 기대하지 않지만

두려움은 온갖 기대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고 예상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지고 그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도 똑같을 거라고 예상한다.


두려움은 상처를 주고

사랑은 상처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뭔가 기대하고,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상처를 입었다고 느낀다.
그건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
자신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았다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


사랑할 때,

우리는 기대하지 않는다.
원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건 안 하건,
그것은 그들이 하고 싶거나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개인 사정일 뿐이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연인이 뭔가 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의무가 없다.


사랑은 존중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두려움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것도 존중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에게 못마땅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당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당신은 스스로 선택을 내릴 수가 없게 될 테니까.
내가 당신을 대신하여 선택을 내려야 한다면,
적어도 그 시점에서 나는 당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을 존중하지 않을 때,

나는 당신을 통제하려 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아이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는 건,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못마땅하다고 느끼며,
아이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대신해서 하려 한다.


또한 나 자신을 존중하지 않을 때

나는 자신에게 못마땅함을 느끼며,
나아가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갈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당신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을 때가 언제인지

어떻게 알게 될까?


"내 가여운 꼴이라니, 나는 별로 강하지 않아, 난 별로 똑똑하지 않아,
난 별로 아름답지 않아, 난 해내지 못할 거야."


내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때, 멸시와 함께 자기연민이 생겨난다.


사랑은 무정하다.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못마땅함을 느끼지 않으며,
다만 연민을 갖는다.


그러나 두려움은 못마땅함으로 가득 차 있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못마땅함을 느낀다.
당신이 나를 존중하지 않고

내가 성공할 만큼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당신은 내게 못마땅함을 느낀다.
반면,

사랑은 존중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해낼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는 당신이 스스로 선택을 내릴 수 있을 만큼 강하고,
그만큼 똑똑하고, 그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
내가 당신의 선택을 대신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해낼 수 있으니까.
당신이 넘어진다면, 내가 당신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
당신이 일어서도록 도와줄 수 있다.


"당신은 해낼 수 있어요. 어서 해보세요."


이런 게 연민이지만,

못마땅함을 느끼는 것과 같지는 않다.
연민은 존중에서 생겨나고 사랑에서 생겨난다.
못마땅한 마음은 존중의 결여에서, 두려움에서 생겨난다.


사랑은 철저히 책임을 다한다.
두려움은 책임을 회피한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가운데 하나다.
모든 행동은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결과를 낳는다.


어떤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어떤 성과나 반작용을 얻는다.
어떤 선택을 하지 않을 경우에도 어떤 성과나 반작용을 얻는다.
이런 식 또는 저런 식으로 우리 행동의 결과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온전히 책임이 있다.
비록 그걸 원치 않았다 해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저지른 실수의 대가를 치르려 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당신은 실수의 대가를 치러야 하며,
그럴 경우 딩신이 치러야 할 대가는 두 배가 된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려 할 경우,
더 큰 우여곡절을 만들어낼 뿐이다.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다.
두려움은 언제나 매정하다.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 마음에는 각종 의무와 기대가 가득해지고,
존중하는 마음은 없어지고, 책임을 회피하고, 못마땅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그 많은 두려움 때문에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우리는 모든 것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며,
분노나 슬픔, 시샘 또는 배반감을 느낀다.


분노

가면을 쓴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슬픔은 가면을 쓴 두려움이다.
질투는 가면을 쓴 두려움이다.


우리는

두려움에서 생겨나

고통을 야기하는 이 모든 감정들을 안고,
온유한 척 연기할 수 있을 뿐이다.


좋은 기분을 느끼지 않으므로,

행복하지 않으므로 온유하지 않다.


사랑의 행로를 밟고 있다면

당신은 의무도 없고, 기대도 없다.
자신이나 배우자에게 못마땅함을 느끼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모든 일이 잘 되고 있으므로
당신의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번져 있다.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며 행복하기 때문에 온유하다.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그러한 온유함은 당신을 관대하게 만들고 모든 문을 열어준다.
사랑은 관대하다.


두려움은 이기적(egoistic)이다.
두려움은 나(ego)의 문제이다.
이기심(egoistic mind)은 모든 문을 닫는다.


사랑은 조건이 없다.
두려움은 조건들로 가득하다.


두려움의 행로를 밟고 있을 때,
만일 당신이 내게 당신을 통제하게 해준다면,
만일 당신이 내게 잘해준다면,
만일 당신이

내가 당신을 위해 만드는 이미지에 부합한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당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당신은 지금 그 이미지가 아니고 앞으로도 결코

그 이미지가 아닐 것이므로,
나는 그 때문에 당신을 심판하고,

당신에게서 유죄를

발견한다.


여러번

당신을 수치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까닭이다.


당신이

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당신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며,

나를 괴롭히고,

나는 당신에게 조금도

참을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는 다만 온유함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의 행로를 밟고 있다면,

'만일'이라는 건 없다.
조건이라는 건 없는 것이다.

나는 이유 없이 그냥 당신을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 당신의 모습을 지킬 수 있다.


내가 현재

당신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좋아하는 모습을 갖춘 누군가와 지내는 편이 더 낫다.


그 누구든

다른 사람들을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바꿀

권리가 없다.


우리가 변한다면,

그것은 변하고 싶기 때문이며
더 이상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의 행로를 따르며 평생을 산다.
그들이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래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배우자와 자기 자신에 대해
그 모든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과정과 고통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통신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사람들은 비판하고, 고통을 당하고, 서로에 대해 수근거리고,
친구들과 수군거리고, 술집에서 수군거린다.
그들은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든다.
감정의 독(毒)을 축적하며, 그 독을 자녀에게 전염시킨다.

 

"네 아버지를 봐.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아버지처럼 되지 말거라. 남자란 모두 이 모양이다.
여자들이란 죄다 저 모양이다."


우리는

우리가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한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의 친구들에게, 우리의 배우자에게.


두려움의 행로를 따를 때
우리는 수많은 조건과 기대, 의무를 가지고 있어서,
감정적 고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규칙들을 만들어낸다.
실은 어떠한 규칙도 없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사랑의 행로에는 공평함이 있다.
어떤 실수를 저지를 경우,

당신은 그 실수의 대가를 한 번만 지불하며,
당신이 진실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실수로부터 배움을 얻는다.
두려움의 행로에는 공평함이 없다.
당신은 같은 실수를 하고 천 번도 넘게 대가를 치른다.
또 배우자나 친구에게 같은 실수를 하고 천 번도 넘게 대가를 치르게 한다.
이는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만들어내고 여러 가지 감정적 상처를 남긴다.
그러면 당연히 당신은 스스로 실패하도록 자신을 가두는 셈이 된다.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해, 심지어는 아주 단순하고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우여곡절의 드라마를 갖고 있다.
지옥에서 이루어지는 보통의 관계에서 이러한 드라마를 자주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두려움의 행로를 밟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에는

그 관계의 절반씩이 있다.
한쪽 절반은 당신이고 다른 쪽 절반은
당신의 아들, 딸, 아버지, 어머니, 친구 또는 배우자이다.
두 개의 반쪽 가운데,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당신의 반쪽이다.
당신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는지,
얼마나 열심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상관없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그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믿는지,
아무리 추측을 해도 당신은 결코 알 수 없다.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사실이 그러한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다른 반쪽에 기를 쓰고 책임을 지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지옥의 관계들은
두려움과 각종 사건, 지배의 전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가

지배의 전쟁에 말려드는 것은

존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다.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은 적은 양의 마약을 복용하는 것일 뿐이다.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지배의 전쟁이 펼쳐진다.
각자 서로에게 책임을 느끼는 탓이다.
나는 당신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을 지배해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일은 내게 상처를 줄 것이고,
나는 고통을 피하고 싶기 때문에 당신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리하여 당신이 책임을 지지 않는 걸 보게 되면,
나는 당신이 책임을 다하게 만들기 위해 한사코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건 단지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일 뿐이지 내가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려움의 행로를 따를 때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존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나는 마치 당신이
당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이고 좋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 만큼
똑똑하거나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행동한다.
당신이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을 돌볼 만큼 강하지 않을 거라고 추측한다.
나는 당신을 통제해야 한다고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 대신 해줄게."


아니면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하지 마."


나는 당신의 절반을 억압하고, 나아가 전체를 지배하려 한다.
내가 우리의 전체 관계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을 경우,
당신이 차지하는 부분은 어디로 갈까?
그건 아무 효과가 없다.


우리는 다른 반쪽과 함께 가장 멋진 꿈을 나눌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함께 만들어낼 수 있다.
다른 반쪽은 항상 자체의 꿈과 자체의 의지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아무리 애쓰더라도 결코 그 꿈을 지배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충돌과 지배의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고, 또래와 팀원이 될 수도 있다.
또래와 팀원은 함께 놀지만, 서로를 거스르지 않는다.


테니스를 칠 때, 파트너와 당신은 하나의 팀이며
두 사람은 결코 서로를 거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제각기 테니스를 다르게 치더라도, 목적은 같다.
함께 즐기고, 함께 경기하고, 사로의 놀이 친구가 되는 것.
당신의 파트너는 게임을 통제하고자 할 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지 마. 이렇게 하라고. 아니, 틀리게 하고 있잖아."


그러면 당신은 아무런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그 파트너와 더 이상 경기를 하고 싶어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파트너가 하나의 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경기하는 방식을 통제하고 싶어한다면,
두 사람은 항상 충돌을 빚게 될 것이다.
당신의 파트너십이나 당신의 낭만적인 관계를 하나의 팀으로 여긴다면
모든 것이 향상되기 시작한다.
관계는 게임처럼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그저 즐기고 싶기 때문에 경기를 하는 것이다.


사랑의 행로를 밟을 때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다.
당연히 당신은 자신을 더없이 사랑하므로
이기적인 사람들이 당신을 이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앙갚음까지는 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명확히 의사를 밝힌다.


"당신이 나를 이용하려 할 때,
나를 경시할 때, 내게 매정할 때 난 싫습니다.
말로든, 감정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나를 악용하는 사람이
내게는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매일같이 퍼붓는 욕설을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기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만만한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당신의 꿈을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면,
당신의 기생충에게는 매우 혹독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쓰레기에

전혀 반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기심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다.
이기심, 지배욕, 두려움은 거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온화함, 허물없음,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언제나 현재 진행형의 로맨스를.

 



관계의

달인이 되는 문제는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깨달음에 이르러,
누구나 자신만의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일단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에게 주어진 절반을 책임질 수 있다.
당신은 관계의 절반에만 책임이 있다는 걸 안다면,
그것을 쉽게 통제할 수 있다.
다른 절반을 통제하는 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우리가 존중한다면, 배우자나 친구, 아들, 어머니가
자신의 절반에 온전히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다른 절반을 존중한다면,
그 관계는 항상 평화로울 것이다.
전쟁은 없다.


다음으로

사랑이 무엇이고 두려움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의 꿈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
소통하는 능력은 당신이 매 순간 내리는 선택에 달려 있다.
감정적 육체를
사랑에 맞추느냐 아니면 두려움에 맞추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두려움의 행로를 따르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주의를 사랑의 행로로 옮길 수 있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주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어느 누구도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리고 행복이란 당신에게서 생겨나는 사랑의 결과라는 걸 깨닫는다면,
당신은 톨텍(Toltec)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책을 쓰라면 천 권은 쓸 수 있지만,
사랑이란 사람마다 완전히 다르다.
사랑은 각자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개념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행동의 문제이다.
행동하는 사랑은 행복만을 낳고,

행동하는 두려움은 고통만을 낳는다.


사랑의 달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사랑을 연습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을 변명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사랑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만 당신은 사랑을 연습하기만 하면 된다.
연습은 달인을 만든다.

 

[돈 미겔 루이스 /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출처]

더보기

두려움의 정체

질문: 나는 공포와 죽음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지성, 사고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 즉 세상은 나이고 나는 세상이다라는 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또 죽음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토론해 볼까요? 
  
크리슈나무르티: 공포라는 것은 복잡한 문제이며 우리는 그것을 검토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편견을 가져서는 곤란하고 전체적으로 공포의 문제를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공포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집합적 공포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서 집단요법을 써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공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의 성질과 구조는 어떤지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합니까? 여러분들은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공포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심리적인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나의 지위나 체면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한다고 합시다. 나는 청중들, 즉 여러분들이 나를 지지해 주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게 됩니다. 나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노쇠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포는 무엇입니까? 나는 여러분들-남자든 여자든-에게 의지하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한 의존은 내가 여러분을 좋아하게 만들고, 그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할 만한 어떤 일을 한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사실을 몰랐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게 되고 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염려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염려하게 됩니다. 나는 어떤 예감이나 근심 그리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죽음이나 아무 의미도 없는 인생에 대한 근심 속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누군가로부터 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혹은 근심 속에서 나는 어떤 신념이나 신에게서 안전함을 찾게 됩니다. 또 나는 인생에서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할 수 없을까봐 두려워하게 됩니다. 나는 능력도 없고 지성도 없을까봐 두려워하게 됩니다. 나는 능력도 없고 지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론 나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공포, 근심, 고독감이 없는 사람과 교분을 맺기를 원합니다. 또한 나는 어두움을 두려워합니다. 
  
공포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왜 두려워합니까? 화를 당하고 싶지 않아서입니까, 아니면 안전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서입니까? 왜 공포가 있습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공포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든 못 깨닫든 그것을 피하려고 하든 극복하려고 하든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든 용기를 내어 태연한 척하든 공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마음이란 것은 아주 섬세하고 예민해서 유아 때부터 상처를 받고 싶어하지 않는지, 어떤지를 말입니다. 상처를 받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벽을 쌓습니다. 우리는 매우 소심해지거나 공격적이 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상처를 받아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줍니다. 나는 상처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포가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상처를 받아왔습니다. 그렇지요? 그러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우리는 많은 저항을 합니다. 그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해 주리라 기대되는 것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공격적이 됩니다. 이러한 공포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면서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육체적 고통에 대한 공포입니까? 위험이나 불확실성이나 상처에 대한 심리적인 공포입니까? 아니면 완전한 안전을 찾지 못한 데에 대한 공포입니까? 혹은 어떤 지배를 받는다는 공포입니까?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질문: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 그 대답을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공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 왜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합니까? 그 점을 생각해 보세요 
  
질문: 나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까봐 두려워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 그러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공포일까요 아니면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일까요? 지금까지 모아왔던 것들--재산, 아내, 명예, 책, 가구, 외모, 능력--에 대해 그러한 것들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공포일까요? 그것 역시 미래, 즉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일까요? 
  
질문: 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 때문에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만족해 하는 것들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 나는 언제나 오늘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즉,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24시간 후가 될 수도 있고 1년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질문이군요 
  
질문: 그러나 미래라는 것은 과거 때문에 사람들이 갖게 되는 모든 기대에 대한 결과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나도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이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요? 나는 이런 공포에 대해서 무엇을 해야할지를 찾아내고 싶습니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아프지나 않을까, 직업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많은 일들이 나에게 닥치지는 않을까, 미치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질문: 나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즉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사건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두려움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있고요 공포란 것은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한 방어죠 그리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불확실성에 대한 방어이기도 하고요 
  
크리슈나무르티: 나도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나는 불확실성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합니다. 공포라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징후이기도 하죠. 
  
질문: 그것은 공포의 일부분일 뿐이죠 또 다른 공포도 있어요 
  
크리슈나무르티: 나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이해할 능력도 없습니다. 공포의 징후는 이러한 불확실성입니다. 어떻게 설명하든 중요한 것은 내가 내일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공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그러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질문: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사람들이 대답하는 것을 보면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크리슈나무르티: 나는 내일 무엇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합니다. 미래는 전부 불확실합니다.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빙하기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모든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그런 것에 대처해야 할까요? 
  
질문: 우리가 처음 해야 할 일은 두려워하지 않는 일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그것은 매우 진부한 말 같군요 그 말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군요 
  
질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공포란 항상 존재합니다. 공포란 항상 생활에 따라 다닌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해요. 
  
크리슈나무르티: 당신의 말은 아무 도움이 안 되는군요. 나는 여전히 내일을 두려워합니다. 
  
질문: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도 당신을 도와 줄 수 없어요. 내일까지 기다려서 일이 일어나게 하고 무엇이 일어나는지 볼 수 없나요? 나는 육체적 안전의 필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리적 안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크리슈나무르티: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안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심리적으로 내일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그것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질문: 우리가 두려워할 때,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현재에 열중해 살아간다면 우리는 미래를 잊을 수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내일은 무엇입니까? 왜 내일이 존재합니까? 여러분은 아십니까? 지금 그것에 대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생각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안전감을 주었습니다. 과거에 많은 불확실성이 존재했다고 해도 나는 무사히 살아 남았습니다. 지금까지 안전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불확실합니다. 그리고 나는 두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일에 대한 공포가 왜 일어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일의 불안에 대한 대답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일은 생각할 때 왜 두려움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습니다. 미래 그 자체는 더 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미래는 모릅니다. 경이로울 수도 있고, 치명적일 수도 있으며 무시무시할 수도 있고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생각은 미래에 대해서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항상 확실성을 추구하는 사고는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고는 왜 공포를 야기시킵니까? 
  
질문: 사고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거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 공포가 들어가는 거죠. 
  
크리슈나무르티: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신이여,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고는 공포를 낳습니다. 
  
질문: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 즉 내일에 대한 공포도 있습니다. 그것은 신념이나 주의에 부착된 것이죠 내가 어떤 신념을 왜 좋아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러한 공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공포는 어떻습니까? 
  
리슈나무르티: 그런 것들은 모두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신념이나 주의에 대한 집착 그리고 내가 직접 만든 어떤 이데올로기적 개념에 대한 집착들은 모두가 공포의 일부입니다. 나는 공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나는 과거에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할 만한 어떤 일을 저질렀다고 앞서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나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과거에 무엇을 했다는 생각은 공포를 낳습니다. 또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공포를 낳습니다. 그래서 나는--틀릴지도 모르지만--사고가 두려움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미래에 대한 것이든 과거에 대한 것이든 말입니다. 그리고 사고는 관념이나 신념을 내세워 그것을 계속 믿음으로써 어떤 확실성을 끌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공포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사고작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공포를 가져오는 어떤 사건을 회상하게 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 사고는 이런 일들을 할까요? 
  
질문: 사고를 하게 되면 미래에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사고는 여러분을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보험에 들거나 집을 짓거나, 전쟁을 회피함으로써 말입니다. 사고는 공포를 촉진할 수도 또 그것으로부터 보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즉 성적 쾌락이나 어제 본 일몰의 즐거움 등 말입니다. 그래서 사고는 즐거움도 주고 공포감도 줍니다. 
  
질문: 인간은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합니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와 같이 식별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공포는 좋은 일들을 일어나게 하고 나쁜 일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서 나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확실히 전 과정을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질문: 공포는 사고를 식별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예, 그러나 그것 역시 사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이것은 좋다., 나는 이것을 갖겠다., 저것은 싫다.와 같이 말입니다. 전체적인 사고과정은 즐거움에 대한 요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즐거움을 주고, 저것은 주지 않는다와 같이 식별에 대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질문: 그러면 어떻게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나요? 
  
크리슈나무르티: 우선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겁니다. 
  
질문: 사고는 공포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우리는 답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안전합니다. 나는 식사를 할 수도 있고, 집도 있고 방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어제는 여러가지 즐거운 일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러한 즐거움이 내일도 반복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사고는 공포도 주지만 어제 내가 가졌던 즐거움을 다시 갖게 해줍니다. 내 의문은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공포를 없애고 계속 즐거움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즐거움을 원합니다. 가능하면 많이 말입니다. 또 공포를 느끼고 있으며 그것을 없애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미래에는 공포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고는 두 가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질문: 그것은 사고에 일종의 에너지를 줍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사고는 에너지입니다. 
  
질문: 이것은 사고에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줍니다. 
  
리슈나무르티: 둘 다 맞습니다. 
  
질문: 그것은 많은 기억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즐거운 추억들은 기억하고 싶고 고통스러웠던 것들은 잊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들이 사고에서 유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 공포와 즐거움은 어느 정도 비슷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크리슈나무르티: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생각하세요. 기쁘게 말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일어나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질문: 그렇죠. 
  
크리슈나무르티: 그러나 내 마음은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신은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각하려고 합니다.만 사고는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매달려 있습니다. 
  
질문: "나는 어떻다."는 감정은 즐거움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이나 사고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단지 "어떠어떠하다."라고만 생각합니다. 나는 공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어떻다."라는 감정은 사고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질문: 무엇보다도 확실성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공포가 사라질 것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요? 
  
질문: 나는 전체의 사고과정을 하나의 덫으로 생각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느끼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내일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나는 내일을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는 어느 정도 확실성이 존재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것을 극복해 왔습니다. 그러나 내일은--핵전쟁이나 돈을 잃어버리는 것처럼--매우 불확실하기 때문에, 나는 미래에 대해서는 안정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러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는 가능하다면 과거나 미래의 공포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싶습니다. 될 수 있다면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공포나 추상적인 공포로부터 말입니다. 나는 공포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것이 어둠이나 불확실성에 대한 것인지, 어떤 사물이나 사람 이념에 부착되어 있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나는 공포의 구조를 알고 싶습니다. 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중요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포가 무엇인지 조사해 보려고 합니다. 공포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일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아주 좋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지금 왜 내일에 대해서 생각합니까? 과거는 좋았고 또 많은 교훈을 주어서 나는 안전하게 되었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 지식도 없기 때문에 나는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미래를 이해하게 된다면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내가 미래를 이해하고 알게 되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나는 또 많은 즐거움, 즉 성적 쾌락이나 성취나 수행의 즐거움을 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져왔던 그런 즐거움이 계속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을 때 나는 더 넓고 더 깊은 즐거움을 원하게 됩니다. 나는 두려움을 피하고 더 많은 즐거움을 갖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입니다. 즐거움은 두려움과 떨어져 있습니까, 즐거움이 공포를 낳는 것인지 아니면 공포가 즐거움에 대한 요구의 결과로 생긴 것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당신은 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나요? 
  
질문: 즐거움은 중요한 것이고 하나의 배우는 과정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아니, 즐거움도 하나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나는 더 많은 즐거움을 위해서 그런 고통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것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질문: 느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이것이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움을 요구하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이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불확실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즐거움과 고통이 함께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나는 하늘에서, 땅 위에서, 가정에서 섹스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원합니다. 즐거움은 나를 모든 것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리고 또한 공포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만을 고집하지는 마십시오 나는 내일의 확실성을 원합니다. 그리고 확실성은 거기에 대해서 알 때만 있게 됩니다. 내가 과거를 제외하고는 무엇을 알 수가 있습니까? 내가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미 과거입니다. 내가 아내를 안다고 말할 때는 과거의 의미에서 그녀를 안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확실성이 있고 미래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안전할 수 있으려면 미래를 과거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나는 사고가 작용하는 곳에는 공포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만약에 내가 내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공포도 없을 것입니다. 
  
질문: 공포는 본능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공포가 에너지이며 거기에는 어떤 힘이 있다고 느낍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알다시피 우리는 각자 자기의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어떻게 공포에 대처해야 할지를 압니다. 우리는 공포를 설명하고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두려워하게 됩니다. 공포는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한 결과로 생긴 것입니다. 미래는 매우 불확실하고 사고는 과거에 대한 회상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사고는 지식과 수 세기에 걸친 경험이 축척된 기억에 대한 반응입니다. 사고를 하다. 보면 "지식이 있으면 나는 안전하게 된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내일에 대해 알게 된다면 공포는 사라지게 됩니다. 내가 갈망하는 것은 지식이라는 확실성입니다. 나는 과거를 압니다. 나는 그것을 분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일을 모르며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고하다. 보면 모르는 것에 대해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까? 따라서 공포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만 모르는, 그것이 두려움입니다. 왜 사고는 내일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모르는 것일까요? 사고는 확실성을 원합니다. 그러나 확실성은 없습니다. 내 질문에 대답해보세요 
  
질문: 살아 있는 체계는 내일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중요한 생명의 법칙이죠. 그것은 어떤 예측을 필요로 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 나도 그 점을 말했습니다. 
  
질문: 우리는 이 생명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무서운 공포를 야기시키는 상상 때문에 심리적인 혼란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하여금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그렇게 말한다면 물리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생존하는 데 반드시 사고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동물들은 공포없이 생존에 대한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본능으로 대체할 수 있어요. 
  
크리슈나무르티: 동의합니다. 우리는 내일 이 집이 그대로 있을거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물리적 존재와 미래에 대한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사고가 없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어요. 
  
질문: 사고는 현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해요. 
  
크리슈나무르티: 날씨가 덥다면 시원하게 해줄 바지를 살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내일을 위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행을 가야 한다면 나는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인 것입니다. 
  
질문: 우리는 자신을 신뢰할 수 없어요. 
  
크리슈나무르티: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 여러분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인가요? 
  
 질문: 왜 안돼죠? 
  
크리슈나무르티: 자기 자신이란 무엇인가요? 
  
질문: 인간성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인간성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선과 악, 전쟁을 겪어 왔습니다. 우리는 공포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남기 위해서 사고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존하기 위해서, 사고는 세상을 내 나라, 네 나라, 나의 정부, 너의 정부, 나의 신, 너의 신, 나의 집, 너의 집으로 구분했습니다. 사고는 이런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살아 남기 위해서 사고는 계획을 세우기를 원합니다. 사고는 세상을 낳았습니다. 나는 그 중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고의 성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디에 필요한지 그리고 어디에서 잔인한지 어디에서 파괴적이고 공포를 만들어 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나의 문제입니다. 나는 사고가 작용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을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으려는 욕망 때문에, 사고는 나누어지고 따라서 파괴적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사고가 명백히 객관적으로 왜곡없이 기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내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 사고는 내일에 대해 생각할까요? 그것은 하나의 방향으로서 내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사고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공포를 낳을까요? 
  
질문: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고는 안전을 위해서 내일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내일을 생각하면서 사고는 또 공포를 야기시킵니다. 자, 왜 그럴까요? 
  
질문: 우리가 즐거움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우리가 각자의 의견이나 판단이나 결론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사고는 미래에서 안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공포를 창조해야만 합니다. 사고는 시간 안에서 안전을 가집니다. 내일은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은 마음 속에 존재합니다. 내일은 심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사고는 내일에 대해서 원하는 것을 추진하게 됩니다. 원하는 것이란 안전, 얻은 것, 성취한 것, 소유하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불확실합니다. 따라서 사고가 미래에 대해서 침묵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내 말의 요점입니다. 사고는 조용히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고는 물리적 보호를 위해 필요한 곳에서는 기능을 합니다. 내일로서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도록 사고를 조용히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고가 지금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나는 사고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또한 그것이 과거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현재가 어떤지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미래에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묻습니다. 내가 완전하게 오늘을 살 수가 있나요? 사고의 전체적인 구조와 기능을 이해할 때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사고의 실체를 이해하게 되면 평온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평온한 곳에는 미래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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